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2025-02-23 17:51:57
그림자를 따라가면 실체가 있다
해피 투게더
로멘스 영화를 추천할 때마다 항상 인지부조화가 걸린다. 머릿속으로는 <해피 투게더>를 외치고 입으로는 <비포 선라이즈>를 외치는 내 모습(물론 <비포 선라이즈> 역시 훌륭한 영화다.). 홍콩영화와 왕가위의 영향력이 개인적으로 상당하고, 그중에서도 <해피 투게더>를 정점이라고 여기는데도 말이다.
어떠한 영향력도, 자격도 없는 주제에 가식적인 의견을 내는 태도는 비단 영화뿐만이 아닐 것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패션, 남들도 좋아하겠지 같은 안일함에 일상을 녹이는 현실이다. 그토록 좋아하는 <해피 투게더> 속 그토록 좋아하는 양조위와 장국영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들은 사랑하기 위해 홍콩에서의 삶을 접고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간다. 용기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르헨티나에서의 생활은 불안정하고,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서로에게 불만은 쌓여간다. 함께 가기로 한 이과수 폭포는 점점 램프 속 삽화처럼 철 지난 꿈으로 남고, 오직 집착만이 불쾌하게 피부에 닿다가 이내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하지만 함께하지 못하니 사무치게 그립다. 함께 있으면 미칠 듯이 불안한 걸 알면서도.
결말에서 두 인물의 마지막이 갈린다. 장국영은 끝내 여권을 찾지 못해 아르헨티나에 남으며 원망과 후회가 뒤섞인 눈물을 흘리는 반면, 양조위는 혼자서 나마 이과수 폭포를 보고 아르헨티나를 떠난 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제법 멋들어진 대사로 극을 마무리 짓는다.
이렇게 보면 양조위만 해피엔딩을 맞이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진 않다. 그는 오직 사랑만을 이유로 모든 걸 포기하고 택한 장소를 떠났다. 장국영 역시 오직 과거 만을 소비하며 목적 없는 낯선 땅에 남을 것이다. 어찌 됐건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직 함께 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람은 한치 앞의 미래도 모른다. 뜬구름처럼 무수히 스치는 생각들에도 여과가 없는데 미래는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사람은 한없이 유한하며 무능한 존재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장점으로 작용해서 우리 삶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주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결말을 알았으면 그들은 모든 걸 포기하고 아르헨티나에 갔을까, 어차피 헤어질 거 집착은 덜 하지 않으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우리는 무수한 삶의 작용점을 지나치면서 불필요함을 느끼기도 한다. 장국영처럼 깊은 후회로 과거만을 소비한 채 한참을 보내기도, 때로는 누구를 원망하기도 하며. 출구는 없을까. 다행히,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이러한 감정조차 오래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불안한 미래에 다시 기댈 것이다. 양조위의 모습처럼. 어쩌겠는가. 지나온 추억마저 모두 미지에서 발생한 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해피투게더> 속 주인공들을 두고 어느 한 쪽을 미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우리 내면의 일부이고, 그것이 어찌 됐건 삶의 다양함을 만들기 때문이지 않나. 그들은 마음껏 기대하고 실망했으며, 헤어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오로지 그들이 사랑했던 과거다. 생소한 나라의 생소한 사랑 이야기에 울림이 있는 이유는 모두 이곳을 지나간다. 그들처럼 용기 있는 자세로 착각 속에 흠뻑 빠지고 싶은 요즘이다.
“두 사람을 '음'과 '양'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만약 이 공간에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면 제일 먼저 보일 사람이 장국영이에요. 모든 사람이 집중하고, 그렇게 주목을 받아야만 하는 배우가 장국영이죠. 양조위는 이 공간에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눈에 안 띄게 어디론가 숨을 거예요. 하지만 언젠가는 서서히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거예요." -왕가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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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온 과정에서 지나치지 않은 감정 속을 유영하다
테이블에서 펼쳐지는 대화는 네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공간 자체의 긴장감과 대화가 동시에 펼쳐진다. 비극적인 사건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마주하는 두 부모의 조우 속,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책으로도 꼭 만나고 싶은 영화, 매스를 소개한다.
가해자 부모와 피해자 부모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야기를 듣지만 폭발하는 감정을 온전히 누르기는 힘들었다. 감정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그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 펼쳐지는 대화는 날카롭다고 생각했던 흐름을 유지한다. 숨 막히는 공간에서 더 숨 막히게 만드는 자리 배치는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약간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그 자리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수많은 대사는 그들이 겪어 왔던 고통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시선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건네는 따뜻한 위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사람의 용서는 고통에 따라 끊임없이 고통받는 이들이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고통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을 갉아먹기에 변하지 않는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네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보이는 표정이나 시선, 목소리를 통해 그들의 감정이 더욱 극대화된다. 대사로 표현되는 감정들이 더 이상 만질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먹먹하다. 가해자의 부모이기 때문에 온전한 슬픔과 그리움을 표출할 수 없었던 가해자 부모의 표정이 떠오르며 그 감정이 커진다. 용서할 대상이 불명확한 이 상태에서 모두가 용서와 화해의 과정을 거칠 수는 없겠지만 계속 대화하고 또 대화하면서 이러한 과정을 나눠야 할 것이다.
화면이 검게 변해도 빛만큼은 사라지지 않는 모습에 영화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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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함을 메우는 코트 위 낭만과 박진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농구 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모교인 부산중앙고에서 공익 근무 중인 ‘양현’(안재홍). 그는 하루아침에 농구부 신임 코치로 발탁된다. 학교 윗선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는 농구부를 해체하는 대신 구색만 갖추기로 했기 때문. 양현은 선수들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팀 전력을 끌어올리려 한다. 천재 유망주였지만 슬럼프에 빠진 가드 ‘기범’(이신영), 부상으로 꿈을 접은 올라운더 스몰 포워드 ‘규혁’(정진운), 유달리 키가 센터 ‘순규’(김택), 길거리 농구만 해온 파워 포워드 ‘강호’(정건주)까지. 그러나 급조한 팀은 첫 경기에서 몰수패라는 결과를 마주하고, 해체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농구를 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잡은 코치와 선수들은 포기를 몰랐고, 이들은 새로이 팀에 합류한 '재윤'(김민)과 '진욱'(안지호)과 함께 8일간의 기적을 준비한다.
스포츠라는 낭만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개인이나 단체끼리 속력, 지구력, 기능 따위를 겨루는 일'.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한 스포츠다.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누구에게도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은 경쟁. 곧 공정한 경쟁. 이는 스포츠가 낭만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보기 힘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 현실 속 경쟁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대학 입시가 취업 준비로, 다시 승진으로. 경쟁은 끊이지 않는다. 규칙이 의미 없을 때도 있다. 부모의 재력, 사회적 지위 등으로 인해 노력이 무의미할 때도 있다.
