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1-06-01 14:49:26
볼 때마다 다른 감상이 나오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대해 많이 접하지 못했을 때 어렸을 적 바로 떠오르는 작품은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한 작품을 많이 보지 않는 편임에도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는 계속해서 볼만큼 익숙하면서도 묵혀두고 찾아보고 싶은 작품이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시놉시스
소녀가 마법에 걸린 순간, 꽃미남 마법사의 성문이 열렸다!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마녀의 저주로 인해 할머니가 된 소녀 '소피' 절망 속에서 길을 걷다가 거대한 마법의 성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과 마법사 하울의 계약을 깨주면 저주를 풀어주겠다는 불꽃악마 캘시퍼의 제안을 받고 청소부가 되어 ‘움직이는 성’에 머물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 이 이후로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관련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면의 성장으로 젊음을 되찾다
소피가 황무지 마녀의 질투로 인해 90살 할머니로 변해버리면서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렸을 때는 황무지 마녀가 언제 마법을 풀어주나 하다가 마녀가 치매 걸린 할머니로 변해버리고, 하울과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를 다시 보면서 할머니에서 다시 원래의 소녀로 돌아가는 것은 하울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를 회복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는 아버지가 물려준 가업을 그대로 이를 생각만 하고 스스로 어떤 일을 좋아하고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생이 언니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 조언을 한다.
90살 할머니가 된 소피 역시 수동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일을 찾아나서고 본인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점점 성장을 해나간다. 그 성장을 보여주는 장면은 설리먼과의 대면신이 아닐까 싶다. 솔직하게 자신이 본 하울을 설명하면서 전쟁에 대한 자신의 의견까지 덧붙일 줄 아는 독립적인 여성임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처럼 내면의 성숙이 완성되면서 소피는 다시 원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머리색만큼은 백발의 모습 그대로 남는다. 이는 아마 할머니였을 때의 내면 성숙을 이룬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가 싶다.
새로 시작하기 위해 파괴한다는 것
어렸을 때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하울과 소피가 함께 하늘을 나는 장면이었다. 그때 인생의 회전목마 ost가 흘러나오기도 하고 굉장히 판타지적이어서 뇌리에 박힌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소피가 하울의 성을 부시는 장면이었다. 하울을 살리기 위해서, 성을 쫓는 설리먼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소피는 이 성 자체를 파괴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캘시퍼에게 연료로 주면서 무너진 성을 다시 일으킨다.
현재 상태에서 이 기반을 가지고 움직일 수 없다면 그 기반을 무너트리고 새로 시작하면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장면이었다.
가족의 의미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저 하울과 소피의 사랑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보면서 느낀 것은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를 따르는 마르크는 마법을 배우는 어린아이로 아직 손길이 필요한 존재다. 그렇게 소피는 마르크에게 할머니로서 엄마로서 누나로서 존재하게 되고 마음만은 소녀인 소피에게 치매에 걸린 황무지 마녀는 고민을 털어놓고 잠깐은 기댈 수 있는 할머니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토록 하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캘시퍼 역시 자신의 쓰임을 알아주는 소피와 하울에게 다시 돌아간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볼 때마다 작품의 해석이 달라지는 듯하다. 놓쳤을 장면을 다시 찾아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Relative contents
-
- 아주 긴 예고편 속 고가의 장난감들, <해피엔드>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피엔드 Happy End, 2017 | 프랑스 외 | 드라마 | 107분
감독: 미카엘 하네케
아주 긴 예고편 속 고가의 장난감들, <해피엔드>
아주 긴 예고편
난 엄마한테 완전 질렸어. 징징거리면서 모든 사람을 열 받게 해.
아빠는 벌써 몇 년 전에 떠났어. 그는 그걸 견디기 힘들었나 봐.
이젠 내가 그걸 감당해야 해.에브는 엄마의 우울증약을 먹은 햄스터가 죽어가는 모습을 sns에 올리며 말한다. 아주 시니컬하게 자신에게 닥친 현 상황을 제시한다. 소파에 누워 발작을 일으키는 엄마를 휴대폰에 담으면서 "구급차 불러야겠다."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계획적으로 엄마를 잃을 예정인 아이가 내보인 이 태연한 행위는 <해피엔드>가 앞으로 써 내려갈 충격적인 이야기의 예고편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브는 드디어 엄마에게서 벗어나 아빠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대저택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건 모두 누리며 살 수 있는 로랑 가문에 드디어 입성한 것이다. 부가 아닌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해 아빠를 따라갔지만, 에브는 그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아빠와의 공간은 허울만 좋은 곳이었고 아이는 여전히 '혼자'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로랑 가문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에브. 치매 환자 할아버지(조르주), 교양만 떠는 고모(앤), 실속 없는 반항아 사촌(피에르), 거짓말쟁이 아빠(토마스), 멍청한 새엄마(아나이스)에게 에브는 잠시 있다 갈 손님에 불과했다. 엄마의 죽음으로 로랑 가문에 정식 일원으로 들어왔음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브는 핸드폰을 들고 로랑 가문의 몰래카메라를 자처한다.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아이는 직접 로랑 가문의 감춰진 사실을 들춰내며 자신의 삶에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깨닫는다. 할아버지는 기회만 되면 자살을 계획하고, 고모는 오로지 '나'의 세계를 완벽히 구축하기 위해 가족은 안중에도 없다. 고모의 아들은 매번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아빠는 끊임없이 다른 사랑에 빠져버리고, 새엄마는 부르주아 가문의 며느리에 만족하며 더 이상의 삶의 고민을 끝낸다.
그토록 원했던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은 에브의 손에 의해 진실이 폭로되며 산산조각 난다. 안타깝게도 아이가 본 로랑 가문의 민낯은 너무나 익숙한 그림이었다. 징징거리던 엄마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고, 죽은 햄스터를 손으로 찔려보던 자신과 소름 돋게 똑같았다. 그들과 다른 선상에 있는 줄만 알았던 에브는 사실 로랑 가문의 3세대 공주였다. 이런 잔인한 깨달음에도 영화는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어주지 않는다. 쉽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끝이 없는 미로에 갇힌 건 관객이 아니라 로랑 가문이다. <해피엔드>의 출구 찾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사건이 아닌 인물들의 삶만 들여다봐도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 들 것이다. <해피엔드>는 뚜렷한 해결책도 없는 예고편을 아주 길게 만들고도, 어둠에 가려진 진실과 비밀을 냉철하게 제시한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극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현실이 궁금하다면, 추천한다.
