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의 영화2025-05-17 11:10:01
연출하는 인간, 해미의 존재-짓기
<버닝>의 해미에에 대해
감독이 직접 밝히길, 영화 <버닝>은 ‘20대 청춘들의 분노를 담은 영화’다. 실제로 주인공인 종수가 사랑을 잃고(?) 분노하는 게 영화의 주된 내용이므로 이는 여러모로 옳은 말일 텐데, 재밌는 점은 영화가 담은 것이 ‘종수의 분노’가 아니라 ‘청춘들의 분노’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감독이 생각하기에 극 중의 종수는 어떤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것인데, 이 보편성의 정체가 조금 애매모호하다.
, 길가다가 우연히 만난 어릴 적 친구와
하룻밤을 보내고 바로 사랑에 빠져서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는 극단적인 인물이다. ‘요즘 시대 젊은이’를 표상하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종수가 보편적인 청춘의 얼굴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그가
‘메타포’로서 기능할 때이다. “메타포에 대해선 종수씨에게” 물어야 할 정도로 메타포에 능한 종수는
인간이라기보단 하나의 은유다. 청춘의 유령이자 어리숙한 미생. 완생의
최소 조건인 독립된 두 눈이 없는 점.
그래서 그에겐 (화면 안에서)이야기를 지을 능력이 없고, (화면 밖에서)영화를 추동 시킬 힘도 없다. 영화의 주인공은 종수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야기를 이끄는 장력은 ‘해미’다. <버닝>은 해미로 시작(영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얼굴’을 해미다)하고, 진행되고, 끝맺는다.
종수의 보편성을 이해하려면 그의 옆에 해미를 갖다 놓아야 한다. 해미와
나란히 섰을 때만 종수는 비로소 얼굴을 갖는다. 마치 거울 단계를 맞닥뜨린 어린아이처럼.
해미는 메타포 같은 건 모르는(모를 수 있는), 오직 스스로-짓는 사람인데 반해,
종수는 “진짜 작가가 되려고 하는 거지”라고
되뇌면서도 정작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종수가
되고 싶어 하는 ‘진짜 작가’는 사실 해미다.
그러나 해미가 작作하는 이야기는 텍스트가 아니라 몸이다. 몸으로 행하는
진짜 삶을 연출할 줄 아는 인간이기 때문에, “귤이 없다는 걸 잊”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을 멸시하는 수많은 눈앞에서도 당당하게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선보인다. 슬프면 아무데서나 눈물을 터뜨리고 눈을 감자마자 잠에 들어버리는 원초적인 행동 양식은 해미가 ‘의문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말해준다.
해미에겐 강력한 자기 확신이 있다. 그가 어린 시절 우물이나 고양이
보일이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처럼, 해미에게 ‘존재하기’란 몸으로 감각되는 무엇이다. 어떤 논리나 증거에 기대지 않고도 그냥
알 수 있는 것. 그럼으로 해미는 ‘우물-보일이-존재’를 그냥 있게-하는 능력이 있는 작가인 셈이다.
이에 반해 종수는 그저 쭈뼛거린다. 해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대신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능멸하고, 금수저 밴에게 똑바로 질문하지도 못하며, 무엇보다 그는 비겁하다. 포그너를 좋아한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저 대마초에 취한 꿈으로만 겨우겨우 도피할 뿐이다(벤/해미와 함께 ‘떨’을 하고 잠든 밤, 그는 꿈에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미소
짓는 소년의 이미지를 본다).
그렇다고 밴처럼 스스로의 공격성을 세련되게 다루지도 못한다. “세상은
수수께끼 같다”고 속으로 앓으며 길 잃은 아이처럼 대책 없이 뛰어다닌다(밴의 비닐하우스 방화 계획을 들은 종수는 아주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폼으로 순찰을 다닌다).
그런 종수를 깨어나게 만든 건 결국 스스로 짓는 인간, 해미다. 해미를 만나면서 굴러가기 시작한 이야기는 해미를 잃으며 갈피를 잃고, 결국
살인과 방화로 산화한다. 그리고 그 일련의 사건들의 여파로 종수의 ‘스스로-짓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분노하는 종수의 보편성은 무엇일까. 종수의 메타포이자 메타포로서의 종수가 지시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허공’이다. 해미가
없는 공간이자 ‘수수께끼’로만 존재하는 거대한 상실.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아무도 없어요”라고 대답할 정도로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버린 희미한 존재들의 합장. <버닝>의 분노는 스스로-짓는 능력,
그러니까 각자 인생의 작가로서 가져야 할 그릇을 잃은 이 시대 청춘들의 허무인 셈이다.
그러나, <버닝>에는
해미가 있었지만 이 시대의 청춘들에겐 누가 있을까. 아직은 이따금씩 그 흔적을 내비치는 이 땅의 마지막
‘해미’들마저 자취를 감추면 이곳엔 무엇이 남을까.
종수의 파주 시골집 TV에서 흘러나오던 두서없는 도널드 트럼프의 ‘비전’만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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