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2025-03-13 14:25:14
깔끔한 액션의 교본, 마무리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타이머
<언젠틀 오퍼레이션> 리뷰
📽️ 언젠틀 오퍼레이션 (2025)
감독: 가이 리치
출연: 헨리 카빌, 앨런 리치슨, 알렉스 페티퍼 외
*해당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상호 돌봄'이라는 새로운 부녀 관계
8/10
11살 딸 소피와 30대 초반의 아빠 패터슨이 소피의 방학을 맞아 함께 여행을 떠난다. 부부의 이혼 후 소피가 엄마와 함께 살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아주 소중한 여행이다. 행선지는 튀르키예. 매끄럽지만은 않다. 두 개의 침대를 확인하고 예약한 호텔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고, 호텔 바로 옆에서 진행 중인 공사는 부녀의 신경을 긁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여행의 기쁨이 더 크다. 패터슨은 다정한 얼굴과 몸짓으로 딸에게 선크림을 발라주고, 소피는 그런 아빠에게 의지하며 둘이 함께 만들 추억에 들뜬 상태다.
11살은 애매한 나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그 사이 어딘가. 소피는 아빠와 함께 노는 것도 좋지만 수영장에서 만난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며 그들처럼 놀고 싶기도 하다. ‘소피의 오빠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젊은 아빠인 패터슨 역시 그런 소피의 마음을 알고 보호자와 친구 역할을 오가며 소피를 배려한다.
어른이 되어가는 소피와 젊은 아빠라는 패터슨의 부녀 관계는 미묘하다. 소피가 절대적 보호가 필요한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젊은 청년인 패터슨 역시 소피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부녀 관계를 따뜻하게 담아내는 〈애프터썬〉이 흥미로워지는 건 이 지점이다. 성장 중인 딸과 여전히 방황하며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한 아빠가 만들어내는 관계에서는 기존의 부녀 관계와는 다른 역동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피 앞에서는 늘 밝고 당당하게 행동하지만, 패터슨은 고통의 시간을 겪는 중이다. 최근 사업에 실패한 패터슨은 미래가 두렵다. 딸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돈은 넉넉하지 않고, 당장 자신의 미래조차 확신할 수 없다. 딸은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소피도 아빠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빠의 간섭과 참견을 귀찮아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활용해 아빠에게 위로를 건넨다. 그녀가 더는 어린아이가 아님에도 말이다.
일상적 배려와 스치듯 지나가는 다정한 말 한마디로 서로를 응원하는 부녀. 그런 그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위기는 두 사람의 정체성이 엇갈릴 때마다 찾아온다. 어린이이자 청소년이고, 아빠이자 (위태로운) 청년인 부녀. ‘어린이’와 ‘아빠’, ‘청소년’과 ‘청년’이 만날 때는 좋은 시너지가 난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년’, ‘청소년’과 ‘아빠’가 만나면 불협화음이 난다. 지금 이 순간의 정체성이 무엇이냐에 따라 돌봄의 화살표가 바뀌기 때문이다. 두 정체성 사이를 오고 가는 둘은 매 순간 서로를 면밀히 탐색하며 미세하게 관계를 협상해야만 한다. 정체성을 오인하면 감정이 상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주고받는 상황이 생긴다. 함께 무대에 올라 춤추고 노래하자는 소피의 제안을 패터슨이 거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린이’ 소피는 어린 시절부터 해왔던 가족의 전통을 거부하는 아빠에게 서운하고, ‘청년’ 패터슨은 남들 앞에서 가무를 하는 게 부끄럽기 때문이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때로는 상처주는 말을 주고받는 장면이 이어지는 동안 부녀 관계의 깊이와 갈등 모두 고조된다. 더불어 패터슨의 아픔과 상처가 서서히 부각되며 소피와 패터슨의 부녀 관계는 점차 ‘청소년’과 ‘청년’의 관계, 즉 돌봄의 화살표가 딸에게서 아빠를 향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애프터썬〉의 성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빠에서 딸로 향하는 일방적‧일반적 부녀 관계를 거스르며 상호 돌봄의 부녀 관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아빠/아버지는 늘 강인한 존재일 것을 요구받는다. 이 요구가 내면화되어 남성이 스스로를 그렇게 재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부장적 젠더 이원론의 각본에서 태생적‧본질적으로 강한 존재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각본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별자들이 있을 뿐이다. 〈애프터썬〉은 방황하는 청년이라는 보편적 인간에게 ‘아빠’ 정체성을 더함으로써 ‘아빠/아버지’ 역시 취약한 존재임을, 즉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보인다.
영화에는 패터슨과의 상호 돌봄 관계가 소피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성인이 된 소피가 동성 애인과 함께 아이를 양육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가 패터슨과 서로 기대며 버티고 지나온 시간을 바탕으로 성숙한 돌봄의 관계를 꾸렸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돌봄이 필요하다.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친밀한 사람에게 기대는 사람만이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돌본다. 이것이 상호 돌봄의 부녀 관계를 감동적으로 영상화한 영화 〈애프터썬〉의 메시지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 가슴 울리는 사진 한 장, 그리고 하나
<하나 그리고 둘>A One and a Two, 2000
드라마 / 대만, 일본 / 173분
감독: 에드워드 양
가슴 울리는 사진 한 장, 그리고 하나
사람들은 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는다. 사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무한정 허비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뿐더러 대부분 어른에게 고민은, ‘결과적으론 다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어린 양양의 사진을 통해 세상을 한쪽 눈으로만 보는 이들의 두 눈을 뜨게 하고, 그동안 외면하기만 했던 진실을 깨닫게 한다.
