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10-13 17:09:56
[BIFF 데일리] 절대 미화되지 않을 기억
<클로즈> 리뷰
제75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공동 수상에 빛나는 '루카스 돈트' 감독의 매우 사적인 기억에 가까이 다가가볼 수 있는 영화 <클로즈>는 성정체성을 다룬 작품 <걸>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작품으로, 이번에도 역시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렇지만 너무나도 보통의 인물을 이야기한다.
작품의 배경이자 루카스 돈트 감독의 출신지인 벨기에는 2003년, 네덜란드에 이어 두 번째로 동성혼 합법화를 이뤄낸 국가이다. 인식은 제도를 뒤따르기 마련이고, 해당 제도가 갖춰진 지 약 20년이 흐른 현재 벨기에 국민의 82%가 동성혼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편견은 존재하며, 동성결혼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동성애에 관해선 거부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클로즈>는 꽃이 만개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두 소년의 모습으로부터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치 박찬욱 감독의 작품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가 들판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의 해방감이 느껴지는 두 소년의 질주는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을 것 만큼 강인하며 아름답다. 이렇게 서로가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이던 두 소년은 새 학기가 시작됨과 함께 사회의 그릇된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문제될 건 없지만 이상하다는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또래 아이들의 말과 행동은 칼이 되어 이 둘의 관계를 조각내고, '레오'를 고정관념이라는 틀 안으로 밀어넣고 만다. 그렇게 레오는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아이스하키를 하는 등 사회가 남성적이라 규정하는 것들에 몰두하며 래미를 자신의 울타리에서 몰아내기 시작한다.
한순간에 래미의 세상은 무너져 내리고, 관계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청소년기의 한 소년의 삶도 함께 무너져버리고 만다. 레오는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학교에 나가고, 아이스하키를 하며 일상을 유지하려 하지만, 전혀 괜찮을 리 없는 레오는 다른 사람의 등을 보는 순간 감춰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지고 만다.
한때 자신의 전부였던 친구는 떠났지만, 레오는 이 추억을 그대로 안고 살아갈 것이다. 영화의 끝자락에 레오가 혼자 들판을 달리는 장면에선 초반 들판씬에서 느껴지던 해방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뒤를 돌아보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레오'의 모습을 통해 이 소년이 잔혹한 세상을 결국 살아낼 것이라는 희망이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기억을 온전히 갖고 결국 살아낼 것이며, 세상의 수많은 '레오'들 역시 살아내리라.
루카스 돈트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 2022 | 104min | DCP | Color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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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어지는 빛과 외면하는 얼굴들 사이에서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1976
-마틴 스콜세지
-드라마, 스릴러
‘트래비스 비클’은 뉴욕의 밤거리를 달리는 택시 드라이버이다. 그가 운전할 때마다, 보이는 길거리엔 자동차와 간판들에서 나오는 빛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어떤 남자에게는 그 가득한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면조차 쓸 수 없는
영화 내내, 트래비스를 한 명의 사람으로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트래비스는 자신이 모는 택시와 하나처럼, 마치 도구처럼 취급 받았다. 영화 속 유력한 대통령 후보 팰런타인은 트래비스의 택시를 타게 된다. 팰런타인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벳시에게서 들었던 남자를 자신의 차에 태우게 된 트래비스는 신이 나서 그를 응원하며 듣기 좋은 말을 건넨다. 그러자 팰런타인은 웃으며 다음 대통령이 바꿔줬으면 하는 것을 묻는데, 정치에 대해 아는 것 없이 그저 순수한 반가움과 기쁨으로 말을 건넸던 트래비스는 당연히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은 정치에 대해 모른다며 넘어가려는 트래비스와 집요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는 팰런타인. 미묘하게 변한 강압적 분위기에 트래비스는 고민하다, 길거리의 쓰레기들을 쓸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원했던 것을 트래비스가 말해줘서 놀랐던 것일까. 아니면 너도 그 쓰레기 중에 하나인데 쓰레기가 쓰레기를 쓸어버리고 싶다고 말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일까. 팰런타인의 표정은 의미심장하게 변한다. 차에서 내리며 잔돈은 넣어두라고 말하는 팰런타인. 그것은 분명 선의와 호의가 아닌 약자를 향한 강자의 멸시였다.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팰런타인과 가면을 쓸 여력조차, 아니 마음조차 없는 트래비스. 그 간극은 승객이 택시 드라이버에게 돈을 건네는 창문 하나만큼의 좁은 거리에서 이루어졌지만, 사실 그 간극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할만큼 넓었다. 그렇게 강자와 약자 간의 계급이 주는 간극ㄱ은 옳은 방향으로 가려던 한 사람의 방향을 조금씩 뒤틀었다.
빛이 보이지 않는 추락
팰런타인이 트래비스를 조금씩 뒤틀었다면, 트래비스를 끝내 추락시킨 것은 벳시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인상을 로맨틱한 독백으로 전하는 트래비스, 그 순간은 마치 꿈 속에서 천사를 본 것처럼 황홀함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트래비스의 일방적인 노력에 둘은 가까워지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관계는 한 순간에 허무하게 끝이 난다. 그 이유는 다른 것도 아닌 영화 한 편이었다. 트래비스와 벳시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데, 영화에는 나체의 남녀가 나오게 된다. 그러자 벳시는 영화관을 박차고 나가게 되고 트래비스를 포르노나 보는 쓰레기로 취급한다. 포르노 영화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트래비스. 평생 그런 영화만을 보아왔고 다른 영화를 볼 기회조차 없었던 트래비스는 그저 자신에게 익숙하고 재밌는 영화를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벳시는 그런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또 다른 택시를 타고 떠나버린다.
