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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9-23 23:19:42

[30th BIFF 데일리] 우리는 빛 고운 세상에 그림자처럼

영화 <흐르는 여정> 리뷰

DIRECTOR. 김진유

CAST. 김혜옥, 저스틴 H. 민, 박대호, 공민정, 김종구

PROGRAM NOTE.

춘희는 세상을 떠난 남편 현철과 평생을 살아온 집을 떠나 자그마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남편이 아끼던 그랜드 피아노와 자동차와 함께. 하지만, 새집에 피아노를 들이는 게 여의치가 않자, 이웃 주민 민준의 제안으로 그의 아파트에 두기로 한다. 알고 보니 민준은 지휘자인 데다 엄마를 찾고자 무작정 한국으로 온 사연이 있다. 두 사람의 뜻밖의 만남에 이어 민준이 기특해하는 피아노 꿈나무 성찬까지 가세하면서, 나이도, 경험도, 삶의 경로도 전혀 다른 세 사람의 무해하고 선한 우정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들이 함께하는 얼마간의 시간은 부재하는 이가 남기고 간 과거의 흔적을 가치 있는 미래의 일로 돌리고, 새로이 태어나게 만드는 환원과 재생과 부활의 과정이기도 하다. 시종 품위를 잃지 않고 너른 품으로 생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껴안는 영화는 의연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참으로 귀한 우아한 세계이다. (정지혜)


 

 

이 영화를 많이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럴 이유가 너무 많아서. 우선 나는 김혜옥 배우의 발성과 발음 방식이 좋다. 누군가의 어머니나 시어머니가 아닌 주연으로 김혜옥 배우를 많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다. 게다가 <나는 보리>의 김진유 감독이다. 말갛고 착한 영화, 보고 있노라면 행복해지면서도 귀여운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자, 강원도를 거점으로 지역 영화의 힘을 계속 실어 온 감독이기도 하다. <나는 보리> 개봉 당시 차기작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믿고 보는 공민정 배우에, 조금 갑작스럽게도 저스틴 H. 민 배우까지?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전작 <나는 보리>에 이어 이번 작품 또한 강원도의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게 담겨 있다. 극 중 마치 주요 인물처럼 피아노가 등장하기에, 피아노를 주로 활용한 음악 또한 빛 고운 풍경에 세밀하게 어우러진다. 무엇보다 좋은 건 사람들 간의 어우러짐이다. 춘희(김혜옥)가 아파트로 이사하고 피아노를 옮기는 과정에서 위치가 마땅치 않자, 갑자기 튀어나온 민준(저스틴 H. 민)이 본인의 집으로 피아노 위치를 제안하고, 조율사 사장님(김종구)까지 합쳐 세 사람이 함께 피아노를 위치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민준의 표현대로 민준이 듣고, 사장님이 조율한다. 조금씩 각자의 몫을 한 끝에 나오는 연주, 그걸 듣는 게 참 좋았다. 모두가 자기 것만 딱 잘라 야무지게 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안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겠다는 신호탄 같아서.

 

 

 

그렇게 시작된 춘희의 아파트 살이는 적응할 일로 가득하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살림살이를 정리해 들어온 아파트와 팔려고 내놓은 본 집을 오가며, 춘희는 추억 서린 물건들에 쌓이는 먼지를 하나하나 정성껏 닦고 건사한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주차장에서는 세차를 하면 안 되고, 춘희가 마치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제사상처럼 챙기는 음악도 볼륨 제한을 받는다. 집을 보러 오는 이들은 애정 어린 집을 너무 쉽게 싹 밀고 트고 고칠 생각만 한다.

 

하지만 사이드미러를 훼손하고 말도 없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그 자리에 사이드미러를 붙여 주는 사람도 있다. 춘희는 자기답게 씩씩하게, 본인이 소중히 여기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살뜰히 주변과 관계를 맺어 나간다. 그 안에서 민준, 춘희의 가장 좋은 친구인 나경, 민준의 제자 성찬, 아파트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진다.

 

 

 

세대를 초월한 우정이어야만 가능한 사랑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세대를 넘어 얽힐 때 가장 큰 폭으로 성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자식 낳아봐야 어른이 되는 거라고 했나 보다. 하지만 꼭 자식을 낳지 않아도, 우리는 사람들과 새로이 얽히고 또 흘러가면서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할 수 있다. 그 삶의 조각들은 흐르는 물이 볕에 반짝이듯 참으로 아름답다.

 

 

 

어쩌면 우리는 빛 고운 세상에 그림자처럼 태어나고 떠나가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다. 서로의 얼굴에 그 빛이 고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빛을 따라 따뜻한 눈 맞춤을 할 수 있다. 그게 사랑 아닐까. 세월의 더께를 같이 닦아내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지가 쌓이는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우선이다. 기꺼이 보조를 맞추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이야기 안에도 그런 사랑이 흐르고 있지만, 영화 밖에서도 흐르고 있다. 실제 부부이기도 한 <나는 보리>에서 보리의 엄마아빠 역할을 맡았던 허지나 배우와 곽진석 배우가, 실제 본인들의 아기를 안고 수어를 쓰며 춘희의 업무 공간에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누가 봐도 콩쿠르 우승하러 태어난 것 같은 이름의 성찬(성이 조 씨다)을 독려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모어 선생님이다.

 

이들의 본체가 반가운 동시에, 이들이 표상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일상에 녹아 있는 모습 또한 반갑다. 너무 당연하게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아, 굳이 조명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자연스러운 이 모습이 아름답고 정겹다. 누군가는 계란 프라이에 설탕을 먹고, 누군가는 까만 차에 하얀 사이드미러를 단다. 그러면 또 뭐 어떤가. 과일 하나에 마음이 활짝 열리기도 하고, 작은 선행이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번지기도 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각자 흘러가지만 또 서로에게 흘러가는. 서로의 먼지를 털어주고 또 이따금 이런 따스한 영화를 보며 함께 걷고 싶다.

 

그래서 말입니다... 나는 이 영화가 아름다운 K-정서의 집약체라고 생각해서, 이런 영화야말로 천만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만한 대중적 감성까지 충분히 갖춘 것 같은데... 이 영화가 개봉하면 저와 함께 천만영화만들기운동본부를 발족해 보실 분 계신지? 이 영화의 여정 또한 응원하는 마음으로 같이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09.18-26) 상영시간표]

2025.09.20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상영코드 207)

2025.09.22 19:30 CGV센텀시티 6관 (상영코드 361)

2025.09.23 16:00 CGV센텀시티 5관 (상영코드 435)

2025.09.24 14: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10관 (상영코드 541)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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