주인공 양양은 하나의 진실을 알기 위해선 앞과 뒤를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보이는 것이 곧 전부인, 순수한 아이 덕에 가족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이면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린 아이에게서 삶의 철학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관객까지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영화다.
출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중
“아빠가 보면 내가 못 보고, 내가 보면 아빠가 못 봐요. 그럼 우린 반쪽짜리 진실만 보는 건가요?
양양의 삼촌은 길일에 결혼식을 올린 이유만으로 자신의 인생에 좋은 일만 가득할 거라 믿는다.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는 그의 노력엔 가장 중요한 점이 빠져있다. 그 점을 양양이 사진으로 찍어 그의 손에 쥐여준다. “삼촌은 뒤를 못 보니까 내가 찍었어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제때 쓰레기봉투를 버리지 않아 할머니가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양양의 누나, 팅팅에겐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팅팅에겐 참고 견디는 것이 그녀의 완전하고 진실한 삶의 자세다. 그러나 그녀 역시 고작 앞만 보고 있을 뿐이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자세를 강요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팅팅에게 자신의 뒤를 볼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녀가 하루아침에 당당하게 진실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본인이 아는 것도 직접 보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음에도 훈수를 두고, 핀잔을 주는 양양의 선생님 같은 어른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출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중
아빠(NJ)의 30년 전 실패한 첫사랑과 팅팅의 설레는 첫 연애가 교차편집되는 이유를 감독에게 묻지 않아도 관객은 알 수 있다. 옷깃만 스쳐 간 사랑도 사랑이라 했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나 후회는 찾아온다. 후회는 삶을 되돌리기 위한 발판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이자 기회다. 과거의 선택이 다시 주어진다 해도, 우린 꺾이지 않고 곧게 나아가야 한다. 유독 밝은 곳만 눈에 담으려는 몹쓸 고집들이 있기 때문이다.
깨어나지 않는 엄마를 앞에 두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양양의 엄마나, 가족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해 자꾸 거짓된 사랑만을 느끼는 옆집 소녀 리리의 뒷모습엔 어둠에 짙게 깔려있다. 우린 모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싶은 뒷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뒷면을 본인까지도 외면해 버린다면, 당신에게 완전한 ‘하나’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깨달은 건, 사는 게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거야. 왜 그걸 전엔 몰랐을까.”란 양양 엄마의 말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양양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각자가 가진 ‘모든 내면’이다. 반쪽짜리 진실만 갖고 타인을 비난하고,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고, 쉽게 절망하는, 즉 한 인간이 가진 ‘수많은 나(자아)’ 말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다양한 인생을 담고 있다. 특정 인물의 이야기에만 치우쳐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들의 삶의 굴곡을 하나의 큰 이야기로 엮어 천천히 풀어나간다. 감각적인 영상미부터 배우들의 명대사까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170분이 넘는 상영시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출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중
귀여운 나비넥타이를 하고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 서서 편지를 읽는 양양의 모습은 <하나 그리고 둘>의 명장면이다. 그의 모든 말이 기억에 남지만, 특히 이 말 한마디가 여전히 웃음을 나게 한다.
“… 아, 나도 이제 다 컸나 보다.”
많은 이가 꼭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다. 아직도 우린 양껏 크지 못했으므로…
-
- 작은 욕망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은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물건이나 지위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욕망’의 사전적 의미는 부족함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실현하고 싶어 하는 ‘꿈’과는 엄연히 다르다. 삶에서 부족한 무언가는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먹을 것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자라나면서 장난감을 비롯한 다양한 것을 욕망한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다. 대부분은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건 인간의 일생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며 때론 괴롭게 하고 또 황홀하게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 욕망을 채우는데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것을 탐하다가 그것이 채워진 순간, 그 황홀한 기분에 도취되기 쉽다. 그런 성취감은 점점 그 욕망에 집착하게 만들고 더욱 크고 완벽한 것을 취하게 만든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금기의 선을 쉽게 넘게 된다. 한 번 선을 넘으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그저 계속 앞으로만, 욕망에만 이끌려 가게 된다. 사실 주변에서도 그렇게 몰락하는 여러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욕망은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지만, 자칫 잘못하면 파멸로 이끄는 독약처럼 위험하기도 하다.
한 남자의 욕망의 변화를 따라가는 영화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는 주인공 스탠튼(브래들리 쿠퍼)이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는다. 스탠튼은 영화 초반 아버지로 보이는 시체를 집에 묻고 불을 낸다. 그만의 장례식처럼 보이는 그 장면에는 어떤 설명도 없다. 영화는 그저 그가 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그가 향하는 길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가 우연히 만나게 된 유랑극단을 만나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다양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나 그곳에서 만난 독심술사 지나(토니 콜렛)와 그의 남편 피트(데이비드 스트라탄)는 스탠튼에게 그들의 독심술을 조금씩 알려주게 된다.
