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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인2025-08-26 21:28:16

내장을 찌르는 비정제 호러

<어글리 시스터>(2025)

 


<어글리 시스터(Den stygge stesøsteren)>(2025, 에밀리 블리치필트)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그림 형제의 신데렐라 이야기, 맞지 않는 구두의 주인이 되어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발가락이며 뒤꿈치를 잘라내는 의붓자매들을 기억하는가. <어글리 시스터>의 주인공은 바로 그 ‘의붓자매’, 엘비라다. 영화에는 무도회 초대 인원을 조사하던 관리의 실수로 엘비라에게 ‘스텝시스터’라는 성이 붙는 장면이 나온다. 이 해프닝이 상징하듯, 원작과 무수한 각색 속에서 그의 캐릭터는 ‘못생기고 못된 의붓자매’라는 수식과 다르지 않았다. 에밀리 블리치펠트 감독은 그를 독립된 내면을 지닌 인물로 재해석해, 익히 알려진 서사의 줄기를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한다. ‘착하고 아름다운’ 기존의 신데렐라에게도 딱히 내면이랄 것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꿰뚫는 영화는, 설정을 표면적으로 뒤집기보단 자매들에게 입체성을 부여하는 방향을 택한다. 신데렐라-아그네스와 엘비라가 대립하는 까닭은 둘 중 하나의 천성이 못되어서가 아니라, 동일하고 공유할 수 없는 목적을 갖고 있어서다. 애초에 아그네스의 아빠와 엘비라의 엄마는 서로의 돈을 노리고 결혼했다. 차이가 있다면 아그네스는 생존을 위해 왕자와의 결혼을 계획하지만 엘비라는 사랑의 결실로서의 결혼을 꿈꾼다는 점이다.

눈여겨볼 것은 영화가 엘비라의 몸을 촬영하는 법이다. 특정한 미적 기준에 맞추어 그의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들이 유독 보기 힘든 까닭은, 사실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낯익어서다. 영화가 신체의 고통을 조명하는 방식은 분명한 방향으로 뻗는다. 코를 높이기 위해 부러뜨리고, 긴 속눈썹을 달기 위해 눈꺼풀을 뚫고, 작은 구두를 신기 위해 발가락을 자르는 묘사들은, 관객이 소화가능하도록 조절되거나 미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듬어지지 않았다. 과장도 거의 없다. 시간을 들여 클로즈업하는 촬영으로 날것의 공포는 충분히 전해진다. <어글리 시스터>는 메일게이즈의 필터를 거쳐 미화된 동화가 아닐뿐더러, 허구의 것으로 정제된 잔혹동화 역시 아니다.

또한 클로즈업되는 것은 엘비라가 코에서 짜내는 피지, 접힌 뱃살이나 튼살이다. 그것들은 그저 거기 있다. 영화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몸을 일정한 모양으로 가꾸는 행위들이 당연하게 소비되는 현상에 의문을 던진다. 기생충을 섭취한 탓에 탈모가 생겨 듬성듬성 두피가 보이는 머리나 숨겨놓은 디저트를 먹는 입, 결말부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부러진 코나 치아 등은 비체화되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이 엘비라의 이러한 모습에 공포와 혐오를 느끼기보단, 그의 고통에 공감하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실제의 코르셋을 입은 여성들이 감각하는 복잡한 욕망은 동시대에 닿아 있다. ‘코르셋’ 은유를 다수 여성이 알고 있으며 바디 포지티브가 트렌드로 확산되기도 하는 현대임에도, 깊이 뿌리내려 정형화된 미의 기준은 최첨단 자본주의와 결합해 그 가지를 더욱 촘촘하게 뻗는다. 영화의 의도는 성형수술로 대표되는 구체적인 외모 바꾸기와 꾸미기 사례들을 지적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을 향한 집착이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들여다보는 데에 있다.

