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블러2025-05-04 17:31:34
[JEONJU IFF 데일리] 부유하는 도시인과 일상의 접촉
영화 <푸르스름한> 리뷰
시놉시스
<푸르스름한>은 모호한 분위기, 느낌, 존재의 연약한 상태를 묘사한다.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Cast
감독: 릴리트 크락스너 Lilith KRAXNER, 밀레나 체르노프스키 Milena CZERNOVSKY
출연: Leonie BARMBERGER, Natasha GONCHAROVA
리뷰
<푸르스름한>은 명확한 줄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 영화가 아니다. 사이에 끼인(in between) 일상 속 순간의 분위기와 느낌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포착하는 일종의 아방가르드 영화다. 코로나 시기 구상된 <푸르스름한>은 판데믹 동안 사회와 일상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느낀 설렘과 두려움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푸르스름한>의 줄거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너무나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던 탓에 소통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세상과 연결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원제 <Bluish>는 본래 파란색의 색채와 우울한 기분을 모두 뜻하는 단어다. 제목의 중의적 의미는 파란색의 이미지를 통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물의 이미지다. 물에 둥둥 떠 있거나 샤워를 하고, 수영을 하는 장면들은 단단하게 뿌리내린 고체 상태로서 인간이 아닌 액체 상태의 인물을 형상화한다. 일종의 정화 행위로서 샤워는 신체와 접촉하는 물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의 실제 시간에 맞먹을 정도로 롱테이크로 촬영된 샤워 장면은 가시적이지 않지만 우리의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순간들을 재탐색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행위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현대인의 하루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단연코 스크린 타임일 것이다. 깜깜한 밤에도 놓지 못하고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의 색채 또한 파란색이다. 스마트폰의 블루 스크린은 세상과 소통되길 원하면서도 단절된 현대인의 불안을 형상화한다. 이를 잠재우려는 듯 주인공은 명상 영상을 틀어놓고 잠에 든다. 수동적인 관람이 아니라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시각적 이미지를 모두 암전시키고 마치 실제로 주인공과 함께 자리에 누운 듯 고요한 명상 영상에 집중한다. 음향이야말로 관객의 신체에 가장 가깝게 접촉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여전히 평면의 한계로 인해 카메라가 두 여성의 일상에 밀착하면 할 수록 관객의 시선은 관음이 된다. 그래서 <푸르스름한>은 관객으로 하여금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에는 세 번의 눈맞춤이 등장한다. 첫 번째 눈맞춤은 병원 대기실에서 만난 아이와 함께 눈을 깜빡이는 장면, 두 번째는 데이팅 어플에서 만난 사람과의 눈맞춤, 그리고 마지막은 완전히 낯선 사람과의 눈맞춤이다. 영화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객 또한 얼굴 클로즈업 정면샷을 통해 배우와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얼굴의 현현으로 설명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상대방의 얼굴, 그것은 참된 인간성의 시작일뿐만 아니라 일종의 윤리적 호소로서, 또는 저항할 수 없는 명령으로서 나에게 다가온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타자를 환대할 수 있다. <푸르스름한>은 혐오가 재미가 된 시대에 파편화된 타자의 얼굴을 다소 투박하지만 온전한 형태로 기워 넣음으로써 일상 속 blue의 순간들을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상영스케줄
2025.05.02(금)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21:00 (상영코드:259)
2025.05.03(토)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20:30 (상영코드:375)
2025.05.04(일) 메가박스 전주객사 4 17:30 (상영코드:449)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2025.04.30~2025.05.09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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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살 생일에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은 오늘부로 75세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생겼습니다. 당신은 과연 죽음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물론, 반드시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권리란 어떤 일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자격이니까요. 다만, 여러분은 앞으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고, 그러므로 돈을 벌 수도 없고, 그래서 집도 구하지 못합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저였다면 궁지에 몰린 기분으로 죽음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을 과연 권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일본의 근미래를 그린 영화 <플랜 75>의 세상으로 떠나보겠습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플랜 75>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플랜 75>는 2024년 2월 7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플랜 75
Plan 75
Summary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하야카와 치에
출연: 바이쇼 치에코, 이소무라 하야토, 카와이 유미 외
노인을 위한 정책, 노인 혐오를 위한 정책
피가 낭자한 바닥에 널브러진 휠체어와 지팡이들, 그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한 청년. 그의 손에는 산탄총이 쥐여 있습니다. <플랜 75>는 노인 혐오 범죄가 일어난 사건 현장을 묘사하는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로 영화의 막을 엽니다.
가까운 미래의 일본에서는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죽음의 권리를 제공합니다.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인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입니다. '플랜 75'를 신청한 노인에게 정부는 10만 엔의 준비금을 지급합니다. 제휴 화장터를 이용한 합동 장례 서비스도 무료로 지원합니다. '플랜 75' 홍보영상에 등장하는 한 할머니는 "이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죽음을 선택할 것을 권합니다.
노인의 존엄한 죽음을 지원하는 서비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정책 안에 노인의 존엄을 위한 혜택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죽기로 결정하면 지급되는 준비금 10만 엔부터 그렇습니다. 자유롭게 쓰라고는 하나, 곧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게는 큰돈을 쓸 만한 곳이 없습니다. 평소 먹어보지 못한 특대 초밥을 시키는 것이 고작이죠. 합동 장례 서비스도 그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효율적으로 처리하겠다는 말을 무료 서비스인 양 홍보할 뿐입니다.
극 중 '미치'는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을 찾습니다. 부동산에서는 집을 구하려면 2년 치 월세를 미리 내거나 일자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미치'는 노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죠. 백방으로 일자리를 수소문해 보지만, 결국 일도 집도 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랜 75'를 신청합니다. 만약 정부가 10만 엔을 죽음의 준비금이 아닌 삶의 준비금으로 지급했다면, '미치'는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미치'를 일자리에서 내쫓지 않았더라면, 그는 집을 구해 계속해서 살아갔을 겁니다.
우리는 여럿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는 것을 선택이라 부릅니다. '플랜 75'는 언뜻 삶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노인들 앞에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후보가 하나뿐인 선택은 더는 선택이라고 할 수 없죠. 그저 강요와 압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순간 관객은 '플랜 75'가 오프닝 시퀀스에 담긴 노인 혐오 범죄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총으로 노인들을 잔혹하게 쏴 죽이진 않았지만, 그보다 더 잔인하게 노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깨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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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곧 개봉을 앞둔 영화 <소풍>의 언론배급시사회에서 나문희 배우가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영화에 노인네들만 나온다고 하니까 투자자가 없었어요." 언론배급시사회 영상이 게시된 유튜브 채널 아래엔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안 본다, 다 늙어서 웃겨."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노인 경시 문화가 만연해졌습니다. 마치 노인은 젊음과 함께 인간의 존엄과 가치까지 잃은 것처럼 대하죠. 하지만 극 중 노인들의 모습은 꼭 청년들과 같습니다. 간소하게 밥을 차려 먹고, 친구들과 맛집을 가고, 수다를 떨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일하고, 촌스러운 건 싫고,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자고 갔으면 좋겠고, 누군가와 함께 자는 밤은 덜 무섭죠. 영화 초반부에 한 할머니는 동료들과 모양이 조금 망가진 간식을 나눠 먹으면서 이런 대사를 뱉기도 합니다. "모양은 달라도 맛은 다 똑같아."
