CINELAB2025-02-11 14: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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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 암살 스릴러 <파탈> 각본/연출 맡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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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라이트만 담백하고 나머지는 어수선한
전설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우승자 서윤복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부분이다. 세계 신기록을 세운 손기정. 하지만 우승의 기쁨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시상식에 올라가는 손기정. 입고 있던 옷에 그려있는 일본 국기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다. 뒤집힌 조선 총독부. 손기정을 겁박한다.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닌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는 말을 마지못해 기록한다. 손기정의 육상선수 커리어는 그때 끝났다.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1947년에서 시작된다. 냉면집에서 서빙 일을 하는 서윤복은 돈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손기정은 나라가 일제에게 벗어났다 하더라도 영 즐거운 일이 없다. 아들과 떨어진 일상. 매일을 술로 보낸다. 국민적인 영웅이라 ‘손기정 상’ 같은 시상식에 초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그가 친한 동료 남승룡, 냉면집 아르바이트생 서윤복과 함께 보스턴 마라톤 대회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강제규 감독은 충무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한 강제규 감독은 3년 후의 <쉬리>로 당시 한국영화 관객 신기록을 경신한다. <쉬리> 이후 4년이 지난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로 1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실미도>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일이라 당시의 충무로도 반향이 컸다. 이렇게 강제규 감독이 상업영화라는 분야에 있어 두각을 드러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감정적으로 진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고, 큰 규모의 신을 찍을 때 인물들을 깔끔하게 정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하는 끔찍한 전쟁의 참상은 영화의 후반부를 위해 필수적이다. 격렬하고 광폭한 전쟁이 이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는 걸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몇 인물들은 전쟁의 광기에 혹해버렸다. 광기에 취한 인물들이 전투 도중이나 군 막사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 장면을 시각화하는 방식에도 감독의 장기가 들어가 있다. 이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 장면은 좋은 의미에서 너절하다. 후반부 진태(장동건)가 피 흘리며 전투를 벌이고 난 후 다음 장면은 깔끔하게 씻은 진석(원빈)이다. 심지어 진태가 처절하게 싸우는 반면 진석은 누군가와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화한다. 당연히 진태의 상황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데, 두 인물 간의 시각적인 대비로 전쟁의 속성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태극기 휘날리며>는 칙칙한 색감, 깔끔한 인물 동선, 처절한 전장의 분위기를 카메라로 담으며 한국전쟁이라는 지옥도를 구현한다. 이 지옥도가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후반부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신이 감동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번 강제규 감독의 신작 <보스턴 1947>는 강제규 감독의 장기들이 알차게 들어가 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하이라이트 신은 당연히 마라톤 장면이다. 이 장면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핵심이 되어 한국사회의 강인함과 서윤복의 단단한 내면을 상징한다. 인물이 뛰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방식이 영화의 몇 사건을 비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는 주인공 3인방을 보스턴에 곱게 보내지 않는다. 몇 가지 위기를 만드는데, 그 위기 이면에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1947년은 미군정이 한반도를 통치하는 시기였다. 한국정부가 들어서기 전이라 대회 참여의 금전적, 행정적 부분에서 지원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대응하는 과정은 혼자 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마라톤과 유사하다. 사실상 1부의 초중반부와 2부의 후반부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암시하는 서윤복의 마라톤은 영화의 웅장함에 안성맞춤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이전에 글쓴이를 포함한 적지 않은 관객들이 '또 억지로 눈물 쥐어짜는 요소 넣었겠네' 우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는 이 우려를 무색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인간의 결기와 의지를 영화 후반부에 방점 찍어 마무리했다. 이 장중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강제규 감독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보스턴의 날씨를 구현하기 위해 호주에서 촬영한다거나, 임시완, 배성우 배우가 러닝 연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이나 400여 명의 외국 배우와 함께했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실화라는 양날의 검
