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5-04-05 20:58:20
세계의 균열에 선 이방인들
<이어즈 앤 이어즈>, 빅토르와 이디스를 중심으로
빅토르 고라야 & 이디스 라이언스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2019, HBO & BBC)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잇츠 어 씬(It’s a Sin)>(2021, 영국 채널4)의 핵심 전개 포함.
2021년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잇츠 어 씬>은, 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퀴어 커뮤니티와 에이즈 위기를 다룬다. 마지막 에피소드,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리치 토저의 건강이 악화되자, 엄마 밸러리 토저는 아들을 외부와 단절시킨다. 리치의 베스트프렌드 질 백스터가 밸러리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밸러리는 퀴어혐오적이고 회피적인 반응을 보이며 질의 호소와 리치의 고백을 무시한다. 리치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질은 밸러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심어놓은 수치심shame이, 리치와 그 모든 이들을 죽인 거’라고.
부러 암울한 톤으로 소개했지만, <잇츠 어 씬>은 리치와 친구들의 하루하루에 넘쳐나던 슬픔과 기쁨, 사랑과 우정, 눈물나는 연대를 담은, 시끄럽고, 신나고, 풍부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족한 소개 대신 죽어가던 리치의 대사를 인용한다, “거짓말하기 싫어요, 왠지 아세요? 난 진짜 재밌었었거든요, 그 모든 남자들이랑.” 말하려던 건: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사회적 이슈와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에서 메인 캐릭터의 목숨을 앗아가는 까닭은, 그저 다른 메인 캐릭터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프랜 백스터) 돕는 스토리텔러다.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 전후의 맥락,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의 액션/리액션을 촘촘히 관찰하며 현실의 시청자가 사회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2019년,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대니얼 라이언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 공무원인 그는 수용 가능 인원을 훨씬 초과한 알루미늄 갑판 쪽배를 타고 남자친구와 바다를 건너다 익사했다. 이 글은 대니얼보다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해 난민 신분으로 유럽을 떠돌던, 불법적인 일상이라도 얻고자 약혼자와 함께 바다를 건너다 ‘어쩌자고 홀로 살아남은’, 인간보단 ‘사건’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었던 그에 대해. 그리고 그 곁에 섰던 대니얼의 시스터 이디스에 대해, 기이해져만 가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의 필연적인 유대감에 대해, 사심과 디테일을 얹어 적었다.
<이어즈 앤 이어즈>는 2019년 기준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이후 10+a년 동안 대가족이 맞닥뜨리는 변화들을 다룬다. 말하자면 SF이나, ‘매년 다시 봐야 한다’, ‘거의 다큐멘터리다’, ‘예측이 무서울 정도다’ 등의 코멘트가 붙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상당히 서늘한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인류의 앞날을 비관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믿는다. 그 중심에는 거의 판타지적으로 아름다운 두 인물이 있었다. ‘중심’이라고 적으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그들은 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시리즈의 오프닝, 로지 라이언스의 둘째 링컨의 탄생과 더불어 메인 캐릭터-라이언스 패밀리-와 시대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소개될 때, 이디스는 일상적으로 부재하고 빅토르는 등장 자체를 않은 상태다. 이들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어떤 ‘노말’/‘스탠다드’가 아니거나 아니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이디스 라이언스는 세상의 변두리를 찾아다녔고, 빅토르 고라야는 ‘사회’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울타리 안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고라야와 대니얼 라이언스
- “You are a beautiful person.”
링컨이 태어나고 몇 년 후, 작품 상 우크라이나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장악한다(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공개된 시리즈다). ‘숙청’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며, 성적 소수자도 그 대상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임시 거주지에서 근무하던 대니얼은, 게이라서 ‘불법인간’이 된 빅토르를 만난다. 흔적이 남지 않는 전기 고문을 당한 그는, ‘영국에 망명 신청을 했지만, 정부가 고문당했다는 증명을 요구해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잠깐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던 동생 로지의 전화를 받기 직전, 대니얼은 연인 랄프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 비비언 룩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한다, “I don’t give a f***.” “내 집 앞 쓰레기만 제때 수거 되면 족하다”는 비비언 룩이 “놀랍도록 멋지다”며 즐거워하는 랄프와, “저 사람은 괴물”이라고 걱정하는 대니얼. 이 커플은 시리즈가 시작하고 5분 만에 갈라설 조짐을 보이지만, 어쨌든 대니얼은 새해를 맞아 랄프에게 청혼한다. 수 해가 지나고, 이 부부는 ‘여전히 가족 모임에서 농담을 주고받지만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는 관계’가 된다. 랄프는 빅토르와 같은 이들이 ‘안 보이’는 자고, 대니얼은 ‘안 볼 수 없’는 자다.
빅토르 고라야의 첫인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 반짝이는 눈동자와 유머감각. 대놓고 던지는 플러팅에 대니얼은 당황하면서 사로잡히고,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한 점의 위화감도 없다. 대니얼을 먼저 유혹함과 동시에 빅토르는 ‘착한 외국인’의 자격을 잃는데, 이야말로 바라던 바다. 빅토르는 자신의 처지, 대니얼의 “남자친구”(이건… 대니얼이 잘못했다.), 따위를 생각지 않고 그저 ‘나와 너의 끌림’만을 똑바로 응시한다. 누군가는 비꼬는 투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겠고, 비도덕적인 시작이었다고 수식할 수도 있겠으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목격했다면, 그 사이 흐르는 공기가 숨막히게 특별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빅토르는 첫인상 그대로인 인물이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서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곧은 잣대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롭고 유연하게 판단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자.”[Indiepost에 게시된 필자의 글에서 인용] 전개상 자세히 서술되진 않으나 단편적인 언급들로 미루어 보면, 빅토르는 어딜 가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연결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인 듯하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뮤리얼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사람 beautiful person”이라고 할까. 이러한 설정은 그의 프레젠스와 엮여 버린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 ‘느낄’ 여지를 완전히 걷어내려는 제스처로 보이는데, 작품은 그가 마냥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속을 식히며 현재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빅토르가 화면에 잡히면 빛의 아우라와 어둠의 예감이 공존한다. 전자는 인간성과 로맨스, 후자는 그 외의 것들이다.