영화 <소풍>이 위대한 배우들의 출연에도 투자에 난항을 겪었듯이, 자본은 슬프게도 사회적 권력을 따라 흐릅니다. 그 때문에 지배 권력과 떨어져 있는 소수자들은 <플랜 75>의 타이틀 디자인처럼 그 존재가 흐려지기 쉽죠. 존재가 명확하지 않은 만큼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쉽습니다.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자신은 평생 장애인, 성소수자, 난민, 비정규직 등의 사회적 약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지요. 최근에는 이러한 태도가 표현의 자유와 이기심을 만나 극도의 혐오로 표출되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노인 혐오 역시 그중 하나이고요.
그런데 여러 소수자 차별 문제 중에서도 노인 혐오는 어쩐지 조금 더 무섭습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늙어가는 운명을 타고났으니 말입니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두면 "나와 너는 다르다"에서의 '나'는 금세 '너'가 됩니다. 자신이 흔적을 지우는 미래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셈이죠.
영화는 '플랜 75'라는 가상의 정책을 통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는 미래를 경고합니다. 이미 망가져버린 세상이 더는 무너지지 않길 바라며, <플랜 75>의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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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황혼을 비추며 끝맺습니다. 단 한 번도 황혼 이후의 시간이 없는 하루를 상상해 본 적 없습니다. 오로지 새벽, 아침, 오후뿐인 나날을 살아야 한다면 아마도 삶은 불행으로 가득하겠지요.
One-Liner
선택지가 하나뿐인 질문 앞에서 선택의 '권리'를 주겠다는 어폐. 혐오는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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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그보다 늦게 태어난 것은 행운이었다
7★/10★
영화만큼이나, 때로는 영화보다 더 유명한 영화 음악(혹은 음악 감독)이 있다. 영화를 본 후 누가 연출했는지보다 음악 감독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그리고 엔리오 마리꼬네야 말로, 이 두 사례의 가장 적합한 예다.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는 2020년 타계한 전 세계적인 영화 음악가 엔리오 마리꼬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고백하자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해 2017년까지 엔리오가 음악 작업을 한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시네마 천국〉, 〈헤이트풀 8〉 두어 편에 불과하다. 내겐 곱씹다 보면 여운을 자아내는 그와의 추억이 없다. 그러나 156분의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현대 영화 음악이 그에게 빚진 것이 너무나도 많고,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온 음악이 그의 성과라는 점을 새로이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엔리오는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음악을 시작했다. 이후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고프레도 페트라시에게 작곡을 배웠다. 엔리오가 ‘순수 음악’의 테두리 아에서 음악을 배웠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장점은 탄탄하고 체계적인 기본기를 바탕으로 영화 음악을 작업해 다채로운 작업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단점은 동료들이 엔리오의 영화 음악 작곡을 하찮게 대했다는 것이다. 영화 음악은 순수 음악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장르로 여겨졌다. 엔리오가 동료들에게서 고립된 이유다. 더불어 그는 늘 예술적 정체성과 ‘순수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배신자’, ‘매춘’, ‘천박하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순수 음악계 출신으로 이와 같은 시선을 어느 정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던 엔리오는 오랜 세월 이 문제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 음악 쪽에서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영화 음악은 천편일률적인 배경 연주곡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엔리오는 전통적인 사운드에 실험적인 요소를 결합해 영화 음악을 별 의미 없는 부가 요소로 취급하는 현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캔 소리, 첨벙거리는 소리, 휘파람 등을 음악에 더해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사운드를 만들었고, 영화는 그 덕에 더 큰 몰입감을 가질 수 있었다.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에는 그가 작업한 영화 음악과 해당 음악이 사용된 장면이 여럿 소개된다. 본 적도 없는 영화의 짧은 장면이, 마찬가지로 짧은 음악과 함께 소개될 뿐인데도 배우의 감정과 영화의 분위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엔리오의 음악이 화면 속 여러 요소와 만나 극적인 시너지를 내기 때문이다. 미처 영화 음악인지 몰랐던, 귀에 익숙한 곡도 꽤 많다. 엔리오의 작업이 얼마나 큰 문화적 파급력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그의 음반은 전 세계에서 7,000만장, 한국에서는 200만 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작업한 영화마다 자신의 인장을 새긴 엔리오. 엔리오는 이내 영화 음악계의 스타가 되었다. 보통 음악 감독이 영화를 먼저 보고 그에 맞는 음악을 작업하는 데 반해, 엔리오의 음악을 먼저 들은 몇몇 감독은 자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요소를 그로부터 찾아내 이를 보완하는 연출을 하기도 했다. “영화 음악은 감독의 역량 바깥에 있다”, “곡 자체가 의미가 있어야 영화에 기여할 수 있다”라는 엔리오의 말에서 자기 일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프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늘 혁신의 전위이기를 멈추지 않은 엔리오. 그의 이런 면모가 ‘영화 음악에 관한 영화’를 가능케 한다. 때로는 관객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분야에서도, 누군가는 장인정신을 발휘해 영화에 기여하고 있고,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가 입증하듯 이런 헌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가 된다. 영화를 아끼는 동시대 관객이 이 위대한 장인보다 뒤늦게 태어나 그가 이뤄놓은 것들을 누리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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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도시, 그리고 사랑의 방식
대도시, 그리고 사랑의 방식
과거 한국 영화계에서도 퀴어적 요소를 담은 작품들이 간혹 등장했지만, 비주류적인 코드로 소비되거나 단편적인 묘사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터부시 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OTT, 드라마, 영화, 웹툰 등 다양한 플랫폼의 확장으로 글로벌하고 젊은 관객층과의 접점이 넓어지면서 보다 입체적이고 퀴어 프렌들리한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영화가 바로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이 작품은 퀴어적 요소만을 부각하거나 심오한 메시지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특성을 살려 유쾌하고 경쾌한 젊은 에너지를 한껏 발산한다. 특히, 대도시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청춘들의 사랑과 고민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특정한 정체성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감정선을 구축해냈다. 그 덕분에 20대의 치열한 나날을 지나오며 ' 사랑 '을 해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 NAVER
영화 속에서 묘사된 대도시는 단연 ‘서울’이다. 서울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거대한 도시로, 면적만 놓고 보면 런던, 베이징, 뉴욕, 싱가포르, 도쿄에 이어 여섯 번째로 크다. 하지만 동시에 인구밀도는 보면 베이징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밀집도를 기록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즉, 서울은 거대한 도시임과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끊임없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간이다. 서로의 퍼스널 스페이스조차 지켜기가 쉽지 않은 이곳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존하며 사랑을 해 왔다.