스포츠는 다르다. 규칙을 어기면 곧장 불이익이 주어진다. 경기장 밖의 일은 경기장 안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낭만의 종류도 많다.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역전하는 것, 약팀이 강팀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 상대를 이기지는 못해도 자기 기록을 뛰어넘는 것... 경기장 밖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모이면 스포츠에는 낭만이 쌓인다.
이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서사가 있다. '재기'다. 스포츠에서 실패는 그저 실패가 아니다. 기회다. 축구에서는 공을 놓쳐도 '세컨드 볼'을 따내서 다시 공격할 수 있다. 테니스나 탁구에서도 서브 기회는 두 번 주어진다. 농구에서 바스켓에 맞고 튕겨 나온 볼을 다시 잡는 행위인 '리바운드'도 마찬가지다. 실패를 만회하려는 열정, 재기를 독려하는 기회라는 로망이 스포츠의 특성인 셈이다.
두 번째 기회라는 낭만으로 가득한 <리바운드>
그래서일까? 두 번째 기회라는 테마는 스포츠 영화에서 언제나 중요한 소재다.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스포츠 영화 <국가대표>가 대표적이다. 작중 선수들은 하나같이 결함이 있다. 미국 국가대표로 뽑히는 유망주였으나 부상 때문에 한국으로 귀화한 선수. 스키 선수였지만 부상을 입어 종목을 바꾼 선수. 군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경력과 가족 생계가 위기에 처한 선수. 그들에게 스키점프 국가대표는 두 번째 기회였다. 제대로 된 훈련장도 없고 금전적인 지원도 마땅치 않지만, 열정을 불태운 원동력이었다. 원했던 순위와 기록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도전이 감동적인 이유였다.
장항준 감독의 농구 영화 <리바운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단 한 번의 기회를 갈구하는 선수들을 나열한다. 슬럼프에 빠져 고등학교 진학조차 어려워진 유망주 기범. 발목을 다쳤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수술받지 못해 농구를 그만둔 규혁. 체계적인 농구 훈련을 받아 본 적 없는 순규와 강호. 초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했지만 한 번도 공식 경기를 뛰어본 적 없는 재윤. 선수로서 실패한 후 지도자로 재기를 노리는 양현. 이들은 ‘슛이 안 들어가도 리바운드(노력)를 잡으면 된다'는 메시지 하에 의기투합한다.
낭만적인 메시지는 진한 감동으로 이어진다. 실패를 곱게 바라보지 않고, 두 번째 도전이 쉽지 않은 사회적 현실과 맞닿아 있으므로. 실제로 장 감독은 “엘리트 체육선수를 꿈꾸지만 이 대회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 경기가 될지 모르는 수많은 선수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 청년들이 조금이나마 위안과 공감을 얻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클리셰의 덫에 걸리다
그런데 감동은 많은 스포츠 영화를 함정에 빠뜨린다. 주제와 메시지가 유사한 것을 넘어서 감동을 주는 방식도 천편일률이기 때문이다. 턱없이 부족한 지원 속에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팀을 꾸린다. 팀 안에서 갈등을 빚고, 부상자가 속출하며, 처음 호흡을 맞춘 경기에서는 참혹하게 실패한다. 하지만 의지와 깡으로 갈등을 봉합하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기적을 써 내려간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스포츠 영화의 공식이다.
<리바운드>도 예외는 아니다. 교장은 구색만 맞춘 채 농구부를 방치한다. 팀의 중추가 되어야 할 기범과 규혁은 중학교 시절부터 앙숙이라서 좀처럼 호흡이 맞지 않는다. 에이스가 되어주길 기대한 센터 '준영'(이대희)은 팀을 이탈한다. 에이스가 사라지자 팀의 전술은 완전히 망가지고, 처음으로 농구를 배운 순규와 강호는 경기에 녹아들지 못한다. 중앙고는 고교 최강팀 용산고를 만난 전국 대회 1차전에서는 참패한다. 하지만 각자의 시련을 딛고 일어난 후 이변을 일으키며 끝내 해피엔딩을 쓴다.
익숙함이 죄는 아니다. 클리셰가 많아도 이야기가 짜임새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리바운드>는 클리셰를 제대로 써먹지 못해서 문제다. 익숙한 소재를 깊이 파고들지 못했고, 전반적으로 수박 겉핥는 인상이 짙다. 일례로 영화는 기범과 규혁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화해하는 에피소드는 의례적인 전개처럼 느껴진다. 농구부 운영에 대한 교장과 교사의 갈등도 간략한 코미디로 언급될 뿐이다. 순규와 강호의 불안함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고등학생에 와서 처음으로 농구를 시작한 관계로 대학 진학을 장담할 수 없다.
클리셰가 너무 많아서 부각되지 않는 대목도 있다. 후보 선수가 없을 정도로 전력이 약한 팀이 기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데 영화는 중앙고 코치와 선수가 무슨 준비를 했는지 거의 짚어주지 않는다. 양현이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선수들이 세탁실에서 패턴 플레이를 짜는 장면이 스쳐 지나가기는 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객관적인 강팀을 매 경기 무너뜨릴 수 있었는지 전술적인 측면은 끝내 알 수 없다. 선수들의 끈기와 노력, 절실함만 거듭 강조된다. 스포츠 영화로서 입체적인 매력을 더할 기회를 날린 셈이다. 그러다 보니 감동 한쪽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생생한 중계로 위기를 타개하다
다행히도 <리바운드>는 위기를 영리하게 타개한다. 실제 농구 경기를 보는 듯한 생생한 묘사가 원동력이다. 모든 시합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만큼은 11년 전 경기를 재현한 듯 보인다. 선수들의 장비부터 포즈까지 실제 선수들의 것과 일치시켜서 현장감을 살린다. 경기장 효과음과 중계진 멘트를 더해 긴박함을 강조한다. 경기 내적으로도 공들인 티가 난다. 열세와 반격, 위기와 역전을 오가는 농구 경기의 흐름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착실하게 연출했다.
세밀한 경기 묘사는 매 시합이 스토리텔링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더 빛난다. 선수들의 위기와 갈등은 농구 코트 안에서만 펼쳐진다. 특히 토너먼트 경기는 선수 한 명 한 명을 위한 쇼라고 할 수 있다. 첫 경기에서 기범은 몰락한 천재의 부활을 알린다. 다음 경기에서 기범이 집중 견제를 당하자 예상치 못했던 대안이 등장한다. 입만 산 줄 알았던 진욱은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순규와 강호도 강한 피지컬로 골밑을 장악하면서 자기 재능을 입증해 보인다. 모든 팀원이 견제당하자 재윤이 빛난다. 그는 처음 출전한 공식전에서 수없이 연습한 3점 슛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상대에게 일격을 가한다. 규혁도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발목 부상 때문에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던 그가 몸을 던지자 친구이자 앙숙인 기범은 멋진 어시스트로 화답한다. 마지막 순간 양현도 선수들의 사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며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물론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다 보니 경기가 너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는 하다. 경기 묘사가 조금 더 상세하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대신 스포츠 영화로서 <리바운드>의 매력은 살아난다. 캐릭터 드라마가 스포츠라는 낭만에 자연스레 녹아들자, 좌절을 극복하자는 메시지와 두 번째 기회라는 소재의 진정성을 제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갈등을 외부에 표출하는 대신 자기 자신과의 경쟁으로 설정한 선택이 후반부에 빛을 발한다. 클리셰의 늪에 빠진 전반의 실책을 만회한 셈이다.