대니얼이 빅토르와 랄프를 두고 내적 갈등을 키울 무렵, 국제 정치적 갈등도 심각해진다. 중국은 인공 섬 홍샤다오를 짓고, 미국은 그 섬이 핵 군사기지라고 주장한다. 뮤리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자리, 트럼프가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영국에서도 사이렌이 울린다. 세계가 끝날지도 모르는 날, 누구와 있을 것인가- 대니얼은 망설임 없이 빅토르에게 달려간다. 뮤리얼의 집도 빅토르의 거주지도 카오스인데, 두 남자의 사랑만 분명하다. 이후 빅토르는 일단, ‘대니얼의 외국인 남자친구’ 위치에 있게 되는데, 작품은 그를 거기 묶어두지 않는다.
이디스 라이언스와 세계의 균열
- “Tear the world down.”
미국이 홍샤다오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기 직전- 시청자는 이디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오랜 부재로 존재감을 먼저 드러낸 그는, 나쁜 소식을 들고 화상 통화 화면으로 등장한다. 그의 첫인상은 강렬한 감정들로 뒤덮여,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가족들이 반가움을 쏟아내는 와중, 울먹이며 안부를 묻는 그의 실루엣은 이질적이다. 이디스는 ‘섬이 보이는 베트남에 시위하러 왔지만 이미 늦었다’고 설명하고, 곧 방사능에 피폭된다. 이디스의 두 번째 출연 역시 화면 속 화면이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핵미사일 발사와 그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족들은 그것을 보며 이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에게 묻는다, “이디스는 어떤 사람이야?” 대니얼은 “조금 진지하다”고 답한다. 스티븐은 “어려서 갔던 여행에서, 이디스는 몰래 나가 담배를 사고 해변에서 자고 싶어했다”고 기억한다.
마침내 화면이 아닌 실물로 가족들을 만난 이디스, 그는 ‘훙샤다오 영상을 거액에 팔았다고 오해하는 무리’와, ‘정말로 거액에 팔자고 하는 무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빅토르는 그에게 “북극이 거의 녹았던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디스는 시니컬한 유머를 섞어 “우리는 계속 호소해 왔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을 늘어놓는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화제를 꺼낸 빅토르만큼은 그 의미를 알아들은 듯하다. 스티븐이 “우리 태어나고 30년 정도는 살기 좋았잖아.”라며 동의를 구하자, 이디스는 “전쟁이 몇 번 있었지.”라며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는다. 다시, 이디스는 어떤 사람인가?
비비언 룩에게 환호하는 로지 옆에서, 이디스는 삐딱하게 서서 눈을 부릅뜨고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세상을 무너뜨려 버려. Tear the world down.” 비비언 룩의 ‘사성당’이 출마한 총선 투표, 그는 투표지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긋는다. 이디스는 때로 세상을 냉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장소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디스는 비비언 룩처럼 인간사가 굴러가는 방식을 꿰뚫어보고, 비비언 룩과 정 반대에 선다. 세계가 이미 ‘찢어지고’ 있음을 아는, 그 갈라진 틈에 빠진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려는 자. 지구 곳곳의 균열을 찾아 몸을 던져 싸워 온 그는, 국가의 틀을 넘어 사유하고, 법이 아니라 정의를 따른다.
이디스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만큼 상대방의 심리나 됨됨이도 빠르게 파악한다. 주변 사람을 아끼지만 덮어두고 응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래 전 엄마와 형제들을 배신하고 새 가정을 꾸렸던 아버지의 장례식 뒤풀이에서, 용해된(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장례법이다.) 아버지를 리쿼 샷인 양 마셔버린다. 그는 후에 빅토르를 강제 이송시킨 스티븐에게 실망하고, “스티븐은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며 칼 같이 잘라내기도 한다.
이디스는 직설적이고 시니컬하고 유쾌하다. 과감하면서도 무신경하지는 않으며, 그 섬세한 대범함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곤 한다. 링컨에게 처음 치마를 입히고 양갈래 머리를 해 준 이도 이디스고, “치마인지 티셔츠인지 모를” 옷을 입고 링컨이 신나게 뛰어다닐 때,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한 이도 이디스다. 다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르겠다I don’t know”, “아마도maybe”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자만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신감와 여유, 올바른 감수성을 동반한 정치적 유머로 정곡을 찌르는 이디스. 그의 농담이 낡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하는 그의 삶에 닿아 있어서다. 마지막 화, 뮤리얼은 ‘세상이 이렇게 된 건, 1파운드 티셔츠에 가려진 것들을 외면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연설한다. 이디스 혼자만이 변명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 ‘잘못한 우리’에 미포함되는 자가 있다면 그일 터임에도.
미국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고 ‘로 앤 웨이드’ 판례를 뒤집자(후자는 작품 공개 이후 실제로 일어났고…) 이디스는 미국으로 날아가 시위대 맨 앞에 서고, 그 결과로 미국 출입금지를 당한다. 그가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자, 대니얼은 공감한다. 빅토르가 스페인에서 (또)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스페인의 “극좌” 정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어도 영국 정부는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대니얼이 사랑에 빠진 후 넘나들게 된 ‘갈라진 틈’, 이디스는 오래 전부터 거기 발을 딛고 있었다.
대니얼의 죽음과 ‘탓blame’
이 시점에서 빅토르의 존재는 우크라이나에서 비공식적으로 불법이고, 곧 공식적으로 불법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는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는가? ‘망명 신청자’라는 그의 신분은 해당 국가가 정해 놓은 바운더리에서 조금만 벗어나거나, 그 법적 범위가 좁아지면 순식간에 박탈당하는 종류의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빅토르의 거처는 내내 불안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문당한 후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영국에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에 있다가 체포당할 뻔 하고, 국경을 넘고 또 넘어 스페인에서 다시 망명 신청을 한다. 마침내 재회한 대니얼과 그곳에 정착하기로 약속하지만, 곧 쿠데타가 발생하고 정책이 바뀐다. 프랑스의 우익 정권도, 스페인의 “극좌” 정권도, 빅토르와 같은 이들을 내친다.