화려한 외피 속 고독이라는 내피
준수한 외모 덕에 ‘인싸’로 오해받기 쉬운 재희와 흥수지만 그들의 속사정은 다르다.“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어긋난다. 자유로운 유러피안 타입의 재희는 남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바로 그 태도 때문에 동기들의 조롱과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며 소외된다. 반면, 흥수는 다소 방어적인 태도로 학교생활을 영위한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관찰자처럼 멀찍이서 재희를 바라볼 뿐이다. 영화 초반에는 주변에서 재희를 두고 비아냥거려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 듯한 흥수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재희와 가까워지면서 종국에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에게 달음박질치는 ‘찐친’이 된다.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감이 변화하는 과정을 비교하며 영화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 포인트다.
두 사람을 이어준 일련의 사건은 무엇일까? 여느 날처럼 청춘을 불태우던 재희와 흥수는 자연스럽게 클럽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흥수는 재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흥수가 누군가와 열렬한 애정 행각을 나누던 순간을 재희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날, 재희는 처음으로 흥수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수는 자신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날을 세웠고, 한동안 ‘아웃팅’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한국 사회는 종종 ‘다름’을 존중하기보다 고쳐야 할 문제로 간주하며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때로 폭력적이고 무례한 침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수가 재희를 경계한 이유도, 아마도 그가 겪어온 침범의 경험에서 비롯된 방어 본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폭력적인 시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흥수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흥수가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함에도 재희는 그런 흥수의 내면을 알아봐 준 유일한 벗이다. 이 대사는 겉으로는 세상사에 무심하고 대범한 듯 보이는 재희가 실은 타인의 불가침 영역을 존중할 만큼 세심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자유롭고, 무심하며, 대범하면서도 쿨한—온갖 미사여구로 재희를 묘사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과거 학교 폭력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인물이다. 결국, 그가 보여주는 겉모습은 일종의 감투와도 같다. 흥수와 재희 모두 각자의 내면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의 외피를 두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도시,그러나 피할 수 없는 고독–<Nighthawks>와 <대도시의 사랑법>
Nighthawks, Edward Hopper, 1942,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영화<대도시의 사랑법>에는 화려하지만 고독한 대도시의 정서가 깔려 있다.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그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미국 사회의 부흥기를 조명한 화가로, 그림자와 빛을 활용한 명암 표현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변화를 주로 그렸지만,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웅장한 도시의 풍경보다 그 속에서 외롭게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미국의 사회과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 대에 발표한 저서 『고독한 군중』을 보면 그 비밀이 조금씩 풀리는 듯하다. 리스먼은 미국인은 소속된 집단에서 소외될까 불안해 늘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신경을 쓰는 타인지향적인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 이에 내면으로는 고립감과 갈등을 느껴 고독한 군중이 된다고 말했다.”1)
특히Nighthawks(1942)는 고독하고 차가운 도시의 밤과, 따뜻한 색감으로 채워진 가게 내부가 ‘안과 밖’을 기준으로 완벽한 명암 대비를 이루는 작품이다.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고독해 보인다. 그럼에도, 차가운 바깥 풍경과 대비되는 가게 안에서 멀찍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약한 온기와 안도감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위 작품은 2차 대전 이후 냉전 체제와 경제 대공황이라는 근현대사적 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제외하더라도, ‘고독’이라는 감정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흥수와 재희를 관통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이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한 세기를 거쳐 증명한 셈이다. 그렇기에 클럽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빛이 가득한 곳이자 고독을 도파민으로 회피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도피처, 엑시트(Exit)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애적 사랑 틀 밖에서 존재하는 두 남녀
영화 속 두 사람은 찐친으로 자연스럽게 함께 살림을 시작한다. 흥수 말처럼 "서울에서 방세가 얼만데!" 서로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하며 성향도 잘 맞는 상대를 찾았다면 그보다 더 좋은 하우스메이트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크고 작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재희의 법조인 남자친구는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흥수의 어머니는 종교의 힘으로 ‘흥수의 병’이 나았다며 기뻐한다. 이러한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긴 시간 동안 서로의 곁을 지키며 의리 있는 친구이자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향하면서 재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흥수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두고 내적 갈등을 겪던 어머니와 얽힌 실타래를 풀고 나아간다. 이맘때 두 사람은 고독했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며 한 층 더 성숙해진다.
예식장에서 흥수가 Miss A의 Bad Girl Good Girl을 추는 장면을 보며 왠지 모르게 콧등이 시큰거렸다. 재희를 누구보다 잘 아는 흥수가 어떤 마음으로 이 곡을 선곡하고 무대를 준비했을지 절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 절친의 결혼식에 참석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았을까.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 앞에 서 있는 친구을 떠나보낸다는 아쉬움과 슬픔 속에서도 그를 유쾌하게 보내주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짠했던 것 같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두 남녀의 전통적인 에로스적 사랑이 아닌, 정신적이고 우정에 가까운 타입의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요즘처럼 일반인 남녀의 연애가 콘텐츠로 소비될 만큼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된 상황에서, 이 작품은 기존의 남녀 관계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구 콘텐츠에서는 ‘게이 판타지’ 요소를 포함한 작품들이 종종 등장하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조차도 본격적으로 다뤄진 사례가 많지 않다. 앞으로 더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한국 영화 속에서 조명되길 기대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와 <room in brookyln>
Edward Hopper, Room in Brooklyn (1932), Artchive, https://www.artchive.com/artwork/room-in-brooklyn-edward-hopper-1932
출가외인이 된 재희가 떠난 후, 흥수는 다시 홀로 그 집으로 돌아왔다. 에드워드 호퍼의 Room in Brooklyn (1932)이 연상되는 시퀀스이기도 하지만, 흥수의 모습에는 ‘고독’보다 오히려 ‘여유’가 스며든 듯하다. 마치 20대의 불안과 혼란을 지나 30대의 어른스러운 여유를 갖게 된 것처럼. 이제 그는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원하던 일을 시작하고, 한때 격없이 청춘을 공유했던 재희와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그 모습에서 마침내 청춘이라는 장막이 완전히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서글프지는 않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두 사람이기에.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 각자의 길을 걸으며 사랑할 이 땅의 모든 재희와 흥수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살아낼 거라고.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Love in the Big City, 2024)>
한줄평: 고독까지 안아주는 우정, 그 또한 사랑이다.