독심술은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을 알아내는 것이다. 어쩌면 스탠튼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을 이미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나를 만나기 전까지 스탠튼의 모습은 큰 욕망 없는 떠돌이처럼 보였지만 그가 독심술을 접하고 나서 그는 자신만의 계획을 만들어간다. 그 이후부터 주도적으로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가려 애쓴다. 극단에서 만난 몰리(루니 마라)에게 대시를 하고, 그에게 도시로 가서 자신들만의 공연을 하자고 제안하는 등, 스탠튼은 조금씩 대담하게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간다.
영화에는 스탠튼의 과거에 대해서는 자세히 등장하지 않는다. 과거를 미스터리로 두면서 스탠튼이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 극단을 떠난 이후 몇 년이 지난 모습을 보여주는 후반부는 그의 욕망이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이 이어진다. 실제로 그는 독심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심령술까지 영역을 넓히게 된다. 아주 작은 심리 술로 시작한 그의 욕망은 독심술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그것을 발전시킨 심령술을 이용해 사회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뻗친다.
심리학자 릴리스를 만나면서 더욱 욕망에 집착하는 스탠튼
후반부에는 심리학자인 릴리스(케이트 블란쳇)를 등장시킨다. 스탠튼 역시 다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재능이 있지만 릴리스는 스탠튼의 심리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욕망까지 투영해보게 된다. 사실 이 두 사람이 만난 그 순간은 스탠튼이 가진 욕망의 선이었다. 스탠튼이 그 선을 넘는지 넘지 않는지는 그가 릴리스를 계속 만나는지 아닌지로 알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그것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스탠튼이 술을 거부하다 처음 마신 순간이다. 그 이후 스탠튼은 욕망의 선을 완전히 넘어버린다.
릴리스의 이미지는 무척 고급스럽고 화려하다. 스탠튼이 이전에 만난 어떤 인물보다 화려한 느낌을 가진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두 인물이 만날 때, 스탠튼의 욕망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스탠튼과 같이 살고 있는 몰리는 사실 그의 욕망을 어느 정도 조절하게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릴리스는 그가 가진 화려함 때문인지, 스탠튼의 욕망을 강하게 자극시켜 파국으로 이끈다.
영화 초반, 유랑극단에는 이상한 기인이 등장한다. 그 기인은 극단 주인(윌렘 데포)이 어디선가 데려온 술주정뱅이였다. 주인이 술과 마약을 미끼로 데려온 기인은 술을 얻기 위해 주인의 말에 따라 이상한 공연을 하게 된다. 기인은 공연에서 살아있는 닭을 물어뜯고 이상한 공연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기인이 갇혀있는 곳에서 그를 만난 스탠튼은 기인이 하는 혼잣말을 듣는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난 이렇지 않았어”. 스탠튼은 그 말을 그냥 듣고 흘리지만, 그 말은 결국 스탠튼에게 다시 돌아간다. 영화 속의 그 기인과 관련된 이야기는 수미쌍관처럼 영화의 앞과 뒤에 비슷한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영화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고 나면 그 처음과 끝의 장면들을 곰곰이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름답고 화려한 파멸의 이야기를 담은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영화에는 소소하고 직접적이지만 아기자기한 유랑극단의 모습이 아름답게 담겨있고, 후반부 스탠튼과 몰리가 고급스러운 무대에서 벌이는 공연도 화려하게 담겨있다. 마치 스탠튼의 욕망이 계속 크고 화려하게 변하는 것처럼 작은 불꽃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규모와 색감을 넓혀간다. 그러다 파멸의 순간 다시 회색빛이 영화의 중심이 된다. 이렇게 영화의 색감과 분위기, 음악은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윌리엄 린지 그레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1947년에 한 번 영화화된 적이 있지만 이번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연출한 2022년작은 영화판의 리메이크라기보단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다시 재구성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과거 영화들과 달리 괴물 같은 존재가 나오지 않지만 한 남자의 욕망이 괴물처럼 무섭게 변해가는 과정을 고급스러운 화면과 분위기로 담았다.
이 영화는 스탠튼 역을 맡은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저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가진 남자가 자신만의 욕망을 가지게 되고, 결국 파멸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브래들리 쿠퍼는 원초적인 욕망을 가진 인물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으면서까지 욕망으로 거칠게 달려가는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이나 루니 마라, 토니 콜렛 같은 좋은 배우들의 연기도 좋지만 이 영화는 브래들리 쿠퍼의 영화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나이트메어 앨리>
https://www.youtube.com/watch?v=KFUGkN-bfXc
-
- 주객이 전도된 마블의 쿠키 인질극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혼자서도 거뜬히 은하계를 수호하는 히어로 '캡틴 마블/캐럴 댄버스'(브리 라슨). 어느 날, 우주선에서 이상한 신호를 감지한 후 정찰을 떠난 그녀는 평소와 달리 계속해서 열려 있는 '점프 포인트'를 발견한다.
그런데 점프 포인트에 손을 댄 바로 그 순간부터 캐럴에게는 이상한 일이 생긴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캡틴 마블의 광팬이자 고등학생 히어로인 '미즈 마블/카말라 칸'(이만 벨라)과 빛의 파장을 조작하는 히어로 ‘모니카 램보’(티오나 패리스)와 위치가 바뀌기 시작한 것.
