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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티2022-01-06 23:19:41

비로소 진짜 자신의 운전대를 잡게 된 모든 이들에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이니 원치 않으시거나 관람 전이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 주세요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가 돌아왔다. 이번 12월은 그의 달이라고 해도 될 만큼, 두 작품이 국내 관객들에게 무사히 안착했다. 바로 <해피 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이다. 먼저 개봉한 <해피 아워>는 사실 2015년에 현지에서 개봉했지만, 한국에는 무려 6년이나 흐른 지금 개봉을 한 것이다. <해피 아워>가 개봉 후 몇 주 뒤 바로 <드라이브 마이 카>가 개봉을 하는데, 이렇게 같은 감독의 작품 더군다나 해외 감독의 작품이 연달아 개봉하는 것은 국내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또한 러닝 타임도 어마어마하다. <해피 아워>는 328분, 무려 5시간 반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는 179분, 약 3시간이다. 그만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찾는 국내 관객들이 많아졌다는 뜻도 되겠지만, 동시에 두 작품을 만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국내에는 지난 2019년 개봉한 <아사코>로 이름을 날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멜로 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영화를 본격적으로 파헤쳐보면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의 흔적 속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목소리가 숨겨져 있었다. 장르와 플롯의 틀 속에서 완전한 류스케의 해석을 한 번에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개봉 당시 국내 씨네필들에게서 아주 열렬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나 또한 <아사코>를 관람하고 난 후의 나의 주관적인 감상과 다른 관객들의 깊이 있는 해석을 비교하는 재미가 아주 컸었는데 이번 <드라이브 마이 카> 또한 어떤 매력이 있을지 매우 기대가 되었다. 지난 제 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단숨에 매진을 기록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제 74회 칸 영화제 각본상 그리고 최근 LA 비평가 협회 최우수 작품상까지 수상하면서 전 세계가 주목을 한 번에 받고 있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개봉 전 프리미어 상영으로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영화는 겉보기에는 정말 아름다운 부부 가후쿠와 오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남편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 오토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을 받아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된 가후쿠가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운전사 ‘미사키’를 만나게 되고,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저 건조했던 둘 사이에 깊은 공감의 연대가 피어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거리가 명확하게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영화다. 그만큼 러닝타임이 길기도 하고 (약 179분) 한번에 영화적인 재미를 찾는 작품이기보다 천천히 그리고 묵묵하게 영화가 제시하는 텍스트를 해석해야 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단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차’ 그리고 ‘연극’ 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 시피, 영화의 주요 소재는 바로 ‘차’이다. 그리고 당연히 가후쿠와 미사키 두 사람은 차에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후쿠는 우선 ‘차’라는 공간이 그의 최적의 연극 연습 공간이었다. 가후쿠는 상대 배우의 대사를 녹음해 준 아내 오토의 테이프를 매일 틀며 대사를 외운다. 그에게 있어 ‘차’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자 누구에게로부터 방해 받지 않는 사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서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한 뒤로부터는 이런 성질이 더욱 강해진다. 어떻게 보면 그 이후에는 ‘연극 연습’이라는 틀 안에 그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미사키에게 ‘차’란 상처가 가득한 공간이다. 미사키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고 자랐으며, 새벽에 일찍 출근하는 어머니를 차에 태우면서 아주 섬세한 운전을 강요받았다. 그 덕에 운전 실력이 아주 뛰어난 미사키는 운전사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어릴 적 그녀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이렇게 ‘차’라는 공간에서 각자 나름의 상처와 좌절감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다뤄왔던 가후쿠와 미사키. 매일 운전을 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달려도 마음속에서 그들은 수없이 방황하고 멈춤을 반복한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달려 왔던 이 둘이 마침내 만났을 때, 그들은 진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연극’이다. 영화의 8할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러시아의 유명 극작가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라는 연극이 영화에서 대단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가후쿠가 수도 없이 연습했던 연극 그리고 연출자로서 연극제에 출품하는 연극이 「바냐 아저씨」이고, 영화에서 자주 가후쿠와 배우들이 이 「바냐 아저씨」 대본 연습을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영화 초반에는 이 극본의 대사가 무작정 흘러나오기 때문에 무슨 의미이지하고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대사들의 의미가 또렷해진다. 「바냐 아저씨」의 설명을 가져 오자면, ‘개인의 고립과 소통의 단절 속에서 반복되는 절망과 후회를 보여주며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나와 있다. 영화를 다 본 후, 이 연극의 설명을 읽었을 때 정말 소름이 돋았다. 저 설명이 바로 <드라이브 마이 카>가 시사하는 바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도 없이 연습해온 대사들과 연기, 아주 가까이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익숙해져버린 모든 것이 다 자신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배우들이 읊기도 하고 본인이 읊기도 했었던 대사들 하나하나가 결국 자신을 향하는 메시지였다. 단순히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화법보다, 모든 것이 ‘연극’으로 통하는 전체적인 구성을 통해 인물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매우 고급스럽고 아릅답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감정을 끌어올려주는 류스케의 화법은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에서 다루는 연극 <바냐 아저씨>에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배우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동안 뒤편 스크린에서는 모든 대사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이 나온다. 영화 전반적으로 이 연극의 대본 연습을 하는 과정들이 나온다. 배우들은 각자 맡은 역할의 대사가 끝나면 책상을 가볍게 노크한다. 각 배역의 대사가 모두 다른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차례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어떻게 보면 심오해 보일 수도 있고 긴 러닝 타임을 생각하면 다소 친절한 설정은 아니다.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영화를 보고난 뒤 왜 류스케 감독이 이런 설정을 넣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직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배우들은 언어를 초월한 연대 속에서 연기한다. ‘언어’는 비록 다르지만 모두 같은 감정과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이 점이 핵심이다. 「바냐 아저씨」는 물론 주인공 가후쿠와 미사키를 향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어떤 위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언어를 초월한 연대에서 외치는 ‘살아가야 한다.’라는 말은 어떠한 위로의 방식보다도 강력하다. 살면서 다른 언어로 위로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없었지만, 각자 다른 언어의 형태로 와닿는 이 메시지는 같은 언어 열 마디보다 훨씬 압도적이고 생생했다. 류스케가 만들어낸 섬세하고 정교한 이 위로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리고 앞으로도 따라하지도 못할 것이다.

두 가지 특징을 모두 다 훑어 봤을 때, 영화가 정확하고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해석과 리뷰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바는 이렇다. 결국,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차’란 가후쿠와 미사키의 주체성을 나타낸다. 매일 똑같은 길을 반복해서 돌고 있는 가후쿠와 미사키. 동시에 그들 내면의 깊은 상처도 오랜 시간 쳇바퀴 도는 듯 반복된다. 종이와 펜을 생각해보자. 펜을 들고 종이에 원을 그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린다. 그 원들이 반복되면, 점점 원 안이 채워지면서 진해지고 이내 점이 된다. 그리고 이내 그 농도를 버티지 못한 종이에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통해 그 원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가후쿠와 미사키도 마찬가지다. 같은 곳을 수도 없이 빙빙 맴돌다 비로소 만나게 된 서로는 앞으로 나아가게 할 원동력이 된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운전처럼, 매일 같은 곳을 덤덤히 맴돌았던 서로는 마침내 진짜 자신의 ‘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또렷하게 들여다보게 된 그들 사이로 새하얀 눈이 내린다. 새카맣게 타버린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녹여주듯이. 비로소 진짜 자신의 운전대를 잡게 된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영화.

작성자 . 그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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