<리바운드>는 일장일단이 확실하다. 전개와 감성이 뻔한 측면은 있지만, 심장을 뛰게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스포츠 드라마의 매력과 감동도 익숙하지만, 실화를 충실히 재현한 제작진의 진심 덕분에 감동은 남부럽지 않다. 그러나 스포츠 영화 중에 흥미롭고, 독특한 위치를 점한 것도 분명하다. 공들인 티가 역력한 경기 장면은 저절로 주먹을 쥐게 만든다. 청춘의 패기가 자아내는 유쾌함과 싱그러움 덕분에 두 번째 도전이라는 보편적인 주제가 색달라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3인조 밴드 '펀(FUN)'의 'We Are Young‘은 신의 한 수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순간부터 결말까지, 명장면으로 손색없으니까.
Acceptable 무난함
분명 익숙한 맛인데, 조금 더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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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1974년, 2023년의 임신중지
1963년, 1974년, 2023년의 임신중지
〈앵그리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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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사건》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레벤느망〉에서 주인공 안은 두 번의 임신중지를 시도한다. 뜨개질바늘을 사용해 혼자서 한 번, 불법 시술소에서 또 한 번. 〈레벤느망〉은 이 고통스러운 순간을 비껴가지 않는다. 안의 거친 호흡과 고통스러운 신음, 날카로운 시술 도구가 안의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럼으로써 ‘불법’이라는 추상적 규범이 초래하는 위험과 이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수치심을 고발한다.
〈레벤느망〉의 배경은 1963년의 프랑스다. 〈앵그리 애니〉는 그로부터 10년 후의 일을 다룬다. 두 아이가 있는 엄마 애니는 임신중지가 가능한 곳을 수소문해 한 서점을 찾는다. 서점 직원은 찾는 책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혹시 모임에 온 것이라면 커튼 뒤쪽으로 가 보라고 말한다. 커튼 뒤에는 ‘불법이지만 비밀은 아닌’ 일이 이뤄지는 중이다.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임신중지가 필요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들에게 사려 깊은 태도로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상세한 설명을 해준다. 임신중지에 어떤 도구를 활용할지 하나하나 일러주고, 모든 궁금증에 상냥히 응대한다. 겁에 질려 그곳을 찾은 여성들의 긴장이 조금씩 풀린다. 그들은 MLAC, 임신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의 활동가다.
이제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시작된다. 애니는 임신중지를 위해 침대에 눕는다. 의사 한 명과 활동가 둘이 애니 곁에 있다. 그들은 애니에게 거울로 자궁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자기 몸의 아름다움을 긍정하기 위함이다. 의사는 애니가 불편함을 느끼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활동가는 애니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내내 곁을 지킨다.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끝났다고요?” 임신중지가 마무리되자 애니가 깜짝 놀라 묻는다.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애니에게는 이토록 쉽고 간단하고 안전하게, 심지어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며 임신중지가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레벤느망〉의 임신중지 장면과 달리, 〈앵그리 애니〉의 임신중지 장면은 심지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두 영화가 임신중지를 재현하는 방식의 차이는 여성의 임신중지 경험이 어떤 환경과 맥락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극적으로 대비한다.
MLAC 덕에 공포가 안도로 바뀐 애니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경험에 계속 잊히지 않는다. MLAC의 도움으로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은 안전하고 믿음직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기부금 형식으로 비용을 지불하면 됐다. 그들의 활동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커다란 평온에 감명받은 애니는 순수한 호기심이 인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불법 행위를, 심지어 비밀리에 진행하지도 않는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데, 애니는 그런 그들에게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던 중 애니에게도 각성의 순간이 온다. MLAC 조직이 여러 곳에서 활동하긴 했어도 임신중지를 원하는 모든 여성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여전히 많은 여성이 위험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애니의 이웃도 마찬가지였다. 애니는 본격적으로 MLAC 활동을 시작한다. 활동을 통해 자신의 편견을 조금씩 수정해나가고, ‘생명 파괴’ ‘문란함’ 등의 낙인 때문에 여성들이 임신중지에 얼마나 큰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도 직접 대면한다.
애니가 MLAC 활동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영화의 질문은 확장된다. 〈앵그리 애니〉는 그저 임신중지의 합법화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더 크고 깊은 질문이 담겼다. MLAC를 찾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기존 활동가, 의사만으로는 모든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이에 오랫동안 단체에서 의사를 돕던 활동가들이 직접 임신중지 시술을 집도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주로 남성으로 구성된 MLAC의 의사들이 반발한다. 자칫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에 전문가만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여성들은 의사 없이 임신중지보다 훨씬 더 위험한 출산을 인류의 탄생 때부터 서로 도우며 해왔고, 시술법이 발전한 덕에 임신중지의 절차가 비교적 간단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MLAC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들의 느끼는 공포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었다.
이는 남성/국가/전문가 집단이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애니는 화를 내는데(‘앵그리 애니’), 그 이유도 이 때문이다. MLAC의 활동이 큰 이슈가 되어 임신중지가 합법화되었으나 합법화가 의료 기관이 그 권한을 독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MLAC에서 가능했던 여성들 간의 연대, 여성 경험의 가시화 등은 배제된 채(즉 MLAC에서 여성들이 쌓아 온 역량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채) 여성이 다시금 남성/국가/전문가의 수동적 객체로 위치지어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애니는 화가 난다.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후 병원에서의 임신중지는 위험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여성을 다시금 외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MLAC 활동을 하며 애니가 가족에 ‘소홀해지는’ 과정과 이로 인한 가족 내 갈등을 통해서는 여성이 가사노동의 책무 때문에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제약을 받는 상황을 짚기도 한다. 〈앵그리 애니〉는 단순히 낙태죄 폐지가 진보·정답이 아님을, 여기에는 이를 초과하는 다양한 결의 질문과 고민이 동반되어야 함을 보인다. 임신중지에 관한 단편적 이해와 서사를 넘어, 여기에 무수히 많은 이슈가 결합되어 있음을 보이는 이 영화는 낙태죄가 페지된 이후에도 여전히 아무런 후속 입법 조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무책임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임신중지 이슈에 관한 필람작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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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 번 때리기만 하는 세상에게 어퍼컷 한 방
웩. 몸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땀이 잘 나는 체질이라 그런가? 오늘 스웻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녔는데 이런 냄새가 나는 건 좀 그랬다. 또 몸에 거북한 느낌이 있다. 위산이 역류하는 따가움이 싫었다. 그래도 책은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꾸역꾸역 읽는다.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오늘 비상금을 털어서다. 이렇게라도 오늘을 보내지 않으면 완벽한 잉여의 삶이 될 것 같았다. 어찌어찌 곳간을 털어서 3만 원을 갖고 왔다. 밖에 외출하기 위한 보람이 있다. 날씨도 때마침 좋았다. 비상금을 털어 버스를 탔다. 계속 방구석에 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기엔 인생이 아쉬웠다. 모처럼 게임 파일들도 다 지워 하나만 남겨놨다. 좋아. 다시 하나에 집중해보자고. 내가 살아온 갓생이 대학생이라는 허울 아래서만 가능했다면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하다. 원래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해야 하는 거잖아? 아무도 동의 안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동안 이기고 있는 삶을 걸어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 내가 탄 버스도 승자의 여유 같은 느낌이다. 뭐랄까, 내 또래에 책 읽는 사람 없는 것 같거든.