'닉 퓨리'(새뮤얼 L. 잭슨)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크리족 리더 '다르-베'(자웨 애쉬튼)의 음모로 인해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셋. 그렇게 팀 '마블스'는 캡틴 마블에게 복수하고 지구를 비롯한 여러 행성을 파괴하려는 다르-벤을 저지하기 위한 모험에 나선다.
똑 닮은 자매, <캡틴 마블>과 <더 마블스>
2019년에 개봉한 <캡틴 마블>은 큰 성공을 거뒀다. 국내 관객 500만 명을 돌파했고, 전 세계에서 11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다만 비평적으로 호평받지는 못했다. 히어로 영화 1편의 기본 소양이 부족했기 때문. 슈퍼히어로는 자기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뇌한다. 아이언맨도, 캡틴 아메리카도, 토르도 예외는 없었다. 반면에 <캡틴 마블>은 캐럴 댄버스의 책임감을 어필하지 못했다.
주인공의 서사가 빈약하니 보조 플롯도 조명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캡틴 마블>에서는 여성 서사 못지않게 의외로 강조된 이야기가 있었다. 난민이다.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우주 난민 스크럴 종족의 이야기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를 통해 <캡틴 마블>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지중해 난민 이슈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드라마 <시크릿 인베이젼>의 틀을 깔 수 있었다.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캡틴 마블>의 속편이자 캡틴 마블, 미즈 마블, 모니카 램보의 팀업 무비인 <더 마블스>는 1편의 행보를 따라간다. 의외의 선택은 있다. 굵직하고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건드린다. 세 히어로의 능력도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하지만 캡틴 마블을 비롯한 주요 인물의 서사와 캐릭터성은 여전히 완성도가 높지 않다. 결국 차기작을 예고하는 쿠키 영상만 뇌리에 남는다. 이조차도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기대감만 키운 전편 행보를 따른다.
캡틴 마블의 성장기
물론 1편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곳곳에 있다. 특히 캡틴 마블의 내적인 성장을 보여주고,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인상적이다. <캡틴 마블>과 <엔드게임>에 이어 이번 영화 초반부까지 캐럴 댄버스는 독선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누구보다도 강력하기에 그녀는 옳다고 믿는 일을 저지르는 데 망설임이 없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크리의 모성인 '할라'를 급습해 행성을 관리하는 A.I. '슈프림 인텔리전스'를 파괴했다. 관리 체계가 없어진 할라는 내전에 휩싸이고, 대기, 물, 태양광 같은 자원이 없어졌다. 이로 인해 캐럴에게는 '말살자'라는 이명이 붙었다. 또 이 오명을 혼자 힘으로 씻어내기로 결심하고 지구로의 귀환도 차일피일 미룬다. 그 때문에 어릴 때 캐럴을 가족처럼 따르던 모니카와의 관계도 엉망이 된다.
<더 마블스>는 캐럴 댄버스가 자기 독선과 오만으로 인한 과오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다. 빌런 ‘다르-벤’과의 대결을 통해서는 본인이 초래한 참극을 직시하고 자기 힘으로 할라의 문제를 해결한다. 특히 자기 광팬인 고등학생 히어로 미즈 마블, 절친의 딸 모니카와 팀으로 활동한 대목이 주효했다. 부끄러운 과거와 고민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워졌고, 독선적인 면모도 내려놓을 수 있었으므로.
우주 경찰 캡틴 마블, 지구 경찰 미국
MCU 속 캡틴 마블의 독특한 위상을 고려하면 그녀의 변화는 꽤 흥미로운 은유이기도 하다. 캡틴 마블은 압도적인 히어로다. 광속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고, 크리 족이나 타노스의 함선을 단신으로 파괴하는 힘을 지녔다. 타노스와 일신으로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이를 현실의 지구에 대입하면 꽤 의미심장한 비유가 된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보여주기 때문. 캡틴 마블이 우주를 마음껏 넘나들듯이 미국은 지구의 바다와 공중을 넘나드는 유일한 국가다. 마음만 먹으면 나라 하나를 풍비백산할 수 있는 군사력을 투영할 수 있는 국제적 위상도 캡틴 마블의 존재감과 유사하다.
그런데 <더 마블스>는 캡틴 마블의 힘을 부정한다. 간신히 보금자리를 만든 후 크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스크럴. 그러나 그들은 협정 체결 직전에 캡틴 마블 때문에 다시금 행성을 잃는다. 그들은 캡틴 마블을 비난한다. 힘이 얼마나 강한 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설사 크리가 진심으로 평화를 원한 게 아니라 해도, 그녀 때문에 다시 한번 피해를 입었다면서.