비싼 장난감의 탈출
로랑 가문에서 인간적인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덜 비정상적인 인물을 찾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가족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지 파헤치는 에브도 사실 그들과 같은 범주에 있는 인물이니까. <해피엔드> 속 로랑 가문은 모두 고가의 장난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 더 많은 이의 눈에 모범이 되어야 하고, 기품 있게 전시되어야 하며, 가족의 비극은 또 하나의 우아한 에피소드가 돼야 한다. 강박적인 그들의 가치는 아무리 땅바닥에 내리 꽂혀도 살아남는다.
그것이 비싼 장난감을 자처하는 그들의 무시할 수 없는 가치이자 힘이다.
할아버지는 제대로 큰 자식 하나 없는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치매란 강력한 질병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가족이란 '거대한 전시장'에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이라곤 아무짝이 쓸모없는 돈뿐이다.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자식들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과거 병상에 누워있던 아내를 직접 하늘나라에 보낸 그 강력하고도 유일했던 힘은 홀로 로랑 가문의 마스코트로 남게 되면서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는 저녁 식사 때마다 싸우는 딸과 손자는 물론이고, 머저리인 아들의 바람기와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두려움에 떠는 손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며느리를 보며 죽음을 갈망한다. 할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려 드는 손자의 손가락을 부러트리는 것도 온몸이 묶인 채 제일 앞 좌석, 1열에서 감상해야 했다.
에브는 엄마가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아빠가 결국 자신을 버릴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비싼 몸값으로 책정된 아이는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 할아버지가 매번 실패했던 것처럼 에브 역시 자유로운 삶을 가질 수 없다.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버려진다 하더라고 도망갈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의 삶은 자신의 암묵적인 미래로 점쳐진다.
"모두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란 아빠의 말에 이미 신뢰를 잃은 에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비극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할아버지를 보면서 어떻게 자신의 다음 스텝을 구상할까. 에브는 적어도 그보다 더 많은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다. 어릴 뿐더러, 몰래 카메라 경험으로 보고 배운 것이 넘쳐 난다. 폭력적이기만 했던 학습 효과가 얼마나 클까.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분명한 건 바다로 휠체어를 밀며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보고 난 후에 벌어지는 에브의 행동이 <해피엔드>의 진정한 끝맺음이 될 거란 점이다. 그러나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대저택이 있는 한 로랑 가문에선 쓸모없는 장난감은 있을 수 없다. 가진 만큼 더 필요한 게 그들이니까.
긴 예고편인 <해피엔드>가 결코 해피엔딩을 그릴 수 없는 이유다.
-
- 모래로 지은 에덴동산
이 글은
넷플릭스 [수리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표시해 주세요.
한국 영화계에는 금기(taboo, banned)가 많았다.
그러나 그 고정관념이 뭐라 하던 상관없이 금기의 선을 넘는 작품들은 조금씩 영화계의 한계를 저만치 뒤로 밀어놓곤 했다.
그 셀 수 없는 수많은 시도들은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한국 영화에서도 이런 게 되네.라는 수준을 너머 세상의 중심에서도 조금씩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목소리에 조금 더 확신을 싣기 위해. 윤종빈 사단은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마약 사범에 대한 이야기로 넷플릭스를 다시 한번 한국 작품으로 장악하려 한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하반기 작품들 중 최고의 기대작이라 불린 이 작품에는. 이미 윤종빈 감독과 수많은 작품을 함께 한 배우들은 물론 "진짜" 장첸까지 합류해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6부작에 걸쳐 쏟아지는 배우들의 열연이 낯선 수리남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습은, 아쉬운 추석 연휴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제격이 될 수 있을까?
인구, 불행의 냄새를 좇아가다.;홍어와 업어치기
사진출처:여성 조선친구 응수(현봉식)가 홍어로 돈을 벌어보자는 제안을 했을 때. 인구(하정우)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홍어를 먹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등을 보이며 덤덤하게 냄새나는 살덩이를 씹어 삼키던 아버지를 향한 서운함 만큼이나, 홍어는 인구에게 빌어먹을 생선에 가까웠건만. 지금의 인구는. 자신이 들이키고 있는 술만큼이나 아버지가 그때 비웠던 잔도. 그리고 아버지 당신의 인생도 쓰디썼을 것이라 이해하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먹을 수 있는 홍어는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귀한 생선이란 뜻이었고. 알게 모르게 짊어지고 있던 삶의 무게와 홍어에 대한 악감정을 뒤집으면. 어쩌면 행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인구를 저 멀고 먼 수리남에서 풍겨오는 홍어 빛깔 돈 냄새에 후각이 마비되게 만들었다.
유도에서도 그렇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상대방이 인구를 향해 달려오는 힘을 역이용해 그대로 업어치면. 그 기세만큼이나 빠르고 힘차게 패대기 쳐진 채로 하늘이나 멍하게 보고 있는 상대방을 볼 수 있다는 것을. 허망한 경쟁자의 눈을 내려다보는 희열은 자신의 것으로 남긴 채.
별다른 도구도 필요 없이. 체급이 비슷하다면 맨몸으로 구르는 건 자신 있었으니. 인구는 인생도 그렇게 업어쳐서 불행을 땅에 붙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그래 내가 졌다.라고 외치는 순간을 기대하듯이.
그러나 홍어도. 홍어 뒤에 숨어 있는 돈도. 인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홍어와 돈의 냄새가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가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 시켰지만. 이 상대는 옷깃을 쥐어볼만하면 뒤로 물러서고. 잡았다 싶으면 교묘히 인구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인구는 애가 타기 시작했고. 결국 업어치기를 위해서는 상대를 잠자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결국 한판승은 홍어의 것이 되고야 말았다.
온몸을 감싸는 고통에 반해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하기만 한 하늘을 보며. 끝도 없이 몰려오는 서글픔을 느꼈을 인구는. 그 절망을 지렛대 삼아 다시 몸을 일으켰을 것이다.
수리남에서 돌아온 인구의 모습은 예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인생에는 한판은커녕 절반도 없으니 그저 열심히 사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측면도 있지만. 썩 다 못해 들큼한 냄새를 두른 불행에게 패대기를 당했던 뒤통수가 아직도 아프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요환, 모래로 지은 에덴동산의 주인;무법 지대에서 법이 되고자 하다+야구공
사진출처:경기신문사탄은 어째서 내게만 이런 공을 날리는가.