그럴 리가 있나. 갑자기 오늘 돈이 없어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위에 썼던 곳간은 게임 머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끼는 여동생의 생일선물도 없어 '카톡 메시지면 충분하겠지' 싶은 나의 정신승리가 오늘 일상의 발단이 됐다. 금세 하는 게임에 눈이 갔다. 모여있는 게임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팔까? 어차피 모아봤자 디지털 쪼가린 거 이럴 때 써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7개월 차 사회복무요원 생활. 이제까지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지만 컴활 예약부터 영화 예매까지 돈 쓸 일이 많아 생활고에 직면했다. 이제는 팔 스니커즈들도 없다. 950원짜리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와버렸다. 와. 그렇게 좋아하는 친한 여동생에게 생일 선물도 못 줘 안달복달하는 하루라니. 금세 내 삶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아 모아놨던 돈이 없는 게 이렇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군것질 좀 적당히 쳐하면 될 일인데 역시 나는 모지리가 맞다. 여자 친구도, 넓은 인간관계도, 술과 담배도 하지 않거나 없는데 이럴 때 돈이 없어서 밖으로 못 나가는 처지다. 이기고 살았던 갓생을 산 사람 치고는 과연 궁색하기 그지없다. 아. 내 또래 중에 책 안 읽는다는 생각도 그냥 나의 생각이다. 주위를 들여다봤을 때 책 많이 읽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내가 만든 나의 기대를 내가 부숴버렸다. 나는 3만 원에 울고 웃는, 그 정도짜리 인간이다. 이런 나의 한 구석도 웃음으로 마무리 짓고 싶은데 말이지. 어떤 노래 가사처럼 지면서 배우는 게 삶이라지만 난 세상에게 너무 자주 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만든 세상은 참으로 광활해서 현실로 나가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젠장. 언제 한번쯤 이길 수 있을까? 늘 세상에게 지고만 사는 것 같다. 미생의 삶으로 그렇게 가다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근데 이런 나에게, 또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우리에게 아마추어 복싱 선수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딱 100엔짜리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실상 까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왓챠에 절찬 스트리밍 중인 <백 엔의 사랑>이다.
100엔짜리 인생
주인공 이치코는 일본 어느 곳에 사는 32세 여성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쭉 백수인 이치코. 어린 조카가 한 명 있다. 조카는 허구한 날 괴롭힘이나 당한다. 이모가 돼서 이런 조카와 같이 운동을 한다거나 자신감, 자존감을 키워주면 좋겠지만 이치코에게 그런 건 없다. 하는 일이라곤 조카와 게임을 하는 게 전부인 이치코. 맨날 '나 언니처럼 되면 어떡하지'식의 시비 걸기가 전부인 동생과 크게 싸우게 된다. 머리에 케첩을 붓고 식탁을 엎은 꼴에 어머니는 폭발해 이치코에게 독립을 권유한다. 그렇게 반강제로 집에서 쫓겨난 이치코. 다행히 어머니와 절연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임대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이치코, 평소에 자주 가던 100엔 숍에 취직하게 된다. 이왕 일자리 구한 거 좋은 곳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걸 그거랑은 거리가 멀다. 가게 점장은 우울증 환자다. 또 동료직원 노마는 띠동갑인 주제에 이치코에게 치근덕대는 게 일쑤다. 또 말도 더럽게 많아서 여러모로 사람을 귀찮게 한다. 게다가 도둑질을 해서 잘렸던 한 할머니는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이나 가락국수를 지맘대로 가져가곤 한다. 역시 사회생활에 쉬운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다니는 이치코. 뭔가 큰 임팩트가 있는 사건 없이 그렇게 일상이 흘러갈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100엔 숍의 단골쯤 되는 사람이다. 스윽 나타나서 바나나만 사 가는 사람이라 '바나나맨'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바나나맨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건조한 사람이다. 웃지도 않고 말투도 그렇게 예의가 바른 사람이 아니라 영 까칠해 보인다. 그런데 그 남자가 어쩐지 이치코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32년의 인생 동안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이치코. 바나나맨의 정체는 알고 보니 전직 복서였다. 바나나맨과 사랑에 빠진 이치코. 바나나맨이 선수로 뛰었던 복싱 운동장에 등록해 뭐라도 부딪혀보기로 한다. 영화는 잘하는 것도, 재미있는 것도 없었던 이치코가 사랑을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원히 지고 사는 거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원한 건 없다. 이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 뜻은 패자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냥 피하기만 어려우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런 경험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축적된다.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 싶지만 사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 패배자. 루저. 뭐 그런 생각을 스스로에게 품게 된다. 가끔은 '이런 말로도 이 상황의 위로가 될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점점 사람이 외로워지는 이유도, 그런 실패의 경험을 타인이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때 사람에게 뭔가 색다른 위로가 필요하다. 단순히 '그냥 잘 될 거야'식의 위로가 아닌 새로운 시각의 무언가가 있으면 참 좋을 것이다. 그래서 연애를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사랑하면서 날 아끼는 이에게 기대면 행복해진다. 근데 매 순간 연인에게 기댈 수 없는 노릇이다. 그/그녀가 도라에몽이 아니니까. 항상 내가 원하는 걸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색다른 위로'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여주인공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온갖 방식으로 괴롭힌다. 특히 동료였던 노마 캐릭터는 진짜 한 대 때려버리고 싶은 첫인상을 끝까지 유지한다. 또 바나나맨이나 복싱같이 이치코가 사랑했던 대상들도 한 방씩은 먹인다. 그렇지만 이것들 덕에 그녀가 웃는 날이 몇 번은 오는데, 이게 '이치코가 어떤 걸 바쳐서 이 결과들을 얻었나'를 생각해보면 영화가 하려는 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것이다.
