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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감독 홍원찬이 낯설어서 영화를 보고 나와 찾아봤다. 이 영화는 세 번째 감독 작품이지만, 이미 '추격자', '작전', '황해'를 각색한 경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은 검증된 것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목을 끌고 다니는 듯한 격렬한 감정이 이어졌다.
하드보일드 액션 느와르.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단어다. 나중에 봤지만, 포스터에도 '하드보일드 추격 액션'이라고 써 있는 걸로 봐서, 감독은 '하드보일드'한 연출에 특히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것이, 주인공 인남(황정민)과 레이(이정재)는 영화에서 웃지 않는다. 아니, 웃을 수 없다. 이들이 놓여 있는 상황은 결코 웃을 만큼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예정된 결말을 향해 직진하는 두 사람의 운명은 그들이 살아온 과거의 집적이며, 스스로가 만든 비극의 결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훌륭하다. 재미있고, 잘 만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한국영화의 작품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생각도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라면, 제작비, 연출, 배우의 연기, 미장센, 시나리오, 영화의 미학적 수준 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을 거론할 수 있는데, 제작비는 헐리우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예산이지만, 연출, 배우의 연기, 시나리오 등은 거대 자본을 들인 영화보도 뛰어나다는 점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다.
영화의 미학적 측면으로는 한국영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서사구조가 있는데, 이미 홍원찬 감독이 이전에 참여한 작품들 '추격자', '황해' 같은 영화만 봐도 서사와 인물의 특별한 개성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영화가 '세계화'하고 있다는 증거를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분명 한국영화지만, 주요 배경은 태국 방콕이다. 주인공은 모두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주인공들은 방콕에서 만나게 된다.
기존의 한국영화에서도 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많지만, 이 영화는 방콕이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구체적, 물적 토대로서 작동하고 있으며, 방콕의 최대 조직폭력배와 연결되면서 갈등의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고, 서로의 이해관계를 비틀며,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효과를 보인다.
두 사람은 '악한'이지만, 각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인남과 딸의 관계는 '레옹'과 '아저씨'에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그건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다. 레이의 폭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그에게서 '터미네이터'의 흔적이 보이는 것 역시 우연일 뿐이다.
하드보일드는 그 자체로 비극이다.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하드보일드'가 아니다. 따라서 주인공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으며, 다만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끝낼 것인가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영화에서 하드보일드는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서사, 다른 하나는 연출이다. 영화에서 장르로서의 하드보일드를 말하려면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성립해야 한다. 비극으로 치닫는 서사와 미장센으로서의 하드보일한 연출. 이 영화는 두 가지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영화다.
물론, 트렌스젠더(아니면 여장남자) 유이(박정민)의 등장이 하드보일드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 있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유이의 모습은 게이의 전형성, 통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 그것이 영화의 분위기와 겉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이 캐릭터에 대한 두 가지 설정이 가능한데, 지금처럼 겁 많고, 여성스러운 '유이'의 모습으로 등장해 인남을 돕는 것과 하드보일드한 설정에 걸맞게 냉정하며 잔인한 인물로 변하면서 두 주인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방식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희망'을 보이는 것이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와 전혀 다르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에게 최소한의 숨구멍이라도 틔워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인남의 바람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연출은 미장센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만, '촬영감독'이 따로 있을 만큼, 촬영은 감독의 전적인 재량권에서 벗어나 있다. 홍경표 감독은 하드보일드한 장면을 위해 극적인 장면에서 빠르거나 느린 화면을 만든다. 홍경표 감독이 기존의 영화 - 설국열차, 곡성, 버닝, 기생충 등 - 에서 분위기에 어울리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솜씨를 보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내는 촬영 기법을 매우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좁은 골목에서, 실내에서 벌어지는 격투가 자주 일어나는데, 액션은 과장되지 않되, 관객이 보기에는 역동적인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속도를 느리게 혹은 빠르게 조절함으로써, 폭력의 강약과 충격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악한이 악당을 상대로 싸운다. 영화에서 평범한 사람이 죽는 경우는 딱 한 번, 인남의 애인 영주의 죽음 뿐이다. 그 외 모든 죽음은 악한이 악당을 죽이는 것이다. 정부 특수요원이었던 인남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살인청부업자로 살고, 재일동포 조폭 레이는 일본에서 태어난 한인 동포이며 이들은 제3국 태국 방콕에서 만나 어쩔 수 없이 방콕 최대 범죄조직을 상대로 싸운다.