요환(황정민)의 원망은 한 달에 두 번씩은 보자고 말하는 안기부 직원의 목을 조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자신을 향해 쉴 새 없이 몸 쪽 꽉 찬 변화구를 던져대던 사탄이 요환의 손에서 비로소 숨을 멈추었을 때. 이제 요환은 사탄이 아닌 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투수석에 갈 때가 되었다고 믿었다. 생기를 잃은 사탄처럼 이제 그 어떤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널브러진 방망이를 그저 흘낏 쳐다보며. 요환은 텅 빈 투수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부터 요환은. 지지 않는 게임을 했다.
마운드 위에 홀로 서 있는 삶은 외롭지 않았다. 요환이 던지는 모든 공에 환호성을 내지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타자석에 들어서는 것이 누구이던. 삼진 아웃 당한 채 흙빛으로 자리를 떠나는 모습은 요환을 점점 더 자신감 만큼이나 난폭한 투수로 만들었다.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채 괜히 방망이를 좀 더 그러잡는(그러잡다:무언가를 가까이 잡다) 타자들의 모습에서. 요환은 희열을 느꼈다. 자신을 옥좨오던 사탄의 눈빛과 자신의 눈빛이 이미 같아졌음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공(Ball, contribution)은 온전히 요환의 것이었고. 누구에게도 넘겨줄 마음이 없었다. 오롯이.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 게임은 참 이상했다.
그동안 보아온 초식동물의 눈을 가지지 않은 인구는. 몇 번이고 데드볼을 맞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더니, 기어코 요환의 공을 멋들어지게 쳐 버렸다.
자신이 던진 공이 스스로가 보는 앞에서 저만큼 작아져서 날아갈 수가 있었던가. 요환은 공을 좇아 고개를 난생처음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했다. 공은 그렇게 열심히. 자신이 던진 속도만큼이나 사나운 포물선을 그리며 기어코 담장을 넘어버렸다.
늘 요환에게 돌아왔던 공은.
이번만큼은 돌아오지 못했다. 덤덤함 밑에 숨겨진 알 수 없는 비웃음이 인구의 입가에 번지는 것을 보며. 요환은 글러브를 집어던질 수밖에 없었다.
무법지대에서 스스로가 법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 자신이 이룬 에덴동산마저도 모래더미에 불과했음을. 요환은 그제 서라도 깨달았을까. 아니면 인구에게서 또 다른 사탄의 향기를 느끼며 치를 떨었을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아래 문단에는 [수리남]의 가장 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고했어요.
믿음에 관하여.;황정민 아이러니
사진출처:경기 뉴스총 6부작인 드라마는 정확하게 절반을 넘어가면서 이야기의 결이 바뀐다. 3부까지 장점이었던 점들이 나머지 후반부에서는 모조리 단점으로 작용한다.
그 단점의 중심에는 그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라는 시리즈의 (메인) 슬로건에 있다. 거의 모든 인물들이 스스로 가진 믿음에 잠식당하는 것을 후반부에서 보아야만 한다.
전반 3부 까지는 자신의 사업 확장에 갑자기 등장한 인물인 인구와 상만(최창호, 넷플릭스 공무원 박해수)을 의심하는 요환의 의심이 살벌할 정도로 펼쳐진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배우 황정민 아이러니가 발동된다.
신세계에서도 그랬듯. 이 배우의 가장 최측근에는 배신자가 숨어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변기수(조우진, 이 작품에서 연기 미침)는 조금씩 그 의심의 상위 리스트에서 빠져 있다. 그렇다고 요환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기 보다 조금은 "도구"처럼 쓰이는 사람에 가깝기에. 이런 부조화는 변기수가 후반에 "어떤" 역할을 할 것임을 오히려 드러내 버린다. 그러니 죽을 고비 한 번 "제대로" 넘기지 않은 그가 갑자기 멀쩡하게 표준어를 쓰며 국정원 직원임을 알게 되는 장면의 임팩트는 매우 약할 수밖에.
또한 최창호(상만이 형, 상만이 형 연기 정말 대단함)가 초반부에 인구를 미끼로 사용했기에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후반부에서 바보 같을 정도로 연신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며 인구의 대답을 기다리는 인류애를 보이는 것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믿음이 결국 뒤통수를 치는 장면은 지구 방위대 미국의 등장으로 급물살을 탄다. 실화에 바탕을 둔 드라마라서 현실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힘든 역할을 도맡아서 해 왔을 국정원 직원들의 무게감이 미국이 띄운 헬기보다도. 혹은 최창호의 가짜 신분인 상만이형의 연기보다도 약한 것은 아쉽다.
마치면서
사진출처:노컷 뉴스정확하게 시리즈의 절반까지만 괜찮았다.
첸진(장첸)의 역할이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와 요환 사이를 제대로 줄타면서 긴장감을 조성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생각이나 명령에 의해 너무 크게 좌지우지되는 것처럼 보이는 점도 매우 아쉬웠다.
또한 유연석을 가장 똑똑한(혹은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캐릭터로 설정했으나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희생시킨 것도 안타깝다. 조금 더 잘 썼다면 심리(두뇌) 싸움에서 매우 큰 역할을 했을 텐데.
반전도 너무 알기 쉬웠다.
언제나 적을 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적의 심장부에 심어 놓는 것이므로.
한국에서 마약 소재를 다룬 드라마 중에서 "스케일"의 확장은 확실히 이뤄진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엉성한 이야기의 전개가 하필이면 후반부에 왔다는 것은 매우 큰 보완점으로 남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구는 요환과의 싸움에선 이겼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 배우들을 가지고 여기까지가 최선일까. 하는 생각이 함께 겹쳐 많이 씁쓸해지는 결말이었다.
[이 글의 TMI]
1.추석 연휴 동안 고향 왔다 갔다 할 때 봤음
2.졸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흥미진진하지는 않았음.
3.황정민 배우는 성경 책 들고 다니는데 이렇게 무서울 일인가.
4.상만이 형+변기수=이 시리즈의 모든 것.
5.돼지고기는 변기수가 구워주는대로 먹자.
#수리남 #윤종빈 #하정우 #황정민 #박해수 #조우진 #유연석 #상만이형 #한국영화 #액션영화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영화망상쌉가능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인플루언서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넷플릭스 #OTT
사진 출처
-
- 바다를 선택한 소녀
모아나
줄거리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고, 드넓은 바다가 사방 천지에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섬, 모투누이.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족장의 딸 '모아나'는 어려서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 유일하게 쫄지 않았던 아이이기도 하다. '테 피티'여신의 심장을 훔친 '마우이'라는 영웅을 찾아서 '테카'를 잠재우고 심장을 돌려놔야 한다는 옛 이야기. 사람들은 다 그거 헛소리라고 해도 할머니는 모아나에게 너가 바로 바다에 선택된 아이라며 얼른 배 타고 나가라고 꼬신다.(물론 진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너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을 뿐.) 할머니는 모아나가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도, 그러면서도 바다 근처를 서성거리며 망설여도 그저 바라보고 모아나의 선택을 존중한다.