이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를 비롯해 미국이 개입한 수많은 국제분쟁을 연상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또 그간 MCU 속 영웅들의 서사와도 일맥상통한다. 미국 군수산업의 모순을 지적한 아이언맨,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한 캡틴 아메리카와 유사한 국제관계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사건만 남고 주인공은 사라지는 마법
문제는 1편처럼 엉성한 플롯이다. 부실한 완성도 때문에 영웅의 성장담도, 비유도 부분적으로만 드러난다. 배경을 쌓아 올릴 충분한 분량이 쌓이기도 전에 일단 사건 속으로 주인공을 던져 놓는다. 실제로 <더 마블스>는 시작과 동시에 점프 포인트 때문에 파괴된 행성과 세 주인공의 위치가 뒤바뀌는 문제를 보여준다. 이후 해결법을 찾고, 한 팀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좋게 보면 짧은 러닝타임에 걸맞은 시원한 전개다. 하지만 <더 마블스>의 핵심이 캡틴 마블의 성장과 팀업이라는 걸 고려하면 적절한 스토리텔링이라 할 수 없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여유를 충분히 주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관객은 쏟아지는 정보를 받아들이기에 바쁘다. 그 과정에서 주인들의 갈등도 날림으로 해결되기 때문에 그들이 한 팀을 만드는 과정에 몰입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캐럴과 모니카의 갈등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캐럴의 절친이자 모니카의 어머니인 '마리아'(러샤나 린치)의 부고를 지키지 못한 일을 포함해 수십 년의 앙금이 쌓인 문제니까. 그런데 영화는 둘 사이에 활달한 제삼자 카말라를 완충지대로 투입해 10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모든 감정의 골을 메워 버린다. 캐럴이 자기 독선과 과오를 깨닫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 변화를 체감할 수가 없다.
즉, 영웅이 성장할 방향은 알려주지만, 사건에 캐릭터가 묻혀 버린 형국이다. 현란한 CG, 더 귀여워진 구스와 다른 아기 플러큰의 활약이 지나가고 나면 정작 주인공이 뭘 했고, 어떻게 변했고, 어떻게 성장했고,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파악할 수가 없다. 이는 <토르: 러브 앤 썬더>, <앤트맨 앤 와스프: 퀀텀매니아>에서 목도한 문제와 똑같다.
조연도, 빌런도 함께 실종된다
다른 캐릭터도 존재감을 보여줄 수가 없다. 주인공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바쁜데 다른 조연들의 서사에 투자할 시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자연히 <더 마블스>는 불친절해진다. 일단 모니카와 미스 마블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이 없다. 디즈니+에서 <완다비전>과 <미스 마블>을 보지 않으면 두 히어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스쳐 지나가는 플래시백 외에 전무하다.
그러니 '마블스'라는 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세 여성 히어로의 연대를 그려낸 여성 영화라지만, 정작 셋의 연대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여성 서사 관련 논쟁도 무의미하다. 그나마 능력을 쓸 때마다 서로 위치가 바뀐다는 점을 살려낸 초반부 액션씬이 눈을 사로잡지만, 그조차 점점 매력을 잃는다. 액션의 절대적인 양도, 스턴트 액션의 박력도 부족하기 때문. 관객이 MCU에 기대하는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다.
빌런도 마찬가지다. 사실 다르-벤은 꽤 입체적인 인물이다. 캡틴 마블이 미국에 대한 은유라면, 그녀는 개발도상국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르-벤은 캡틴 마블 때문에 파괴된 할라를 복구하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 즉, 그녀의 행적은 환경이라는 더 큰 선을 위해 개발도상국도 희생을 감내하라는 선진국 논리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크리 제국이 빌런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맥락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하지만 <더 마블스>는 다르-벤에게 뱅글과 코스미 로드(망치)로 점프 포인트를 열어 위기를 조성하는 역할 그 이상을 맡기지 않는다. 그녀가 캡틴 마블과 적대하게 되는 계기에 대한 설명도 딱 한 장면뿐이다. 그녀의 최후 역시 히어로와 대립한 결과보다는 자멸에 가깝기 때문에 임팩트가 크지 않다. 타노스, 로키, 제모 남작, 웬우 등 과거 MCU의 빌런을 돌이켜보면 MCU가 빌런 레시피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쿠키 영상을 보기 위한 100분
결국 남는 것은 쿠키 영상뿐이다. 본편 끝에는 카말라가 드라마 <호크아이>의 주인공 케이트 비숍을 만나며
'영 어벤저스(Young Avengers)'의 등장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엔딩 크레디트 후에는 멀티버스를 매개로 MCU와 기존 20세기 폭의 엑스맨 시리즈의 만남을 예고하는 쿠키 영상이 있다.
두 장면 모두 마블 팬의 심장을 뛰게 하기는 충분하다. 특히 엑스맨과 MCU의 만남은 디즈니가 20세기 폭스 스튜디오를 인수한 이후로 팬들이 오매불망 기다린 이벤트다. MCU의 다음 작품이 <데드풀 3>인 점도 팬들의 기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기대감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상업적으로는 훌륭한 전략일지 몰라도, 본편 완성도를 고려하면 MCU 영화가 일종의 '쿠키 영상 인질극'으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더 커진다. 특히 한국 관객은 기대보다 실망이 커도 놀랍지 않다. 마블 코리아가 적극적으로 홍보한 '얀 왕자', 박서준의 출연 분량이 카말라의 가족이나 구스보다도 적기 때문.
Dreadful 끔찍한
멀티버스와 팀업이라는 강박. MCU의 엑스맨마저 걱정스럽다.