이 영화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세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야기 안에서 한국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는 설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1,2부의 이야기 이면에 깔려있는 시한폭탄임과 동시에 강제규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국민성을 보여주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 설정이 정직하게 작동하는 경우도 있다. 초반부 주인공 3인방은 선수 엔트리 등록을 위해 관련 부처를 찾아간다. 이 장면에서 담당 공무원이 손기정 일행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은 사실적이다. 영화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손기정 선수와 관련한 부분이 몇 등장하는데, 이 문제와 1947년의 보스턴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정부의 지원 없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만 봐도 비슷한 예시가 몇 있다. 또한 궁핍한 한반도를 보여주는 방식도 극 중 등장인물들이 마라토너라는 점에 잘 어울린다. 신발은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영화는 신발을 수급하는 문제를 무작정 으쌰 으쌰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길 만큼 합리적으로 해결한다. 이 현실성과 관련한 부분은 2부에서도 마찬가지다. 2부에는 역사의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은 꼼꼼함이 느껴진다. 영화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후일담을 찾아보면 이 인물들을 꽤나 잘 살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마라톤 장면에서 특정 사건이 약간 영화적인 왜곡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장면 역시 1947년의 보스턴에서 실제로 이뤄졌던 일이라는 것이 놀랍다. 영화가 실화라는 점을 잘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실화라는 틀에 안주한 흔적이 아쉽다. 어쭙잖은 신파극을 가볍게 벗어난 후반부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더라도 플롯의 나머지 부분들은 예상가능하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인물들이 납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박은빈 배우가 맡은 역할은 이야기에서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단지 서윤복에게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데에만 그치고 있다. 박은빈 배우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기 전의 작품이 아니었어도 이 인물에 대한 아쉬움은 남을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어렵게 대회에 참여해서 상을 받았어. 그럼 곱고 순한 여성 캐릭터는 영화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할 것 같은가? 이 문제의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또 영화 1, 2부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무례하다. 구체적으로 2부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어떤 두 미국인이 갖고 있는 비중이 크다. 이 두 인물은 관객들에게 '빨리 화 내!' 겁박하는 느낌마저 든다.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1947년이라지만 현실감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더 차갑고 냉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 서윤복이 어떤 모습으로 달리기를 했는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차라리 이 부분을 구현하는 게 이야기의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인다. 영화의 기획의도에 희생된 인물들이 아쉬웠다.
슬렁슬렁 넘어가다
영화는 인물들의 욕망과 관련한 문제를 손쉽고 전형적으로 해결한다. 먼저 이야기할 것은 주인공 서윤복이다. 서윤복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어머니다. 서윤복은 아픈 어머니를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초반부에서 영화는 서윤복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하지만 서윤복은 실행력이 있는 사람이다. 서윤복이 초반부에 달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몇 번 대사를 치는 부분에서 주인공이 마냥 이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준다.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영화의 1부가 가진 큰 과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화는 이 문제를 굉장히 쉽게 해결한다. 물론 그 사건이 이 인물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그건 인물의 동기부여에 대한 문제인거지 실제 이 인물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과는 좀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이 문제는 2부에서 원인만 달라진 채로 반복된다. 영화 2부에서도 이 부분을 다루기 때문에 1부의 어설픈 마무리가 더 아쉽게 느껴진다. 남승룡의 경우에도 문제를 맺고 끝는것이 불확실하다. 이 인물은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하지만 이 욕망을 가진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남승룡은 이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단 조금의 과정도 없이.