만약 트래비스가 택시 드라이버가 아니었다면 벳시가 단 영화 한편으로 트레비스를 그렇게까지 매몰차고 차갑게 몰아붙였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트래비스의 말투, 옷차림, 직업 등으로 벳시는 이미 트래비스의 가치를 단정지었고, 그 단정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바로 그 영화일 뿐이었을 것이다. 벳시가 떠나버리자 트래비스는 자신도 택시가 있다며 중얼거린다. 그리고 아마 그 순간 트래비스는 자신이 나아질 수 없는, 그리고 언제든지 대체되고, 갈아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갱단들 사이에서 아이리스를 구한 트래비스는 영웅이 된다. 그러던 중, 아이러니하게도 벳시가 다시 한번 트래비스의 택시를 탄다.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택시는 벳시의 집 앞에 도착한다. 그리고 벳시는 택시값을 계산하려 지폐를 꺼낸다. 둘의 인연을 정리해버리는 그 지폐 한 장. 너가 아무리 발악해도, 쓰레기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한 조소. 지폐 한 장에는 그 조소가 담겨 있었다.
저 창문 너머에서 들리는
영화 속,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깨끗했던 트래비스. 그를 보면서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겹쳐 보였다. 언제나 웃고 행복하고자 했던 트래비스와 트루먼. 하지만, 세상은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았고 철저히 도구화 했다. 세상은 이들이 대중을 즐겁게 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나르는 일만을 하길 원했고,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트루먼은 창문을 깨고 자유를 얻었지만, 트래비스는 끝내 창문을 깨지 못했다. 택시 드라이버로서 바라본 거리에 가득한 인간 쓰레기들. 그것들 중에는 펠런타인처럼 화려하고 깨끗한 외면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지독한 것들도 있었다. 그렇게 트래비스는 거리의 쓰레기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고 단련한다. 그렇게 단련이 끝나고, 펠런타인의 유세현장에 나타난 트래비스. 그는 무언가 확신을 한 듯, 모히칸 머리를 하고 있다. 사람을 위하는 척 연기하며 단상에 선 펠런타인과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뿐인 트래비스.
하지만 서로가 받는 관심과 사랑의 총량은 펠런타인이 서있는 단상과 트래비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차이 났다. 택시의 창문 사이보다도 더욱 멀어진 둘의 거리는 결코 좁힐 수 없었다. 사람들을 위하는 척 가면을 벗지 않는 펠런타인. 트래비스는 그를 암살하려 하지만 총도 제대로 꺼내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실패한다. 그제서야 군중들이 처음으로 트래비스를 쳐다보게 되고, 그 순간에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트래비스는 영웅의 모습이 아닌 허중지둥 비겁하게 도망치는 한심한 쓰레기의 모습이었다.
나에게만 암흑같은
학대받는 아이리스를 위해 트래비스는 갱단을 괴멸시킨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살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총알은 없었다. 총알이 없었던 것을 알게 된 트레비스는 안심했을까, 아니면 절망했을까. 분명 절망했을 것이다. 트래비스는 자신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쓸어버려야 하는 거리의 쓰레기로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희망에서 시작하여 스스로를 죽어야 할 쓰레기라고 단정짓기까지의 외로운 과정들. 이 과정들은 좁은 방, 꺼진 TV 앞에서 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통과 상실의 연속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과정들을 알아준 이는 없었다. 갱단을 소탕하고 소파 위에 쓰러진 트래비스부터 시작하여 괴멸된 갱단, 트래비스를 포위한 경찰들을 거쳐 길거리의 사람들까지 담아내는 카메라. 그 카메라가 담아내는 하이앵글은 건조하고 관조적이다.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하는 자들과 스스로는 쓰레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 이들 중 쓰레기는 누구일까.
트래비스는 룸미러를 통해 언제나 손님들을 쳐다본다. 그 모습은 손님들이 자신을 친구이자 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트래비스의 그런 바램에 무색하게도 그들은 아무도 트래비스를 친구 또는 사람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트래비스는 그저 쓰레기통이었다. 택시의 뒷좌석에 자신이 들고 온 쓰레기를 버리고, 침을 뱉고, 토를 하는 인간들.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트래비스는 쓰레기들을 위한 쓰레기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답도 하지 말고 그저 입 닥치고, 자기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라는 한 손님의 말처럼 트래비스의 인생에는 자신의 생각과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할 기회가 없었다. 그저 기계처럼 택시만 모는 것이 세상이 그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이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곳에 몸을 맡겨
트래비스가 택시를 몰 때마다 보이는 자동차들의 라이트와 가게의 간판들. 그것들이 내뿜는 빛은 흠결 없이 깨끗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리고 탁하다. 하지만 그 흐리고 탁한 빛들 중 어느 한줄기조차도 트래비스를 비추지 않았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는 존재하며, 그림자가 없는 빛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빛이 흐리고 탁함을 부정하며,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곁에 드리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다가오면 멀어지는 빛들. 그 빛들은 누군가를 외면하는 얼굴과 닮아있다.
트래비스에게 남은 삶은 그야말로 잿빛이다. 트래비스가 아이리스를 구하고 영웅이 된 것조차 그의 망상이라는 해석이 있을 정도로, 영화 속 트래비스의 남은 삶에는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의 쓰레기들을 누구보다 혐오하지만, 그들에게 시선이 점점 끌리는 트래비스. 어쩌면 트래비스는 그 쓰레기들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리의 쓰레기들도 과거에는 트래비스와 닮은 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희망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갔지만, 수많은 멸시와 외면을 마주하고 결국, 자기혐오의 결정체가 되어 쓰레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다 수없이 봐온 쓰레기 더미들이 내뿜는 눅눅한 비린내와 누린내마저 온기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게 그 온기마저 느끼기 위해 그들은 그 쓰레기 더미로 뛰어들었고, 그들은 점점 더 커다란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겨울이 되고, 혼자서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질수록 트래비스도 점점 더 그 온기에 이끌릴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트래비스들이 고민하며 지나왔던 거리를 지나, 결국 쓰레기 더미에 몸을 맡기게 된다. 낮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뉴욕의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저 쓰레기 더미들을 불쾌해하고 흉물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라. 그 길거리의 쓰레기 더미들은 만든 건 그 어떠한 것도 아닌 당신들과 우리, 그리고 나라는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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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겐 최악이었을지라도 당시의 나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개인적으로 내가 작년부터 국내개봉만 기다려왔던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의 수상 후보에 오르고, 실제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레나테 라인스베는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
하지만 사실 수상여부와는 별개로 '이 영화는 왠지 내가 깊이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작품이다'라는 느낌이 올 때가 있지 않나.