대니얼은 빅토르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이디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원히 범죄자로 살게 되더라도, 살 수는 있지 않겠냐며. 이디스와 프랜은 그를 돕고, 대니얼은 빅토르를 데리러 간다. 홀로 오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인과 함께 돌아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나, 빅토르의 말대로 대니얼은 “여권을 도둑맞았다고 세관에 말하면” “Ok, this way sir.”이라는 안내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었을 테다. 둘, 두 번째 ‘실패’는 브로커의 게이혐오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했던 “지루한 삶”, 작품은 그 바람을 시스템의 실패와 의도적 부재가 죽이는 과정을 담는다.
대니얼과 랄프는 법이 보호하는 결혼을 했었다. 대니얼과 빅토르의 로맨스는 법적으로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시간은 늘 충분치 않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적인 싸움과 은둔, 체포와 탈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줄곧 방법을 찾고 다음 걸음을 고민한다. 이처럼 애를 태우는 관계성은 픽션 상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매력’은 외국인/비백인/이방인이 ‘상대방’, ‘객체’의 자리에 위치하며 그와 관계 맺는 ‘주인공’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가 ‘구출’ 된다면 주인공은 (죽더라도) 영웅이 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야 한다. 이방인의 죽음이 주인공의 ‘동기’로 작용하는 방향도 있다. <이어즈 앤 이어즈>의 경우는 둘 다 아니다. ‘영국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에게 구해지는 외국인’, ‘인간이 아닌 사건’: 빅토르는 그것들이 아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그리고 갈수록 명확하게, 그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이 연인의 장면에서 상호 또는 대니얼 단독 시선을 주로 취하던 작품은, ‘구조 작전’이 잘 풀리지 않는 동안 빅토르의 시선에 주목한다. 그는 지폐를 세는 대니얼의 손을 바라보고, 좌절하며 욕하고 벽을 치는 대니얼을 바라보고, 값을 흥정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빅토르는 주장도 감정도 ‘차마 강하게 꺼내지 못한다’. 그에겐 돈도, 여권도, 집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 무기력, 근심, 자책, 주저- 그가 지닌 절박함의 속성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자신의 생존에서 대니얼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흐른다. 소중한 이가 ‘나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끝내는, 사랑을 붙잡는다. 쪽배에서 내리자고 대니얼을 설득하지만- 다음 순간, 바다를 건너기를 고집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믿음이 비친다.
이어, 작품은 시청자가 ‘항해’의 카오스와 대니얼의 죽음을 빅토르의 입장에서 겪도록 연출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의 시체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우크라이나어로 ‘모르겠다’고 반복해 중얼거린다. 그 상태 그대로 대니얼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족 그룹 통화 연결이다. ‘대니얼의 전화’를 받고 가족들이 쏟아내는 -다양하지만 유사하게 일상적인- 노이즈를 받아내는 빅토르의 정서는, 이질적이다. 겨우 틈을 찾은 빅토르는 바짝 마른 톤으로 죽음을 전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집에 왔는데, 여기가 집인가요?” 충격과 슬픔에 잠긴 가족들은 달려와 문을 두드린다. 빅토르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공포스럽다. 그것이 4화의 엔딩, 빅토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면 또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위협받고 있는가. 서구적 표상에 길들여져 있던 시청자는 시험/갈등에 빠진다.[참고: 러셀 토비, VULTURE]
다음 화는 이전 화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열린다. 영국 총리는 이제 비비언 룩이고, “사라진 자disappeared”들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작품은 대니얼을 애도하며, 그의 죽음에 집착하는 스티븐을 조명한다. 수용소에 갇힌 빅토르를 면회하러 온 스티븐, 다소 일방적인 대화 사이에- 대니얼이 죽던 날 라이언스 가족과 빅토르의 대면이, 짧은 컷들로 나뉜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비난을 퍼붓는 로지와 스티븐, 엉망으로 움츠러들어 무어라 답하거나 하지 못하는 빅토르, 대사는 뮤트 처리돼 있다.(짐작 가능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 끝에 로지와 빅토르는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지만, 스티븐은 ‘탓’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어스트와일”(‘골라낸’ 자들을 가두는 열악한 비밀 수용 시설)의 내부자가 된 스티븐은,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 빅토르를 이송자 명단에 넣어 “사라지게” 한다. 몇 년 전, 빅토르는 어쩌다 영국에서 추방당했던가, 대니얼에게 빅토르의 일터 정보를 들은 랄프가 보복성 리포트를 해서다.(규칙을 어긴 빅토르의 잘못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그 규칙은 ‘고문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답하겠다.) 두 사람의 행동은 겹쳐 보인다. 랄프는 작품이 ‘돌아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자발적으로 무지했던 그는 ‘행복’과 자극만을 좇았고, 안전하고 좁은 특권 바깥을 볼 의사가 없었다. 리포트 사건에 앞서, 랄프가 빅토르의 억양을 놀리듯 따라하는 컷이 있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였으나, 그가 빅토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를 대하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랄프는 남편에게 배신당했고, 크게 상처받았다. 그러나 ‘복수’의 구체적인 방법이 (아마 인지한 적 없었을) 특권을 이용해 누군가를 안전망 밖으로 내쳐버리는 것이라는 점이, 그 사고방식과 실행력이 무섭다. 랄프는 아마 제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티븐은 어떤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였을 때, 그는 친절한 지지자의 태도를 보였다. 대니얼의 죽음 후 스티븐은 균형을 놓친다. 그는 빅토르에게, “전부 당신의 탓이다,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동안 너무나 질렸다”고 말한다. “awful”, “bored”: 그 단어들을 빅토르에게 덧씌운다.(빅토르와 대니얼이 “boring life”를 바랐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워딩을 씁쓸하게 곱씹게 된다.) 동생을 잃은 스티븐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겠냐만은- 랄프보다 훨씬 ‘똑똑한’ 그가 빅토르를 바라보았던 시선은, 어쩌면 랄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선다. (다행히 작품은 스티븐을 버리지 않고, 후에 내부고발이라는 기회를 준다.)