평점: ★★★★
각주표기: 중앙일보, 「'혼자'를 좋아하는 사람과 '외로운' 사람의 차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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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동석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얕은 명과 아주 짙은 암
압구정 문지기
강남구 압구정동의 어느 날. 대국이 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지앞이 넓다. “안녕. 거기서 일하면서 불편한 거 없어?” “사장님. 여기를 이렇게 하면 대박 난다니까!” “오늘 머리 바꿨네!” 대국이 형은 오늘도 압구정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간섭하고 있다. 이 양반은 하는 일이 없나? 정답. 대국이 형은 그냥 백수다. 다른 사람한테 자기를 소개할 때 ‘사업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직업이라곤 없다. 남에게 건네는 명함은 ‘조기축구회 회장’이라는 타이틀 뿐. 아내는 왠지 없는 듯 보이고 딸과는 떨어져서 살고 있다. 집은 예전에 살던 아파트가 아닌 조기축구회 사무실이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내실은 비어있는 대국이 형. 사람들도 겉으로는 대국이 형에게 반가운 척 하지만 내심 그렇게 유쾌하게 그를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다.
다시 현재로 시점을 돌린다. 압구정동에서 아는 지인들을 만난 대국. 어느 식당에서 미정과 대화하고 있다. 한 성형외과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오빠. 그거 알아? 건달 조태천 걔가 성형외과 사업을 하려는 거. 그리고 그 사업에 박지우라는 의사가 있대. 지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대국. 지우는 예전에 잘 나가던 성형외과 의사였다. 그러나 성형외과 안에서 일하던 간호사의 배신으로 면허가 정지되어 야인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아. 쟤가 좀 하는 애구나. 그런데 어디서 봤는데? 머리를 굴리는 대국. 그래. 그랬었지. 대국의 고등학생 시절,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동생이었다. 어렸을 때 자주 봤었어! 걔가 그럼 그렇지! 무릎을 치는 대국. 지우에게 접근한다. “야. 나 대국이 형인데.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 한국에서 시도 한 번도 안 했던 거야.”
마동석 시네마틱 유니버스
<범죄도시 2>가 개봉한 지 6개월 정도 지났다. '마블리' 마동석 배우가 신작을 발표했다. 글쓴이가 아는 마동석 배우는 그야말로 슈퍼스타다. 파이기의 부름을 받아 <이터널스>에 출연해 마블 영화 크레딧에도 이름을 올렸다. 아직도 안젤리나 졸리랑 같이 같은 장면에 나왔던 게 신기하다. 또 <범죄도시 2>로 팬데믹 이후, 극장가 최고 흥행작의 원톱 주연을 맡았다. 상업적으로만 필모그래피의 분기점을 잡았을까? 이 배우가 <부산행>과 <베테랑>을 기점으로 인지도를 얻기 전에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 <부당거래>에도 출연했던 경력이 있다. 서서히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며 인기를 끌어올린 마동석. 2022년 12월의 현재, 그에게 주어진 '흥행 보증수표'라는 타이틀은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지. 그만큼 잘 된 작품이 많으니까.
<압꾸정>은 이 마동석이라는 이름의 네임드 파워를 전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첫 번째. 마동석 배우 연기 잘한다. 새삼 영화 보면서 마동석 배우 연기 잘한다고 느꼈다. 일단 초입부에서 대국은 실없는 캐릭터성을 관객에게 서서히 쌓아 올린다. 우리가 아는 마동석 배우는 무력이 강한 캐릭터다. 영화의 후반부에 대국의 싸움실력에 대해 묘사되긴 하지만 전반부는 이를 뒤집는 장면이 있다. 마동석 배우는 이를 정확히 이해라도 한 듯 영화에서 마석도와는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 일례로 지우를 설득하는 장면이 있다. 지우에겐 두 가지 페널티가 있다. 이 두 페널티를 대국이 해결해주는 듯한 묘사가 영화에서 제시된다. 이 문제들을 대국이 전적으로 그의 방식으로 해결한다. 여기서 한 문제는 전적으로 그이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었고, 다른 문제는 대국의 내면을 묘사하면서 중반부에 회수된다. 여기서 마동석 배우는 두 해결 방식에 차이점을 두며 후자에서 이야기에 임팩트를 주는 연기를 보여준다. 대국은 말을 잘하는 캐릭터다. 이 때문에 좀 비정상적인 캐릭터가 굉장히 쉬워 보이는 화법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곤 한다. 이 '두루뭉술하게' 라도 넘어갈 수 있는 이유는 마동석 배우의 연기력 때문이었다. 역시 베테랑은 클래스가 다르다.
또 영화는 마동석 배우의 캐릭터 '마블리'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 봐도 싸움 잘하게 생긴 외모의 마동석 배우. 이를 살리듯 실제 트레이너 출신이었다는 점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러니까 오히려 귀여운 모습이 더 부각된다. 영화는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마동석의 귀여움을 강조한다. 태천을 만나 자기 자신을 어필하는 모습, 눈 반짝이며 사업 아이디어에 설명하는 모습 등등 관객석에서 '귀여워!'라고 말할 장면이 많다. 그리고 전적으로 이 영화의 코미디 요소는 마동석 배우의 능청맞음에 의존한다. 이건 그냥 영화를 1분 이상만 봐도 안다. 저런 외모에 저런 코디를 하면서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은 마블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반대 측면에서 대국의 무력을 묘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런 덩치에 싸움 못한다고 하면 더 이상하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꼭 저런 애 한 명쯤은 있었다. 이를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만든 세팅일까? 영화에서 액션이 아예 없진 않다. 역시 마동석 배우의 캐릭터성을 잘 활용한 셈이다.