이 영화가 내겐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이런 내 느낌은 적중했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영화의 매 순간순간을 그저 즐기면서 관람했다.
영화는 의학을 공부하던 주인공 '율리에(레나테 라인스베)'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조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 율리에는 끊임없이 다음 챕터로 나아간다.
의학을 전공하다가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도 하고, 사진을 배우다가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서점에서 일하기도 하고, 이후에 우연히 에이빈드를 만나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기도 하고.
그녀는 정해지지 않은 길을 끊임없이 달려가고, 또 나아간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2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챕터들을 통해 율리에의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각본을 소설 작품처럼 12개의 챕터로 만든 이유에 대해 감독 요아킴 트리에는
'인생의 챕터들 사이의 공간이 실제로 보이는 공간만큼 소중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다.
이 작품은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영화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라고 답했다.
율리에와 '악셀(안데르스 다니엘슨 리)'은 서로를 매우 사랑했지만, '아이를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의 생각이 확연히 달랐다.
나이차가 어느 정도 있는 둘은 삶의 다른 단계에서 서로를 만났다.
성공한 만화가로서 비교적 뚜렷한 목표와 앞날이 있는 악셀과 달리, 율리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고, 또 방황하곤 한다.
율리에는 자신에게 안전망은 없지만 머무를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복잡한 자기 자신을 명확히 정의내리고,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율리에는 악셀을 떠나 이전에 우연히 만나서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던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에게로 향한다.
우연히 한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둘은 서로에게 애인이 있는 상태였기에 당시에 차마 바람을 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종의 선을 정해두고 그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우연히 율리에가 일하는 서점에서 재회한 둘은 여전히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에이빈드는 이런 자신을 '최악의 인간이 된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라고 표현한다.
율리에는 자기자신을 괴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느 하나 끝까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이런 자신을 참아줘서 고맙다'라고 말하곤 했다.
율리에에게 에이빈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율리에는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옛연인인 악셀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율리에는 병실에 있는 악셀을 찾아가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점에서 악셀과 율리에가 나누는 여러 대화들의 내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악셀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자꾸 지난 날을 곱씹고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이건 '예술'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이를 가진 율리에가 악셀에게 '아이를 가지고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냐'고 묻자 악셀은 자기자신도 불안했지만 율리에가 좋은 엄마가 될 확신을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악셀은 항상 율리에가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악셀은 율리에에게 '내가 너와 헤어지고 나서 가장 후회되는 한 가지는 네가 얼마나 멋진지를 깨닫게 해주지 못한거다'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율리에를 평생 동안 제일 사랑했다고. 자신은 죽어서 추억으로, 목소리로만 남는 게 싫다고. 자신의 집에서 율리에와 같이 살고 싶다고.
악셀과 율리에는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났고, 서로 다른 걸 원했다.
악셀은 비교적 안정적인 삶 속에서 보편화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원했고,
율리에는 지금 자기 자신이 어떤 단계인지도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시로 꿈과 목표가 바뀌는 사람이었다.
서로 다른 삶의 단계 속에서 각자가 생각한 최선의 선택을 했기에 어긋날 수밖에 없던 사랑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챕터인 12장은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이다.
악셀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율리에도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에이빈드와 헤어진 율리에는 사진작가로서의 일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리고 우연히, 에이빈드가 새로운 여자와 결혼 후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율리에의 눈빛은 더 깊고, 복잡하고, 또 평화롭다.
영화의 긴 호흡을 따라가면서 그저 율리에의 삶을 지켜보며, 율리에가 하는 고민과 선택들을 복잡한 생각 없이 단순히 마주하며 끝까지 관람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괜히 눈물이 나고 공허한 기분이 드는 나 자신을 마주했다.
아마도 인생은 그래도 살아진다, 살만하다는 생각과 한편으론 인생은 너무 덧없다는 생각이 공존하기 때문이겠지.
사실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부끄럽지만 '조금은 내 얘기 같고, 어쩌면 앞으로 이어질 내 얘기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 운명이길 바라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그 무언가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무언가'는 오지 않기도 하고.
이게 적합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했는데 그런 선택을 한 내가 너무 최악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느 하나 끝까지 이루어내는 일이 없어서 나 자신이 엉망이 된 것 같고.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나의 선택들이 후회가 되어 한꺼번에 밀려오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나 자신이 너무 괴짜같고.
나는 나 자신이 최악으로 느껴질 때가 너무 많다.
그럴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위로삼아 자주 건네는 말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잖아.
이 영화는 이런 말을 건네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 혼자 나 스스로에게 위로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로를 직접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랑영화가 아닌, '한 인간의 성장담'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했기에 최악이라고 느껴질법한 선택을 했고, 또 그 선택들에 후회했고, 이 과정을 겪으며 성장했다.
이 한 사람은 수많은 사랑과 이별, 좌절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했으며, 무수히 많은 그 선택의 결과를 마주하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또 이 과정 속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을 지켜냈다.
감히 타인의 선택에 대해 '최악'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다보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최악'이라는 지점에 도달한 후, 그 다음에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도약하는지'인 것 같다.
그러다보면 그 당시에는 그게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무한하지 않은 생애 속, 끊임없이 도전하고 갈망하는 율리에의 이야기를 담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25일 개봉한다.