‘그 모든 일들이 꼭 빅토르의 탓인 것만 같은’ 이 모호한 감각. 만약 스티븐처럼 그 ‘탓’의 감각을 지우기 힘들다면,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왜 그의 탓인가? 그의 탓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 그래선 안 되는 이와 사랑에 빠진 것? 살아남으려고 애쓴 것? 살아남은 것? 하나하나 살피며 걷어내다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거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허면 그 감각의 원천은 무엇인가. 로지가 사는 곳을 ‘범죄 구역’으로 지정한 시스템은 빅토르를 범죄자로 만든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감추려는 권력자들이 온갖 지표를 끌어와 ‘보호 대상’과 ‘위험 요소’를 구분하고, ‘적절’한 그룹에 성공적으로 낙인을 찍은 결과다. 또한, 너무 피곤했던, 지나치게 절망했던, 현재가 충분히 안락했던- 개인들이 그것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 결과다.
빅토르는 그 못난 만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저 스티븐을 ‘let go’한다. ‘당신의 탓’이라는 스티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대니얼의 죽음은 ‘나 때문이지만 내 탓은 아님’을 알고, 받아들인다. ‘내 존재를 골칫거리로 만든 시스템’을 인지하고, 애도에서 ‘거짓된 탓의 감각’을 분리해 낸다. “어스트와일”에서 재회한 친구가 ‘대니얼이 너를 꺼내 주지 않겠냐’고 묻자, 빅토르는 “할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라고 답하며 미소짓는다. 그에게 대니얼은 죄책감보다는 사랑의 기억이고, ‘내가 택한 가족’이고, 그를 살게 하는 동력이다.
이방인들의 연대와 사랑
낙인이 찍힌 당사자인 빅토르, 그리고 이디스는, ‘의심치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이다. 첫 만남부터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주로 ‘대니얼이 이디스에게 빅토르와 관련해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연결되던 두 사람은, 대니얼이 죽은 이후 본격적으로 한 화면에 잡힌다. 거기엔 단순히 가족-지인 간의 친밀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 (대니얼-이디스의 것이 그러했듯 퀴어 피플 간의 유대도 포함돼 있을 테다.)
1화 엔딩, 까마득한 해안에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디스. 흥분과 분노로 범벅된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빽빽한 군중 사이에서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있는 빅토르가 거기 겹쳐 보였다. 하나 더: 홍샤다오에 미사일이 떨어지기 직전 화상 통화를 건 이디스와, 4화 엔딩에서 대니얼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 그룹 통화를 건 빅토르가 있다. 앞서 두 장면을 각각 묘사하며 동일하게 ‘이질적’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구도가 다른 두 시퀀스에 작품이 부러 유사한 뉘앙스를 부여했다는 해석은 비약일 테지만, 역시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운과 불안의 기운이, ‘나쁜 뉴스’가 된다. 빅토르와 이디스는 ‘분위기를 깨는 자’[Sara Ahmed]들이다.
난민인 빅토르와 피폭당한 이디스의 신체는 이디스의 조모 뮤리엘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있다. 빅토르는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 오늘을 소중히 즐기고, 이디스는 죽음을 예감하며 세상의 그림자들을 조명한다. 이디스는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잊지 말자는 듯 갇혀 있는 빅토르를 언급한다. 그는 ‘분위기를 깨기를 자처하는 자’, ‘비밀’을 끄집어내는 자, 자발적 아웃사이더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룰에 순응하길 거부하고, 불평하기도 전에 무너뜨릴 궁리를 시작하는 그는, 제 어머니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딸도 아니다.
빅토르는 ‘그 자리에 있거나 언급되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임에도 그렇다. 비자발적 아웃사이더인 그는 둘 이상의 국가가 솎아내고 감춘 그림자, 비밀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친부모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숨겨 준 우크라이나의 친구들이고, 대니얼이고, “너의 부모는 역겨운 사람들”이라고 해 준 뮤리얼이다. 곁에 나란히 서서 손을 내미는 이디스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아웃사이더’적 판단력을 유지하는 채로다. “우릴 가둬 놓고, 전염병을 들여와 퍼지게 내버려 둬. 아주 영국적이야.”,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어스트와일”에 갇힌 빅토르가 한 시퀀스에 각각 던지는 대사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기득권층의 룰에 들어맞지 않는 자였던 빅토르는, 라이언스 가족relatives을 자신의 가족family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섞여 용해되지 않고 ‘당당히 아웃사이더로 남는다.’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혁명적 변화는 한쪽이 한쪽을 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디스는 바깥에서, 빅토르는 수용소 안에서, ‘비비언 룩 정권 하에서 사라진 자들’에 대해 수소문한다. 빅토르가 전한 “어스트와일”이라는 이름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스티븐에 의해 그가 “사라진 자”가 되자, 이디스와 프랜, 빅토르의 변호사 이본, 동생이 “사라진” 아흐메드, 아빠의 행동을 온라인으로 목격한 스티븐의 딸 배서니… 많은 이들이 모여 ‘빅토르를 건져내는 김에 세상을 뒤집는 작전’에 동참한다. 여기서 빅토르는 ‘구해지는 자’인 것 뿐 아니라 함께 세상을 뒤집는 자다. ‘구해진’ “어스트와일” 수용자가 카메라를 들어야만, ‘가로막힌’ “레드존” 주민들이 펜스를 들이받아야만, 그들이 “보여져야”만 혁명은 성공한다-고 작품은 말한다.
“지루한 일상”을 갈망했던 빅토르와 “지루한 일상”을 의심하던 이디스는 닮아 있었다. 빅토르는 (아마 난민이 되기 전부터) 안전망 바깥에서 살아 왔고, 이디스는 그 안팎을 오가며 균열을 가시화해 왔다. 그들은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들’ 너머의 세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감시카메라 위치를 교묘하게 피해 입모양을 숨길 줄 아는’ 두 사람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어디에선가 만나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디스에 대한 서술이 끝내 프랜에 닿듯, 빅토르를 설명하다 보면 대니얼을 돌이키게 된다. 그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방인으로 불리며, 기꺼이 이방인인 채로.
* 사라 아메드가 쓴 <행복의 약속>(2021년 후마니타스 번역본)을 읽다 쓰기 시작한 글이다. 빅토르와 이디스의 ‘이방인성’을 종합하는 데에 특히 도움을 받았다.
모든 사진 출처: HBO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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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다.