영화가 가진 아쉬운 점 중 하나는 통일성이다.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가장 큰 이물감 두 개는 배성우와 하정우 배우다. 우선 배성우 배우와 하정우 배우는 다른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정우 배우가 맡은 손기정 역은 <수리남>의 강인구와 별 차이가 없다(심지어 헤어스타일도 비슷하다). 이러다 보니 손기정과 남승룡이 아니라 하정우와 배성우 배우 각자가 대화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는 임시완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달리는 신이 아닌 선에서, 이 영화에서 본 임시완 배우는 어쩐지 <미생>과 <불한당>에서 본 기시감이다. 김상호 배우도 이 배우가 등장했던 사극의 어느 장면처럼 연기한다. 대표적으로 이 인물들이 2부에서 밥을 먹는 신이 있다. 배우들의 일상연기에서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더 두드러져 강제규 감독의 역량을 생각한다면 아쉽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비단 연기 말고도 편집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신파극에 대한 반발심리를 너무 의식해서인지 이야기는 생략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특히 남승룡의 서사에서 더 느껴진다. 아마 배성우 배우의 개인적 에피소드 때문인 듯). 이것 덕분에 뚝뚝 끊긴다. 심지어 인물이 오롯이 대사를 칠 때에도 컷전환이 캐릭터를 방해한다는 느낌마저 든다. 대표적으로 손기정이 남승룡, 서윤복과 대화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서로 대화하는 신인데 말 중간에 시점이 바뀐다. 그동안 강제규 감독이 규모가 큰 신을 깔끔하게 연출했다는 점과 반대로, 소수의 인원이 대화하는 신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밑반찬이 아쉽네
앞에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기획의도에 충실하다. 스포츠 신파극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관객들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 장면은 멋진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변 등장인물을 콘셉트 아래에 가둬놓은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큰 덩어리들은 있는데 중간단계들이 좁고 얕다. 이 얕은 깊이 덕에 영화 자체가 올드하게 느껴진다. 정작 영화가 우려하는 점은 다 보완했지만 이를 덮기 위한 수가 반대로 단점이 되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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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하늘에 수놓아진 색색의 풍선을 보며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가장 먼저 본 영화 <이웃들> .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어서 기대를 했던 작품이었다. 쿠르드인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민족과 부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폭력이라는 부조리함을 자극적이지 않고도 울림있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영화 <이웃들> 시놉시스
90년대 초 시리아 국경 마을, 세로는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된다. 학교에는 쿠르드인 아이들을 범아랍의 충성스러운 동지로 키워내려는 목표를 가진 선생님이 새로 부임한다. 유대인들을 증오하라고 가르치는 선생님의 말씀은 세로를 혼동스럽게 만든다. 오랫동안 좋은 사이로 지낸 이웃이 바로 사랑스러운 유대인 가족이기 때문이다.
* 해당 내용은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보도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이웃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어느 날 생겨버린 국경에 대하여
중학생 때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왜 자로 잰듯이 직선인지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었다. 이는 당시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던 프랑스와 영국이 자신들의 기준대로 그저 땅따먹기 하듯이 영토를 나눠가졌고,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부족과 민족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이권에 따라서 국경을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부족이 통합되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분할되는 경우도 있었고, 사이가 좋지 않은 부족이 엉겁결에 하나의 나라가 되면서 불화가 더 쌓여버리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그야말로 아프리카는 분열과 전쟁이 도사리는 공간으로 되어버렸다.
아프리카에만 해당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 국경선의 문제가 중동지방까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리아와 터키를 경계로 쿠르드인은 분할되었고,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이산가족을 상봉하듯이 15분간의 면회로 생이별한 가족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서도 시리아에 있는 군인은 쿠르드인에게 아랍어로 소통할 것을, 터키에 있는 군인은 그들에게 터키어로 소통할 것을 강요한다. 쿠르드인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한 채 터키인과 아랍인으로서만 존재하길 바라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국경이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와중 쿠르드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철조망을 사이에 둔 터키군과 시리아군이 서로 쿠르드어로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기도 했다.