이 영화는 반드시, 꼭 영화관에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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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옆엔 누군가가 필요해
개봉 전 시사회에서 먼저 관람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누구나 홀로서기를 꿈꾼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면서 가장 원하는 건 자유일 것이다.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수많은 구속된 상황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목표다. 자유에 대해 바라보다 보면 주변의 도움이나 지원이 별거 아닌 듯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해나갈 수 있다는 느낌은 어떤 사람의 도움도 거절하게 만든다.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나 아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더욱 그 도움은 받기 어려울 것이다. 한참을 보이지 않거나 옆에 없었던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주려한다면 당연히 그 사람의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노력할 것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데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 조지
영화 <스크래퍼>의 주인공 조지(롤라 캠벨)는 얼마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조지는 아주 어릴 때 엄마 곁을 떠난 아빠의 존재를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주변에 바로 도와줄만한 어른이 없다는 의미다. 정부의 지원으로 성인 보호자를 지정받아야 하지만 조지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면서 손쉽게 정부의 관리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십 대 초반의 아직 어린 조지는 혼자 모든 걸 관리하며 생활을 이어나간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조지는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훔쳐 용돈과 생활비를 해결하고 있다. 영화는 그 모습을 심각하게 보여주기보단 경쾌하면서도 조금은 건조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 자체는 범죄지만 그 일은 조지가 어쩔 수 없이 생활을 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지의 독립적인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집으로 아빠 제이슨(해리스 디킨슨)이 찾아오면서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영화가 집중하는 건 조지와 제이슨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것이지만, 제이슨의 등장으로 혼란을 겪는 조지의 감정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조지는 아직 엄마를 잊을 수 없는 나이다. 그는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보고 싶은 엄마를 보기 위해 집 밖을 나와 작은 골목에 들어가 휴대폰에 저장된 엄마의 동영상을 본다. 마지막으로 저장된 엄마의 모습에는 조지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함께 담겨있다. 그 동영상을 보는 순간은 조지에게 엄마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렇게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아무렇지 않게 해야 할 일을 한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등장
갑작스러운 아빠의 등장은 조지에게 굉장한 혼란을 준다. 아빠 제이슨도 마찬가지다. 조지가 커가는 걸 보지 못했고,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딸의 앞에 나타나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제이슨은 조지에게 따뜻한 모습을 할 수도, 잔소리하는 모습을 할 수도 없다. 아빠지만 사실은 아빠 노릇을 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지난 과거에 대한 사과다. 영화 속 제이슨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것을 깨닫는다.
제이슨이 선택한 건, 잔소리하는 아빠도 아니고 따뜻한 아빠도 아니다. 좀 더 다가가기 위해 친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지가 자전거를 훔치러 갈 때 슬쩍 따라가 같이 그 도둑질에 동참한다. 그리고 경찰로부터 도망가고 기차역에서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조지와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거리감은 조금씩 줄어든다.
엄마와 아내를 잃은 두 사람은 서로 교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가까워지는 과정이 <스크래퍼>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무척 우울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을 우울하게 그리지 않는다. 어떤 때는 경쾌하게 또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아주 슬픈 일을 경험하고 나서도 누군가에게 의지할 존재가 있다는 것을, 어쨌든 서로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영화의 맨 처음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 문구는 혼자서도 자랄 수 있다는 식의 문구로 수정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아이가 자라는데 누군가는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지에게 아빠 제이슨이 나타났고 제이슨은 주변 이웃들과 교류도 시작한다. 완전히 혼자 있던 조지는 조금씩 마을 속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제이슨의 등장이었고, 그 끝은 제이슨이 조지의 집에 살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우울하지 않고 따뜻한 이 영화의 정서
조지와 제이슨이 좋은 부녀 관계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은 서로가 어떤 결핍이 있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각자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 서로의 마음을 긁으며 속을 썩였지만 두 사람은 이내 상대방을 품어 안는다.
영화에는 조지가 방에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탑을 쌓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 닿으려는 듯 쌓아 올린 작은 탑은 조지가 우울할 때마다 누워서 쉬는 방이다. 그 방은 일종의 치유의 공간이다. 제이슨이 그 방을 처음 본 순간, 아마도 그때가 제이슨이 조지의 아빠가 되기로 결심한 시점일 것이다. 그 공간은 추억의 공간이면서 위로의 공간이다. 조지가 만든 그 추모의 탑은 마치 조지의 마음속에 있는 잡다한 추억들의 집합소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조지의 마음이 바로 그때 제이슨의 마음에 닿았다.
영화 <스크래퍼>는 무척 따뜻한 영화다. 태어나 처음 만난 아빠와 딸이 조금씩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무척 잔잔하게 담겨있다. 영화를 연출한 샬롯 리건 감독은 이번 영화가 첫 장편 데뷔작이다. 이 따뜻한 이야기로 39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영화는 결국 아이가 자라나는데 누군가가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무척 따뜻한 방식으로 조지의 삶을 비추는 영화는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조지가 다시 누군가의 도움으로 따뜻한 가족이 함께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무척 경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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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결혼 이야기>,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결혼에 대해 꿈꾼 적은 없다. 굳이 따지면 한 번쯤은 해볼 만하지 않을까? 평생 흔들리지 않고 혼자 살 때보다 둘 이상일 때 조금 더 든든하지 않을까.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나눠먹고 대화를 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찌감치 행복한 가족이나 행복한 결혼생활도 믿지 않았다. 결혼식이 해피엔딩으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둘이서 여행만 가도 한 번은 싸우는데 결혼이 그렇게 좋기만 할리가. 결혼을 계약처럼 연장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가족과 결혼에 대해 충격적이지만 슬픈 사실을 한 가지씩 깨달았다. 가족은 생각보다 그렇게 화목하고 평화롭지 않다. 잘 사는 집이든 못 사는 집이든 어느 집에나 속 썩이는 사람이 있고, 콩가루가 솔솔 날리는 듯한 분쟁이 있기 마련이다.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다. 결혼에 대해 놀랐던 점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보다 결혼을 생각하는 그때 마침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결혼에 수많은 조건이 있다면 사랑 역시 그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사이에 사랑이 있다면 좋고, 사랑이 없으면 정으로 산다고 하더라. 그래도 반평생을 함께 할 텐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해버리냐고? 막상 결혼의 압박이 들어오는 나이가 되니 이해는 된다. 결혼을 하라는 주변의 눈초리나 말소리는 지겹다. 그렇다고 혼자 살자니 혼자만 사는 삶은 자신이 없다. 해치워버리듯 해도 비난하지 못하겠다.