김효은 감독의 <새벽의 Tango>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된 영화이다. 일상을 파고드는 과거의 사건들과 그 사건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입체적인 인물과 다양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그런 작품이었다. 이연, 권소현, 박한솔 배우의 열연으로 특별함을 더하고 잔잔하면서도 강렬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시놉시스
친구에게 사기당한 뒤 숙식 제공 공장에 숨어들 듯 들어와 일자리를 잡은, 매사가 분명하고 직설적인 지원. 누구에게나 상냥하며 스스로도 언제나 낙관적인 지원의 룸메이트 주희.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 조장을 달게 된 꽤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한별. <새벽의 Tango>는 이들의 이야기다. 어느 날 공장 동료에게 사고가 일어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세 사람의 반응과 해법은 놀랄 만큼 다르다. 인물 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난감함 혹은 그 난감함을 넘어서는 감동은 입체적인 캐릭터 구축과 유연한 감정 축적으로 점점 더 강력해진다. <새벽의 Tango>는 관계의 실패와 복구에 관한 신중한 질문이고, 성격과 운명에 관한 흥미로운 예시이며, 마침내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의 상실에 관한 애틋한 애도다. (정한석)
영화리뷰
친구에게 사기당한 지원은 급하게 일자리를 찾아 공장에 들어오게 된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휘둘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지원과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낙관적인 룸메이트 주희가 만난다. 전에는 마주하지 못했던 친절함에 어색해 거리를 두기도 했지만 그들은 점차 가까워진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는데...
소문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사실은 진실이 되고, 더욱 무성해져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에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소문이라는 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교묘히 섞여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만든다. 타인의 불행을 유머로 소비하고 행복을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손쉽게 소비하는 것이다. 그 말을 재미있게 소비하면서도 그 말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그 당사자를 욕하곤 한다. 그처럼 말과 잘못에 대해 책임지려 하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누구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진다. 유일하게 그 책임을 지는 주희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떳떳하지 못해서인 건 아닐까.
이 영화는 참으로 씁쓸하다. 하지만 감정의 호수로 빠져드는 듯한 묘한 매력이 있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는 새벽이라는 시간대는 사람이 유일하게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 그리고 특별함을 나눌 수 있는 시간대로 작용한다. 타인에게 휘둘릴 수 있는 낮과는 달리 낯선 땅고를 '새벽'에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다. 조금씩 쌓아가는 미묘한 감정을 깨닫기도 전에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결말에 더할 나위 없는 허망함을 느꼈지만 숨을 수 있는 새벽의 시간에 머물고 싶었던 지원이 낮의 시간대로 나아가게 만드는 결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이처럼 삶은 때론 지나치게 잔혹하면서도 희망을 주는 모순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가 겪는 감정의 복잡함과 순간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고 결정에 책임을 지며 성장해 나간다. 새벽의 고요함에서 시작된 지원의 여정은 낮의 복잡한 현실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상실에서 고귀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상영 시간
10월 5일 20: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10월 8일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10월 9일 20:0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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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폐미'라는 그 모호함에 대하여
‘퇴폐미’ 라는 그 모호함에 대하여
영화 속 주인공들이나, 연예인들에게 심심치 않게 쓰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말 ’퇴폐미’, 이 묘한 단어는 때로 음란하다거나, 부도덕적인 것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팜므파탈이나, 악녀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퇴폐는 한자로는 무너질 퇴, 폐할 폐를 쓰고, ‘퇴폐미’를 사전에서는 ‘도덕이나 풍속문화 따위를 벗어난 데서 느껴지는 아름 다움’으로 정의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퇴폐미(decadence) 라는 말은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미술, 문학, 음악, 철학 등 문화 전반의 경향에서 시작되었다. ‘시대정신을 무시한 미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미술’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히틀러가 나치 독재가 지배하는 동안 인상파,표현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 야수파 등에 모두 ‘퇴폐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여 칸딘스키, 뭉크, 피카소, 샤갈의 그림이 포함된, 퇴폐미술전을 열고, 많은 작가를 탄압한 사례는 유명하다. 공산주의에서는 자본주의 음악이라며 ‘재즈’를 퇴폐적이라며 배격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유신체제에서 대중가요를 퇴폐성향이라는 이름을 붙여 금지곡으로 만들기도 했다.
퇴폐라는 말은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에 대한 반항의 의미가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기존 체제와 다른 길을 시도 하고, 지금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고, 황금빛, 꽃길과는 다르게 투쟁의 이미지로 그려지기 쉽다. 투쟁하고, 박해 받는 어두운 현실. 그리하여 공허하고 때때로 슬픈 눈빛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는 이미지.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나직히 말할 것 같은, 무심한 눈빛.
생각해보면 영화 속 퇴폐미를 가진 인물들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한 눈빛으로 스토리에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적인 캐릭터. 나는 왜 이런 캐릭터에게, 배우에게 매력을 느끼고 때때로 꺄 – 하고 비명도 지르며 빠져들게 되는 걸까.
나의 경우, 현실에서는 대체로 일상을 평범하게 꾸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탈이라고 해봐야 가까운 곳으로 여행 정도인 삶. 내가 이런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나에게 없는(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밖으로 거의 발현되지 않은) 저항과 반항에 대한 욕망을 실현 시켜주는 대리만족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엔 모호하여 더 신비하고 매력적인 ‘퇴폐미’ 가 가득한 영화를 보며 잠시 일상을 탈출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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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사가 곧 가족사, 가족사가 곧 개인사
장재현감독의 <검은 사제들>은 한국에서 오컬트영화가 흥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감독이 오컬트장르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그의 데뷔작을 통하여, 장재현감독은 장르영화감독으로서의 입지를 톡톡히 다졌다. <검은 사제들>부터 <사바하>에 이르기까지 장재현감독은 자신만의 유니버스를 구축해 나갔고, <파묘>는 동양의 오컬트를 한국사에 녹아내었다. 거기에 마치 <사일런트 힐>을 연상시키는 크리처물을 더하여 장재현표 오락영화의 새로운 시도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파묘>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묫바람이 잘못 든 집에 이장을 하게 된 장의사, 무당, 풍수사가 위험한 무언가를 만나게 되면서 이를 헤쳐나가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총 6장으로 이루어지며 전반부에는 동양의 오컬트로 전개되다가 '무언가'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면서 영화는 크리처물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한국을 넘어 동양 전체의 영역으로 문화가 확장되어 극을 전개해 나간다. 더불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징을 활용하여 극의 개연성과 당위성, 캐릭터의 특성에 부여한다. 극 중 빌런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본군들로, 역경을 헤쳐나가는 인물들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하였다는 것에서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한'을 이야기의 뼈대로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영화 <파묘>는 크리처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후반부에서부터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검은 사제들>에서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악마의 존재가 <파묘>에서는 얼굴까지 클로즈업되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크리처물에 낯선 관객들은 유치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초반부에는 고전 오컬트물이 떠오른다면, 후반부에는 영화 <더넌>이라든지 <사일런트 힐> 같은 영화들이 떠오른다는 것인데 <사일런트 힐>에는 있는 긴장감이 <파묘>에서는 다소 약하다.