슈퍼히어로의 사이드킥
그렇게 마동석 배우의 특성을 경제적으로 활용한 영화. '<범죄도시> 제작진 참여'라는 포스터 문구는 다른 점에서 빛을 발한다. 바로 <범죄도시> 시리즈에 출연했던 조단역들이 영화에 출연한다는 점이다. 일단 가장 마지막 시퀀스에 브로커로 등장하는 인물이 누군지는 적지 않겠다. 마동석의 필모그래피를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인물이다. 이 사람을 제외하고, <범죄도시 2>에서 '최용기' 역을 맡았던 차우진 배우, '장 씨 형제'의 일원을 맡았던 김찬형 배우, '유종훈' 역을 맡았던 전진오 배우가 줄현한다. '빅 펀치 엔터테인먼트'라는 소속사 이름을 보여주듯 '범죄도시'에서 봤던 이름과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 좋았다. 어떤 배우는 '범죄도시' 시리즈에서 맡았던 역의 정반대를 맡은 지점이 재밌기도 했다. 이렇게 톱스타의 이름값이 중요한 영화에 카메오라도 출연해야 이름을 알리는 것 아니겠어? 위에서 언급했던 배우들이 다들 연기를 잘하는 것은 뭐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조단역이 아니었던 정경호, 오연수, 오나라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
돌림노래
이렇게 마동석 배우의 이미지를 잘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처럼 한 인물의 성공담을 담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는 2022년이다. 이 영화가 굉장히 올드하고 식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 글쓴이는 일단 올해 개봉했던 <킹메이커>, 2006년에 개봉한 <라디오스타>와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 있을까를 주안점으로 두고 영화를 봤다. 딱히 없다. 소재만 다르다. 그런데 인물 갈등구조나 캐릭터의 세팅이나 굉장히 전형적인 패턴에 의존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래서 영화 내내 신선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없다. 아. 중간에 오나라 배우를 필두로 한 뮤지컬이 나오는데 그건 그나마 신선했다. 그 외의 것들은 '이 사람이 진짜 흑막일 거야' 싶은 그대로 흘러간다. 초반부 대국과 지우가 힘을 합치겠지. 그럼 둘이 협업을 해야겠지? 그럼 대국이 자기 인맥이 넓으니까 인맥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할 거야. 그런데 저거는 말이 안 되는데? 그럼 후반부에 회수가 된다. 돈 갖고 하는 사업인데 둘이 엄청 예민할 것 같은데? 그대로 영화 안에서 묘사된다. 아무리 웃음과 감동을 목표로 둔 영화라고 해도 창작자의 오리지널리티가 없이 얕게 흘러가는 건 좀 너무했다.
이야기의 내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영화의 강점은 '마동석'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영화는 그게 전부다. 일단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세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극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은 네 명이다. 미정, 지우, 오연서 배우가 맡은 규옥이다. 영화의 시놉시스와 예고를 읽은 분들에게 '이 사람 어떤 캐릭터 일 것 같아요?'라고 물으면 바로 설명이 딱 흘러나올 것 같다. 미정은 성격 좋지만 실력은 없는 그런 사람. 지우는 얕은 사회성으로 대국이라는 기회를 놓칠 사람. 규옥은 왠지 신비로운 매력을 품기는 냉미녀. 그리고 이게 끝이다. 영화는 이 캐릭터들의 개성을 살리지 않았다. <육사오>에서 박세완 배우가 맡은 '연희'와 고경표 배우가 맡은 '천우'의 이름이 기억나는 것과는 다르다. 그냥 단지 마동석 배우의 존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사람들의 캐릭터성을 희생한 느낌이 좀 있다. 그중 최고는 오연서 배우가 맡은 '규옥'이다. 극 중에서 규옥이 있는 에스테틱 샵의 손님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여기서 규옥이 갖고 있는 비밀이 공개된다. 이 비밀은 영화에서 아~무 연관이 없다. 그리고 오히려 이 비밀이 후반부 전개에 걸림돌같이 느껴진다. 아니 그럼 그걸 이용해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은 것이다. 심지어 오나라 배우가 맡은 '미정'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오나라 배우가 코미디 연기로 어찌어찌 존재감을 채우긴 하지만 미정이 뭘 했는가?라고 하면 '과연 가장 중요한 조연으로 불릴 만 한가'에 대해 의문점이 있다. 이렇게 캐릭터 세팅에서 희생한 것이 많기 때문에 대국이라는 인물도 뭔가 매가리가 없다. '마석도'에게서 볼 수 있었던 강력한 액션과 코미디. 우리가 마동석 배우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볼 수 있었던 '마블리'의 상큼 발랄함. 진작에 봤던 내용을 두 번 보기 때문에 이야기의 허술함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이럴 거면 그냥 <범죄도시 2>를 다시 보지 왜 이걸 만든 걸까? 하는 의문이다.
허술한 이야기
이렇게 마동석이라는 톱스타에게 의존했다고 해서 이야기의 구멍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예상대로 쭉쭉 흘러가는 이야기.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흘러간다면 이야기의 현실성이 떨어진다. 인생이란 원래 안 좋은 일도 일어나곤 하니까. 대국과 지우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이 갈등 세팅은 굉장히 자극적이다. 엄연히 인물들이 범죄를 일으킨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범죄를 만드는 데 있어 극에서 어떤 인물들이 배신한다. 여기서 인물의 감정선에서 섬세하지 못했던 것은 아쉽다. 이에 대한 암시가 몇 개 있긴 하지만 '설마 이거를 위해서?' 싶은 것이 후반부에 그대로 이어진다. 떡밥을 뿌리는 방식이 조악한 느낌? 또 좀 내면의 내실이 없어도 사업가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대국, 무려 의사인 지우의 인물 세팅을 다 뒤엎을 정도로 의심 없이 쉽게 지나간다.
또 영화에서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화재 사고가 있다. 이 화재를 위해 필수적으로 제시돼야 한 준비물들이 있다. 대국의 준비물을 묘사하는 방식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을 떠돌려 특정 장소에 가는 대국. 이 인물들을 따돌리는 과정이 치밀한가? 에 대한 건 당연히 의문이다. 또 따돌리고 난 다음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게 묘사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대국과 갈등을 겪는 어떤 인물의 준비물도 허점이 많다. 이 인물의 원래 성격 묘사에 의존하는 걸 좀 넘어선 느낌? 이 갈등에서 특정 인물이 갖는 감정선이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영화의 설득력이라는 측면에서 큰 약점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또 두 캐릭터의 속성을 제외하고, 화재 자체에 대한 CG처리는 많이 조악하다. 뭔가 타고 그을린다는 느낌이 없다. 대놓고 컴퓨터 그래픽 같아 깔끔하지 못한 뒷심이 느껴진다. 영화에서 이 화재가 지나가고 제시되는 진한 감동이 감독이 가장 말하고자 하는 부분일 텐데, 후반부의 이야기가 엉성하다 보니 후반부에 감정이입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과거에 개봉했을 법한
이게 만약에 3년 전인 2019년 12월에 개봉했다 하더라도 올드하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럴만하다. 영화에서 부분 부분 제시되는 낡은 구석은 깔끔하지 못한 완성도에 기름을 붓는다. 대국의 액션신, 가장 첫 번째 시퀀스에 등장하는 카메오, 극후반부 두 인물 연출. 배달 앱을 극에서 어떻게 다루는가? 에 대한 방식. 대국의 무식함. 미정 캐릭터를 보여주는 방식. 극에서 티가 안 나려고 해도 날 수밖에 없는 뭔가 예전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이야기가 과거를 다뤘다고 해서 영화의 모든 것이 올드할 필욘 없다. 오연서, 정경호, 마동석 배우의 팬이라고 해도 이런 이유를 들어서 보라고 추천하고 싶지 않다. 오연서 배우? 아~~ 주 예쁘게 나온다. 정경호 배우? 무슨 20대 중반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마동석 배우? 역시 멋있는 배우다. 오나라 배우? 수상 축하드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올드한 영화의 흐름때문에 장점보단 단점이 더 많이 느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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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댕겨진 불씨는 반드시 타오른다
DIRECTOR. 모함마드 라술로프
CAST. 마흐사 로스타미, 세타레 말레키, 소헤일라 고레스타니, 미삭 자레
SYNOPSIS. 꿈에 그리던 수사판사 승진을 하게 된 ‘이만’, 때마침 테헤란에서는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이만’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총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딸들과 논쟁을 벌인 어느 날, 총이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가족의 믿음에는 균열이 생긴다. 지금 반드시 목격해야 할, 올해 가장 용감한 걸작.