과거와 확연한 차이점은 요즘 결혼은 과거만큼의 인내심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지 않아도 된다. 헤어져도 된다. 이혼 역시 나쁜 것이 아니다. 의무감으로만 지속했던 결혼이야말로 나쁘다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이혼하는 시기는 인내심이 어디까지 발현되었느냐 정도의 차이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 혹은 자리를 잡고 나서 황혼에 이혼하거나 졸혼을 하는 경우도 많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헤어질 수 있다. 나조차도 정말 밥맛 떨어질 때면 엄마는 아빠랑 왜 결혼했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게 말이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의외로 그래도 가장 중요한 순간 결정을 내릴 때는 아빠와 가치관이 비슷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인가. 정말 중요한 50%만 맞으면 나머지는 맞추면서(혹은 어차피 맞추지 못할 테니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살라던 말씀이. 그게 엄마의 결혼 철학이었는지도.
<결혼 이야기> 속 니콜과 찰리는 변호사 없이, 소송 없이 '둘만의 원만한 합의'로 이혼하기를 꿈꿨다. 바람대로 되면 좋았겠으나 애초부터 둘의 입장 차이는 너무나 명확했다. 나도 모르게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고 공감되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둘의 감정이 극도에 치달았을 때 말다툼을 보고 확실해졌다. 찰리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그의 희생이 적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도 니콜은 찰리에게 저주를 퍼붓지는 않았다. 찰리의 말에 말문을 잃은 건 니콜만이 아니었다. 헨리만 괜찮다면 병에 걸리거나 차에 치여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니. 내가 당신을 더 사랑했다는 니콜의 말에 그게 LA에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반응은 맥빠졌고, 같은 극단 메리 앤과의 외도에도 그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졌다. 결혼 생각도 없고, 나에게 바라는 게 많은 당신 때문에 내가 수많은 유혹을 젊은 나이부터 얼마나 피하느라 힘들었는지, 당신이 나를 먼저 거부했으니 바람이 아니란다. 유혹에 관해서라면 니콜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찰리는 이기적이다. 본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끝까지 가버린다. 총알이 살을 뚫고 나서도 회전을 하면서 몸속에 파편을 남기듯이. 후벼파는 것 이상의 말을 쉽게 하더라. 그가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하지 않았다면 고개를 저으면서 그를 선택했던 니콜을 처량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누가 봐도 상처받은 눈이면서 미안하다며 찰리를 꼭 안아주는 그녀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게 사랑인 걸까. 내가 상처받아도 그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걸, 그 말을 하면서 본인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고 안아줄 수 있는 게. 사랑을 하기엔 나 역시 너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영화를 봤다. 찰리를 정말 이해할 수 없을지 궁금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은 없다. 찰리는 내 남편이 아니니까. 다시 보니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그는 왜 뉴욕을 놓을 수 없었을까? 뉴욕이 집이고 자신의 가족은 '뉴욕'의 가족이라고 무척 강조한다. LA는 왜 안 되는 걸까. LA의 변호사와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공간도 넓고 살기 좋다는데도, 니콜의 가족을 좋아하면서도, LA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심지어 그가 사랑하고 상처 주고 싶지 않았던 니콜이 원하는데도. 뉴욕이 대체 그에게 뭐길래. 'LA'의 가족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뭐길래.
니콜이 변호사 노라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찰리는 이혼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니콜의 의사를 좀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말이다. 니콜은 LA에서 살고 싶었고 다양한 장르에 참여하는 배우이자 감독이 되고 싶었다. 지금처럼 '찰리의 극단'에서 '찰리가 가장 아끼는 배우'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화나 드라마, 연극 등에서 종횡무진하고 싶었다. 남편의 외도에 상처받은 사이 마침 LA에서 하는 드라마가 기회처럼 찾아왔다. 찰리의 응원을 기대했건만 그는 쓴소리만 뱉었다. 그가 LA에 잠시라도 살려고 시도했다면, 그가 함께 극단에서 공동 감독을 맡아 공연을 준비했다면, 니콜에게 네 생각은 어떤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말을 했더라면. 수많은 가정법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니콜은 결혼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찰리의 이야기는? 니콜은 찰리와의 이혼을 피할 수 있었을까. 니콜이 '찰리의 아내'로 살기로 체념하는 것 말고, 찰리가 막무가내로 뉴욕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고, 그를 설득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영화를 살펴봐도 찰리의 이야기는 니콜의 이야기만큼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찰리도, 그의 변호사도 그런 이야기를 터놓지 않았다. 그러니 다만 추측할 뿐이다. 니콜이 찰리에 대한 장점에 썼던 것처럼 그는 아무것도 없이 뉴욕에 와서 자수성가했다. 누구보다 뉴요커 같다. 직업적인 명성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집이 생겼다. 뉴욕은 그의 마음의 고향이다. 알콜중독에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와 좋은 기억이 없는 어머니와 태어난 고향은 뒤로했다. 그는 소중한 니콜과 아들 헨리, 인턴마저 가족 같은 극단 사람들을 만났다. 좁고 경적소리가 넘치는 뉴욕에 스스로 가족을 만들었다.
