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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E2025-02-21 17:54:01

담벼락 하나, 그 너머의 비명

<존 오브 인터레스트>, 평범한 악에 대하여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새로운 획을 긋는 역할을 했다. 유대인이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과정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필요한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서 좋은 지점을 남겼다.

대중은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인생은 아름다워> 등 기존의 영화들을 통해 유대인이 겪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시각적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극의 전개가 대부분 가해자보다 피해자 측면에서 몰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정확히 반대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수용소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루돌프 회스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 가족의 일상이 주로 카메라에 담긴다. 그래서인지 집중하고 보지 않는 이상 유대인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계속 주인공인 회스 부부의 집안을 오가며 잡다한 일을 해내지만 영화에서 그들의 존재감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그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과 정원 그리고 주인공 가족들의 대화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무채색,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 장면들에 유대인들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건 다시 관람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정원을 가득 채운 초록빛 잎사귀가 바람에 살랑이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면과 대조되는 섬뜩한 소리들은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오로지 청각적 요소로만 수용소가 정원 담벼락 바로 너머에 있음을 인지하게 만든다. 가장 잔인하게 느껴진 부분은 정원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편에서도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웃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점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쑥쑥 자라난 잔디와 풀, 여러 종류의 꽃,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들이 타는 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걷지도 못하는 그들의 막내 아이까지, 촘촘히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가정을 이뤄낸 루돌프 회스 손에 의해서는 수많은 유대인이 죽어 나가는 상황과 대조적이다. 마치 회스 가족이 곧 다른 사람의 피로 쌓아 올린 부, 안락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 사람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을까. 루돌프 회스는 영화 말미에 원인 모를 헛구역질을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아이들을 먹고 입히고 키우며 삶을 영위해 나갔다는 건 돌이킬 수 없다.

 

두루두루 잘 지내고 품앗이하며 서로를 챙기던 사회 분위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재 우리 삶을 돌이켜 보게 된다. 때때로 함께 일했던 직장 상사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악독했고, 임원진은 부하직원들의 고혈을 짜내기 바빴다. 방식이 조금 다를 뿐 세상에는 여전히 회스 부부처럼 개인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생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수용소에서 고된 일로 힘겨워하는 유대인들이 조금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깊은 밤 몰래 찾아와 사과를 두고 가는 소녀. 이런 소녀의 모습을 띤 사람이 가끔씩이라도 좋으니 아직은 꽤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상황과 직면할 일이 잦아지길 기원한다.

 

작성자 . SUE

출처 . https://blog.naver.com/cine_soo/223743675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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