솔직히 좀 과하긴 해
극을 보면서 느껴지는 단점은 살짝 과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크게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닐 것이지만 작위적인 설정이 있기는 했다. 일례로 주인공의 100엔 숍에서 유통기한 지난 도시락을 가져가던 아주머니 묘사가 그렇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이 사람이 굳이 이럴필요가 있나? 싶은 구석이 있다. 인물의 귀결을 안 내도 되는데 급 마무리한 느낌? 또 노마 캐릭터도 보면서? 싶은 구석이 있다. 이 사람의 패고 싶은 캐릭터성은 그 값을 충분히 하지만 벌인 일에 책임을 안 지는 느낌이다. 이 둘의 인물 설정이 영화니까! 실제가 아니니까!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극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좀 기능적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설정이 어느 정도는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좋은 편이다. 일단 바나나맨과 이치코의 캐릭터 설정이 좋았다. 바나나맨이 좀 나쁜 놈이긴 해도 이치코에게 동기부여를 심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했다. 적당히 나쁜 놈이라 거리감에서 오는 그 매력이 딱 잘 느껴졌다. 자기 이야기라곤 도통 안 하는 바나나맨. 바나나맨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가 복싱선수였다는 점이다. 인물 설정과 여주인공의 각성 계기가 연관이 있어 이 부분의 개연성이 딱딱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남주인공에게 관심이 생기고 이와 나서도 비슷하다. 복싱이라는 스포츠는 상대방을 주먹으로 때리는 스포츠다. 근데 이치코는 처음 여동생과 싸우고 집에서 쫓겨난다. 개싸움으로는 케첩도 붓고 별의별 짓을 다하지만 이치코는 복싱에 문외한이다. -물론 복싱을 하나둘 씩 배워 엔딩신에서 결투를 벌인다.- 난 비유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힘을 영 못쓰는 우리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늘 잘할 수는 없다. 언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애가 됐다가 내일 성숙해지는 게 우리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복싱(실전)에는 약해도 내 만만한 선에서(가족)는 여포가 되는 우리 모습이다. 보통 이런 내 모습을 알게 되면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챔피언이 될 수는 없어도 100엔짜리 개싸움은 가능한 여주인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은 더 나은 선택지를 위해 미친 듯이 산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이 사람에게 이입이 가능하게끔 극본이 인물 간의 연출과 사건 배치를 잘한 편이다. 즉 영화를 주인공의 매력 하나만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말씀! 미운 오리 새끼가 되어 백조로 날아오르는 이치코에게 뭔가 정이 간다.
안도 사쿠라의 격이 다른 루저 연기
안도 사쿠라라는 이름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느 가족>에서 우는 연기가 칸에서 엄청 극찬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이 사람이 연기하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 뭐랄까, 처음에 덩치가 좀 있게 나올 때는 이렇게 미련해 보일 수가 없다. 그냥 눈빛이랑 뒤태만으로도 둔해 보인다. 또 극 중반에 고기를 먹는 신이 있는데 젓가락질도 서투른 사람이다. 아니 젓가락질을 서투른 연기를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극도로 섬세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디테일을 포착하지 못할 것 같다. 또 바나나맨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자 친구 역할도 잘 수행해낸다. 자칫 보면 지 가족에겐 나빠도 남자 친구에겐 착한 이중적인 모습이 밉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선을 잘 탄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도 사랑의 힘을 받아 변하기는 했다. 그런데 안도 벚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찌질이 연기를 하면서도 하이라이트의 당당한 모습을 2시간 내내 유지한다. 뭐 루저였던 사람의 성장 서사는 다른 영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자기가 루저였던 시기가 있지 않고 나서 이런 게 가능할까? 싶은 연기다. 일본식 찐따 코미디로도 괜찮은 작품이다.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웃는 날 꼭 올 거야
이 영화는 잔인한 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사실 이치코의 삶과 우리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인생은 원래 지면서 배우는 거라지만 어째 가슴속에 패배 소식이 너무나도 많이 쌓였다. 그러다 보면 이 세상에 난 어울릴 수 없는 걸까, 루저가 되는 기분이다. 이치코도 마찬가지다. 37살에 복싱 시합에 나가 두들겨 맞았던 바나나맨처럼 삶에서 피동적이었던 이치코. 이치코는 마음이 자라 이제 세상에게 반격을 준비한다. 우리 모두 이치코가 하려고 했던 이 '반격'의 한 갈래 안에서 살고 있다. 1인분의 삶을 하고 싶어서가 열심히들 사는 이유 아닌가. 그렇게 세상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더라도 뭐라도 미친 듯이 부딪히는 게 우리 모습이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글러브 하나를 건네준다. 싸우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 삶에서 이기고 살 수는 없다. 그러려면 이왕에 다 걸어서 뭐라도 얻고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감독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야 엔딩처럼 좋은 시간이 올 테니까. 다들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야 세상이 우리에게 잠깐의 시간을 주곤 했으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왓챠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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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난 네가 달처럼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제주에 살아서 불편한 게 뭐예요?라고 물으면 '의외로 몇 가지 없어요'라고 답하고 싶다. 사실이다. 의외로 없다. 서울 드문드문 가보고 다른 지역은 경험이 아예 없는 수준이지만 불편한 게 없다. 글쓴이는 제주에 살다가 서울에 가면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들이 다양할 거라고 믿었다. 가령 '탐스' 초록색 맛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갔던 세운상가 근방의 GS에는 그 '탐스'가 없었다. 또 제주의 어느 동네 물가가 엄청 비싼 편이라고 들었다. 실제로 내가 일하고 있는 곳 근처 대학가 물가는 비싸다. 그런데 을지로 인근에서 평양냉면을 먹으려면 무려 12000원을 내야 한다는 점이 나의 입을 뜨악하게 만들었다. 제주 토박이 정식인데 반찬 많은 거 먹으려면 9천 원이면 되거든. 이렇기 때문에 누가 제주에 놀러 오면 저렴한 가격에 맛집 투어가 가능하다.