찰리 입장에서 LA는 어디까지나 니콜의 고향일 수밖에 없다. 찰리의 뉴욕은 흔들려도 이상할 것 없이 뿌리가 얕다. 10년을 넘게 산 니콜은 뉴욕보다 LA를 그리워하지만 찰리에겐 10여 년 된 뉴욕이 전부다. 그 뉴욕엔 편히 볼 수 있는 부모님, 형제 같은 혈연이 찰리에겐 없다. 은연중에 니콜과 그녀의 가족을 보면서 LA의 넓은 공간만큼이나 휑한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LA에 있는 니콜과 헨리는 찰리가 없어도 자연스럽다. 헨리를 너무나 쉽게 LA에, 니콜의 손에 맡긴다면 그는 그의 부모님과 그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고 그는 그런 부모의 모습이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가 힘들게 만든 가족이 무너졌을 때조차 그는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아무것도 없이 뉴욕에 와서 자수성가한 뉴요커가 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기적이다. 그래서 솔직하지 못한 채 마음에 담아둔다. 대체로 진심과 좋은 말은 담아두었을 것이다. 니콜이 자신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뉴욕을 떠나면 이 가족이 부서질 것 같은 걱정도, 그녀의 연기를 비평하지만 감동받았던 마음도.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배우가 자신을 떠나 LA로 난생처음 활동을 하러 간다니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 가 버려. 갈 테면 가. 그러고도 당신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은 누굴 만나도 불행할 거야. 그녀가 떠나가 버리기 전에 먼저 이혼하자고 하진 않았을까? 둘 중에 이혼을 먼저 이야기한 건 찰리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혼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도록 니콜을 몰아붙였든지. 초반에 이혼 준비로 성질을 내고 눈물을 보이는 니콜의 모습에 비해 침착한 찰리를 보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둘은 이혼했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좋은 사람, 좋은 부모인지 시험받았다. 추억은 무능과 부도덕의 증거가 되었다. 찰리는 조금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니콜이 늘 잘라주던 머리는 이발소에 가서잘라야 하고, 빨래방에서 빨래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3800km를 날아 뉴욕에서 LA로 와야 헨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양육권도 45:55의 비율로 손해를 봤다. 영화의 끝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살아있는 것(Being Alive)에 대해 노래를 불렀다. 나를 필요로 하고, 상처 주고,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혼자가 아니라.
이 싸움에서 결과적으로 니콜이 이긴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솔직했고 더 많이 사랑했고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니콜의 눈빛 역시 종종 촉촉해진다. 니콜이 읽지 못했던 편지를 찰리가 읽었을 때, 'I'll never stop loving him, even though it doesn't make any sense now'라는 문장을 들었을 때. 서로를 축하하고 싶지만 예전처럼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을 때. 찰리가 UCLA 전임으로 오게 되어 한동안 여기 머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이혼하기 전엔 왜 그럴 수 없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변호사나 판사에게는 지지부진한 한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결혼 이야기든 당사자에게는 며칠 밤낮을 해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다. 헨리라는 아들을 둔 찰리와 니콜 커플의 이야기는 그래도 사랑이 있는 결혼이었다. 보기 좋았다. 서로의 장점을 읊는 장면으로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이 반대라서 보완해주고 있어서 보기 좋았다. 진흙탕 싸움을 하지 말자던 사람들이 진흙탕에 빠져들어 이혼을 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뭘 모르고 어리석어서 진흙탕에 발을 담근 게 아니다. 서로 약점을 아는 사람들끼리 일부러 급소를 건드리면서 상처를 내는 다툼. 그 말이, 그 행동이 이렇게도 쓰인단 말인가? 놀라진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건 그들이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마음은 칼질하듯 날카로운 단면으로 잘리지 않는다. 사람과 시간이, 사랑이 남아있다. 다만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함께 할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도 남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수백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단 한 가지 감당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누구와도 헤어질 수 있다. 당신을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 원하는 삶에서 멀어질수록 마음 한 켠에서는 엉켜있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새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부른다.
<결혼 이야기>를 보면 결혼에 대한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결혼은 이래서 해볼 만하고, 이래서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이혼 역시 그래서 희망찬 행동이기도 하고 절망스러운 밑바닥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많다. 결혼은 사랑 하나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이야기다. 아직도 절절한 둘의 눈빛과 별개로 그들은 이혼서류에 서명했다. 그들이 수많은 결혼의 위기를 넘겼음에도 이번에 정말 이혼을 했다는 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풀린 신발 끈은 묶어주지만 같은 방향을 볼 수 없고 나란히 걸을 수 없다. 잔잔한 오보에 소리에 서로에게 등진 채 자신이 갈 곳으로 걸어가는 찰리와 니콜을 보면서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떠올랐다. 둘에게 들려준다면 아마 눈이 빨개진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찾을 때의 마음으로.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 김광석 <사랑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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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나를 모른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한데 속은 완벽하게 곪아 있다. 27살, 젊고 탄탄한 몸과 피부, 좋은 학벌. 남부럽지 않은 월가에서 일하고 집도 삐까뻔쩍하다. 얼마나 자기 관리가 철저한지 매일 아침에 피부에 팩을 하고 열심히 운동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모른다. 인간이지만 혐오와 분노 빼고는 별다른 감정이 없다. 서로의 명함, 입은 옷, 들리는 식당이 자신의 모든 것인양 뽐내고 비교한다. 내 명함보다 잘 빠진 명함을 보거나 내가 예약 못하는 인기많은 식당을 누가 예약했다고 하면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점점 멈출 수가 없어서 티가 날 정도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나는 썩어빠졌다고. 나는 사람을 죽였다고. 게다가 즐긴다고.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는다. 놀랍지도 않은 듯한 눈동자로 그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 없다고.
이 영화를 단순한 싸이코패스영화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면 원인이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주변 사람과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케이스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오늘의 주인공은 패트릭 베이트먼. 사이코패스 영화를 보면 볼 수록 주인공이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느낌이다. 어느 정도냐면 어지간한 살인이나 괴팍한 장면들에 무덤덤하고, 살인 전에 신이 난 그의 미소와 율동이 귀엽게 느껴지고 있다. 아마 그와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혹시 그에 비해 나는 용기가 없거나, 죄책감이 심한 것 정도는 아닐까.