-
- 4등 (2015)
영화 <4등>의 중심 인물은 모두가 피해자다. 이미 첫 아시안 게임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다가오는 아시안 게임의 유망주로 떠오르는 젊은 수영 천재 ‘광수’,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으나 매번 4등만 하는 ‘준호’, 기자이자 준호의 아버지인 ‘영훈’, 악착같은 준호의 어머니인 ‘정애’. 간략한 소개로만 보아선 이들이 무슨 피해자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영화속 이들을 지긋이 바라보면 그들이 어딘지 말도 안되는 선택을 하며, 그 선택의 원인을 좀처럼 찾을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속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중력을 행세하는 힘의 주체는 대체 무엇인가? 쉽게 보이지 않는 이 희미한 중력장의 실체는 영화속 인물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
1-1. 광수
가장 먼저, 광수의 경우는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태릉으로 출발하는 날 그의 오래된 고향의 폐건물에 들러서 광수는 불법 도박을 하고 있는 고향 선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폐건물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광수의 뒤에 떨어진 말. “내일 가도 되잖아, 너 천재잖아”라는 그 말이 광수를 다시 도박판으로 불러들인다. 서울로 떠나려던 광수는 뒤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시고 뒤돌아서더니, 다음 컷에는 어느덧 광수가 도박판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컷으로 이어진다. 광수는 이 지점에서 어촌 마을의 도박에 빠진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진 셈이다.
광수는 몇날며칠을 도박에 빠져 태릉선수촌에 늦게 들어가게 되고, 뒤늦게 들어간 광수를 본 선수촌 코치는 대걸레 자루로 광수에게 체벌을 가한다. 대걸레 자루로 백 대. 그 체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광수의 몸은 분명 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광수는 저항하고, 저항은 코치의 심기를 건드린다. 곧 체벌은 감정적인 폭력으로 변질되고, 광수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선수촌을 떠난다.
1-2. 어머니 정애
정애는 아들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아들 준호는 매번 4등만 하고, 정애는 준호의 성적이 아쉽기만 하다. 정애는 준호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기꺼이 악역이 되고자 한다. 준호에게 일부러 밉살스럽게 ‘4등’이라고 부르는 모습, 준호에게 대놓고 “엄마가 싫지? 그러면 수영할 때 엄마가 뒤에서 쫓아온다고 생각하고 해 봐”라는 식의 말들을 하며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다. 정애가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첫째로 아들이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애가 열정을 부을만한 것이란 이제 아들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심한 교육열로 유명한 한국사회 수많은 어머니의 초상을 담은 것이 영화 <4등> 속에서 그려진 정애의 모습이다. 특히나, 그 자식에게 거는 간절함의 깊이는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가 낮을수록 짙어진다. 출산과 육아후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의 삶만을 좇는 정애에게는 사회적 지위가 없다. 그녀가 사회속에서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아이들의 교육밖에 없다. 이는 한국사회의 구조, ‘여성’에게 부과되는 독박육아와 강력한 사회적 단절의 탓이다. 이런 구조 탓에 어머니 정애는 자기 자신에게서 더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두 아들을 다그친다. (자신처럼)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으면,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1-3. 아버지 영훈
아버지는 수영 천재이자 유망주인 광수를 만나고 이 유망주를 일찍이 알아보고 친해진다. 영훈은 광수의 성적을 묻고 광수가 높은 기록을 세웠다는 대답을 듣고는 광수에게 기대를 걸며 명함을 건네준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광수에게 호의적이다. 기자인 그가 수영 유망주와 친해지고자하는 목적은 어느정도 알 법하다. 그리고 이런 가벼운 인간관계는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져내린다는 사실 또한 충분히 알 법하다.
광수가 태릉을 박차고 전화를 건 것은 ‘영훈’의 번호였다. 광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대걸레 자루로 100대를 맞으라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신이 있어서 늦게 간 겁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1 주일 늦었습니다. 그리고 광수의 절박한 전화를 받은 영훈의 대답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였다. 그리고 이런 영훈은 후에 자신의 아들 준호가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에게 체벌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광수를 찾아가 그에게 아이에게 체벌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를 통해서 영훈은 분명하게 체벌에는 반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체벌에 반감을 갖고 있는 영훈은 광수의 전화를 외면하는데, 이 행동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란 영화를 통해서 다 알 수 없기에 추론만 가능할 뿐이지만, 가장 높은 가능성을 가진 이유를 제시해보자면, 영훈이 광수를 두둔한다고 하여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자신의 업으로 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영훈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비주류의 물결에 몸을 떠맡기라는 선택은 어렵다. 영훈에게는 일단 제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의무는 전적으로 영훈에게만 짊어져 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영훈은 다소간에 뻔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역시 그 기형적인 한국 사회의 구조탓이라고 하겠다. 여성에게는 독박육아가, 남성에게는 생계유지의 의무가. 한쪽 성별에게 주어지는 전적인 의무들이 그 의무를 짊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고, 망쳐놓는다.
1-4. 준호
“형. 1 등하면 무슨 기분이에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4등 준호는 1등을 해낸 초등 수영부 선수에게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묻는다. 이런 준호는 광수의 과거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준호는 그저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고, 엄마는 성적이 나오지 않는 준호탓에 애가 타서 새로운 코치 광수에게 준호의 지도를 맡긴다. 그리고 광수는 준호에게서 재능을 발견한다. 광수는 재능있는 준호를 키우고자 체벌로 엄하게 가르치며, 어린 준호는 당연히 맞는 게 싫다. 하지만, 준호는 가정으로 돌아와 어느순간 자신의 동생에게 자신이 받은 체벌을 그대로 재현하며 동생의 울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광수처럼.