다만 이는 영화 <파묘>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피할 수 없는 단점으로 보이기에 이것으로 작품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논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시나리오가 극의 당위성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장르의 전환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그렇다고 장르가 완전히 전환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계획 하에 이루어진 선택임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파묘>는 장재현감독의 오컬트 3부작이라는 것과 한국에서 오컬트장르영화를 잘 만들어내는 감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자체가 꽤 큰 의미를 지니는 바이다. 물론 작품성이 부족하다면야, 영화의 의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오컬트영화를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대하는 감독의 자세가 연이어 괜찮은 작품을 뽑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종합적으로 녹여낸 영화 <파묘>의 결말은 동화책과도 같은 결말로는 끝나지 않기에 오히려 완벽해 보인다. 영화의 결말을 우리나라 역사로 치환해 본다면 이 영화가 왜 구태여 그러한 선택을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 공통의 상처인 일제강점기가 영화의 소재로 쓰이지 않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가족사가 곧 개인사이자 개인사가 곧 가족사가 되는 공포를 영화 <파묘>는 영리하게 사용하면서도, 이를 단순히 유희적 소비로만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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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외면하고, 진실을 피하고, 흘러서 결국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니체, 선악을 넘어서영화 <아네트>를 보러 가기 전에 줄거리를 읽어보았다. 오페라 가수 '안'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 첫눈에 반한 둘, 그리고 빛과 어둠. 파도를 배경으로 한 포스터는 꽤 격정적으로 보였고, 이것을 사랑의 소용돌이쯤으로 해석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게 있었다. 장르에 로맨스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 사랑을 노래하는 뮤지컬 영화인데 왜 분류를 이렇게 해뒀을까?
영화를 보던 중에 이해했다. 이건 사랑 영화가 아니구나.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답게 시작은 음악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음성이겠다. 숨도, 웃음도, 말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자의 말. Ladies and Gentlemen.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에 할 법한 시작과 달리 그가 하는 말은 다소 기이하다. 노래부터 웃음, 하품, 눈물처럼 다소 즉각적인 반응, 심지어는 숨 쉬는 것마저 이 쇼에서는 금지된다. 우리 개인의 자유와 의사결정을 모두 빼앗듯이.
이제 밴드의 녹음 현장에서 실제 감독이 나와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So may we start. 플래시몹처럼 한 무리에 사람이 하나둘씩 불어나고, 끝으로 주인공들이 걷고, 걷다가 흩어진다. 이때부터 영화의 큰 특징이 드러났다. 함축과 생략. 대사가 곧 노래 가삿말이 송스루 뮤지컬 영화다운 면모다. 다만 <레미제라블>을 떠올리면 조금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아네트>는 서사 전개 방식이 평이하지 않다. 인물의 삶과 방향성,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중요한 대목은 가십 뉴스 형식으로 짧게 보여준다. 그것도 음악과 어우러지니, 뉴스보다는 광고에 가까운 느낌이다. 시간을 뛰어넘기 용이한 구조다.
어느새 인물은 미래에 와있고, 생각이나 감정은 '무대'라는 공간을 통해서 드러난다. 오페라 가수 안, 스탠드업 코미디 헨리 모두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연기하는 사람이니까.
안이 맡은 배역은 늘 배신과 고통이 뒤따르며, 캐릭터의 죽음으로 끝난다. 옷과 역할은 바뀌지만, 그의 결말은 전혀 달라지는 게 없다. 이것이 하나의 운명인 것처럼. Where is the moon? Where is the starlight? 별빛도, 달빛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을 맴도는 안. 꼭 미래의 복선 같은 노랫말이 들린다. Though I thought that I knew him, I am wrong. I don't know him. He is a stranger. Tonight.
헨리는 무대에 오르기 전, 자신만의 루틴을 반복한다. 담배를 피우고, 바나나를 먹고, 가볍게 뛰면서 펀치를 휘두르고, 복싱 가운의 후드를 뒤집어쓴다. 관객들의 웃음, 환호, 박수를 받던 헨리. 유쾌함으로 물든 공간에는 하나의 물음이 끝없이 뒤따랐다.
Why did you become a comedian? 헨리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안의 이야기를 한다. 안과 약혼했다고. 한창인 나이 때에 자유가 끝났다고 표현하자, 관객석 한 곳에서 약간의 타박이 들렸다. 다시, 헨리가 반응했다. 안은 너무 완벽한데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느냐고. Yes, Yes, Yes. 이 대답은 실제 헨리가 들었던 반응일까, 아니면 헨리의 자격지심일까?
영화의 빌드업은 끝났다. 이제 차곡차곡 쌓인 불안이 모습을 드러내고, 탑이 무너질 때다.
둘은 결혼하고, 아이가 탄생한다. 딸의 이름은 아네트 Annette. 하지만 아네트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보이지 않는 줄로 인형을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Marionette의 모습이었다. 아네트는 보호자의 품에 안긴 채 모든 움직임에 제약받는다. 뽀뽀를 피하려고 고개를 돌려도 그 작은 몸짓은 가뿐히 무시당하고, 결국 보호자는 원하는 바를 취한다. 이 또한 뒤에 펼쳐질 이야기의 단서가 된다.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안과 대조적으로 헨리의 커리어는 퇴행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끝인 셈이다. 타인을 공격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고, 비꼬던 것이 통하지 않자 헨리는 더욱 자극적인 이야기를 펼쳤다. 오늘 안을 죽였다고. 이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 헨리는 이야기를 멈췄어야 했다. 그건 더 이상 웃긴 이야기가 아니라 모욕적인 폄하라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헨리는 과거의 영광에 살면서 현재의 추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안의 성공과 지위를 시기하기에 이르렀다. 열등감은 소위 '망한' 사람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커리어가 망한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들, 즉 자기혐오가 열등감으로, 열등감이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발현된다.
