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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2025-09-23 23:44:48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조명한 알려지지 않은 영웅에 대해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리뷰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것은 한때 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였고, 재능 있는 화가이자 사진가,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던 당시의 참상을 조명한 영웅, '리 밀러'에 대한 전기 영화다. 

 

 

​뮤즈, 사진가, 아내 


 

때는 1930~40년대. 한 차례의 전쟁의 폭풍이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났고, 찰나 같은 평화를 누리던 때. 한때 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였으나 오직 피사체로만 남는 일에 염증을 느낀 리 밀러가 재능 있는 사진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다. 밀러는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우며 프랑스 시골의 낭만을 만끽한다. 그들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전운이 감돌지만, 막연한 낙천과 몇 잔의 술은 그런 시름은 곧 잊게 하고, 예상치 못한 사랑은 쉬이 다가온다. 밀러는 자신의 독특함을 알아차리는 롤랜드와 사에 빠지고, 정착할 줄 모를 것만 같던 여인은 마침내 영국 땅에 뿌리 내릴 것도 같았다.

 

 

 

그러나 찰나 같은 평화는 파시스트들의 군화발 아래 무참히 짓밟힌다. 온 유럽이 나치의 발 아래 놓인 때, 영국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언제 폭격이 터지고 식량이 고갈될지 모르는 그 불안정한 시기에, 남자들이 전쟁에 지원하거나 차출되어 빈 자리를 메꾸는 것은 길 떠나지 않은 그밖의 사람들, 이를테면 그 이전까지는 사회 진출이 더뎠던 여성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좀처럼 재능을 발휘하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던 밀러에게 그것은 일종의 기회였을 것이다. 유명 잡지사인 '보그'에 취직해 힘든 시기의 국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진을 찍는 것. 밀러는 훌륭한 사진가였고, 그 일을 잘 했다. 카메라를 들고 나아갈 때마다 여성이라 부딪히게 되는 유리 천장을 마주하지만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도 그 일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그 시기에 그런 것은 꿈 같은 일이었으리라. 

​게다가, 밀러에겐 프랑스에 두고 온 자신의 친구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밀러는 그 혼란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뭔가라도 해야만 했다. 그래서 했다. 그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종군 기자로 나서면서.

 

전쟁의 참상을 조명하다

 

 

그 전장에서, 밀러는 차마 세상이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승전의 이면에 가려진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다. 승전을 기념하느라 차마 보도되지 않은 죽어가는 병사, 학대 당한 소녀,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시신들을. 거기서 그가 목격한 것은 수치를 빌미로 숨겨지고 잊혀진 다른 누군가의 역사였다.

 

 

 

그 모든 끔찍한 죽음과 비참의 사이에서, 밀러는 독일군 남자의 꾀임에 넘어간 프랑스 여인들이 마녀로 낙인 찍히거나, 미군 남성이 프랑스 여성을 강간하려는 것을 본다. 밀러는 그로 말미암아 전쟁이 승리와 패배만의 문제가 아니며, 입막음과 숨죽임, 죽음과 생존, 사라짐과 남아 있음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카메라 셔터음은 유독 무거웠다.

그러나 밀러의 노력은 쉬이 외면받았다. 기껏 고취된 국민들의 사기를 꺾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밀러의 사진들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차마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역사들

 

밀러의 아들은 그에게 묻는다. 왜 그 모든 사실들을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아마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그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밀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재능과, 그가 목격했던 많은 것들을 뒤로 하고, 평범한 가정의 좀 불행하지만 또 좀 행복한 아내이자 어머니로 늙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을 마냥 실패한 영웅의 이야기라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밀러는 그러한 혼란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던 그림자와 응달의 삶 위로 기꺼이 플래시를 터트렸다. 끔찍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인화하고, 그 사진들을 투고했다. 그리고 차마 영국 보그 지에는 실리지 못했던 그 사진들은 편집장인 위더스의 시도로 말미암아 뉴욕 보그 지에 실렸다. 어쨌든 밀러는 시도했고, 세상은 얼마쯤의 진실을 알았다. 그런 치열한 노력들을 우리는 아쉬움은 마음이 들지언정 감히 실패했다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이를테면 한 여성 사진가의 치열한 노력의 흔적이자, 승자의 역사에 취해 우리가 차마 보지 못했던 사실들에 대한 후회, 또는 반성의 산물 같다. 아들 안소니가 밀러의 사진들을 보며 지난날의 어머니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밀러가 보고 들은 일이 2025년인 지금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 영웅이 경험한 바는 그다지 요원한 일이 아니다. 내가 글을 쓰는 바로 이 순간에도 전쟁은 벌어지고 있고, 이토록 발전한 21세기에도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은 알게 모르게 인류의 절반을 가로막고 있지 않나. 그러니 밀러의 노력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그러한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저 지나간 일을 애틋해 하는 것을 뛰어넘는, 실제적이고 합리적으로 필요한 일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여자>는 많은 의미를 가진다.

 

 

 

 

 

 

작성자 . 토리

출처 . https://brunch.co.kr/@heatherjorules/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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