인남의 삶은 자기 의지와 관계 없이 비틀렸기에, 그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고, 숨을 쉬고, 밥을 먹어도 그의 삶은 마치 무덤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반면 레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정'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그의 과거가 그를 '백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불우하고, 불행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남은 딸 유민을 구하기 위해 방콕 최대 폭력조직의 중심으로 뛰어들어가고, 레이는 인남을 잡기 위해 그 뒤를 쫓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방콕 최대 폭력조직과 맞닥뜨린다. 이 과정에서 방콕의 폭력조직은 와해 수준으로 망가지고, 태국 전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한국사람의 등장으로 들썩거린다. 만약 주인공의 추격전을 국내에서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차이는 무엇일까.
기존의 액션 영화에서는 배경 공간을 익숙한 곳으로 한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국내의 크고 작은 도시, 누구나 알고 있는 장소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편하다는 장점과 함께 낯익어서 식상하다는 뜻도 된다. 배경 공간을 외국으로 옮기면서, 외국인, 외국사회 속으로 주인공이 들어가는 방식은 낯설지만 신선한 모험이고, 비슷한 이야기라도 '낯설게 하기'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낯설게 하기'는 서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다. 공간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인물의 생각과 행동 역시 낯설게 보이고, 관객은 공간과 인물의 낯선 모습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영화에서 방콕 시내와 태국 배우들이 단지 배경이나 소재로 등장하지 않고, 서사에 개입하는 구체적 역할을 통해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영화는 추격과 액션을 느와르로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중요한 요소를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경이 되는 태국 방콕에서 주인공들은 태국 최대 폭력조직과 만나게 되는데, 이 폭력조직이 벌이는 '사업'이 상상을 초월한다.
불법 마약판매, 성매매, 인신매매, 장기매매, 경찰 뇌물 공여, 아동 노동 등 최악의 범죄를 다 저지르고 있다. 따라서 방콕 범죄조직과의 싸움은 인남, 레이 모두 조금의 거리낌 없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특히 인남은 딸 유민을 구출해야 하는 절박함과 그들의 잔혹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기 마련이지만, 인남을 바라보는 시선은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묻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인남의 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한 때 국가의 비밀요원으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버려진 개인, 그것은 국가의 폭력이며, 인남은 그 폭력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최근 한국영화가 선전하고 있다. '강철비2'도 훌륭하고, 이 영화 역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팬으로 매우 행복한 경험이다. 홍원찬 감독이 각색한 기존의 영화들 - 추격자, 황해 등 - 도 한국영화에서 빛나는 영화였듯이 이 영화도 최고의 영화 목록에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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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링 이브 1,2,3]: 싸이코패스 살인마와 MI6 요원의 추격전, 그리고 러브스토리
▶싸이코패스 살인마와 MI6 요원의 추격전, 그리고 러브스토리
서로 다른 조직에서, 서로 다른 목표로 일하지만 소름 끼치게 닮은 이브와 빌라넬. 이브는 MI6 요원이고, 빌라넬은 싸이코패스 살인마다. 점차 서로를 알아가는 둘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 분노가 아닌 사랑이다. 동료를 죽이고 가족을 해친 살인마에게 끌린다는 것, 자신을 좇는 요원에게 끌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설정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낸다.
핵심은 파괴적 여성 욕망이다. 젠더에 따라 굴절된 불평등한 욕망 구조로 인해 여자들의 솔직한 욕망은 늘 파괴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여자들의 욕망이 기존 질서를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않는 여성 욕망, 남자가 아닌 여자를 향하는 여성 욕망이 용납되지 않은 이유다.