그 흔적은 헨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고 온 여섯 명의 여성. Subjected to Henry McHenry's abuses. Witnesses to his violence. And his anger. His anger. 이때 그들의 모습은 꼭 경찰서에서 취조당하는 용의자 같았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나서서 말을 하느냐는 노랫말이 압박감을 더했다.
이때 교차된 장면은 공연장으로 이동하던 안이 잠결에 보았던 산불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헨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보였다. 약간 놀란 듯한 안의 표정에서도.
두 사람은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고자 요트 여행을 떠났다. 비가 퍼붓고, 배가 흔들리고, 왠지 모르게 스산한 여행을 누구도 상상하진 않았을 테다. 술에 잔뜩 취한 헨리는 비를 맞으며, 그만 들어가자는 안의 말을 모조리 무시했다. 그리고 갑자기 시작된 왈츠. 안은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헨리의 손아귀에 잡혀 마구잡이로 돌고, 휘청이고, 미끄러진다.
헨리는 안의 말을 개의치 않는다. 바람 때문에 목이 상한다는 말도, 이러면 위험하다는 말도. 오히려 그 말에 자극을 받은 듯 움직임은 더욱 과감해졌다. 결국 헨리의 우악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안은 바닷속으로 빠지고 만다. 헨리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작은 배를 타고 아네트와 탈출해 몸져눕는다.
달을 바라보는 아네트, 그리고 억울함에 유령으로라도 주변을 맴도는 안. 이제 안의 복수가 시작된다. 다름 아닌 자신의 딸, 아네트의 목소리로.
헨리는 아네뜨에게 줄 선물로 램프를 사 온다. 불을 켜면 방 안에 달과 별이 퍼지는 램프. 그때 아네트는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보다는 멜로디다. 그 흥얼거림을 듣고, 헨리는 안과 오랜 인연이 있던 지휘자를 데려 온다. 그러니까, 자신의 커리어와 명성이 모두 소멸된 헨리에겐 새로운 기회였던 것이다. 지휘자는 이건 아동 착취라고 거부했지만, 그건 처음뿐이었다. 돈 때문이든, 명성 때문이든, 예술적 호기심 때문이든, 혹은 그 모든 것을 위해서든 아네트를 무대에 세웠다.
아네트는 금세 인기를 얻고, 그 인기의 보상처럼 헨리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아네트의 목소리는 멜로디를 부를 때만 들을 수 있지, 평소엔 어떤 말도 조잘대지 않았다. 장난감 악기를 가지고 놀던 뒷모습은 방과 무대에 갇힌 꼭두각시 같았다.
헨리는 지휘자에게 아네트를 맡겨두고 밖을 떠돈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고, 환호해 주고, 사랑해 줄 여성들을 만나러. 하지만 헨리는 아무것도 사랑을 하거나 받을 자격이 없다. 이미 자신의 손으로 사랑을 죽였고, 또 다른 사랑은 한 곳에 방치해 뒀으니까.
성공의 궤도에 오를수록 헨리는 불안해진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끝은 또 살인이었다. 아네트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 현장을 제 눈으로 목도하지 않아도 헨리의 살짝 젖은 머리, 눈빛, 숨결에서 느꼈을 테다.
상황의 끝에 다다른 헨리는 갑작스럽게 아네트의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끝까지 돈벌이를 놓지 않았다. 성대하게 펼쳐진 아네트의 은퇴 전 마지막 공연. 언제나 그렇듯 아네트는 벼랑 끝 같은 구조물에 섰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점이 있다. 아네트는 멜로디를 부르지 않고,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Dad kills people.
재판장.
탕. 탕. 탕.
총소리 같은 나무망치 소리.
드디어 마지막. 진짜 아네트를 만날 때다. 많이 변했구나, 한 마디로 마리오네트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아네트. 헨리도 변했다. 확 짧아진 머리. 사람을 죽일 때마다 자신의 턱 끝을 물들던 붉은 상흔도 어느새 꽤 큰 크기로 자리 잡았다.
헨리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며 아네트의 용서를 빈다. 하지만 아네트는 헨리와 안, 모두를 거부한다. 자신을 이용하려고만 했지 진정으로 아껴주고 사랑하지 않았다고. 특히 헨리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아네트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한다. 용서하지 않고, 잊지 않고, 강해지겠다고.
마리오네트는 죽고, 이제 아네트는 교도소 밖, 세상을 살아간다.
숨소리까지 허용치 않던 쇼가 끝났다. 엔딩 크레딧에서 우리는 배웅을 받는다. 어쩌면 그들을 배웅하는 걸까. 우리는 그들이 비춰주는 수많은 달을 보며, 길을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테다. 달이 비추는 건 길이지만, 내가 비추는 건 나여야 한다. 남이 나를 어떤 식으로 보든, 내가 나를 잃는 순간 나의 심연은 괴물의 것이 될 테니까.
'괴물'이라고 해서 교활하고 치명적인 게 아니다. 옳고 그름의 판별 능력도, 상황 파악 능력도, 사랑할 능력도 대상도, 그 무엇도 없는 사람. 그러니까 줄이 달린 인형이 되는 셈이다. 그 줄을 끊는 건 결국 나의 보호자도 아닌 나 자신이고. 이 사실을 홀로 깨우친 아네트가 대견스러울 뿐이다.
*위 글은 씨네랩(https://cinelab.co.kr/)에서 초대권을 받아 참석 후 기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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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줄거리
만삭의 엄마와 숲 속으로 들어가는 오필리아.
먼 길을 힘겹게 달려왔건만, 새아버지는 자신들을 딱히 반기지 않는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오필리아는 숲 속 미로에서 자신을 '판'이라 소개하는 요정을 만난다.