숲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왕자가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조롱하자, 엘비라는 판타지 속 다정한 왕자를 상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의 환상은 잿빛 화면 위에 얹힌 핑크빛 글씨처럼 지속적으로 현실과 충돌한다. 엘비라는 그 색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선 자신이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원해서 왕자와의 결혼을 바라고 외모를 변형시킨다고 여기지만, 엘비라를 꿈꾸게 한 책의 저자는 율리안 왕자 본인이고 엘비라의 생김새를 깎아내린 것은 엄마를 비롯한 타인들이다. 그가 내면화한 바를 단순화하면 크게 두 가지다: 왕자와 결혼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그것이 내 꿈이라는) 환상, 그렇게 하기 위해선 특정한 외모를 획득해야 한다는 강박. 주입된 강박은 뱃속에서 불어나 영양분을 빨아먹으며 엘비라가 자신을 잊게 만든다.

엘비라는 숙녀 학교 교사가 건넨 기생충을 삼킨다. 찢어진 아그네스의 드레스는 아빠의 시체에서 꾸물대던 누에들이 꿰맨다. 이와 같이 영화는 페니스를 닮은 동물의 형상으로 내면화된 메일게이즈를 은유한다. 왕자와 결혼해 몰락한 가문을 부활시킬 수 있도록 호박에 마법을 걸어주는 아그네스의 죽은 엄마, 기절한 딸의 발가락을 기꺼이 마저 잘라주는 엘비라의 엄마 레베카, 엘비라를 조롱하는 교사, 성형을 격려하는 다른 교사. 미소지니적 가부장제에서 살아남은 기성 세대 여성들은, 자신을 포함한 여성들의 살을 좀먹는 구조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무도회장에서 정신을 놓은 채 휘둘리듯 춤추던 엘비라의 눈에 아른거리던 환각 속에서, 기생충은 젠더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의 구멍에 넘쳐흐른다.

인물들이 상징으로 소비되기 쉬운 형태의 극임에도 영화는 끝까지 현실에서 분리되지 않고 중심을 잡는다. 완벽한 완결을 욕심내며 인물들을 조종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가도록 놓아둔다. 속눈썹을 바느질하는 수술을 받고 눈을 뜨지 못하는 엘비라에게 케잌을 떠먹여줄 때, 다친 발로 서두르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엘비라를 내려다볼 때- 영화는 아그네스의 복잡한 표정을 조명하지만 이 실마리를 섣불리 연대의 제스처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모르지 않는 아그네스는 제 의지로 왕자의 소유물이 되고, 레베카는 딸의 눈을 피하며 젊은 귀족의 페니스를 입에 문다. 악녀와 선녀는 구분되지 않고, 아무도 응징당하거나 구원받지 않는다. 영화는 다만 엘비라의 곁에 동생 알마를 둔다. 남성의 도움을 받길 거부하고 말을 능숙하게 타며 좀처럼 웃지 않는 소녀. 그는 엄마와 언니들을 관찰하고 걱정하다 마지막 순간 엘비라를 돕는다. 그를 통해 영화는, 옆사람의 머리를 짓밟고 함께 늪에 잠기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겠냐고 묻는다.

스스로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원했던 자리, 엘비라는 거기서 튕겨나간 후에야 내장에 기생하는 기성의 시선을 끄집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그 결과로 망가졌다’고 여겨지기 쉬운 몸을 동정하지 않는다. 비틀어진 코와 부러진 앞니, 잘린 발을 ‘교정’하지 않은 채로, 엘비라는 알마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손으로 짚고 내려오며 비로소 편안하게 웃는다. 환상 속에서 왕자가 쏜 화살을 맞고 사랑에 빠진 여자가 구충약을 먹고 거대한 기생충을 토해내기까지. 뱃속 가장 깊숙한 곳을 겨냥해 주입된 이물을 찌르는 <어글리 시스터>는, 바디를 재료로 하는 호러를 전시하기보다는 바디에 관한 호러를 사유하는 영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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