POINT.
✔️ 2022년 히잡 시위를 둘러싸고, 이란의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영화입니다. 감독과 두 딸 역할의 배우는 이 영화 이후로 망명했고, 함께 나오지 못한 엄마/아빠 역할의 두 배우 사진을 높이 올려든 채 레드카펫에 섰습니다.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소헤일라 고레스타니는 2022년 당시 시위에 연대하여 수감되었고, 현재 자택 연금 상태라고 합니다. (해당 내용을 비롯, 영화 외부적 이야기는 배급사 그린나래미디어 SNS에서 참고했습니다.)
✔️ 의미 있는 영화인 동시에, 재미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인데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집안에서 없어진 총을 둘러싼 가족 간의 이야기가 아주 잘 짜여 있는 구조라서, 다음을 궁금해하면서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흡입력 있는 영화입니다.
✔️ 영화는 6월 3일 개봉합니다.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이 있다. 1장에서 총이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 총이 반드시 쏘아져야 하며, 쏘지 않을 총이라면 이야기에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를 역이용해 신경 쓰이는 위치에 놓여 있던 아이템이 별 의미 없는 맥거핀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집안에서 총이 사라진 이 영화에서 총은 맥거핀일 리 없어 보였다. 총을 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관객은 총의 행방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겠지.
이 영화에서 총이 맥거핀일 리 없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맥거핀으로 장난을 치기엔 이 영화가 너무 절박한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담고 있었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체제 비판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감시와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감옥이냐 망명이냐, 다소 극단적인 두 가지 선택지만 남아있던 상황에서 감독은 망명을 택한다. 칸영화제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심사위원 특별상'이라는, 기존에 없던 상을 만들어 수여했다. 한 해가 지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다른 이란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 감독에게 돌아갔다. 심사평에는 "저항과 생존"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어, <신성한 나무의 씨앗>도 함께 떠오른다. 무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수년간 이어진 노력, 인내, 그리고 저항 끝에 이슬람 공화국 체제 아래에서 썩고 텅 빈 검열의 체계는 마침내 밀려나기 시작"했다며 '검열을 거부하는 영화'들이 "보다 단단한 기반 위에 올라섰"다는 내용이 담긴 축사를 보냈다. 히잡에 대한 검열은 2022년 이전의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고, 영화에 대한 검열 또한 2025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1. 이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사건은 2022년 마흐사 아미니라는 이름의 여대생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고 '도덕 경찰'에게 끌려가 구금 끝에 의문사한 사건, 그리고 거기서 촉발된 대규모 히잡 시위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수만 명이 구금되었고 사망자도 (사망 사유와 숫자는 제각각 다르게 밝히고 있지만) 수백 명에 달한다. 의문사에서 시작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개 처형까지 불사하면서, 이란은 '신정일치' 즉 종교와 정치를 접붙인 시스템을 공고히 하려 애썼다.
이 '신정일치'의 나라는 1979년 혁명으로 들어섰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였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시위였는데, 당시 왕조의 급격한 서구화 정책과 경제적 어려움이 맞물리면서 군주제에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비밀경찰이 돌아다니고 반대파가 '정치범'으로 탄압받는 사회를 끝내고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시민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시 혼란과 의견 차이의 우여곡절 끝에 설립된 국가가 이슬람 교리와 정치를 내세우면서 도덕 경찰이 돌아다니고 정치적 탄압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여성 인권은 그야말로 추락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누렸고 이란혁명에서도 굵직한 역할을 여성들이 해냈는데, 혁명 끝에 여성들에게 남은 것은 히잡을 뒤집어쓰고 다니라는 강요, 히잡을 쓰지 않고 운전하다가 벌금을 물거나 차량을 압수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다. 시위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히잡을 벗어던지는 시민 불복종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란 정부는 여전히 강경하다. 히잡은 여전히 법령으로 강제되고 있고, 공개 처형과 구금은 셀 수 없으며, 심지어 카타르 월드컵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던 남자 축구 선수들에게까지, 선발 제외 소문부터 사형 선고까지 다양한 탄압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짓밟아도, 외치고 버티고 항의하는 목소리는 죽지 않는다. 끝내 살아남아 우리에게 도달한다. 검열과 탄압이 아무리 이어져도 이 목소리는 제 갈 길을 간다. "1명을 죽이면 1,000명이 일어난다!" 하고 분연히 일어났던 이란의 여자들처럼. 검열 시스템은 "공포와 위협으로 마치 모든 걸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섬광탄 같은 효과"일 뿐 "실질적으로 모든 걸 볼 수는 없다"는 무함마드 모술라프 감독의 말처럼.
#2. 우회하여도 반드시 길은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세대와 성별에 따라 다른 미디어를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불안한 시위의 소식 앞에서 엄마는 텔레비전을 켜 보지만, 텔레비전은 엄마에게 아주 간단하고 정제된 뉴스 이상의 정보를 주지 못한다. 마치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드라마까지 보고 나면 텔레비전을 끄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체제의 수호자인 동시에 체제의 피해자인 기성세대 여성은 가장 혼란스러운 자리에 놓여 있다.
딸들은 SNS로 다양한 소식을 접한다. 온라인에 게재된 영상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자매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도 거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안다. 마치 히잡이나 부르카처럼, 두껍고 검은 커튼으로 자신을 가린 채 창 밖을 내다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자체 검열'의 집안에서도, 자매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뿐 아니라 통제 안에서 우회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빨간 하트로 이름을 저장해 두면 남자친구인 걸 들킬 테니까 하얀 하트를 쓴다든지. 이들에게 미디어는 양방향이고, '모바일'하다.
반면 아버지는 그 어떤 미디어도 접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그나마 미디어라고 부를 법한 것은 직장 동료와의 대화가 전부이며, 그 또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대화는 아니다. 그의 공간은 눈도 귀도 막혀 있다. 복도 가득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손동작을 한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등신대이며,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인 채 고요하게 끌려 다니는 이들의 존재만이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갖고 움직이는 이들이다. 죽은 공간에서 이들은 자신의 폭력이 자승자박의 미련 일로를 걷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심지어 총이 사라진 후로 "내 집인데도 안심이 안된다"며 불안과 혼란을 체험하고도,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와중에 자신의 혐오와 억측만큼은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다.