모아나는 물론 너무나 바다로 나가고 싶지만, 완강한 아버지는 모아나가 족장의 자리를 지켜서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난리다. 그러나 책임감 스웩 넘치는 아빠도 언젠가부터 섬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을 감지한다. 할머니는 이 때다 하면서 심장을 돌려놓지 않아서 저주가 온 거라고, 모아나에게 원래 이 부족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일깨워준다.(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뭐, 예상하겠지만 결국 모아나는 바다로 떠난다. 바다가 나를 선택했다는 것 하나만 믿고!
책임지는 방식에 대하여
숨은 의미 찾기
디즈니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 고전적 공주들로 큰 흥행을 거두었지만, 그 공주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공주의 상은(이보시오, 관상쟁이 양반. 내가 공주가 될 상인가? feat.이정재) 아니었던 것 같다.
모법답안처럼 여겨지는 옛 공주들을 뒤로하고, 자신들이 만족할만한 새로운 공주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시도를 통해 '포카혼타스/ 뮬란/ 미녀와 야수/ 벅스라이프의 개미공주' 같은 공주들 말고도 '타잔의 제인/ 인어공주의 딸/ 인크레더블의 헬렌' 처럼 여러 여자주인공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해서 정착한 공주들이 바로 '공주와 개구리/ 라푼젤/ 메리다와 마법의 숲' 속의 공주들이었다. 여기서 잭팟 터진 게 바로 '겨울왕국의 엘사(feat.레리꼬)'였던 것이고. 그러나 디즈니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있는 더 많은 공주들을 발굴하고자 한다. 그런 시도에서 나온 것이 바로 모아나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대를 잇거나, 가문을 책임지거나, 책임을 지는 것은 보통 남성의 역할로 도드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성별에 관계없이 극성 부모님을 만나면 누구나 다 똑같을 거다. 마치 모아나처럼. 이렇게 말하니 마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모아나는 분명 '디즈니가 최종적으로 다다랐던 공주들'과는 다르다.
보통 주인공에게 어떤 책임이 주어지면 '책임 vs 자유'의 구도로 나아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주인공에게 책임을 분배하는 방식이 이분법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엘사와 모아나의 구도를 비교해보자면,
엘사 :'왕국에서 자신의 힘을 숨기고 훌륭한 여왕이 되는 것 vs 자신의 힘을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
모아나 :'족장이 되어 사람들을 바다로부터 지켜서 책임지는 것 vs 바다로 떠나 섬의 저주를 풀어 사람들이 넓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책임지는 것'
이라는 상황에 놓인다. 엘사와는 달리 모아나는 '책임 vs 책임'의 구도를 갖는 것이다. 거기에 바다로 떠나는 것이 자신의 자유임과 동시에 부족의 정체성을 찾는 모험이기도 하다. 모아나는 아빠가 찾지 못했던 새로운 책임지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번에 디즈니가 말하고자 한 것은 '책임지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전에 인크레더블 2를 리뷰할 때, 제작진이 세대교체를 노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특이한 것은, 모아나를 격려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도록 조언하는 것이 할머니라는 점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모아나를 흔드는 것이 바로 아빠다. 이로써 두 종류의 어른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자신의 편견에 휩싸여,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어른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어른은 진실을 알려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가 원하는 방향을 선택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결국 공생하며 서로를 돕고 도움 받으며 살아야 한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지혜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세상은 변한다. 문제에서 도망쳐봤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회피하고 그저 참기만 하던 옛날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부딪히고, 직면해야 한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전세대에게 말하고 있다.
젊은 층에게 자리를 양보하되,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짜 어른이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선택받은 게 아니다
감상평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 사회에서 가장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단연 90년대생이다. 세대교체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세대를 무시하거나 제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를 꾸려나갈 준비를 해야한다. 그 방식이 설령 믿을만한 것이 아니더라도, 시도조차 못하게 막는 것은 이전세대의 권력남용이다. 늘 새로운 것은 비난받았지만, 세상을 바꾼다.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아직은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마우이'는 '모아나'와 같은 처지이다. 전설의 영웅이라 불리지만,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철부지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모아나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길을 선택했지만,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막막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때에 필요한 것은 마음이 통하는 동료이다.
두 사람은 서로 부족한 점을 배우고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함께' 결말을 만들어낸다. 뱃머리가 약간 삐그덕거려도, 거센 물살에 가끔은 심하게 흔들릴 지라도, 배가 바다에 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 모아나는 관객을 하나의 지점으로 이끈다.
우리 인생은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다. 가끔은 큰 파도를 만나서 다치기도, 누군가를 잃기도 한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배를 만나고 무인도를 찾고, 새로운 곳을 개척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항해를 멈출 수는 없다. 가끔씩 지독한 인생의 파도에 너무나 지쳤을 때, 내가 발견했던 땅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물론 너무 마음에 드는 땅이 생긴 사람은 그곳에 정착할 수도 있고, 뭍보다는 파도의 스릴을 즐기는 사람은 땅에 발 디딜 틈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바다로 내몰 수도, 땅으로 붙잡을 수도 없다.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영화 속에서 발견한 것은, 단순히 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뭉친 소녀가 아니었다. 자신이 선택한 바다라는 모험을 즐기고, 그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결국 모아나가 책임진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마우이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졌다.
때로 항해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결국 나의 마음이 어디로 끌리는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언젠가는 바다 위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답은 언제나 나에게 있으니까.
