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072025-09-25 09:50:58
[30th BIFF 데일리] 여행에서 그가 찾은 것은
영화 <여행과 나날> 리뷰
감독 미야케 쇼(Miyake Sho)
출연진 심은경(Eun Kyung Shim), 신이치 쓰쓰미(Shinichi Tsutsumi), 유미 카와이(Yuumi Kawai), 만사쿠 타카다(Mansaku Takada)
시놉시스
어느 여름, 도시에서 온 여자는 한적한 바닷가에서 어머니의 고향을 찾은 남자와 우연히 만난다. 어느 겨울, 슬럼프에 빠진 작가는 눈으로 덮인 산속에서 홀로 여관을 지키는 주인장을 찾는다. ‘이’는 몇 해 전, 한 감독의 제안으로 쓴 영화 시나리오를 떠올릴 때마다 여행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멘토였던 교수가 남긴 유품을 지닌 채, 말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홀연히 여행을 떠난다. 심은경이 연기하는 ‘이’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쓰는 행위를 ‘여행’에 비유한다. 여행의 비일상성이 안겨주는 놀라움과 당혹감은 비 내리는 바닷속에서 함께 헤엄치며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예고하기도 하고, 인근 마을 연못에서 비단잉어를 포획하는 재미가 경찰 출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 속 영화의 여름 바다 풍경과 대비되는 겨울의 설경 속에서 현실의 경계는 몽롱하게 흐려진다. 매혹의 장이 펼쳐진 한여름 낮의 추억, 그리고 한겨울 밤의 꿈 같은 소동은 어느새 차가운 물 속으로 사라진다. 미야케 쇼의 <여행과 나날>은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과 『혼야라동의 벤상』 두 편을 독특한 액자식 구성으로 엮은 작품이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어 온 촬영감독 쓰키나가 유타는 두 계절 속에서 펼쳐지는 두 이방인의 여정을 고요하게 담아내며, 후반부를 이끌어가는 심은경과 쓰쓰미 신이치의 담백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연기가 돋보인다. (박가언)
-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어서? 유명한 예술 작품을 관람하고 싶어서? 혹은 그럴듯한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현실을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공통점이 있다.
알지 못하는 길이나 처음 보는 풍경, 비일상적인 곳을 돌아다니다보면 현실에 놓인 문제들을 잊게 된다. 돌아오면 다시 일상을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여행을 하며 느끼는 해방감은 일시적이다. 아주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날아가버리는 꿈의 내용처럼 잊어버리기도 쉽다.
그래서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한다. ‘여행과 나날’은 꿈과 같은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상상 속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소소한 이야기다.
‘일상이란 주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보면 온통 말에 갇히게 된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며 현재 한국어, 영어,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다.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며 말로 꽉찬 하루를 보내고 나면 종종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일상적인 것들이 조금씩 나를 지치게 만든다. 내가 자주 쓰는 언어. 매일 드나드는 집. 지금 하고 있는 일. 나의 하루에 익숙하게 자리 잡은 것들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일상이라는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의 것’이라는 어떤 책임감을 갖게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 ‘이’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극본을 쓰는 일은 마치 여행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방인이라는 위치에서 애매하게 일상을 유지하는 일은 더 힘들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의 멘토였던 교수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감정적으로 일상의 리듬을 흔들어놓지만 물리적인 변화는 크지 않다. 여전히 ‘이’의 하루는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그러한 괴리 사이에서 주인공은 문득 여행을 결심한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은 매 순간이 새롭다. ‘이’는 숙소를 구하지 못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여관으로 찾아간다. 그곳에는 오래된 여관을 운영하는 한 아저씨가 있다. 오랫동안 손님이 오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곳에서 ‘이’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눈이 쌓인 거리를 산책한다. 그곳에서는 시간도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면 상상력이 풍부해질까 아니면 생각이 많아 우울해질까. 아마도 답은 ‘둘 다’일 것 같다. ‘이’가 쓴 극본 속 남자와 여자는 한적한 바닷가 근처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 고요는 내면에 있는 감정을 뒤엉키게 하거나 충동적으로 바다에 뛰어들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말과 같은 인공적인 요소가 끼어들지 않는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 그 자체에서 이상하게도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느리고 잔잔한 장면의 흐름을 따라 영화를 보다보면 사소한 일들이 엄청난 사건이나 회심의 유머처럼 느껴진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토끼 이름과 문짝 그림. 얼어붙은 백만 엔짜리 비단잉어. 도둑질 이후 남겨진 발자국과 카메라. 밤중에 찾아온 경찰들. 벌어지는 사건들은 소소하지만 감독이 남겨 놓은 작은 틈 속에서 관객들은 저항없이 웃어버리게 된다.
화면에서도 인공적인 조명을 덜어내고 낮과 밤의 빛을 그대로 담는다. 어두운 장면에서는 인물의 얼굴 대신 실루엣과 목소리에 집중한다. 인물과 공간을 클로즈업하지 않고 멀리서 관찰하듯 그들을 바라본다. 꾸며내지 않은 화면들은 관객들이 감당해야 할 어떤 말과 같이 부수적인 것들을 버리고 여행을 하는 듯한 해방감을 준다. 한적한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는 전반부는 여름의 풍경을 만끽하게 한다면 눈으로 온통 하얀 후반부는 겨울의 풍경을 만끽하게 한다.
‘이’가 며칠간의 여행을 마치고 눈길을 걸어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가 여행에서 어떤 이야기를 얻고 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간 그녀가 다가올 나날들을 잘 보낼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공식 상영을 마친 '여행과 나날'은 올겨울 12월에 국내 개봉할 예정이다.
[상영 일정]
2025.09.19. 12:1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상영코드 078)
2025.09.20. 12:30 영화의전당 소극장 (상영코드 170)
2025.09.24.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7관 (상영코드 535)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9월 17일 ~ 9월 26일
- 1
- 200
- 13.1K
- 123
- 1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