이 미련의 핵심에는 언어의 혼탁이 있다. "여성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히잡을 써야 한다고 하는 이들의 언어 논리 그대로다. "가족의 믿음을 회복"하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가족에게 가하는 행동은 이 나라의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폭력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보호라는 귀한 단어가, 명예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이토록 해악밖에 남지 않은 방향으로 혼탁해지고 무너졌다. 이렇게 깨지고 더럽혀진 언어로 짜인 지배구조는 시스템 안의 모든 사람을 옭아매는 폭력밖에 되지 못한다.
#3. 반쪽은 피와 어둠 아래 있어도, 나머지 반쪽은 빛 아래 있기에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것은 단연 여성들의 얼굴이다. 과연 셋 중에 누가 총을 가져갔을까 궁금해지는, 어머니와 두 딸뿐 아니라 잠깐 등장하는 큰딸의 친구까지 이들 모두 폭력적인 구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솔직히 영화 보기 전부터) 관객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영화에서 이들의 얼굴은 이따금 절반씩 나뉘어 다른 빛 아래 놓인다. 친구의 다친 얼굴은 처참한 피범벅이 되어 있는데, 코를 기점으로 반대쪽에서 보면 그 상처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끔하다. 그 얼굴을 영화는 햇빛 아래 공들여 오래 보여준다. 마치 보라는 듯이. 현실의 참혹한 이 상처를, 보라는 듯이. 이 느낌은 이후 캠코더 앞에 선 큰딸과 엄마의 얼굴에서 재현된다. 캠코더 화면 안에서 이들의 얼굴 절반은 어둠 속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 얼굴은 빛을 받아 새하얗게 드러난다.
이는 살뜰한 시중 손길을 받던 아버지의 얼굴과 매우 대조적인데, 그의 얼굴은 아내의 세심한 손길을 받지만, 물로 씻고 머리를 빗어 넘기고 잔털 관리까지 꼼꼼하게 이루어지지만, 역실 불빛 아래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은 분명 밝은 빛 아래 있음에도 살아있는 신체보다는, 마치 명화 속에 이미 베어버린 목처럼 보인다. 이는 어둠과 피에 절반이 묻히고, 눈물 혹은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로도 생명력이 하얗게 빛나던 여자들의 얼굴과 대조적이다.
어쩌면 이 얼굴이 이란이라는 나라의, 그리고 기본권 수준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국가 폭력과 싸우는 나라들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한다. 베어버린 목처럼 보이는 얼굴들이 지배구조를 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어둠과 피에 짓밟혀도 빛 아래 생명력이 형형한 얼굴들이 일어나고 있다. 권위적인 반지를 낀 손은 그 빛나는 얼굴들을 결코 파괴할 수 없다.
체호프의 총이 반드시 쏘아져야 하듯이, 불씨가 댕겨진 혁명은 반드시 타올라야 한다. 이란의 여자들도 영화들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주요한 분기점을 함께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어떻게 피어나 무엇을 뒤덮고 자라나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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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말란이 다시 인류에게 보내는 서늘한 경고
가족 여행
신난다! 가족 여행이야! 언제 어디를 가든 여행은 늘 설레다. 귀여운 꼬마 웬. 한적한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말에 즐거운 기분이다. 노래 볼륨 크게 키우고 이동하고 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이동하는 세 사람. 여행지에 도착했다. 짐을 꺼내고 어디서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복잡한 고민은 어른 둘이서 해도 큰 문제는 없잖아? 팔랑팔랑 뛰어 어딘가로 향하는 웬. 별건 아니다. 별장 앞에 어떤 풀숲이다. 혼자 놀고 있는데 떡대 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안녕!” “안녕하세요!”
성격은 좋아 보인다. 처음 보는 아저씨와 대화하는 웬. 서로 이름을 말한다. 저는 웬이에요. 난 레너드야. 사람 없는 한적한 동네였기 때문에 웬의 입장에서 이 손님이 낯설다. 왜 여기에 오셨어요? “사실 인류를 구해야 할 과제가 있거든” 갑자기 차분한 전원일기에서 sf로 장르가 바뀌고 있다. 뭔 소리지? 웬이 레너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난 너희 가족을 만나러 왔어. 너희 가족은 이제 숭고한 결정을 해야 하거든.” 느낌이 안 좋다. 어린 나이지만 이 사람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느낌이 현실로 이뤄지듯 웬의 시야에서 어떤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사람들은 무기를 갖고 있다. 설마? 이거 우리 가족을 해치려고 오는 건가? 쿵쿵 다가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웬은 달린다. “아빠! 아빠!” 그런 웬을 보는 레너드. 레너드의 속셈은 간단했다. “웬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을 죽여 인류를 살려야 한다”라는 것이다.
믿지 못하는 이유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동하는 문장은 예고에도 나온 것으로 보인다. “내 가족을 희생시킬 것인가, 인류를 구할 것이다”다. 이 질문은 굉장히 자극적이다. 만약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묻는다면 답이 쉬울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에서 타고 내려오는 인류의 고전적 떡밥이 영화에서 구현된 셈이다. 영화는 이 딜레마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어떻게? '불신'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적으로 내세웠다. 왜 불신하게 됐을까?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세팅이 있다. 이게 시놉시스에서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아서 뭐라고 쓸 수는 없다. 대략적으로 써보자면, 이 웬 가족은 약간 특별한 가족이다. 가족 구성원이 살짝 다른 것이다. 이 다르다는 특성은 영화에서 핵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인과관계를 갖는다.
바로 이 가족 구성원의 배치는 불신이라는 핵심으로 닿을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뭐 PC주의다 뭐다 해서 이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뛰운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혐오 내지는 혐오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는 두 이야기(가족의 탄생, 레너드 일행과의 인질극)를 축으로 끌고 줄거리를 이끈다. 이 가족이 왜 세상에게 이럴 수밖에 없는가? 의 배경을, 또 두 가지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괜히 세상이 망해가는 이야기와 가족의 탄생을 병치시킨 것이 아니다.
이들이 소수자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불신이라는 키워드는 영화에서 굉장히 흥미롭다. 영화에서 왜 딜레마가 일어날까? 상대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믿지 못하는 이유’에 따라 주인공(들)이 설정해 놓은 장치들이 있다. 뭐 동양인 딸을 입양했다던가, 차에 뭔가가 있다던가 하는 것들이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 장치들이 매 번 다르고, 왜 구비했는지도 사실감이 있게 제시했기 때문에 글쓴이는 영화가 흥미로웠다. ‘아, 감독이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이 도구들을 영화에 넣었구나’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인류와 가족 중 어떤 것을 고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불신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전개한다는 생각에 빨려 들어갔다.