-
- 이 세계는 앞으로도 찬란히 빛나고
BTS 팬 무비 성공 이후 아이돌 팬 무비들이 쏟아졌다. 팬데믹 직격탄을 맞은 극장가의 생존 전략 중 하나인 동시에, 코로나19 기간 동안 공연을 즐길 수 없는 아이돌 팬들이 즐길 거리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도, 상영 시간표 하나 확보하기 힘든 영화들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꼭 반갑지만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팬 무비 중 <마이 샤이니 월드>를 보러 간 건, 우리 집에 샤이니 팬이 하나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팬 아닌 내게도 샤이니 2시간 보는 일은 즐겁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샤이니의 팬으로 정의해 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지만, 샤이니 노래를 거의 다 알고 있으며 꽤 좋아하고 자주 듣는다. 나 정도로 자주 듣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래도 우리 동년배는 기본적으로 샤이니를 다 알지. 아이돌로 대표되는 케이팝 시장의 판도가 한참 바뀌어 요즘 남자 아이돌은 음반 백만 장이 팔려도 대중성을 고민해야 하지만, 10-15년 전은 그렇지 않았다. 그냥 텔레비전 보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가 요즘보다 쉬웠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2세대 남자 아이돌 대다수가 연예면 대신 사회면에 실리면서 매우 불편해진 지금, (체감하기로는 그룹당 평균 1.8명 정도 살아남은 느낌이다.) 영화 <성덕> 관객과의 대화 자리마다 ‘구 오빠 성토대회’가 열리는 판국에, 샤이니처럼 빛나는 자리를 꾸준히 지켜온 그룹은 많지 않다. 덕분에 샤이니의 역사는 샤이니와 팬들만 즐길 수 있는 그들만의 세상이 아니라, 나처럼 샤이니에 호감을 가진 일반 대중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마이 샤이니 월드>의 의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무대 장인인 동시에 예능도 되는 걸 대중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영화에서 무엇을 보여주더라도 뭐 샤이니라면 믿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들어갔는데… 2시간 후 다시 나온 나는 어쩐지 ‘독기 풀 충전’ 상태가 되어 뭐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굳게 하고 있었다.
#Let’s go back to the time now
샤이니는 2008년 데뷔했다. 나는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당시는 지금처럼 아이돌 시장이 포화되기 전이었으므로, 누가 데뷔하면 주변인 대다수가 대충 아는 분위기였다. 근데 뭐 노래 제목이 ‘누난 너무 예뻐’라고? 막내가 아직 초졸이라고? 그렇게 시작부터 센세이셔널했던 샤이니는, ‘컨템퍼러리 밴드’라는 현란한 이름을 달고 나왔다. 수능 대비 영단어장에서 contemporary를 “현대의, 동시대의”라고 달달 외우기는 했지만, 당시의 내게 샤이니와 그 단어의 연관성은 이해하지 못했다. 알게 뭐야 내가 신나는데. 당시 <사.계.한>, <real>, <in my room>까지 앨범 수록곡을 전부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 샤이니는 정말로 “컨템퍼러리” 밴드였음을 깨닫는다. 16년째 활동하고 있는데 “컨템퍼러리”함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그룹으로서 위기를 맞은 순간이 없지는 않았음에도, 그 모든 순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샤이니의 팀 색깔을 지켜냈다. 여기에는 데뷔 16년차가 되도록 단 한 번의 무대도 설렁설렁 하지 않는 그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종현을 멀리 보낸 후, 추모의 마음을 담는 동시에 샤이니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님을 명확히 한 정규 6집. 샤이니는 커다란 빛 모양 하나 주변을 네 개의 빛이 둘러싼 로고를 쓰고, 종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사로 담아 노래하고, 그렇게 종현의 자리를 명확히 지켜냈다. 누군가의 앨범이 ‘꽉 차 있다’는 표현은 관용적으로 많이 쓰이지만, 정규 6집은 꽉 차 있다 못해 넘쳐 흐른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의 명반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절로 느껴지는, 그 앨범으로 샤이니는 자신들이 영원히 건재할 다섯 명임을 명확히 했다.
슬픈 일이었지만, 여전히 종현의 말과 글과 음악이 그립지만, 언급을 피해야 하는 일도 아니게 되었다. 샤이니가 그 동안 열심히 다져 둔 자리가 이미 탄탄하기에, 이 영화 또한 종현을 슬프게 언급하거나 과하게 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이후 각자의 군백기를 거치고 나와 <Don’t call me>로 또 센세이션을, 올해 나왔던 앨범 <HARD>는 데뷔 16년차가 기존 색깔과 다른 음악으로 이렇게까지 새로울 수 있다는 놀라움을 주었다.
이 영화는 그 모든 시간을 공연 영상 위주로 세심히 담는다. 영상 속 샤이니는 땀 범벅이 되어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노래를 한다. 노래를 왜 저렇게 잘하지? 아니 원래 잘하는 거 몰랐던 건 아닌데… 그래도 신기하네… 저 춤을 저렇게 추면서 어떻게 잘하지? 그리고 왜 다 아는 노래지? 물론 샤이니 노래는 명곡도 많고 대중에게 알려진 것만 해도 숱하게 많고… 그러다 보니 통사적으로 모든 곡을 담을 수는 없다. 2시간 동안 모르는 노래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 노래는 없네…’는 많았다. 실제로 콘서트 할 때도 무슨 곡을 담을지가 아니라 무슨 곡을 뺄지 고민한다고 하니까.
공연 영상 사이사이 샤이니 멤버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오직 샤이니만이 할 수 있는 ‘라떼 토크’다. 역시나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라떼 토크’다. 이들이 매 순간 얼마나 열심히 임했는지가 물씬 느껴지는, 듣다 보면 나도 열심히 살고 싶어지는, 그리고 이들이 왜 ‘왕년의’ 이름이 되지 않는지, 왜 앞으로도 쭉 건재할 것 같은지도 느껴지는. 연차가 아무리 차도 눈빛의 독기가 빠지지 않는 그룹들이 있다. 샤이니가 그렇다. 샤이니는 앞으로도 늘 “컨템퍼러리 밴드”일 것이다.
#뜨거워지자 터질 것처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게
‘누난 너무 예뻐’로 데뷔했을 당시의 샤이니를 볼 때는, 이토록 오래 샤이니를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래 본다는 건, 그렇게 서서히 스민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인데,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동태 눈깔’ 되지 않고 건재한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런 샤이니의 지난 역사를 2시간 동안 볼 수 있어 좋았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보고 싶다. 팬이 아닌, 샤이니에 호감을 가진 대중에게도 이렇게 느껴지는데 팬에게는 이 영화가 얼마나 뜻깊을지 궁금하다. 영화 속에 자리를 내어 팬의 페르소나를 앉혀 두고, 함께한 시간의 가치를 자연스럽고 은은하게 담아내기도 한 만큼. ‘마이 샤이니’의 세상인 동시에 마이 ‘샤이니 월드(샤이니 팬클럽 이름)’이기도 한 영화로 만들어낸 만큼.