그 대신 분명하게 따라오는 단점이 있다. 바로 시사회를 못 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도 용산 아이파크몰 가보고 싶다. 돌비 사운드 한 번 느껴보고 싶다. 나도 홍상수 영화 극장에서 보고 싶다. 웨스 앤더슨 영화들 극장에서 보고 싶다. 이런 영화들 틀어주던 영화관은 도에서 사업한답시고 폐쇄됐다. 그래서 자의와는 상관없는 문화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가끔 나를 먼저 떠나는 사람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원래 살던 곳이 제주가 아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있다. 몇몇은 제주가 좁아서 더 큰 공기 마시려고 비행기를 타기도 한다. 이상한 암흑기에 추스를 기간이 필요했던 나. 20대 내내 손가락 빨며 그 사람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이럴 때는 살던 곳이 서울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크게 상관없나? 분명한 건 나이가 들어갈수록 먼저 떠나가는 이들의 마음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 그 사람도 그럴 만한 입장이 있었겠지. 있으면 몰랐던 것들이 없었을 때 알게 되기 때문에 다치던 안 다치던 내 옆사람에게 줄 수 있는 만큼의 모든 걸 줘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밤이다. 2020년,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치지 않은 멀티버스의 제주에 두 여자가 상실과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낮과 달처럼 공존할 수 없는 사람 같다. 으르렁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낮과 달>이다.
떠나간 너의 뒷자리
먼저 언질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남편은 일찍 떠났다. 혼자 남겨졌다. 민희는 집 안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남편이 남긴 흔적 하나하나를 되짚어본다. 일기장. 수첩. 페이스북… 항상 투정만 부렸던 자기의 모습이 강박이 되어 돌아왔다. 민희는 스스로의 내면을 더 깎아 들어간다. 점점 그리움이 커지는 이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페이스북을 키는 민희. 남편의 피드를 봤다. 남편 경치는 아무렇지도 않게 ‘ 이 집에 다시 돌아갈 것’이라는 글을 올렸었다. 홀린 듯 화면에 시선이 간다. 민희는 이사를 결심한다. 경치의 고향이었던 제주로.
그렇게 무작정 제주에 도착했다. 잠깐 쉰다는 생각으로 들어온 제주. 어려운 것들은 뒤로 하기로 한다. 원래 라이프가드 일을 하던 민희. 쉬는 동안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 같은 제주가 고향이었던 남편의 친구와 잠깐 대화를 나눴다. 타지에 왔다. 이제 혼자 사는 삶에 적응해야 하겠지. 부분 부분 떠오르는 옛 기억들을 뒤로하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나는 민희. 남편이 페이스북에 썼던 집 근처를 지나가고 있는데, 그곳에 어떤 여자가 수강생들에게 요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잠깐 구경하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 강사가 민희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어디 가? 그 잠깐 수강료 내고 가야지!’ 싹싹한 미소로 요가 강사 목하는 민희를 맞이한다. 몇 마디 나누는 둘. 그렇게 대화가 통했다. 민희의 홀로서기 첫 시작이 좋다. 목하의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이야기를 펼치는 둘.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알지 말아야 할 것들을 눈치채 버렸다. 민희 옛 남편의 첫사랑이 목하였던 것이다. 좁디좁은 제주에서 원수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기싸움을. 펼치는 둘. 민희의 제주 살이가 무탈히 지나갈 수 있을까?
제주 살이 26년 차
글쓴이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다. 일단 좋은 것은 공기 맑고 예쁜 곳이 많다는 것이다. 요즘 제주를 오는 사람들이 어떤 곳을 원해서 비행기를 타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제주에 살면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된다. 이 글을 읽는, 제주살이를 꿈꾸는 분들에게 '수월봉 알아요?'라고 물으면 아마 10분 중 1명만 안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슷한 질문으로 '평대리 알아요?' 물으면 거의 대답 못하실 것이다. 이렇게 세간의 여론을 뒤로하는 나만의 핫플을 알 수 있다는 점은 엄청난 강점이다. 바다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테니까. 안 좋은 점도 사실 많다. 바로 상영관들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 영화 vod로만 보게 된다. 또 시사회 하면 거의 못 간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지리가 너무 좁다. 내가 어디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그럼 그 사람은 적지 않은 확률로 누군가의 지인이다. 이는 작은 마을에서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 마을에 주기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이웃사촌일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영화는 이런 제주의 특성을 잘 활용한다. 제주도민인 글쓴이가 흥미롭게 느꼈던 부분이다. 처음에 주인공 민희가 착잡한 마음에 바다로 빠진다. 옷이 다 젖게 된다. 그때 만나는 젊은 남자가 있다. 바로 태경이라는 사람이다. 이 태경은 남편의 첫사랑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내 옛사랑의 첫사랑 아들'이 작위적인 설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제주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특히 태경과 목하처럼 그 마을에서 오래오래 살았던 사람이라면 더더욱이 그러기 쉽다. 이런 제주라는 공간 세팅은 다른 요소로도 이어진다. 영화에서 굉장히 인상 깊게 제시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문어회, 동굴, 감귤나무라는 점이다. 문어회 먹는 장면 아직도 기억난다. 진짜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동굴과 감귤나무라는 소재는 영화에서 중요한 연출 지점으로 사용된다. 이 크고 작은 동굴은 제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오름 쪽을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동굴이 많이 있다.
그리고 제주를 활용한 방식 중 가장 화룡점정은 목하의 캐릭터 설정이다. 요즘, 그러니까 근 몇 년간 제주를 살다 보면 목하 또래의 여성분이 몇몇 보인다. 이 분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코디법이 그대로 나온다. 헤어스타일 하나, 액세서리 하나 다 찐 제주도민의 바이브가 느껴진다. 갈옷을 찾을 생각을 어떻게 했대? 감독이 제주도 분이 아니라면 찾을 수 없는 디테일이었다. 또 주인공 목하가 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도 디테일함이 돋보인 수였다. 실제로 이주민분들을 대상으로 요가 가르치는 분들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말투랑 억양이 그 강사님 톤인 게 신기했다. 이 뿐만 아니라 목하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를 봐도 그렇다. 기억나는 것이 화분을 홍대 인근에서 볼 수 있는 깔끔한 감성이 아닌 아날로그틱한 것을 고른 것이었다. 뭔가 캘리그라피로 쓴 것 같은 간판은 실제로 제주도민 분들이 카페를 차릴 때 자주 쓰는 방식이다. 또 카페 안에 천으로 된 설치물(?)이 있다. 이 천으로 된 카페에서 요소들이 내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뭐 영화에서 옥에 티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태경이 어디에서 공연할 때 공연장이 '낮과 밤'이다. 이 '낮과 밤'은 제주시청에 있다. 그리고 이 '낮과 밤'에 나와서 자전거를 타는 신이 있다. 이때 자전거로 왔다 갔다 하는 길은 제주시 노형쯤에 있는 어느 곳이다. 뭐 영화라는 것이 다른 세계를 만드는 일이라 결함이라고 뽑기는 어렵겠지만 제주도민이 이 영화를 보기에 이런 점이 눈에 들어왔다.