쿠르드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있는가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세로는 TV를 통해 만화영화를 보고 싶지만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는 소년이다. 그렇게 평화롭던 세로의 가족에게 어머니가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로의 엄마와 세로, 그리고 이웃들은 근처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던 터기 군인은 멀리서 뷰파인더를 통해 세로 어머니를 몰래 훔쳐보면서 동료에게는 새를 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총구는 세로 어머니를 향한 상태에서 동료는 장난삼아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터키군은 의도치 않게 세로의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
사람인 줄 모르고 동료는 방아쇠를 당겼을테지만, 그 이후 터키군과 시리아군의 모습을 보면서 쿠르드인을 지켜줄 이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터키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세로의 엄마는 쿠르드인이었어도, 국적은 시리아였다. 하지만 시리아군은 자국민이 다른 나라 군인에 의해 살해되었음에도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사람은 살해한 터키군 역시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저 쿠르드인은 명목상 거주지에 따라 시리아인과 터키인이라는 국적을 받았을 뿐 실제 국가의 보호를 받지 않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을 지켜주는 국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고, 그저 강압적으로 아랍인이 될 것을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그들이 아랍인이 된다고 하여 실제 아랍인과 같은 처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런 강압의 장소였던 학교에서 세로는 졸다가 꿈속에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고, 거기서 삼촌과 함께 날렸던 색색의 풍선들이 하늘에 수놓아진다. 실제였다면 국경에 있는 시리아군과 터키군이 그 풍선들을 다 터트렸을 테지만 꿈이기에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는 모습을 보면서 쿠르드인이원한 것은 국가가 아닌 그저 나의 이웃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뿐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 수많은 풍선들이 국가라는 강압적인 체제가 아닌 함께 자유롭게 서로를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바라는 쿠르드인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뭉클했던 순간이었다.
교육의 중요성
영화 <이웃들>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가득한 선생님이 학교에 부임한다. 갓 학교에 입학한 이들에게 유대인은 아랍인을 납치에 죽인 뒤 그들의 피로 케익을 만들어 먹는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유대인을 만나면 그들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에 대해 가르친다. 새하얀 도화지인 아이들은 유대인 더미를 향해 선생님이 가르쳐준대로 칼로 찌르고, 유대인을 죽여야 한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바로 옆집에 친한 유대인 가족이 살았던 주인공 세로는 중간에서 엄청 혼란스러워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제껏 지켜봐온 유대인 가족은그런 존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직접 유대인은 그런 것이냐며 순수하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기준을 점점 세워가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폭력성은 그대로 학습하는데, 제대로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를 자루에 넣고 유대인 더미를 칼로 찔렀던 것처럼 살아있는 생명을 실제로 죽이기에 이른다. 이 모습을 보면서 어린아이들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인식 없이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느낄 수 있었다.
2시간이 넘는 조금은 길었던 러닝타임에 비해 굉장히 집중도가 높았던 영화 <이웃들>. 외부세력에 의해 갈라진 민족에 대해여, 그리고 그들을 지켜주지 않는 국가와 폭력성에 대해서 잔잔하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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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끌리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시놉시스를 보고 재밌어보여서 보기 시작한 영화 <동네사람들>. 마동석의 통쾌한 액션과 추리를 기대했지만 실망스러웠던 작품이었다.
영화 <동네사람들> 시놉시스
여고생이 사라졌지만 너무나 평온한 시골의 한적한 마을, 기간제 교사로 새로 부임 온 외지 출신 체육교사 기철은 동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다. 실종된 여고생의 유일한 친구 유진만이 친구가 납치된 거라 확신하여 사건을 쫓고, 의도치 않게 유진과 함께 사라진 소녀를 찾기 위해 나선 기철은 누군가에 의해 그녀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두가 침묵하는 사라진 소녀,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그녀를 찾아야만 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동네사람들>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마동석표 액션
범죄도시, 신과함께 등 전작에서 봐왔던 마동석 배우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대부분 할리우드에서 볼 듯한 체격에 기술보다는 남다른 체격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스타일의 액션을 많이 보였다. 그래서 마동석 배우가 이번 영화 <동네사람들> 속에서 다른 액션을 선보일 것이라고 기대를 하진 않았다. 한국에서 남다른 피지컬로 헐크처럼 쓸어버리는 액션을 선보일 수 있는 남자 배우는 마동석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액션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영화 <동네사람들>의 연출이 잘못한 것 같다. 하나도 통쾌하지 않다. 액션을 선보이고 있는데 어쩜 그렇게 지루할 수 있을까. 전작에서 그의 액션 역시 영화 <동네사람들>의 액션처럼 충분히 유추가 가능한 액션이었지만 엄청난 희열감과 통쾌함을 주었다. 하지만 영화 <동네사람들>은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은 액션 영화였다. 좋은 배우를 가져다가 나쁘게 써먹은 예로 영화 <동네사람들>이 한동안 거론되지 않을까 싶다.