영화를 관통하는 한마디는 초반과 후반에 나온다. 중요한 건 마지막 한마디다. 마스크팩을 벗으며 그는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진짜 자신을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영화의 말미에서는 Inside doesn't matter. 안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모두들 실제로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름도, 대화도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가지는 건 역시나 그의 겉모습이다. 탄탄한 몸매, 잘 태닝한 피부, 명품 스타일의 옷과 소품들. 아무도 그에게 잘 지내는지, 건강한지, 보고 싶었다든지 묻지 않는다. 시체가 든 가방을 보며 '워후, 멋진 걸'.하는 말에 '응 장 폴 고티에꺼야.' 라는 심드렁한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없다. 하긴 뭐 태반이 약에 쩔어 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다. 정도의 차이일뿐 우리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아메리칸 사이코에 워너비 도르시아(Dorsia)가 있다면, 현실에선 요즘 뜨는 인스타 맛집이 있을까. 우리도 봐왔지 않는가. 음식을 제대로 먹고 즐기기보다 사진찍고 그곳에 갔다왔다고 자랑하는 것이 지나쳐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누가 입은 옷, 쓴 화장품들을 찾으며 더 예쁘고 멋있어지는데 고민을 하며 시간을 잔뜩 보내기도 한다. 자기 삶이 어떻게 보이는지 푹 빠져 건사하기 바쁘다보니 다른 사람의 말은 영화처럼 한 귀로 흘려듣게 되기도 한다. 듣고 있으면서 듣고 있지 않을 때도 많다.
패트릭의 내면은 황폐하게 버려져 있다. 그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 월급루팡처럼 십자말풀이에는 뼈와 살, 가슴, 피 같은 그의 머릿속 초유의 관심사를 적고 음악을 듣고 있다. 그러나 대체 그런 건 누가 신경쓰겠는가. 그의 부사장 지위가 중요할 뿐이다. 그나마 조금 가까운 약혼녀는 묻는다. 왜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그 일 하는거야? 그의 답은 우리의 인생과 다르지 않다. 맞지 않아도 맞춰서 살아보려고 한다는 거다. 그의 모든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된 것이다. 하버드 경영학과도, 어쩌면 클럽에서 하는 코카인, 머리스타일도 그냥 남들이 다 하는거라 그들과 맞추려고 시작한 것 아닐까. 그에게 자유나 개성이란 건 없다. 우리는 주인공인 패트릭을 보지만 사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는 어느 월가의 젊은 금수저 한량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손쓸 수 없이 망가지고 있고, 더 이상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여러 번 얘기했다. 우습게도 그가 가장 행복해보이는 순간은 이 모든 일련의 살인(혹은 그의 망상)을 고백했을 때이다. 왜 그렇게 기뻤을까. 늘 패트릭을 얼간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난 일을 저질렀고, 드디어 한 순간이나마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인정과 관심이다. 자신이 아파하면 남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고, 비정상적인 일을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싶었던 것이다.
살인은 그가 생각하는 개성이자 새로운 힘의 표출방법이다. 패트릭은 똑똑하게 이 세계를 알고 있다. 화가 나면 뒷골목의 약자들을 찾아간다. 남들 앞에선 오, 우리는 노숙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입바른 소리를 내뱉는 그는 가짜다. 더럽고 냄새나고 무능력한 노숙자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죽인다. 특이하게 자신의 동료를 한 명 죽인다. 그의 행동 중 안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만큼 위험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만 했다. 그의 자존심을 온갖 방법으로 짓밟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도 꾸준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멋진 명함을 갖고 있고 식당 예약은 더 잘 하고, 게다가 그의 진짜 이름을 들먹이며 멍청하고 한심한 녀석이라고 욕한다. 더 이상 그를 더 모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그는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과격하다. 뒷골목의 여자들을 학대한다. 자신이 이렇게 능력있고 탄탄한 체력을 갖고 있다는 자기애에 도취되어 거울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카메라까지 동원하는 남자라니. 특히 금발의 여자에게 엄청난 스크래치라도 입은 것인지 취향이 확고하다. 그가 만나는 여자는 모두 금발이다. 약혼녀, 내연녀 관계의 코트니, 비서 진, 에스코트 걸들까지.
이상한 점은 남자들처럼 그냥 죽이지 않고 여성의 경우 성적으로 유린하고 죽인다는 점이다. 힘과 권력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모든 여성은 그에겐 힘이나 지위든 어느 면에서나 밀리기 마련이다. 이건 그만의 생각은 아니다. 그의 동료들과의 대화에선 세상에 성격좋은 여자는 없다는 결론이 난다. 자신들의 온갖 성적 취향을 맞춰주고 멍청하지 않은 그런 여자는 이데아라나. 게다가 똑똑하고 성격좋은 여자는 없단다. 오 있댔지, 못생긴 여자. 그나마 약혼녀와 내연녀는 죽이려는 충동도 없고, 건드리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이건 그가 새삼스레 일말의 보루가 있는게 아니다. 그쪽은 건들면 골치 아픈 걸 알기 때문이다. 부모님과도 연루되어 있고, 숨기기도 쉽지 않다. 그들의 친구가 그의 친구들이니까. 비서나 에스코트걸들이야 돈이나 많이 찔러주거나 소리 소문 없이 없애버리기 어렵지 않으니까.
그의 살인에는 이상하게도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살인이라는 체력적 소모가 심한 노동에 필요한 노동요라도 되듯, 마치 이 상황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미끼처럼 혹은 음악 마니아처럼 그는 온갖 명곡들을 자체 bgm으로 틀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으면 정말 그 곡을, 그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는 좋은 머리로 그럴싸한 평론을 외워서 읊조리고 있다. 외우느라 힘들었겠네, 정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보이는 생기있는 눈빛이나 감탄사보다는 기술적이고 덤덤한 평가가 주를 이룬다. 실제로 살인을 하기 위한 신나는 몸동작과는 대조적이다. 사실상 그의 개성을 표출한다는 살인마저도 다른 이의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신경쓰는 식당의 요리라도 되는 양 살인 앞에서 고상한 말들을 늘어놓는 꼬락서니라니.