살인은 파괴적 여성 욕망의 은유다. 빌라넬은 〈킬 빌〉의 우마 서먼처럼, 애초부터 사회에 순순히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없는 ‘여왕벌’이다. 여왕벌이 여왕벌로서 존재하려면 자신을 옥죄는 주변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이브만이 빌라넬의 파괴를 다르게 독해한다. 이브는 빌라넬의 파괴에서 해방감, 흥분, 전율을 느낀다. 기존의 도덕률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빌라넬에게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 대신,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남편 대신 빌라넬을 선택한다.
다만 시즌이 지날수록 드라마의 전개가 처진다는 게 아쉬웠다. 이브와 빌라넬의 서로를 향한 ‘기괴한’ 욕망은 어느 순간부터 질질 끌린다. 둘 사이의 강렬함이 소진되니, 불필요한 캐릭터 설명과 개연성 없는 인물이 늘어난다. 시즌제 드라마의 어쩔 수 없는 한계기도 하겠지만 조금 짧더라도, 압축적으로 둘의 사랑을 진득하게 감상하고 싶었다는 아쉬움은 떨쳐지지 않는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률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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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걸 왜 봐요마 소다팝 마이 리틀 소다 팝!
이 글은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엘르/넷플릭스
5분만 참으면 된다.
그러면 웬만한 뮤지컬 뺨치는 퀄리티의 노래들도, 이 세상 만으로도 모자라서 저세상까지 호령하는 아이돌들도. 게다가 왕크왕귀의 정석답게 왕발로 쓰러트린 것들에 집착하는 더피도 모두 누릴 수 있게 된다.
사실 최근에(?) 개봉한 애니메이션이었던 [퇴마록] 덕분에 한동안 마음에 드는 작품은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제목에다 떡하니 케이팝이라는 말이 박혀 있어서 거부감이 좀 컸던 것도 부인하지는 않겠다. 설상가상으로 재생버튼을 누르자마자 얼토당토않은 소다팝 타령을 해대는 바람에 살짝 위기가 왔지만, 정말로 딱 5분이다. 그것만 넘기면 된다.
사진출처:연합뉴스
생각해 보면 반가운 점(?)들이 참 많은 작품이다. 한국적인 색채가 가득하기 때문에 그다지 씹어 삼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 샤이니 이후로는 아이돌의 계보에서 멀어진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부담감 없는 노래와 콘셉트(소다팝 제외)이었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에 대한 편견이 서서히 사라져서, 보면서 꽤 몰입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 사람들을 제외하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요소들을 가득 담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이질감을 전형적이지만 언제나 먹히는 서사와 구조로 안정화시켰다. 게다가 고리타분함을 피하기 위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먹히고" 있는 한국형 아이돌의 모티프를 차용한 셈이다.
사진출처:미주 중앙일보
이 절묘함은 작품이 가진 확실한 차별점이 된다. 그리고 그 차별점은 신선함이 되어 이 낯선 것들로 가득한 작품의 배경인 한국, 더 크게는 한국 문화(불교 포함)에 대한 궁금증까지 불러일으킨다. 덕분에 우리는 사자 보이즈가 갓끈 돌리는 것에 가장 열렬한 물개박수를 치는 관중들이 되는 동시에 저걸 나는 알고 있다.라는 자부심 비슷한 것 마저 느낄 수 있게 된다.
분명 소다팝이 울려 퍼질 때 머리를 싸매며 꺼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말했던 나였는데 작품이 끝나고 나니 나도 모르게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내가 싫어요마 소다팝 마이 리틀 소다팝.
[이 글의 TMI]
1.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웃겼던 것은 HAN의원이었음.
2. 더피 시무룩해할 때 나도 같이 시무룩해짐.
3. 그래도 저승사자한테 가터벨트는 너무한 거 아니오.