범접할 수 없는 악인의 부재
어쩌면 마동석표 액션이 큰 통쾌함을 주지 못한 이유에는 악한 상대가 그렇게 크게 부각되지 않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악인의 힘이 크면 클수록 마동석의 액션은 더욱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영화 <동네사람들>에서 악역을 하는 캐릭터는 기존 범죄물의 악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유약한 면이 많이 부각됐다. 대표되는 악인이 미술선생님과 그 아버지다. 미술선생님 김지성은 몰카를 달아 여학생들을 훔쳐보고 여학생들을 유인해 집까지 끌어들이지만 그렇다고 살인까지 계획을 하진 않는다. 어쩌다 보니 여학생을 기절시켰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가 살인을 하게 된다. 그리고 미술선생님은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자라다보니 측은한 느낌마저 자아내다보니 악인이라는 이미지가 크게 부각되지 않아서 액션의 통쾌함이 반감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주제가 무엇인가?
영화 <동네사람들>을 다 보고 나서 이 작품을 보고 도대체 내가 무엇을 느껴야 하나? 하고 혼란스러웠다. 화끈한 범죄 오락 액션이었다면 보는 동안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고, 액션, 스릴러, 추리였다면 적어도 추리하는 데 머리를 쓰면서 그 에너지를 소비라도 했을텐데 이 작품은 약간 3초 스포식으로 머리 속에서 다음 내용을 넌지시 알아서 알려주다보니 흘러가는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회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즘 극심하고 있는 몰카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어서 영화의 방향이 모호한 상태에서 끝나다 보니 끝나고 얻은 깨달음은 ‘아! 끌리지 않는 영화는 시간이 남더라도 보지 말아야겠다’였다.
영화 <동네사람들>은 마동석을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나쁘지 않지만 작품 자체는 추천하진 않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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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아지 인형을 ‘콜라’라 부르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
6★/10★
아동 애니메이션 〈캐리와 슈퍼콜라〉는 국내 유튜브 채널 누적 조회수 1위를 기록한 유튜브 채널 ‘캐리 TV 장난감 친구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모험을 담은 영화다. 유튜브 채널의 세계관을 영화로 확장했다는 데서 이 채널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인기를 끌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언더독〉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애니메이션을 연달아 연출한 오성윤, 이춘백 감독이 감독을 맡았다는 점도 〈캐리와 슈퍼콜라〉의 기대 요소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우주 악당 ‘스펙터’는 예쁜 별과 행성을 모아 우주 정원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스터’가 가진 힘이 필요하다. 스펙터의 야욕에 여러 행성을 파괴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스터는 동료 ‘와쿠’와 함께 지구로 도망친다.
한편 평범한 학생인 캐리는 학내 SNS에서 자신의 게시물이 큰 인기가 없어 고민이다. 그러던 와중 스펙터를 피해 캐리가 아끼는 강아지 모양의 ‘콜라’ 인형에 들어간 마스터를 만난다. 캐리는 애착 인형 콜라가 말하고 움직이는 상황이 어색하지만, 그런 콜라의 모습을 SNS에 올려 친구들의 관심을 끌고 나서부터는 이 상황을 즐기기로 한다. 이렇게 캐리는 마스터의 힘으로 ‘슈퍼콜라’가 된 콜라와 새로이 우정을 쌓아 나가고 끝내 와쿠, 인간 친구들과 힘을 합쳐 스펙터의 계획을 좌절시킨다.
〈캐리와 슈퍼콜라〉는 〈마당을 나온 암탉〉, 〈언더독〉과 달리 성인 관객이 함께 즐길 만한 영화는 아니다. 작화와 세계관 등의 요소가 아무래도 어린이 관객에게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사회장에서 이 영화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설렘을 줄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시사회장과 달리 보호자를 동반한 어린이가 가득하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압권은 내 옆에 앉은 어린이 관객과 보호자의 대화였다.
보호자: “○○야, 콜라 어디 있어?”