역설적으로도 준호는 새로운 코치인 광수에게 ‘엄하게’ 교육을 받으면서, 성적은 점차 좋아진다. 하지만 성적과는 반대로 준호는 점차 코치의 체벌이 두려워 수영에서 느꼈던 순수한 흥미와 즐거움을 점차 잃게되고, 급기야 광수의 체벌 탓에 더 이상 수영을 하지 못하겠다며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수영장을 떠난다.
2. 기성 사회의 구조와 구조속의 피해자들.
이 네 명의 중심인물을 정리하다보면, 영화가 그려낸 그들의 삶은 도덕적 딜레마에 의한 긴장의 장력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광수는 태릉으로 떠아냐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장에 남고, 모욕적이고 감정적인 체벌이 싫어 태릉을 떠났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며, 정애는 자신이 악역을 맡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악행을 중단하지 않고, 영훈은 타인의 고통은 외면하더라도 자기 자식의 고통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준호는 마찬가지로 체벌이 싫었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고 권위적으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이 도덕적 딜레마들은 모두 어떤 원인에서 부터 발생하고 있는데, 이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귀납적으로 접근하면 그 원인을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영화속의 모든 문제는 불합리한 기성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어촌마을의 기성세대인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도박판에 어쩔수 없이 빠져드는 광수, 그리고 잘못은 체벌을 통해 몸속에 교훈을 새겨야 한다는 기성의 교육 방식, 양심적인 비주류에 휘말리면 생계를 보장할 수 없는 사회속에서 생계를 위해 뻔뻔해져야 했던 영훈, 이 사회속에서 이젠 자신이 무엇도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자식들은 무엇이라도 근사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애.
영화 <4 등>속 인물들을 통해서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구조주의 이론에 따라 잘못된 기성의 구조속에서 상처받는 이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쩔수 없이 잘못된 구조를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개별적인 의미와 신념을 잃고, 사회 주류의 신념과 구조를 따르는 이들의 삶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사회적 지위와 계급이 낮을 수록 구조의 요구와 강요에 더욱 순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이 기성 사회를 만든 기성 세대들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아픔은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대적 상처이며, 일반적인 역사적 기류에 의한 것이지 특정한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기성의 세대를 비판하는 것이아닌 기성의 사회 구조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되돌아보며 무엇을 고쳐나가야 할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3.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들
영화 <4 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현재까지 앓고 있는 상처를 재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몇몇 사람들에게는 지난한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처지와 영화속 불합리한 상황들을 동일시 여겨볼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 <4 등>속 인물들은 구조에 의해서 요구된 악역을 어느정도 떠맡는다. 이를 통해 관객은 상처를 지닌 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역설적인 비인간성을 영화속에서 목격하며, 이 영화가 마냥 통렬한 사회비판의 영화로만 다가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아마도 비판만을 담은 영화였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테지만, 영화 <4등은> 사회구조의 문제성에 대한 비판만을 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한 줄기의 희망을 예술적으로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4 등>은 조금 높게 평가하고 싶은 영화다.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은 개별체의 순수한 특성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의 지문과 홍채가 다르듯이 인간이 가진 개별성은 인간 종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이 모인 사회의 다양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때때로 ‘구조’는 구성원들에게 특별한 지위와 책무를 떠맡기거나 강요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순수한 특성, 개별성과 주체성을 잃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강요와 구조가 정의한 개체성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순수한 개체성을 추구할 때 아름답게 빛난다. 영화 <4등>에선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사회적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는 체벌이 두려워 수영장을 떠난 준호가 다시금 수영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늦은 새벽에 수영장을 찾아와 홀로 어둡과 차가운 물속에서 빛을 따라 헤엄치는 장면에서 그렇다.
이 씬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어둑한 새벽, 어둑한 물속에서 감감히 출렁이는 빛의 주변을 헤엄치는, 절대적인 어둠속 희미한 빛의 주위로 떠도는 여리고 어린 피사체의 모습이 씬에 아름답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본래 밝기만 해서는 그 밝음의 정도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인지라, 어둠속에서의 그 희미한 빛을 향해 헤엄치는 준호의 모습은 그 어떤 희망적인 언어보다도 강렬한 희망의 언어로 읽힌다. 비록 그 빛이 준호를 수영장에서 꺼내올리는 빛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그 결과로만 축약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4 등>은 이렇게 구조속에서 피해받는 이들의 고통과 초상들을 보여주는 한편으로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사회구조 내의 개별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에서 탈피하여 개별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과정이 지닌 순수함의 미학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희미하지만, 희미하기 때문에 강렬한 희망의 메세지를 유려하게 그려내어, 작금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판의 메세지와 함께 영화의 미학적인 추구 또한 충실히 따르고 있는 꽤나 괜찮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
-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없을지도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제프 맥페트리지는 그래픽 디자인 계에서 아주 유명한 작가이지만
일반인들은 그의 이름은 모를 수도 있다.