#케이팝데몬헌터스 #메기강 #크리스아펠한스 #아덴조 #안효섭 #메이홍 #김윤진 #켄정 #이병헌 #넷플릭스 #OTT #애니메이션 #판타지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CGV #롯데시네마 #영화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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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됐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던, <미드 90>
* 글에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드 90 Mid90s, 2018 제작
미국 | 드라마 | 85분
감독: 조나 힐
시작됐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던, <미드 90>
출처: 영화 <미드 90> 스틸컷
여기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스러운 손길을 느껴본 적 없는 아이가 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나, 진정으로 함께 산다고 확신할 수 없어 외로운 13살 사춘기 소년, 스티비. 아빠의 존재는 궁금하지 않고 엄마의 관심은 오직 생계유지이며, 형(이안)은 무차별적인 폭력만 가한다. 가족이지만, 큰아들 생일에 남자친구 얘기를 하며 부끄러워하는 엄마와 동생이 건넨 선물을 똥 씹은 표정으로 내던지는 형을 어린 스티비가 온전히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다. <미드 90>는 스티비의 삶을 이루는 시공간을 담아내는 일에 주력한다. 왜 왜소한 아이의 몸에 푸른 멍이 가득한지 설명하지 않는다. 처음엔 그를 방황하는 청춘으로도 표현하지 않는다. 매일 가족 눈치를 보며 아슬아슬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바쁜 아이에게 ‘방황’과 ‘청춘’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가혹한 처사니까. 따라서 스티비의 세계는 외줄타기처럼 아찔하다. 불안이 가득한 사건들은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그 사건들은 전부 시작만 존재할 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어떤 사건이 스티비를 무자비하게 삼켜버릴지 짐작할 수 없기에 영화 <미드 90>은, 해피엔딩은 물론 치유 과정도 섣불리 기대할 수 없는 이야기로 우리를 맞이한다.
스티비는 형의 방 안에서 세상을 배우며 산다. 양아치 같은 형을 혐오하면서도 동경하고 닮고 싶어 한다. 우연히 거리에서 어른의 기세에 눌리지 않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동네 형들을 발견하기 전까진 그랬다. 형의 주먹질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스티비는 보드를 타고 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낯선 그들에게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저들과 함께라면, 자신을 옭아맨 현실에서 탈주할 수 있을 거란 강한 확신에 다음 날부터 동네 형들의 아지트 보드 가게로 출근 도장을 찍는다. 서클 눈치를 보며 며칠을 보냈을까, 마침내 서클 일원 로벤이 스티비에게 악수를 청한다. 스티비는 로벤의 ‘함부로 고맙다고 말하지 말라’는 첫 번째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들의 언어를 열심히 배우고, 행동강령을 습득하며 서클에 스며든다.
출처: 영화 <미드 90> 스틸컷
"땡볕! 너도 갈래?"
서클의 입단 조건은 명확했다, ‘우리와 똑같이 하며 살 것’. 스티비는 거친 욕설과 도를 넘는 일탈을 일삼는 서클에 온전히 소속되기 위해 정말, 죽도록 노력한다. '멋들어진 보드를 타면서 술과 담배를 하고,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틈틈이 섹스를 즐기는 어른'이 되고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활용한다. 서클은 스티비에게 자유이자 꿈이며, 우정이자 사랑이 꿈틀거리는 곳,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자 유일한 자부심으로 정의된다. 형의 낡은 보드를 가장 아끼는 노래 테이프와 바꾸고, 위험한 도전을 서클 일원으로 함께하고, 엄마 돈을 훔치는 등 숱한 노력 끝에 스티비는 새 보드와 서클의 일원임을 인증하는 별명, ‘땡볕’을 얻는 데 성공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드디어 그도 험악한 세상으로 내던져진, 방황하는 청춘이 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과거, 엄마 돈을 훔치기 전에 빗으로 자기 허벅지를 세게 문지르며 자신을 체벌했던 아이는 달라진다. 집 안에서 혼자 고독과 외로움을 피하고자 했던 자학을, 보드를 타는 서클 친구들과 함께 차들이 다니는 도로 위에서 마음껏 행한다. 그들에게 자학은 자학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는 세계에선 당연한 일과였고, 맥없이 흐르는 시간 속의 즐거움이었으며, 자연스러운 경험 축적이었다. "어차피 우린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죽어, 그러니 그냥 즐겨!" 서클 일원, 존나네의 말처럼, 불합리와 불안정, 불건전함은 곧 삶의 규칙이자 지혜였으니까.