어린이: “(강아지 모양의 ‘콜라’ 인형 굿즈를 가리키며) 여기!”
보호자: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콜라.”
어린이: “이거 진짜 콜라인데?”
보호자: “아니, 그거 말고 마시는 콜라.”
적어도 이 영화를 보러 온 어린이들에게는 마시는 콜라가 아니라 영화 속 귀여운 강아지 인형이 ‘진짜’ 콜라다. 무엇이 진짜 ‘콜라’인지를 두고 벌어진 이 대화가 아이와 보호자 모두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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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박찬욱이하고는 못 헤어지겠다!
영화제에서의 수상 소식은 관객들에게 해당 영화의 관심을 모으는 것도 있지만, 영화를 보는 데에 있어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준다. 앞서 개봉한 <브로커>가 "남우주연상"이었다면, 이번 <헤어질 결심>은 "감독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집중할 것은 정해졌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남편의 자살 사건으로 과부가 된 젊은 중국 여자 "서래"와 이를 조사하는 형사 "해준"이 만나며,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작품이다.
특히, 이번 <헤어질 결심> "15세 이용가"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2006> 이후 16년 만이다! (물론, 앞선 게시물에서도 말했지만 국내 영화의 15세는 그래도 나온다!)그도 그럴 것이 그가 연출해온 이력에 쓰여있는 단 하나의 작품만을 봤어도 알겠지만, 대다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렇기에 이번 영화는 대충 친화적으로 보이겠으나... 아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가 자연스레 떠오를 정도로 옛 흑백 영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요즘 스타일이 아니다! - 먼저, 개봉한 <브로커>의 1,232,709명(06.29 기준)은 책정된 손익 분기점 150만명에 모자라다. 결론은 '흥행과 예술성은 별개다.'라는 것인데, 영화 <헤어질 결심>라고 다를까?1. 내 눈을 바라봐?
영화를 보는 데에 스크린은 해당 작품의 눈이다.
관객 본인의 시점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 해당 작품 내의 등장인물들의 눈일수도 있고, 이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감독(창작자)의 의도된 견해일 수도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가장 중요한 감각은 "시각(눈)"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신생아는 눈을 꼭 감은 채 태어난다. - 이는 완전한 시력이 아닌 것도 있지만, 빛에 눈을 보호하려는 목적이다. (물론, 뜬다고 해도 세세한 형체는 못 본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유"의 맛과 향으로 엄마를 구분하는데 그렇게 본 엄마는 내 엄마가 맞을까?지면의 수증기가 올라와 "가시거리"를 감소시켜 사람들의 시야에 방해되는 "안개", 역시 중요한 소재이다. (해당 영화에서는 음악으로까지 들려준다) 이처럼 본 작품은 '보고 있는 게 맞아?'를 의심하게 만드는데, 극 중. "서래"와 "해준"의 만남에 있는 색깔에서도 이를 넌지시 말한다. 흔히, 빨간색은 정열적인 사랑을 뜻하지만 위험을 의미한다. 그와 달리, 초록색은 안전을 의미하면서 식어버린 사랑 (흐르지 않아 썩어버린 피)을 의미하는데, 둘의 만남에서 계속해 교차되는 이 색깔은 누구의 감정을 말하는 걸까?
2.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죠?
앞서 말한 "안개"는 "가시거리"를 감소시켜 사람들의 시야에 방해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거리가 짧아져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사람들 간의 거리는 친함 혹은 사랑을 판단하는 객관적인 지표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극 중. "해준"이 망원경으로 "서래"를 보거나 "서래"의 음성을 녹음해 그 뜻을 해석해 상황을 정리한다. 근데, 재밌는 건 이 모든 것들을 "해준" 혼자서만 했다는 것이다.특히, "서래"의 음성을 녹음해 "해준"이 해석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텍스트'에는 뜻이 있지만, 이를 말하는 문장의 구성과 발음에 따라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 '배'라는 하나의 단어에도 신체, 과일, 이동 수단 등으로 여러 뜻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서래"가 말했지만 이를 읽는 "해준"은 자신이 그 상황을 상상하며 정리한다.