배우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 배우의 이름 석 자보다 작품 속 역할로 대표되는 사람.
그가 그런 사람이다. 그의 이름 석 자보다 그의 작품으로 더 유명한 사람.
솔직히 나도 그의 작품들은 살면서 여러번 마주친 적이 있었으나 그가 어떤 작가인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시사회에 초대되어 정말 유익했다.
뭐랄까 예술가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가장 정석적인 모습을 훔쳐본 것 같았다.
예술의 영감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꽤나 일상적이고 그의 작품은 그의 일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형태는 단순하지만 색감은 다양하다.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형태로, 전달하고 싶은 감정은 색깔로 표현하는 것 같다.
그의 지인들의 말처럼, 그는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인 듯 하다.
예술을 정의하는 수많은 미사여구들 중에서 모호함으로 승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는 명확한 의도가 보이는 그림을 선보인다. 그래서 대중은 그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이란 없어선 안 될 것이지만 언제나 찾아와 주지도 않는 것이라
예술가들에게 다작이란 맘처럼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프 맥페트리지는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그의 다작 비결을 이야기할 때 정말 깊은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상을 잘 유지하라는 것, 루틴을 만들라는 것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 나에게도 이 지점은 아주 큰 관심사이기도 하다.
자신을 잘 지켜낼 것, 그래야 영감이든 이벤트든 뭐든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같다.
기회가 왔는데 내가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 그건 소멸되는 기회이기에
언제나 나만의 취향, 나만의 루틴, 나만의 생각을 매일매일 잘 가꾸어야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찾아왔을 때
그것이 기회이든 불운이든 잘 대응할 수 있는 것 같다.
뭐든 움직이면서, 무계획 속에서도 끊임없이 고민할 것
그의 삶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는데 그는 그 과정을 방황이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그는 굉장히 상황 변화에 유연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들어온 기회를 해보고 안되면 다른 길로 가 보는 그 모습이 굉장히 유연해보였다.
해볼까 말까 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닐까 항상 고민하는 나에게
그냥 해보고 안되면 관두고 이런 모습이 상황변화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사실 포기가 빠르다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나는 하나의 것에 미련하리만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순간들도 있어서
오히려 저렇게 빠르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 능력이 나에게는 필요하다고 느끼는 지금 이런 다큐를 보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우선 미술 작가인만큼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마침 미술전시를 보러 가고 싶었던 나에게 1차적 만족을 주었고
그의 삶을 훔쳐보며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조금 더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졌다. 그것이 일이든 취미이든 나의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면 그 어떤 형태든 상관없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취향을 조금 더 섬세하게 가꾸어나가고, 하루 루틴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꼭 하는 루틴, 점심에 꼭 하는 루틴, 저녁에 꼭 하는 루틴 이런식으로라도 말이다.
지금처럼 흐르면 흐르는대로, 멈추면 멈춰서 고통스러워하는 대로 끌려다니는 듯한 이대로의 삶보다는 한 템포 더 멀리 갈 수는 있겠지.
사회적 성공이 되어주면 더 땡큐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고민할 단계가 아니기에 우선 나의 하루부터 organize 해보겠다.
저 멀리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 컨텐츠는 여러모로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생각을 확장시켜 준다는 점에서
영원히 사랑하게 될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일상에 많이 숨어있으니 많이들 찾아보시길 바란다. 제프 맥페트리지, 생각보다 멋있는 사람이더라. 전시를 가고 싶었던 욕구는 일부 충족할 수 있어 좋았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되어 작성되었습니다.
-
- 영화라는 매게체가 주는 시각적 청각적 황홀경의 최대치
*해당 영상은 씨네 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10월 27일 개봉하는 작품 ‘아네트’의 돌비시네마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한 영상입니다. 예술가들의 도시 LA,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다. 함께 인생을 노래하는 두 사람에게 무대는 계속되지만, 그곳엔 빛과 어둠이 함께한다.
-
- 중앙대학교X환몽씨네, 채널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 (feat. 최민식, 김윤석, 이병헌 외)
중앙사랑과 함께한 예능형 콜라보 콘텐츠입니다!
졸업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학교를 떠나기 전,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재밌게 즐겨 주신 중앙사랑 27기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본 영상은 지난 2월에 촬영한 콘텐츠입니다.)
#중앙대학교 #중앙대 #중앙사랑
-
- 영화 <UFO는 살아있다: 아폴로 11호의 비밀> 메인 예고편
21세기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 'UFO'
전 세계를 속인 NASA의 진실을 파헤친다!달 탐사, UFO, 외계인의 존재 등
몇 년 간 NASA를 향해 제기되는 음모론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기밀 정보를 공개용 문건에 포함시킨
NASA의 작은 실수로 인해
그들의 문서 조작 사실이 확인 되는데...
미 공군 소령의 증언부터 우주비행사들의 녹취록까지,
모든 증거가 이 안에 있다!
-
- 넷플릭스 <더 플랫폼 2> 공식 예고편
수직 구조로 된 감방. 새로운 거주자는 각각 음식 한 접시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정말 공정한 걸까? 이에 정체 모를 리더가 잔혹한 시스템에 자체적인 규범을 도입시키고, 이후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수상한 배급 방식에 대해 반기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