출처: 영화 <미드 90> 스틸컷
서클과의 교류에도 스티비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형의 무시무시한 폭력과 엄마의 강압적인 폭언은 계속됐다. 스티비는 하루빨리 그 누구도 함부로 자신을 건들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분노를 표출하고, 느껴보지 못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껴야 했으며, 이는 가족을 이해하는 일과 가족과 함께 사는 과정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 결과 스티비는 더 위험한 상황 속에 뛰어든다.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손에는 술병을 들고 다니며 기꺼이 몸을 땅바닥에 내리꽂는다. 그가 내놓을 수 있는 거라곤 종잇장 같은 몸뿐이고, 친구들과 평생 함께할 수만 있다면 온몸이 부서져도, 심지어 죽을 뻔해도 좋으니까. 스티비의 결연한 목표가 서클 일원들의 삶으로 연결되고 흡수되자, <미드 90>은 기다렸다는 듯 스티비에서 멈추지 않고 서클 개개인이 가진 속사정을 이야기 곳곳에 털어놓는다.
레이, 존나네, 4학년, 루벤도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동시에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중이다. 영화는 서클 활동을 통해 이들이 사실 자기 미래를 향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을 설명한다. 사회는 물론 가족에게까지 보호받고 도움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탈출해 자기와 같은 동족을 만나, 새로운 가족을 결성한 이들을 응원한다. 세상 밖으로 나온 스티비의 필연적인 성장통과 서클 친구들의 내일을 향한 의지를, 넘어지고 깨져도 끝끝내 일어나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는 스케이트보드로 전달한다. 또한 서클 이야기를 비행 청소년들의 사건 사고로 치부하지 않고 사회가 낳은, 묵과할 수 없는 문제임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문제투성이인 서클이 이들의 유일한 안식처로 이해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스티비가 보드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 게 아니라 오히려 안도감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이유이다. 이후 스티비는 존나네의 음주운전으로 크게 다치고 만다. 그러나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구들의 우정과 연대에 활짝 웃는다.
출처: 영화 <미드 90> 스틸컷
영화 속 어른들은 행동하지만, 서클의 멈추지 않는 보드 질주에 한없이 무력하게 비친다. 도로의 무법자들을 막는 일과 비행 청소년과 자기 아들을 구분하는 일에 급급할 뿐이다. 하지만 <미드 90>은 어른을 절대 생략하지 않는다. 방관자든 제삼자든 구경꾼이든 상관없이 보드를 타는 서클 주변에 항상 위치하게 하고, 두 세계를 한 화면에 담는다. 본 영화가 시각적으로 더욱 의미 있는 건 서클의 성장통을 단독으로 노출하지 않고, 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혼란을 매 순간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목적은 당연히 두 세계의 통합. 영화는 그 귀중한 결과를 마지막 장면에 수놓는다. 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찾아온 서클을, 아들의 진정한 친구들로 받아들이는 스티비 엄마의 깊은 이해와 따뜻한 눈빛으로 말이다.
<미드 90>은 그 나이를 겪어야만 하는 청소년들의 성장통을 그린 작품이다. 성장을 위해 방황을 필수적으로 엮었고,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이들의 모습을 따스하게 비췄다. 이따금 현란하고 화려한 보드 곡예가 눈물짓게 하는데, 우린 이미 이 눈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시작됐지만 끝은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웠고 또 다행스러웠던 우리의 그때를, 그 간절했던 순간들을 잊었을 리 없으니까‥. 단언컨대 <미드 90>이 단순히 가혹하기만 한 영화였다면, 많은 이가 자전적 얘기를 담은 조나 힐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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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이번 제 12회 광주여성영화제에서 단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심부름, 젖꼭지 3차대전, 행인, 해피해피이혼파티. 이렇게 총 4편의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이에 짧막한 리뷰를 남겨볼까 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
‘심부름’은 ‘남매가 엄마의 심부름을 한다.’라는 간단 플롯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만, 여기서 ‘스릴러’라는 장르가 추가되어 보는이들에게 무언가 계속되는 위험을 감지하도록 이끌어 간다. 엄마에게 연락해서는 안 되고, 표백제와 청소도구, 위험해 보이는 공구 용품 (톱 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엄마의 거짓말이다.