과하기도 해
그렇게 제주라는 지역 특성을 잘 활용한 영화긴 하지만 과하기도 하다. 일단 영화의 설정이다. 솔직히 과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주인공의 옛 남편 경치가 인간적으로 너무 나쁜 사람이다.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라는 부분이 인물 간의 갈등과도 이어지고, 영화의 핵심 키워드 열등감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인물 간의 열등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설정을 넣었다면 사실 좀 아쉽다. 인물 간의 리액션이 들어간 부분을 조금만 들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이다. 그냥 단지 경치가 나쁘다!라는 것만 보여주는 것 빼고는 장면의 활용도가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또 이웃집이라는 설정에 과하게 기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목하라는 인물이 후반부에서 민하에게 어떤 행동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입장을 바꿔도 말이 된다. 목하의 아들 태경은 꿈이 있다. 그 꿈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꿈을 목하는 반대 한다. 이 목하가 반대하고 반작용으로 태경이 어떤 일을 한다.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지만 단순히 열등감이라는 키워드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쓰인 지점이 되는 것이다. 또 유다인 배우가 맡았던 주인공 민희의 행보가 사실 좀 아쉽다. 유다인 배우가 사랑스럽고 귀엽게 이 캐릭터를 묘사해서 그렇지 행보 자체만을 보면 의문이 드는 것이 많다. 누군가에게 극언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극의 이야기 전개 하나 때문에 희생한 부분이 조금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장면에서는 '이 장면에 이 부분을 암시했어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일단 주인공 둘의 이름이 목하, 민희인 것과 영화 제목이 <낮과 달>인 것이 그랬다. 전자는 이름의 이니셜이 같은 MH라는 것 때문에 만들었을 것이다. 또 제목이 <낮과 달>은 영화의 핵심 시퀀스와 이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 공존하기 불가능하지 않은 두 사람의 처지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까진 괜찮아. 극후반부 가장 마지막 시퀀스에서 두 인물이 어디에서 있다 나온다. 또 갈등이 가장 고점을 찍는 순간에 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 또 목하의 어떤 대사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다. 이 후반부에 들어가는 대사가 흐름을 살짝 깨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영화 연출이 암시하는 선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그렇게까지 높은 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장면은 사실 없어도 그만이다. 제주의 트레이드 마크로 소개됐던 지역 특산물이 있다. 이 특산물을 활용한 비유로 이미 내포했던 주제가 비유를 통해서 다시 제시되니까 살짝 진부하게 느껴지는 지점인 것이다.
재미있는 독립영화
근데 모든 영화를 도식화시켜서 볼 필욘 없다. 위에서 언급한 부분은 글쓴이가 감상을 글로 쓰기 위해 굳이 여러 번 생각해서 뽑은 것들이다.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면, 이 작품은 재미있는 독립영화라고 생각한다. 초반부 유다인 배우가 영화를 시작한다. 여기서 유다인 배우가 보여줬던 표정연기가 굉장히 탁월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연기를 그럴듯하게 품어내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된 채로 시작한다. 이 감정이입은 러닝타임 후반부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영화가 보여준 연출이 이 감정의 흐름을 깨지 않기 때문에 러닝타임 끝까지 흐뭇하게 볼 수 있다. 이 감정선의 흐름에는 감독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와 관련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면 이런 막장 치정극이 없다. 그러나 인물들이 생기 있게 살아 숨 쉰다.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여기서 코미디 요소도 있고 뭉클해지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독립영화를 볼 때 어떤 걸 기대하고 볼 수 있을까? <리멤버>처럼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비극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외계+인> 1부처럼 휘황찬란한 시각적 쾌감을 느끼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독립영화를 볼 때 이런 영화들이 가지는 소소한 유머가 좋다. 예술가들 특유의 사랑스러운 기운도 좋다. 이 영화는 감독이 갖고 있는 인간사에 대한 관점, 또 관객들이 이런 걸 느꼈으면 좋겠다!라는 진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에너지가 엇나가지 않기 때문에 러닝타임까지 무리 없이 볼 수 있다.
또 영화의 핵심 소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핵심 소재는 그리움과 회한일 것이다. 두 인물은 한 사람 경치에게 그리움을 품고 있다. 이 두 사람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미련이다. 그때 그럴 줄 알았으면 잘할 걸. 인물은 미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각자에게 열등감을 가진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사람들은 과거에 매달려서 살고 있다. 후회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서 기인한다. 후회는 사람을 같은 지점에서 붙박혀서 머무르게 만든다. 그러나 인생에 되감기란 없다. 결국 하는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다음엔 그러지 말았어야지를 되뇌는 것이다.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의 인과관계를 알고 싶어 했던 두 사람. 영화는 러닝타임 후반부에 가서야 이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간을 제주로 세팅한 이유도, 아침드라마 같은 설정도 다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끔은 낮에 떠 있는 날처럼 새로운 각도에서 무언가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세상의 전부가 아닌 거 다들 다 알잖아? 다들 다 똑같이 산다고 믿고 있다. 무언가를 떠나보내게 만든 그것들이 미울 것이다. 상처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무얼 해도 남겨졌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게 들려온다. 그런데 사람마다 빈 공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글쓴이도 독자분들도 다들 알고 있다. 떠난 이의 흔적 안에 살다가는 결국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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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연과 상상(2021)> 리뷰
-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을 감상했다. 러닝타임은 두 시간가량이지만 세 개의 옴니버스가 엮인 영화이기에 각 단편은 30-40분쯤 된다. 이것은 각본이 의도적으로 특정 주제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실제로 영화는 각기 다른 상황의 인물이 ‘우연’ 속에서 ‘상상’하는 모습을 거듭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끊임없이 기대 지평을 배반하는 각본을 통해 관객 역시 영화를 감상하는 도중 여러 상상을 하고, 자신에게 이러한 우연은 없었는지 생각하게 되기에, 제목 자체가 적지 않은 확장성을 지닌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우연과 상상이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보편 경험일 테니.앞서 언급했듯 <우연과 상상>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기묘한 애정 전선을 통해 우연이 낳은 상상을, ‘문은 열어둔 채로’는 앙심을 품은 개인의 상상과 우연이 맞물리며 맞이하게 되는 어떤 파국을, ‘다시 한번’에서는 우연과 상상이 동시 결합하여 빚어낸 가슴 아린 재회를 그린다. 모든 에피소드는 단절되어 있으나 대다수의 장면이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선 분명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특별한 액션이나 빠른 화면 전환조차 없어 단조로워지기 쉬운 세 개의 단편에 감독은 121분 동안 ‘우연’과 ‘상상’을 예상치 못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매번 새로운 활력과 긴장감을 불어넣는데, 이 솜씨가 정말이지 굉장하다. 상영관에서 다른 관객과 웃음과 탄식을 공유하는 건 참 오랜만이었지 않았나, 생각했을 만큼.※ 이하 스포일러 주의세 에피소드각 에피소드의 플롯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우연히 태어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츠구미(현리)는 업무를 통해 친해진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에게 최근 만난 한 남자,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에 대해 말한다. 그는 아직도 2년 전 헤어진 전 여자 친구를 떠올릴 만큼 순정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순간을 말하는 츠구미의 이야기가 너무도 따뜻한 탓에 그와 카즈아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 즈음, 영화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카즈아키의 전 여자 친구가 바로 메이코라는 사실이다.