그가 실제로 사람들을 죽였는가, 죽이지 않았는가는 영화를 볼 수록 아리송하다. 그는 정신과 약을 먹고 있고 그가 죽였다고 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자판기에는 고양이를 넣어주세요 같은 말도 안 되는 광경도 펼쳐진다. 그가 시체를 숨기는 은신처로 썼던 폴 알렌의 집은 다시 찾아가보니 구조도 다를 뿐더러 시체도 없다. 영화 <블랙 스완>에 나오듯 그의 내면이 불어일으킨 환상일 수도 있다. 착하고 억눌린 백조에서 경쟁자를 찔러 죽이고 흑조로 재탄생하던 니나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녀가 찌른 것은 자신이었고 누가 찔렸든간에 그녀는 자신은 완벽했다며 기뻐했다. 패트릭은 그의 넘치는 자신의 몸 사랑을 생각하면 자해를 했을 가능성도 적다. 또한 자신이 죽인(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게 그의 환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는 않다. 영화의 입장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게 중요한 거니까. 오히려 무서웠던 건 마지막 독백 때문이었다. 불러도 답이 오지 않는 이 상황에 모든 걸 초월했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 뭔가 저질러도 단단히 저지를 그 눈빛.
시도 때도 없이 그는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고 있고, 폭로하고 싶어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고작 그의 비서 진이 그가 끄적인 낙서로 알았을 뿐이다. 그는 길티 플레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기관리의 1인자처럼 착실해보였던 그가 사실 엄청 비틀렸고 못된 짓을 했다는 걸,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맞춰살지 않고 내 멋대로 산다는 걸, 들킬까봐 두려우면서도 어서 알아주길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이 그에게 불안한 매력을 선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똑똑한 그가 알고 있듯, 그가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설사 그것이 들킨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어차피 세상에서 죽어있는 존재이다. 그것이 영원히 그가 벗어나지 못하는 덫이다. 그렇게 살아있다고 소리쳐봐도 모든 것은 다른 삶의 소음에 묻힌다.
상상해보자. '패트릭 베이트먼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도 다같이 멈칫했다가 심드렁하고 예측가능하게 말을 돌리지 않을까. '아, 그 얼간이 녀석이요. 멍청한 짓은 다하고 다녔는데.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혔다가 인생 종친 하버드 녀석이죠', 하거나 '흠, 저녁은 어디서 먹지. 딱히 땡기는 곳은 없는데, 도르시아?'라고 하거나, '자자, 새로 산 명함이야. 어때? '아니, 내 꺼 좀 봐.' 하며 어깨에 힘주고 자랑하고 있겠지. 역설적으로 그가 홀대했던 내연녀 코트니나 비서 진 정도만 말문을 잃은 채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들이 그를 걱정해주면 믿지 않았다.
그렇다. 영화 < 아메리칸 사이코 >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선혈이 낭자한 살인이 아니다. 수많은 말이 오가도 진실과 내면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익숙한 외로움. 남다를 것 없는 일상의 변하지 않을 단절감. 딱히 아메리칸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보편적인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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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에 대한 공포
30년간 계속된 일가족 연쇄 살인 사건.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의 생일이 14일이라는 것과 ‘롱레그스’라는 서명이 적힌 암호 카드뿐. 영원히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에 남다른 능력의 FBI 요원 ‘리’가 투입되고 지금껏 아무도 알아내지 못한 암호를 해석하는데... 모든 프레임에 악마의 단서가 심어져 있는 지난 10년간 가장 무서운 영화
<롱레그스> 줄거리
이질적일 만큼 새하얀 장소에 나타난 차. 혼자 집 밖으로 나온 아이. 나오는 인물은 아이 하나지만 비워져 있는 차 안, 뒤쪽에서 들려오는 뻐꾹뻐꾹 소리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 공간에 존재함을 인지시킨다. 4:3 비율로 보이는 장면에서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하고 스산한 기분을 안기며 시작한다.
주인공 ‘리 하커’는 FBI 요원으로 뛰어난 직감을 인정받고 연쇄 살인 사건에 투입된다. 용의자가 있는 장소를 특정하고 알 수 없는 그림들에게서 정답을 유추해 내는 리의 직감은 기이할 정도다. 단순히 ‘직감이 좋음’이라는 특성으로 치부하기엔 초자연적인 현상 같은 리의 직감.
FBI의 유능한 요원들조차 밝혀내지 못했던 살인사건의 진상은 리의 직감으로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리조차 누군가에게 끌려가듯이 풀어나가고 있기에 분명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주인공을 따라 영화가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범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수사 시작부터 우리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롱레그스임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롱레그스의 얼굴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궁금한 점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살인을 저질러 왔냐는 것이다. 롱레그스는 어떻게 집에 침입했고 아무 흔적도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걸까.
<롱레그스>는 얼핏 보면 수사물 형식을 띄고 있다. 신입 요원 리 하커가 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게 영화 중후반부까지의 내용이니까. 하지만 초반에 미약하게 보여주던 리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살인 사건, 그리고 롱레그스가 리와 연관이 있음이 보여진다. 리는 그렇게 살인사건에서 한 발짝 떨어진 수사관이었다가 어쩌면 연쇄 살인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일지도 모르게 되며 리의 개인사는 곧 살인사건의 핵심이 된다.
과거를 4:3 화면 안에서 비추며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분위기를 한껏 살렸으며, 사건을 풀어가는 요원들도 이 사건을 벌인 롱레그스도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악마의 존재는 오컬트적인 측면을 강화한다. 잦은 점프 스퀘어로 놀래키기 보다는 영화 자체에 우리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즉 악마에 대한 공포를 퍼뜨려 놓으며 불길한 분위기를 영화 진행 내내 유지한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신의 기억과 주변에 대해 찜찜해 하는 리 하커를 마이카 먼로의 연기가 몰입감을 확 살려준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기괴한 인물, 롱레그스 역시 <롱레그스>가 악마라는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감을 상승시킨다. 그렇지만 롱레그스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장면들은 오히려 불길하고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미스터리한 감정을 반감시키는듯해 아쉬웠다. 하지만 기이한 분위기의 오컬트 영화를 보고 싶다면 추천한다.
그런데 15세인 것치고는 꽤나 끔찍한 장면들이 있으니 못 보는 사람들은 유의하길.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롱레그스>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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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조커: 폴리 아 되"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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