대중 입장에서는 그냥 샤이니가 앞으로도 자기 심지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사실 그럴 것 같아 걱정되지 않는다. (걱정이라는 말은 우습지만, 우리는 이미 그 시절 명곡을 많이 잃었어요.) 단지 온유가 건강을 회복하여 다음 활동은 꼭 같이 할 수 있길. 오래오래 샤이니를 보고 싶다. 한일전 중립을 지켜야 되네 어쩌네 하는 자의식 과잉 아이돌이나, 영상통화 팬사인회에 비싼 돈 주고 온 팬에게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개만 주억거리는 아이돌조차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에서, (몰랐죠? 저도 이 글 쓰느라 조사하다가 알았습니다. 대중성에서 멀어진 아이돌의 장점일까요.) “샤이니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는 16년차 아이돌은 얼마나 소중한가.
대중에게 샤이니는 감을 잃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고, 자기 색깔을 잃은 적도 없는 그룹이다. 여전히 무대에서는 데뷔 때 못지 않게 열정적이지만, 연차에 따른 여유까지 갖추어 더욱 빛나는 그룹이다. 그렇게 비춰질 수 있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지, 이 영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전히 “새로운 히트 멈추지 못했다지” 소리를 들을 자신이 있고, “왕관은 주인을 되찾아내”고 있으며, 물려줄 생각이 없는 샤이니를 보니, “샤이니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보고 나오는데 괜히 힘이 났다. 나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계속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저렇게 독기 풀 충전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훌륭한 선배 직장인들에게서 엿본, 연차에서 나온 여유와 여전히 빛나는 열정의 조합을 샤이니에게서도 본다. 샤이니의 세계는 앞으로도 찬란히 빛날 것이다. 때로는 야근 노동요로, 때로는 여행 BGM으로, 때로는 밥 친구 예능으로… 언젠가 디너 쇼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오래오래 빛나는 샤이니를 볼 수 있기를.
-
- 상처에 대처하는 그녀의 자세
-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결국 누구보다도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던 스즈코
스즈코가 처한 상황, 하루 아침에 범죄자가 되어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된 상황은 스즈코도 스즈코 인생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본인이 범죄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살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건은 터져버렸고, 그 이후의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옛 동창들의 왕따는 스즈코가 감당해야만 하는 문제들이었고, 스즈코도 감옥에서 나와서 텅 빈 거리를 걸으면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고민하며 노래를 불렀던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착잡한 마음에 대비되게끔 노래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스즈코는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백 만엔을 열심히 벌어낸다. 스즈코에게 그 당시는 도피라는 키워드는 생존과도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동네를 벗어나야 내가 산다"는 마음이었겠지. 그리고 백만엔 이 모일 때마다 도망쳐온 바다, 산골, 도시 그 어느 곳에서도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 바닷가에서 만난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에게서는 극강의 철벽을 시전하고, 산골에서도 자신의 상처에 얽매여 살고 있는 그녀에게 좁디 좁은 산골 사회가 표출하는 공격성 때문에 그녀는 더 움츠러들게 된다. 그 어느 곳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한다. 백 만엔은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범죄자입니다. 나를 깊이 알아갈수록 당신은 날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스즈코의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에 밝게 살아가려고 하는 스즈코의 인생 목적이자 자기 혐오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잘못 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부정적인 세상의 시선에 굴복하는 스즈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즈코는 그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은 채, 혼자 세상을 맴돌며 가족에게까지 괜찮은 척하며 살고 있는데, 스즈코의 동생은 스즈코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왕따의 피해자로 현실을 도망가고 싶어하는 동생은 스즈코를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개척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런 인식은 동창에게 놀림 받고 있는 스즈코가 당당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동생에게 인상적으로 남겨졌기 때문인데, 동생의 인식과는 달리 스즈코는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동생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동생은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계속 살아가보겠다는 결심을 담은 편지를 스즈코에게 전달함으로써 스즈코와는 다른 선택을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 입장에서는 둘 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둘 다 서로가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설정은 꽤나 흥미롭다. 거지 같은 현실에서 도망친 여자, 그 현실을 그대로 감내하고 있는 동생, 은근히 비교가 되면서 보고 있으면 애잔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표면적 진실 말고 그 이면을 보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 말들은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고,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단지 내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 나와 관련없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평가내리는 모습들을 제대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비판하기에는 내 마음이 콕콕 찔리는 이유는 나도 저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일까.
스즈코의 남자 친구는 스즈코의 내면에 깊이 자리한 정착 욕구를 불러일으킨 사람이었다. 남자 친구의 거짓말만 아니었더라면 스즈코는 계속 남자 친구 곁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앞서 등장한 두 장소에서의 떠돌이 생활과 그로 겪게된 오해와 편견들로 지칠대로 지친 스즈코에게 제 때에 나타난 사람이었는데, 스즈코가 백만 엔을 다 모아 떠나갈까 두려워 돈을 빌리며 오해를 사기 충분한 행동을 한다. 이는 스즈코가 떠나려는 충분한 명분을 제공한다. 이 남자는 스즈코를 붙잡으려다 오히려 스즈코를 떠나보낸 것이다. 머리를 잘 못 쓴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냥 솔직히 "백만엔이 모여도 나를 봐서라도 떠나지 말라"그 말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나 답답했었다. 하지만 이런 계기가 있었기에 스즈코는 자신이 굉장히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고, 오히려 동생보다도 더 성숙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역시 모든 고통에는 좋은 대가도 함께 온다. 이유없이 지나가는 고통은 없는 것이다.
영화는 열린 결말인데, 나는 스즈코의 마지막 대사와 독백 대사들로 보건대 스즈코는 남자 친구와 재회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씩씩하게 걸어나갈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시 떠나간 곳에서는 계속 지금까지 살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상황, 상처에 정면 돌파하는 용기 있는 모습, "나는 잘 못 한 것이 없어"라며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살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스즈코가 자신에게 내려야 할 처방은 떠돌이 생활이 아니라 어쩌라고 식의 마이웨이의 당당한 마인드여야 한다.
-
-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6년 여교사가 당시 만 13세 남학생과 성관계를 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여교사는 2급 아동 강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3개월 후 조기 석방되었다. 하지만 다시 남학생을 만나 관계를 가진 것이 적발되었고 최종적으로 7년 징역을 살았다. 더욱 충격(?) 적인 것은 여교사는 남학생과의 사이에서 딸 2명을 낳았다. 복역 중 첫째 딸을 낳고 가석방되었고, 두 번째 복역 중 둘째 딸을 낳았다. 출소 후 여교사와 남학생은 결혼하며 다시 한번 유명해졌다. 2017년 그들은 이혼을 했고, 2020년 여교사는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남학생과 두 딸이 곁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토드 헤인즈의 신작 <메이 디셈버>는 위에 언급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아무래도 토드 헤인즈는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해외의 경우 아동 성범죄는 아주 심각한 범죄로 취급된다. 특히나 최근의 국내 경향으로는 이 영화가 개봉조차 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개봉을 하는 것은 토드 헤인즈라는 명성과 스타 배우들의 출연이지 않을까. 여하간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아동 성범죄라는 소재는 무시할 수 없는 소재인 건 분명하다.