두 번째 이야기인 ‘문은 열어둔 채로’ 역시 첫 번째 에피소드처럼 세 사람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취업이 예정되었던 사사키(카이 쇼마)는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가 재학 중 취업자에 대한 특례 인정을 해주지 않아 유급생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그러진 것에 대해 세가와를 원망하고,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자 불륜을 저지르는 파트너이자 늦깎이 대학생인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교수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오는 문이 열린 세가와 연구실에서 그의 신작 소설(심사위원조차 노골적인 행위 묘사라며 지적했던 페이지)을 낭독한다. 연구실의 문이 열려있는 동안엔 그 누구도 나오와 세가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나오의 녹음 파일이 타인의 손에 떨어짐에 따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운명을 겪게 된다.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번’은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의 이야기다. 동창회에 어울릴만한 타입이 아님에도 그는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향을 찾는다. 허탕을 쳤다고 생각했으나, 우연히 나츠코는 기차역 앞에서 아야(카와이 아오바)를 마주한다. 아야의 집에 초대된 후에야 나츠코는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유키)이 아닌 걸 알고, 아야 역시 도쿄로 갔던 다른 동창과 나츠코를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둘의 이야기는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한다.우연/상상을 포용하는 인간의 선택우연이란 무엇인가? 하마구치 감독은 "우연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라고 말했다는데, 운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입장에선, 완전한 필연이란 조작된 가상의 세계 – 시나리오 따위 – 에서만 허락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 중 결국 우리가 ‘기억하기로 선택'하여 우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일련의 사건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무엇이지 않을까.만일 우연을 관계에 기초한 불확실성, 그러니까 타인과 자신이 유관하다는 전제 하에서 발생하는 불확실한 사건들의 연속이라 정의한다면,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메이코는 우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메이코는 자꾸만 모르겠다는 말을 거듭한다. 무책임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메이코에게 있어 ‘모르겠다’는 고백은 자신이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런데 메이코가 츠구미의 이야기를 듣고서 카즈아키를 2년 만에 찾아갔을 때, 관계의 주도권이 옮겨간다. 카즈아키는 분명 헤어진 후에도 메이코를 잊지 못했지만, 최근 관심이 생긴 사람이 그가 아니라면 메이코를 따라가지 말라는 부하직원의 충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산재한 우연이 인간에게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생각하지만 우연은 기실 우리가 인지하고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순간 발생한다는 것을 이보다 더 근사하게 비유할 수 있을까. 결국 메이코는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홀로 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찍는 것은 완공되지 않은 거리의 풍경이며 나뭇가지로 막혀 트이지 못한 하늘이다. 메이코는 예기치 않게 진실을 발견하였을지라도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불확실성을 확언하는 데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메이코이기에 그가 사랑을 인식하는 데에 시간이 소요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순간이 자신만을 위해 적절하게 찾아오지는 않는 법이니, 상실 역시 마땅한 결과물로 받아들여야 하리라.이렇게 우연 자체의 속성을 파고든 이후 등장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감독은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가 우연이라 적당히 부르는 사건이, 사실은 스스로가 뿌린 씨앗의 결과물이 아닐까 의심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나오와 세가와의 이혼/지위 박탈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사사키의 비대한 자아(자신은 이보다 더 나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를 접점/시발점으로 하여 파생되었을지라도, 뜯어보면 인물 각자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사키는 자신이 프랑스어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으며, 나오는 가족이 있음에도 내연관계를 저버리지 않았고, 세가와는 나오에게 녹음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나. 그리고 5년 후, 나오와 사사키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속성조차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인생에서 필요하다고 말한 세가와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인지 나오는 사사키를 껄끄럽게 대하던 태도를 철회하고 자신의 명함을 건넨 후 세가와와의 관계를 회복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이는 이전보다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사사키는 거부한다. 나오의 손을 빌려 세가와를 응징하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사사키는 자기 우월감에 도취된 상태에서 답보하는 셈이다. 이에 나오는 자발적으로 유혹을 선택한다. 그저 한 번의 마주침으로 끝날 수 있었던 긴장은 그리하여 연장되고, 우연이란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동일한 패턴으로 영원 회귀할 수 있음이 암시된다.마지막 에피소드는 '당신은 분명히 내 기억 속 누군가일 것'이라는 믿음이 부른 상상의 부산물이다. 충분히 어색해질 수 있음에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완전히 정립한 중년은 흔들리지 않는다. 서로를 나츠코의 옛 연인/아야의 친구라 상상하며 역할극을 진행함으로써 나츠코는 하지 못한 말을 토해내고, 아야는 자신조차 바라보지 못했던 내면을 이끌어낸다. 마음 깊은 곳의 공허를 메웠다기보다는 공허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은 두 사람은 묘한 연대를 이룩하고, 이는 역 앞에서 헤어지던 순간 아야가 동경했던 20여 년 전 동창의 이름을 나츠코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 아야가 기억해낸 이름이 노조미(소망)이라는 점은 퍽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우리는 우연을 통해 후회를 털어내거나 잊었던 꿈을 되찾음으로써 성장할 수도 있는 셈이니,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에게 덤블도어가 건넨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해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거란다."영화를 본 후, 우리네 일상을 시나리오로 만든다면 이보다 더 엉뚱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촌극에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영화든 현실이든 기대를 배반당하는 지점은 한결같이 우스꽝스럽다. 역시 삶은 원경에서는 비극처럼 보일지언정 가까이에선 희극인 모양이며, <우연과 상상>은 그런 점에 있어 더없이 훌륭한 리얼리즘 영화일 것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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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틀린 집 - 집 구조를 잘못 지으면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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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영상은 홍보마케팅사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이 집 뒤틀린 거.. 아세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딴집에 이사 오게 된 가족.
엄마 ‘명혜’는 이사 온 첫 날부터 이 집이 뒤틀렸다고 전하는 이웃집 여자의 경고와
창고에서 들리는 불길한 소리로 인해 밤잠을 설친다.
아빠 ‘현민’은 그런 ‘명혜’를 신경쇠약으로만 여기고
둘째 딸 ‘희우’는 가족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마주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다.
그러던 어느 날,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잠겨있던 창고문을 열고 만 명혜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데…
뒤틀린 틈에서 시작된 비극이 가족을 집어삼키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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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외계+인> 1부 티저 예고편
역대급 스케일+독보적 세계관+완벽한 캐스팅까지! 상상 그 이상! 확신의 기대작! [외계+인] 1부 티저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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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 메인 예고편
고요한 우주를 가르는 절규 피할 수 없는 그것과의 사투 [맨 인 더 다크] 페데 알바레즈 감독 [에이리언] 리들리 스콧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