분명히, "서래"의 입장도 있지만 이를 배제한 채 자신의 주관으로 채워 넣으며 스스로 "내적 친밀감"을 만든다.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3. 사랑에 매달리는 순간, 승부는 결정된다.
근데, 이는 "해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극 중. 한국말이 서툰 중국 여성이라는 설정의 "서래"는 한국어는 단순한 어휘만을 구사하고 속담과 격언 같은 어려운 표현들은 중국 말로 말한다. 그러면서, 웃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는데 왜 그러는 걸까? 말하는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은 다했으니 속 시원하겠지만, 듣는 사람은 '이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라는 정리가 남았다. 관계란,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로 정리하는 감독의 정리는 사랑의 잔인함을 토로한다.물론, 여기까지 감독의 역량과 실력만을 말했지만 이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배우들의 활약도 넘어갈 수 없다. "해준"역의 '박해일'분의 연기도 충분히, 인상적이나 "서래"역의 '탕웨이'분은 '왜, 연기 부문에 언급이 되지 않았을까?'가 의문이 생길 정도로 '미스터리의 여인'을 제대로 수행해 주었다. - 어찌 보면, "메가박스 오리지널 티켓"이 더 먼저 나간 이유에 합당한 답변일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박배우님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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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일루셔니스트》, 환상은 어디까지가 좋은 것일까?
영화 《일루셔니스트》는 다시금 내가 애니메이션 감상에 최적화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보는 내내 격하게 화가 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고, 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영화 《일루셔니스트》 시놉시스
세월이 흘러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는 일루셔니스트는 자신이 설 수 있는 무대를 찾아 이곳 저곳을 떠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스코트랜드의 한 선술집에 머물며 공연을 하다 그곳에서 앨리스라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일루셔니스트의 무대에 반한 어린 소녀 앨리스는 다음 무대를 찾아 떠나는 일루셔니스트와 함께 여행을 나서고 뒤이은 그들의 모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비언어극 같았던 영화 《일루셔니스트》
영화 《일루셔니스트》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언어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국어가 아니기에 대사가 많은 영화의 경우네는 자막을 읽는데 집중을 하다보면 장면장면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 작품은 불어였기 때문에 자막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 《일루셔니스트》는 일종의 비언어극처럼 대사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주변 환경에 관객들이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있었다. 앨리스의 달라지는 모습과 함께 점점 낡아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부각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앨리스가 빛이 날수록 오히려 영화 자체의 색감이나 조명은 점점 어두워지는 등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화면을 구성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동심은 언제까지 지켜줘야 하는 걸까?
영화 《일루셔니스트》를 보면서 화가 나고 답답했던 것은 도대체 왜 할아버지는 앨리스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걸까? 였다. 자신의 생계를 위협하면서까지 앨리스의 세상을 마치 환상 속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준 것일까? 답답했다. 영화를 본지 꽤 됐지만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다. 앨리스는 자신이 점점 화려해지면서도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마법으로 얻은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결국 앨리스에게 마법사는 없다는 말을 남기면서 앨리스의 곁을 떠난다.
둘 모두에게 별로 좋지 않았던 방법인데 왜 그것을 고수했는지 의문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그렇다면 아이들의 동심은 언제까지 지켜줘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던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마법사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앨리스의 곁을 떠난 할아버지는 기차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그림을 열심히 그리다가 연필을 떨어트린 소녀는 기차 의자 바닥에서 연필을 찾는다. 그 연필을 주운 할아버지는 기다란 자신의 연필과 비교하며 소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짧은 연필 대신 긴 연필을 줄까 잠시 고민하지만 원래 소녀의 것은 소녀에게 전달한다.
여기서 나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마술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환상 속에 두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술 한번으로 아이들이 헛된 생각을 품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마술을 보여주되 그 마술은 순간적인 재미일뿐임을 알려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 장면을 영화 《일루셔니스트》의 명장면으로 꼽고 싶었다.
영화 《일루셔니스트》는 대사가 많이 없어서 영화 그 자체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던, 그래서 작품의 여운과 의미가 많이 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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