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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2025-06-25 23:21:03

거대한 고통과 비극, 그 속에 남겨진 사랑을 건져올리며

영화 <그을린 사랑> 재개봉을 보고

 

이 리뷰는 영화 <그을린 사랑>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을린 사랑>은 쌍둥이 남매에게 도착한 편지 한 통으로 시작한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나왈 마르완. 쌍둥이 시몬과 잔느의 어머니다. 나왈 마르완이 최근 유명을 달리하며 쌍둥이에게 유서를 남긴 것이다. 유서에는 자신의 시신을 엎어달라, 비석에 비문도 새기지 말라는 충격적인 부탁이 단호하지만 간결한 어투로 쓰여있다. 나왈은 쌍둥이에게 한 가지 부탁을 더 남긴다. 두 통의 편지를 주인에게 전해주라는 것. 한 통의 편지는 쌍둥이의 형이자 오빠, 또 다른 한 통은 쌍둥이의 아버지에게 남긴 것이다.

 

 

 

 

 

쌍둥이는 어머니로부터 생전에 자신들에게 이부형제가 있다는 사실은 물론,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기에 이 부탁을 다소 황당하게 여길 수 밖에 없다. 공증인은 쌍둥이가 어머니의 유언대로 편지를 전달하고 나면 제대로 장례를 치러도 된다는 이야기를 마저 전해준다. 시몬은 분노한다. 시몬은 나왈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남들처럼 장례도 치르고 비석도 새길 것이라 하지만, 잔느는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고자 한다. 그렇게 잔느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의 편지와 여권을 받아, 어머니가 살았던 고향으로 떠난다.




어머니가 아닌 나왈 마르완을 찾아

 

 

 

쌍둥이를 낳고 기른 어머니의 이름은 나왈 마르완.

 

쌍둥이는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평생을 함께 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 잔느는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고향에 도착해 어머니가 남긴 흔적들을 차츰 찾아간다. 영화는 잔느의 발걸음과 오래 전 나왈의 발걸음을 교차하여 보여주며,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되짚어준다.

 

사막, 비포장 도로가 널리 펼쳐진 뜨거운 중동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왈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지만, 와합이라는 무슬림 난민과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지게 되고 도망치려 하지만 가족에게 발각당해 명예 살인 당할 위험에 처한다. 와합은 목숨을 잃지만 나왈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만, 아이를 잃게 된다. 

 

나왈은 아이 고아원에 보내면서 발 뒷꿈치에 문신을 새긴다. 점 세 개가 일렬로 늘어선 모양의 문신을 통해 아들과 언제라도 다시 만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이후 나왈은 대학에 진학하지만, 점차 내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이가 있는 지역까지 내전이 번져오자, 나왈은 아이를 구해오기 위해 내전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사라진 아이와 옮겨온 분노



 

<그을린 사랑>은 가상의 중동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첨예한 종교 갈등과 내전 상황을 통해 레바논 내전을 모티프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무슬림의 첨예한 갈등이 반복되던 당시, 두 집단은 서로에게 학살에 가까운 복수를 일삼는다.

 

나왈은 난민 캠프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중 기독교군에게 습격을 당하고, 기독교인임을 밝힌 나왈을 제외한 모두가 살해 당한다. 특히 나왈은 버스에 타고 있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엄마인 척 하지만, 기독교군은 이를 비웃듯 자신의 엄마에게 달려가는 어린 소녀에게도 총구를 겨눈다. 총에는 신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나왈의 아이가 있던 고아원도 흔적도 없이 불 타 있다. 나왈이 타고 온 버스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불타는 버스, 사라진 아이, 잿더미가 된 마을 안에서 분노는 나왈을 집어삼킨다. 이후 나왈은 복수를 꿈꾸며 반란군에게 합류해, 기독교 인사를 살해하려다 붙잡혀, 감옥에 수감된다.



노래하는 여인

 

정치범들이 수감되는 감옥 안에서 나왈은 무려 15년 동안 수감된다. 의연한 표정, 투신하지 않는 꼿꼿함, 어떤 상황에서도 노래하는 나왈의 모습에 감옥 속 이들은 나왈을 "노래하는 여인"이라 기억한다. 하지만 나왈에겐 노래를 멈추지 못한 이유가 있다. 감옥 안에서 울리는 타인들의 비명 소리, 고문 소리. 반복적으 이루어진 잔인한 고문과 강간. 그 안에서 나왈은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결국 나왈은 고문관이었던 아부 타렉의 성폭행으로 아이를 임신하고 감옥에서 출산하게 된다.

 

 

 

두 통의 편지, 한 명의 주인



잔느와 시몬은 나왈이 감옥 안에서 출산한 아이가 자신들의 형이자 오빠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왈의 출산을 도왔던 간호사를 통해 나왈이 출산한 아이들이 자신임을 알게 된다. 시몬은 나왈이 함께 일했던 반란군의 수장을 만나는데 성공하고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만류에도 진실을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시몬은 자신의 형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고아원에서 군 조직으로 가, 군사로 키워졌다는 것.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했다는 것. 그리고 이후 고문관이 되어 감옥으로 향했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아부 타렉"으로 바꿨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나왈이 쓴 두 통의 편지의 주인은 단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왈은 죽기 전, 캐나다에서 자신의 아이를 마주한다. 

 

발 뒷꿈치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다가갔던 나왈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만, 아부 타렉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왈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왈은 편지에 그 사실을 적는다. 당신으로 인해 아이를 낳았고, 고통스럽고 괴로웠지만 자신이 낳은 쌍둥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또 다른 고백을 한다.

 

이 비극을 덤덤히 밝히는 동시에, 여전히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다고. 네가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사랑하기로 했던 것처럼 여전히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며 아부 타렉을 용서한다. 

 

진실을 마주한 뒤 분노와 고통 속에 남겨진 쌍둥이들에게도 편지를 남긴다. 너희 아버지이자 형이자 오빠를 가졌을 때, 그 시작은 분명히 사랑이었다고. 그러니 너희는 증오와 고통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라 사랑 속에서 태어난 이들이라고. 사랑을 잊지 말라고 말이다.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진실과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2시간 넘게 스크린을 채운다. 영화관 곳곳에서는 한숨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비극 속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나왈은 이 고백을 통해 대를 이은 비극의 뿌리를 끊고 싶었을 것이다.

 

 

지키지 못했던 아들은 폭력의 도구가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났고, 아이들은 고통 속에서 잉태되었다.

언젠가 드러날 진실은 나왈이 낳고, 사랑했던 자식 모두를 상처 입히고 나왈이 겪었던 오랜 고통을 다시 반복시켰을 것이다.

독방에 갇혀 15년을 보냈던 나왈보다 더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갇혀 보낼 것이다.

 

나왈은 이를 끊어내기 위해 고백을 택한 것이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비극에 휘말려 서로를 훼손한 가족들이, 이 삶을 형벌로 여기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더는 이러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마음을 걷어내고 비극으로 불탄 삶 속에서 한 줌 재가 된 사랑과 애정을 건져냈던 것이다.

 

 

더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나왈이 남긴 사랑이라는 거대한 마음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초청받아 참석했습니다.

 

 

 



영화 <그을린 사랑>

6월 25일 4k 리마스터링 재개봉


 

작성자 . 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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