현재 그리고 미래
영화에서 제시한 불신을 과거 그리고 현재에 어떻게 적용시키는가에 대해서도 흥미로웠다. 우선 영화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종말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종말을 어떻게 다루는가? 의 답은 간단하다. 주인공 일행이 이걸 믿지 않으면 그의 반작용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샤말란은 이 현재 세태에 대해서 '단순히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가 비극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라고 규정지었다. 이는 우리 현대 사회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를 인과관계로 설정했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영화가 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과연 이 영화에서 제시하는 재앙들이 어느 날 갑자기 뚝딱 일어났던 걸까? 아닐 것이다. 이미 레너드와 같은 사람들이 계층을 가릴 것 없이 경고했던 것이다. 또 이런 일들이 전부 다 별개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살짝 이루어져 있다. 물질론적 사회구성이론이 세상에 한 트럭인 것이 이 근거로 볼 수 있다. 영화는 이런 것들이 서로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듯이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이 역설을 중심으로, 좁은 공간을 설정한 후 강강강의 템포로 전개하는 영화의 서사가 강력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영화의 목표와 목적이 정해진 것이다.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는 방식은 전작을 생각나게 한다. 바로 <올드>다. 이 <올드>와 <똑똑똑>이 세상을 구현하는 방식은 유사한 듯 보인다. 먼저 좁은 공간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어느 해안 <올드>, 한적한 별장 <똑똑똑>이 공간적인 비슷하다. 또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담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올드>, 경고와 불신을 소재로 담은 <똑똑똑>이 그렇다. 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소재로 다룬 <올드>와 인과관계를 소재로 담은 <똑똑똑>이 유사하다. 물론 이 둘은 안 좋은 지점까지도 닮은 듯하다. 그러나 이 유사하다는 특징은 인간을 바라봤던 샤말란의 관점이 느껴진다는 점, 그러니까 감독이 샤말란을 어떻게 현재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절대 그냥 넘어갈만한 세팅은 아닌 듯하다.
좀 심했어
그러나 이렇게 사회비판적인 코드를 '샤말란스럽게' 잘 소화한 듯 하지만 이 영화의 불호 포인트는 명확할 듯싶다. 우선 첫 번째, 영화 템포가 너무 강강강의 템포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 빠른 템포에 비해서 영화의 키워드가 주인공들의 특수한 세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어떤 분에게는 영화를 부정적으로 보기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전작 <올드>는 주인공들에게 병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여러 커플이 나오기 때문에 샤말란이 품고 있을 다층적인 관점을 품을 수 있다. 넓은 영화라고 보기는 좀 어렵기 때문에 이 영화의 이야기 방식이 지루하고 기가 빨린다고 느끼기 쉬울 것 같다. 또 주인공들의 선택(들)이 합리적이었는가? 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박력이 갑자기 풀리기 때문이다.
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몇 가지 반전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집단의 구성이다. 영화에서 거의 주인공격인 집단이 후반부즈음에 밝혀진다. 이 집단이 구성되는 이유가 샤말란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때려 박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를 제시하는 방식도 위에서 서술했던 '박력이 약해지는 이유'기도 했지만 글쓴이는 더 나아가 이 암시가 굳이 필요한지도 의문점이 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는 서스펜스 중 하나는 주인공들이 '일반인'이라는 점이다. 이 사람들은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는 상황이 뭔지 감 잡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인물들이 벌이는 어떤 행동들이 더 잔혹하게 느껴진다. 이걸 이야기의 긴장감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 자체가 영화에서 충분히 하고 싶은 말을 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하는 방식과 내용까지 아쉬운 단점이 되는 것이다. 아니 초중반부까지 '이 사람들이 과연 어떤 인간인가'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 그러니까 일반인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던 힘으로 영화가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이를 후반부에서 다 너무 설명하고 넘어가니까 주인공의 입장 빼고 영화가 무뎌졌을 것이라는 것에 공감한다. 또한 이 인물구성이 이루어진 계기를 생각해 보면 좀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있다. 이 사람들이 크고 작게 행동하는 근거들이 힘이 떨어진다. 게다가 네 명 중 한 사람의 가장 또렷한 히스토리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기능적으로 끼워 맞췄다는 느낌이 좀 있다. 이는 후반부가 될수록 좀 이질감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레슬러
영화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캐스팅 둘이 있다. 바로 레너드 역을 맡은 데이브 바티스타와 레드먼드 역을 맡은 루퍼트 그린트다. 데이브 바티스타는 MCU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에 출연하며 나름의 인지도를 높였다. 또 이를 바탕으로 작년 <나이브즈 아웃 : 글라스 어니언>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치를 잘 살리듯 바티스타는 영화를 끌고 가는 원 톱 주인공으로서 이야기를 이끈다. 영화에서 '안타까움'에 대한 감정적인 리액션이 좀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바티스타의 공이 크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살짝 질리기는 한다. 뭐 관객 분들이 보는 데에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또 '해리포터' 시리즈의 론 위즐리 역이었던 루퍼트 그린트 역시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론 위즐리' 생각이 잘 안 났다. 그렇게 좋은 연기를 보여준 두 사람과는 다르게 주인공 둘은 연기가 많이 아쉽다. 한 인물은 감정연기를 하는데 거의 똑같은 표정으로 매번 같은 억양을 보여준다. 레너드 일행이 나올 때는 몰입되지만 주인공 가족이 나올 때 루즈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또 세 주인공 중 하나는 영화에서 입체적인 캐릭터가 되는데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연기에 힘이 없었다. 이러다 보니 주인공들이 별로 기억에 안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 샤말란 영화에 절대 빠질 수 없는 깜짝 카메오가 있다. 솔직히 좀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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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이 은근슬쩍 준비하고 있는 어벤져스 (feat.영어벤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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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
2021. 01. 15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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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는 장면이 너무 많은데 전부다 100% 리얼로 한 영화 ㅋㅋ
두번다시 안나올 레전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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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마야와 3인의 용사>
마법이 가득한 신화 속 세계. 4개의 왕국이 지배하는 이곳에는 용감하고 반항심 넘치는 전사, 마야 공주가 있다. 마야의 임무는 고대의 예언을 이뤄 인류를 구하는 것! 과연 마야는 복수에 눈이 먼 지하 세계의 신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El Tigre》 《마놀로와 마법의 책》의 호르헤 구티에레스 감독이 전하는 《마야와 3인의 용사》는 9개의 대서사시로 이루어진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이벤트다. 조이 살다나, 가브리엘 이글레시아스, 앨런 말도나도, 스테파니 베아트리스, 디에고 루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앨프리드 몰리나, 케이트 델카스티요, 대니 트레호, 치치 마린, 로지 퍼레즈, 퀸 라티파, 와이클리프 장, 호르헤 구티에레스, 산드라 에키와, 이사벨라 메르세드, 첼시 렌던, 호아킨 코시오, 카를로스 알라스라키, 리타 모레노. 올가을,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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