우선 토드 헤인즈라는 감독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긴 감독은 아니라는 걸 밝혀야겠다. 기억도 잘 나진 않지만 <파 프롬 헤븐>, <캐롤>로 이어진 멜로드라마 감독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그 사이사이엔 다른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있지만 난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의 연장으로 <메이 디셈버>를 읽었다. 즉, 멜로드라마로 이 영화를 접근한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더 이상의 멜로 드라마가 가능한가.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어원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글라스 서크로 상징되는 그 멜로드라마가 2024년에 가능하냐는 문제다. 멜로드라마는 아주 단순한 구성을 취한다. 남녀가 사랑하지만 어떠한 장애물이 그 사랑을 막는다. 더글라스 서크의 걸작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는 계급과 나이가 주인공들의 사랑을 가로막았다. 아주 오래전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이 사랑을 가로막았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사랑을 가로막을 게 없어서 죽을 병에 걸린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물론 간혹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같은 장애라는 요소나 혹은 <건축학개론>에서는 이 장르적 요소를 훌륭하게 지역 정치학으로 엮는 경우도 있다. 토드 헤인즈는 <메이 디셈버>에서 그들의 사랑을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으로 진행시키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둘의 나이차는 무려 23살이니까. 하지만 토드 헤인즈는 멜로드라마 장르 공식으로 이 영화를 풀어가진 않는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실제 사건의 여교사 그레이시라기보단 그들에게 접근한 엘리자베스다. 그레이시와 조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그 영화에서 그레이시 역을 맡은 게 바로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연기할 실제 인물 그레이시를 관찰하기 위해 접근한다. 극중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연기할 인물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자신이 잘 모르는 인물을 고른다는 말을 한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더 흥미롭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엘리자베스는 상당히 거만하다. 즉, 영화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는 당연히 뒤따르는 문제가 생긴다. 엘리자베스와 관객을 동일선상에 놓고 영화를 진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관객들이 엘리자베스를 계속 쫓아가며 그녀가 얻는 사실과 힌트들로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게 할 것인가. 흔히 플롯을 구성할 때 아주 많이 쓰이는 방법이지만 토드 헤인즈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법적으로 그레이시는 아동 성범죄자다. 바꿔서 이야기해 보자. 그레이시는 스물세 살 연하 남자를 서른여섯에 만났다. 그리고 섹스를 했다. 당신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이건 첨예한 문제다. 미성년자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심지어 할리우드 감독들과 배우들의 연인들을 이해하는 것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 더군다나 미성년자다. 그것도 만 13세.
아마 단순히 나이차를 두고 그 연인들을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내면을 깊게 들어가서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질문에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건 사기꾼이거나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인간일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타인을 이해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토드 헤인즈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하기 위해 그레이시와 주변 인물들을 만나는 동선을 따라가는 방향과 관객들이 그레이시와 조를 따라가는 하나의 방향으로 총 두 개의 방향성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방향성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먼저 엘리자베스 쪽을 살펴보자. 엘리자베스가 등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똥과 함께 등장한다. 혹은 엘리자베스는 똥을 들고 등장한다. 여하간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쪽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시를 연기하려고 하는 점은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 태도는 어떻게 보면 오만하다. 자신이 흥미로운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전 남편과 변호사 등을 만나면서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떠올려본다. 중요한 장면으로 그레이시가 조와 처음으로 섹스한 곳에 가서 자위를 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메리의 학교에 가서 연기에 대한 강의를 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는데 그 강의에서 엘리자베스는 연기와 실제가 뒤섞이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기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물론 토드 헤인즈는 자신이 생각하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연기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엘리자베스는 배우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장면을 보면서 엘리자베스의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엘리자베스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엘리자베스 본인을 당시 그레이시의 상황에 놓는 것에 불과하다. 즉, 그레이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영화의 의견에 공감한다. 하지만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엘리자베스란 인간은 자신의 배역을 위해 남의 남자랑 섹스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건 엘리자베스란 인간에 대한 일부의 이해다.
그런 다음 엘리자베스는 카메라와 정면으로 대응한다. 이 장면은 나탈리 포트만의 아주 인상적인 연기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딘가 부족한 연기라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부족한 연기를 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아니라 토드 헤인즈의 연출이다. 영화가 이끌고 온 서사와 카메라의 위치가 지금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절대적으로 관객들이 따라갈 수 없는 연기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본인이 찾던 결론에 도달한다. 그레이시가 어렸을 때 오빠들에게 성추행을 당해서 비뚤어진 성관념이 생겼다는 정보를 듣는다. 그는 그레이시를 이해할 핵심적인 단서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사건이 인간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프로이트에게 배웠다. 최근 들어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거나 프로이트는 사장된 인물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책을 보거나 의견을 들으면 결국 다시 프로이트 이론 안에서 그 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본다. 프로이트의 일부 이론이 틀리거나 부정당할 수는 있지만 결국 다시 프로이트라는 점은 아직까지 분명하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토드 헤인즈가 함정을 파두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성추행의 결과로 그레이시가 조와 섹스를 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훗날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비웃는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영화를 찍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연기하는 그레이시는 마치 삼류 연기자가 연기하는 에로 영화 같은 느낌이 풍긴다. 심지어 사실관계조차 알지 못한 채로 영화를 촬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무의식이 있다는 걸 밝혀냈으며 인간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부분을 밝혀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업적은 엄청난 것이지만. 하지만 분명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인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무엇이 인간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고, 무엇의 항목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이제 그레이시와 조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그레이시와 조는 나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냉장고를 열고 소시지가 없다는 사실에 그레이시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심각한 음악은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느껴진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장면은 조가 자려고 누워있는 그레이시 옆에 누웠을 때 그레이시가 냄새난다고 씻고 오라고 이야기한다. 극장에서 이 장면이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단순히 웃기는 장면은 아니다. 이 전 장면이 조가 TV를 통해 세수를 하는 여자가 나오는 광고를 보았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그 장면과 이 장면은 같이 연결해야 한다. 조는 왜 깨끗하게 세수하는 여자를 그렇게 유심히 바라보는 것일까. 그리고 그레이시가 씻으라고 말할 때 왜 상반신에 물만 살짝 묻히고는 마는 걸까.
