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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9-23 00:15:43

[30th BIFF 데일리] '멸종 위기 사랑'의 단꿈

영화 <보태니스트> 리뷰

DIRECTOR. 이징(Yi Jing)

CAST. 예슬 자슬레(Yesl Jahseleh), 런쯔한(Ren Zihan)

PROGRAM NOTE.

열세 살 아르신의 인생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예르켄 삼촌이었다. 아르신에게 ‘식물학자’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식물채집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었던 삼촌은 3년 전 눈이 많이 온 겨울 마을을 떠났다. 전설 속의 노인처럼 영생의 샘물을 먹고 어디선가 나무의 일부가 되어 누워있는 걸까, 사마귀처럼 몸을 숨길 나뭇잎을 찾아낸 걸까. 도시의 일자리와 가을 목초지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부름에 형과 단짝친구와 첫사랑 메이유까지 멀리 떠나가는 와중에, 초원의 눈부신 태양과 개울 가득한 윤슬은 무성한 잎을 키워내듯 홀로 남은 소년을 훌쩍 자라게 했다. 이징 감독은 자신이 나고 자란 신장 북부의 자연과 토속정서를 바탕으로 한 이 데뷔작으로 2025년 베를린에서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 국제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최은)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는 이육사의 <유리창>의 구절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슬픈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던 적이 있다. 영화 <보태니스트>는 그 시구를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하게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만 같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선사한다.

 

영화는 장수의 샘물을 마셔서 가족도 죽고 모든 게 변해갈 때까지 죽지도 못한, 그래서 나무로 몸을 관통해 죽고자 했으나 그조차 실패한 채 백 년을 살아남은 남자의 전설을 들려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물가에 손을 담그고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댄 고운 소년의 이미지로 연결해, 과연 이 소년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소년 아르신의 생활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잎을 말려 표본을 만들고 그러다 종이가 바람에 날아가도 초연하게 줍는 성정. 좀처럼 요동하지 않는 곱고 순한, 식물을 닮은 소년이다. 그리고 소년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소녀 메이유가 있다. 소녀는 소년과 달리 한족이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둘의 첫사랑에서는 햇볕과 풀 냄새가 나고, 서로 다른 모국어의 소리가 들리고, 새 잎처럼 푸르고 싱그러운 빛이 난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풍성한 이해로 더없이 아름답다. 서로의 감성을 고스란히 이해하는 모습이 그만큼 귀해서일까. 지금은 사막 같은 언덕이지만 수십만 년 전 한때는 바다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을 기꺼이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 그래서 파라솔을 펴고 바닷가에 온 사람들처럼 누울 수 있는 마음.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어쩌면 사랑의 본질인지 모른다.

 

 

 

햇볕과 종이와 풀잎으로 차오른 첫사랑은 그러나 이내 깨어져야 한다. 두 사람이 사랑의 터전으로 삼았던 폐교에는 양들이 들어오고 사랑했던 시간은 이리저리 뜯기고 밀리고 넘어진다. 소년이 사랑했던 이들은 그렇게 하나씩 마을을 떠난다. 실종되어 버린 삼촌에 이어 첫사랑 소녀도, 도시살이에서 도망치듯 돌아왔던 형까지도 생을 불태울 자리를 찾아 다시 떠난다.

 

소년은 식물들과 고요함이 가득한 땅에 혼자 남아 있다. 아니 정말 혼자일까. 오래 전부터 쌓인 식물들은 그 땅에서 매몰되어 석탄이 되었고, 소년의 방에 들어왔던 염소처럼 지도를 좀먹으며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는 목가적인 동화 같은 아름다운 풍경 뒤에, 이 땅을 스산하게 만든 이들의 존재감을 아주 옅은 그림자로 깔아 두었다.

 

 

 

유순한 뿌리를 내리고 이파리를 서로 돌보며 자라나는 식물 같은 사람들의 자리는, 땅을 마구잡이로 파고 무언가를 찾아 흙을 들추는 이들에 의해 많이 유약해졌다. 이런 세상에서 작은 식물 잎과 가지의 가치를 아끼고 바라본다는 건, 마치 어두운 숲에서 작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소년 아르신은 기꺼이 그 길을 간다.

 

오래 전의 연인들은 서로를 기다려 불을 밝히고 손을 흔들었지만, 스마트폰과 덤프트럭이 있는 시대의 연인은 그럴 수가 없다. 기술의 발전은 떠나는 자와 남는 자를 너무 빨리 떨어뜨리고, 순정을 표현하기는 어렵게 만들었다. "내일이면 인류가 잃어버릴 멸종 위기 사랑"을 단꿈처럼 품은, 그 자리가 너무 아득해서 더 슬프고 아름다운 첫사랑의 초상이다. 이렇게 예쁜 꿈이라면 좀더 오래 꾸고 싶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09.18-26) 상영시간표]

2025.09.20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 (상영코드 202)

2025.09.22 12: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7관 (상영코드 384)

2025.09.24 17: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9관 (상영코드 538)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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