엄마의 거짓말을 남의 입을 통해서 들은 후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누나는 심각성을 느끼고, 비교적 평화로워 보이는 친구네 가정과 잠시 동안 자신의 가정과 비교해본다. 그 외에도 어딘가 아파 보이는 누나의 모습 또 엄마를 경계하는 듯한 누나. 누나의 미심쩍은 행동에 관람객은 위화감을 느끼지만, 정작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동생은 영 해맑게 행동한다.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느껴지는 한편, 남성이자 나이가 적은 남동생은 그러한 위험 부담이 없다는 것이 주목할 포인트이지 않았나 싶다. 알고 있기에 느끼는 공포, 모르기에 감당할 필요 없는 공포. 이렇게 나뉠 것이다. 영화는 둘의 모습을 보여주고, 누나의 시선에서 영화가 끝이 난다. 마치 동생은 그저 타인과 같아 보였다. 같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누나에게만 책임감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내겐 많은 단서들을 나열하며 따라 와보라는 식의 늬앙스가 느껴졌었다. 이는 추리보단 확신을 주었고, 흡입력보단 그저 나의 생각이 맞을지 정답을 맞추고 싶어 전전긍긍한 감각을 심어주었다. 만약 주인공의 초점을 남동생으로 맞춰 엄마의 알 수 없는 심부름, 그리고 누나의 미심쩍은 행동에 의문을 품는 이야기로 전개했다면 좀 더 이입할 수 있으며,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예전 영화제에서도 스릴러 장르의 단편 영화를 몇 번 본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왜 여성영화제에 출품되었는지 궁금했던 영화였다. 아마 주인공이 누나여서일까. 누나와 남동생, 그 구성원에서 짐을 짊어지는 것은 오로지 장녀, 누나이기 때문에? 뭔가 여러므로 아쉬움이 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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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5]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가 지난 주 개봉했습니다.
흑백영화로 촬영된 영화는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시절 쓴 자산어보의 서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을 가미하여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매우 아름답게 촬영이 되어서 하나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줍니다.
정약전은 기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반면 창대는 성리학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 길로 향하려 하죠.
서로 관계가 처음에는 좋지 않지만 정약전은 창대에게 책에 대해 알려주고 창대는 정약전에게 어류에 대한 정보를 알려줍니다. 서로 교환으로 시작한 이 관계는 점점 깊어지죠.
결국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에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구요자세한 내용은 리뷰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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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6] AI에게도 감정이 있을까? (with. 손동완 감독)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00:00 영화를 많이 찍어보는 것 04:43 첫 번째 영화 [바퀴] 09:58 두 번째 영화 [캐비닛] 11:29 두려움에 관하여 14:58 세 번째 영화 [잘 들었어요] 19:05 노래방 이야기 21:04 하남자들의 이야기22:59 [하얀 꿈] 이야기 & 다시 노래방 이야기 24:30 네 번째 영화 [레디 액션 영화 속으로] 28:31 연기에 관하여 & 사투리에 관하여 31:15 시나리오에 관하여 34:13 다섯 번째 영화 [리콜] 35:54 AI에게 자아란? 41:03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나? 51:24 장편 영화 이야기 55:15 다음에 찍고 싶은 단편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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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 파이널 예고편
긴장감에 잠식된다! 생존을 향한 몸부림의 시작 절대 소리 내지 말 것 [에이리언: 로물루스] 파이널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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