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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영화2025-09-24 15:36:16

이것은 게임인가 영화인가 「탈주」

영화 「탈주」 리뷰

 

 

 

 

영화에서 앵글은 문법이다.

 

 

왕가위나 알폰소 쿠아론이 카메라의 위치와 방향을 활용하는 방식을 봤을 때, 앵글이란 소설의 '문체'와 같은 지위를 가진다. 그러니까 앵글을 보면 감독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태도가 보인다는 말.

 

 

그런 의미에서 「탈주」의 앵글은 단순 명료하고 직선적이다. 솔직하다. 그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고 단점이라면 단점이겠다.

 

 

 

“내 앞 길 내가 정했습니다”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군부대.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 ‘규남’(이제훈)은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북을 벗어나 원하는 것을 해 볼 수 있는 남한으로의 탈북을 준비한다. 오랜 시간 철저하게 준비해온 탈주. 비무장지대의 지뢰 위치와 철책의 개구멍까지 모두 표시해둔 지도를 완성할 찰나, 규남의 계획을 알아차린 후임 '동혁'은 규남의 지도를 가지고 먼저 탈주를 시도해버린다. 새치기를 할 거면 성공이나 할 것이지 그걸 또 실패해서 잡혀버린 '동혁' 탓에 규남은 함께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규남’을 (탈주병을 체포한) 영웅으로 둔갑시켜 출세하려는 장교 '현상'(구교환) 덕에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규남'은 탈주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데..

 

 

영화는 시종일관 어떻게든 북한을 탈출하려는 규남의 뜀박질과 '현상'의 섬세한(?) 추적을 보여준다. 그 외 다른 모든 것들은 생략됐다. 앞서 언급한 앵글부터가 그렇다. (「탈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초반부 규남이 철책까지 질주하는 장면부터 카메라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규남을 따라 아주 빠른 속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횡 이동을 하는데, 이런 카메라 움직임은 사실 흔하게 볼 수 없는 연출이다.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시점'이라고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 카메라 자체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건 자칫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샘 맨데스 감독의 역작(오스카 촬영상을 받기도 했던) 「1917」 의 카메라 이동과는 다른 경우다. 롱테이크 핸드헬드로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관객이 전장에 직접 참여해 있는 느낌을 줬던 「1917」과는 달리, 「탈주」의 그것은 오히려 몰입을 깬다(이동의 방향과 형태가 자연스럽지가 않다). 카메라 이동뿐만 아니라, 컷 편집 방식도 관객의 '몰입'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동혁'의 첫 등장 시퀀스에서 사건의 증거물품을 점프 컷으로 연속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그렇다. 심지어 점프 컷으로 보여주는 물건들은 '동혁'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냥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감독의 연출이 거기서 그쳤다면, 영화는 '별로인 영화'에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탈주」는 나름의 매력은 갖춘 영화다. 영화가 그런 식으로 '몰입'을 깨서 얻은 것도 있다. 바로 관객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것이다. 정신없이 질주하는 '규남'의 달음박질을 넋 놓고 보게 만드는 게 「탈주」의 목표이자 미덕이다.

 

 

빠른 호흡의 컷편집과 앵글은 서사를 잃은 대신 리듬감을 얻는다.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이미지들은 적당한 완급조절로 일관적인 방향으로(횡방향) 병치된다. 적당한 순간에 스펙터클하고, 적당한 순간에 이완된다. 그럼으로 관객들은 일단 계속 보게 된다. 일종의 맛있는 시각적 자극, '방치형 게임'처럼 말이다. 잘 설계된 리듬감과 스펙터클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도 영화의 한 측면임은 분명하기에, 분명한 성취는 있는 셈이다.

 

 

다만, 잃은 게 좀 크다. 일단 몰입은 차치하고, 이야기적으로 구멍이 너무 많다. '규남'이 그토록 탈주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부터가 납득이 안되고('내 앞길은 내가 정한다'는 게 끝이다), '동혁'의 뒷배경이라든지, 유랑민들은 갑자기 왜 나온 건지, 그들은 왜 '규남'을 도와주며, 애초에 북한에 실탄과 라이플로 중무장한 유랑민이 있긴 한지.. 등등 모두가 구멍이다('선우민(송강)은 도대체 왜 등장하는 건지?).

 

 

이토록 숭숭 뚫린 서사적 허점에도 불구하고 「탈주」의 러닝타임은 1시간 30분 남짓이다. 분량의 압박 때문에 생략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영화가 그런 거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동혁'이 현장에 나가지 않고 무전기로 전해 들려오는 소리만으로 작전을 지시하는(하지만 왜..?)'게임적'인 장면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피아니스트 설정이 생겼고, 쫄깃한 총격전 장면이 필요해서 밑도 끝도 없이 유랑민들이 튀어나오는 식이다. 앞서 언급했던 '동혁'의 첫 등장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그냥 박진감 있는 리듬감'만'을 위한 컷들인 셈이다.

 

 

네이버 영화 평점란이나 왓챠피디아에서 「탈주」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점 차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탈주」는 미비한 점이 많다(이야기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그러나 그게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모든 문화 장르는 어느 정도 기능적인 면이 있고, 특히 영화는 그중 단연코 으뜸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매력과 미덕을 갖췄다.

 

 

해서, 나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봤는가?

 

 

무슨 소리? 난 영화를 본 적 없다. 방치형 게임을 했을 뿐..

작성자 . 먼지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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