조의 그런 심리에 대해 알 턱이 없지만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조와 그레이시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더럽다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조는 자신이 더럽지 않다는 걸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더럽지 않기 때문에 씻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닐까? 물론 이는 추론이다.
내가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한 가지는 영화가 시작하고 난 다음 그레이시와 조가 마주치는 장면이다. 부엌에서 둘이 마주쳤을 때 쇼트의 배열이 약간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확신했던 것은 그레이시와 조의 대화를 샷 리액션 샷으로 이어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조와 그의 아들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정확하게 엿볼 수 있다. 그레이시는 정면에 가까운 위치에 카메라가 위치하지만 조를 보여줄 때는 아들의 정면 가까운 곳에 카메라가 위치한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그레이시와 조가 이야기를 해도 둘의 시선을 일치시키지 않는다.
영화가 그 시선을 일치시키는 장면은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전 남편을 만났을 때나 변호사를 만났을 때 완전히 일치시킨다. 또한 조가 지붕에서 아들과 함께 대마를 피우는 장면에서 시선은 일치한다. 시선을 일치시키는 문제는 보편적인 영화에서는 아주 익숙한 문법이지만 이러한 문법 자체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감독들이 있다. 이 영화도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조는 아들과 대화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한다. 하지만 그레이시와 조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둘의 시선이 일치하는 부분은 영화 후반부에서 조가 그레이시에게 자신이 너무 어리지 않았냐고 물을 때다. 조가 대화를 시도하자 카메라는 둘의 시선을 일치시킨다. 하지만 이내 그레이시는 대화를 거부하면서 장면은 끝난다.
그레이시는 딸 메리의 졸업식에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데 영향을 주고, 자신에게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게 된 이웃이 생기자 오열한다. 이따금 이유 없이 울기도 한다. 우리는 그레이시와 조 사이에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문제가 명확하게 어떤 건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레이시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앞부분 소시지가 없을 때의 음악과 딸 메리의 의상을 고르는 장면을 보면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레이시의 문제가 명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몇 부분으로 그녀를 추론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버지와 굉장히 서먹하다. 아버지를 만나서 줄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보면 그 또한 추론할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우린 알 수가 없다.
관객들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와 조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실제로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의 전 남편 대화를 살펴보면 전 남편이 당시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그건 그의 입을 통해 증언되기 때문이다. 변호사 또한 마찬가지다. 변호사는 그레이시를 보고 범죄자라고 일갈하며 그레이시는 당시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 그레이시는 조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별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다.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 상태를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그레이시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거나 그레이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즉 36살의 여교사가 13살의 남학생을 사랑하고 그래서 섹스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고, 복역 후 그와 결혼을 했으며 이후로도 같이 살았다는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탈리 포트만의 독백 연기도 아니고 마지막 장면의 엘리자베스의 오만함도 아니다. 조가 지붕에서 아들과 함께 대마를 피우는 장면이 왜 잊히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만 13살의 아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감정이 타인에 의해 안타깝고 불쌍한 존재가 되면서, 자신의 사랑이 범죄 행위가 되며 정상적인 성장을 밟지 못한 것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되어서야 자신의 10대를 다시 새롭게 경험하는 그 순간이 인상적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장면은 조와 엘리자베스의 섹스다. 이 장면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 영화 속에서 그레이시는 어떤 변화도 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일하게 변화하는 건 조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나타나고 나서 조는 심경의 변화를 느낀다. 아니 심경의 변화를 알아차렸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조는 처음으로 그레이시에게 자신이 너무 어렸던 거 아니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부인하는 그레이시의 행동과는 다르게 조는 그 손가락질에 대해 그레이시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조는 10대 때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중이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와 섹스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명백하게 자신의 역할을 위한 섹스다. 그러니까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레이시의 입장에서 조를 품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영화는 마치 성기 삽입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연출했다.
하지만 조의 입장은 약간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섹스를 했다. 이 또한 추론일 뿐이지만 천천히 다시 한번 살펴보자. 엘리자베스는 지금 서른여섯의 그레이시를 연기하는 입장이다. 즉 당시의 그레이시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 13세 이후의 삶을 다시 겪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생활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당시의 편지를 꺼내보고 딸의 졸업식을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는 당시의 그레이시와의 섹스를 다시 해본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물론 추론이다. 여기에는 이 영화의 인서트로 계속 등장하는 나비와 애벌레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다. 영화가 시작하면 나비가 나온다. 그리고 중간에 등장하는 인서트에서는 애벌레가 등장한다. 생각해 보면 순서가 뒤집혀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러므로 이미 나비가 된 조가 다시 애벌레부터 시작하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변호사를 만나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밖은 부드러운 빛이 내리쬐고 안은 어두컴컴하다. 바깥은 녹음이 드리워진 공간이다. 이는 마치 인상주의 화풍처럼 느껴진다. 인상주의가 등장했을 때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리다 만 그림이거나 혹은 그림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작자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비판이 쏟아졌었다. 미술사 고전기에 원근법이라는 개념과 현실의 모방이라는 아주 중대한 부분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세상의 비밀을 파헤친 것만 같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어 인상주의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순간의 인상들을 그리면서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나는 이 점이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태도가 결국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도 있었을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멜로드라마의 감독 답게 토드 헤인즈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탁월하게 연출했다. 특히 그레이시가 엘리자베스에게 화장해 주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장면은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 모두 옆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빛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다. 이는 분명 엘리자베스의 독백 장면과 대비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 반면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느낌은 약하다. 즉 이 장면은 분명한 디렉팅이 들어간 것 같다. 이 순간 마치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입을 맞출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충동의 감정에 솔직했다면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뭔가를 얻지 않았을까. 물론 난 엘리자베스를 모르지만 말이다.
2024년 03월 07일.
-
- 이걸 못봤다고? 시간을 순삭 시켜 버리는 송혜교의 복수극 [더글로리] 완결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넷플릭스에서 바로보기
-
- 하이큐!! 극장판 / 쓰레기장의 결전 / 많이 보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 쇼요와 켄마의 매력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끝나고 제대로 있네요.
-
- 넷플릭스 <밥 로스: 행복한 사고, 배신과 탐욕> 공식 예고편
독특한 헤어스타일, 감미로운 목소리, 낭만적인 풍경화. '참 쉽죠?'로도 알려진 밥 아저씨에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다.
-
- 영화 <안녕, 할부지> 메인 예고편
기적 같은 푸바오의 탄생부터 할부지와 바오패밀리의 귀여운 케미까지 (⋆ˆ ³ ˆ)♥ 예고편만 봐도 마음이 몽글몽글 아름다워짐🥹 🎬 《안녕, 할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