판은 그녀를 '모안나'라고 부르며 오필리아가 원래는 지하왕국의 공주라고 말한다.
오필리아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예언의 책을 건네는데...
시청포인트
1. 마냥 아름답고 달콤한 판타지가 아닌 다크 판타지
2. 점점 오필리아에게 동화되는 자신을 발견
3. 여운 짙은 마지막 장면
전체 평점
★★★★★(5.0 / 5.0)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그 장면'을 우연히 접하고 영화가 궁금해져서 보게 되었다. 이런저런 해석을 해보려고 했지만, 슬쩍 검색만 해봐도 어마어마한 분량의 분석들이 쏟아져 나오는 터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뜯어내서 일일이 분석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야말로 '멍 때리고' 본 영화. 내게 정말 좋은 영화란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다. 혹은 숨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거나. 두고두고 보고 싶을 만큼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였다.
이 글은 내가 영화 속 내용을 진실 혹은 오필리아의 상상, 어떤 것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어차피 이 영화의 핵심은 그 부분이 아니던가. 역사적 사실이나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희망이 있겠거니'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지만, 암울한 결말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영화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면 좋겠지만,
나로서는 오필리아의 상상이라고밖에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키지 않고 표면만 보아도 이해가 된다. 연이은 부모의 죽음과 계부의 학대, 불안정한 주변 환경, 누구에게도 관심받거나 사랑받지 못한 채 방치된 아이. 오필리아는 책 속 아름다운 세상처럼 자신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지하왕국에서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현실에서 충분히 만족했더라면 구태여 판이 내미는 선택의 책을 받아 들 필요가 있었을까? 지금 현실세계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더불어 자신을 '공주'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맞아떨어진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을 때 사람들은 오필리아를 보고 좋아하지만, 진흙투성이가 된 오필리아를 보고는 그녀의 어머니조차 화를 낸다. 굳이 자신의 외관이나 행동을 꾸미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봐주는 이는 없다. 어린 소녀는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억을 잃은 공주'로 설정한 것이다.
보통 우리는 사람이 죽었을 때,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란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오필리아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후,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지하왕국의 부모님 앞에 서 있는 장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눈물이 났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감내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켜 아름답고 황홀한 세계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달빛만이 오필리아를 비추는 장면에 비해 지하왕국은 너무도 휘황찬란해서 확연한 슬픔을 자아낸다.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진 작은 소녀에게는 이승에 남아 있을만한 그 어떤 이유조차 없다. 그나마 삶을 버티게 해 주었던 가족마저도 자신보다 앞서 저승에 갔기 때문. 오필리아에겐 차라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고달픈 현실을 애써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마저도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애달플 뿐이지만.
오필리아가 죽은 후라도 자신이 원하는 '어느 거짓과 고통도 없는' 곳으로 가서 모안나 공주로 영원히 행복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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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리는 가족이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돌아왔다. 스토커는 관객의 눈치를 본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최근 영화 '괴물'을 다시 보면서 떠올랐던 그의 영화, 서사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보고자 한다.
1. 담백한 이야기의 매력
그의 이야기에 빠진 이유는 담백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울어달라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게 한다. 관객을 말 그대로 관찰자로서 기능하게 한다.
그의 영화의 인물들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소소한 행복들을 추구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들의 행복은 이질적으로 비춰진다. 어느 가족에서는 훔친 물건으로 한 가족의 밥상을 차려내 하하호호 웃음짓고 있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자매들도 복잡한 가정사를 가졌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한 밥상을 함께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담백하게, 하지만 밝게 서로의 상태를 살필 뿐이다. 그들이 가진 특유의 멋이라고나 할까.
2. 그들과 대비되는 사회의 무심함
그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주류 사회의 허망함을 느낀다. 사회 속에 속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 사회의 일원이 되면 누군가는 낙오되는 생존 게임이라고 생각한다면 난 이긴 자라는 오만 아래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과 함께. 그들은 주류 사회에서 낙오되었지만 행복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류 사회는 여전히 중요하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야 가장 최악이 상황에서 구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도 배다른 여동생과 오래 함께하려면 호적이 중요하고, 나의 가족 속 가짜 가족들도 그들을 증명할 호적이 없어 사회에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내가 사회에 속해있다는 호적의 존재, 그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내리는 인간의 무정함도 알 수 있다. 그의 영화들은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못하는 현대인들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류의 관점에서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타인의 관심이 가있지 않는 것을 미끼로 범죄자가 되어 있거나 어딘가 사회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런 걸 보고 있자면 혈육이라는 개념의 무의미함을 그의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피를 나누었다고 해서 가족이라고 할 수 없고 타인이어도 가족이 될 수 있다'가 그의 작품 세계 속 공통 키워드이다. 가족은 피가 아니라 관계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게 그의 영화가 가진 무심함 속 따뜻함이다. 주류 사회가 혈연 중심의 가족을 외칠 경우, 가족 안의 관계성이 모두 좋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가식적인 가족애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관계성이 빛나는 경우 나이, 직업, 사회적 위치에 관계없이 진실된 가족애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서도,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도, '어느 가족', 그리고 기타 다른 영화에서도 그가 그리는 가족이 그렇게 따뜻해 보였던 게 그런 이유 때문 아니었을까. 그래서 요란하지 않지만 보고나면 힐링이 되는 그의 영화가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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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사다 가족> 메인 예고편
아버지를 닮아 어릴 적부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던 마사시는 사진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졸업작품으로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재현한 사진을 찍는다.
독특한 가족사진으로 주목받게 된 마사시는
타카하라 가족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특별한 가족사진을 찍어주는데
어느 날, 타카하라 가족이 사는 마을에 쓰나미가 덮쳤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들을 찾기 위해 마을로 간 마사시는 버려진 사진을 세척하는 봉사를 통해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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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을 수놓은 별빛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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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와 난민 소년, 소외된 그들이 만든 파리의 기적!남모를 상처와 사연으로 홈리스의 삶을 살게 된 '크리스틴'
세상의 외면과 냉대 속에서 삶을 이어가던 크리스틴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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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말도 통하지 않지만 크리스틴은 술리의 엄마를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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