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고 일년쯤 지났을까? 다정한 누나였던 첫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어.”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둘째의 임신이후 각오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게다가 둘째의 탄생이 후 첫째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동생을 꽤나 예뻐하고 잘 돌본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어느날 툭 내던진 한마디에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행동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울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이 작은 아이는 일년이 넘는 동안 어떤 감정으로 동생을 대해 왔던 걸까? 나는 우선 말없이 꼬옥 안아주었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를 보며, 내가 자주 눈물이 났던 것은, 클레오의 모습에서 나의 첫째아이를 보았기 때문일 것 이다.
클레오는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여섯살 여자아이다. 엄마가 아장아장 걸을 때쯤 세상을 떠나 아빠와 살고 있는 클레오는 서아프리카 카보베르데에서 온 보모 글로리아의 보살핌과 돌봄을 받고 있다. 엄마의 부재를 모두 채워주고 있는 사람. 클레오가 유치원에서 나와,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서 글로리아를 보고 활짝 웃으며 글로리아를 반긴다. 둘은 다른 엄마와 딸처럼 함께 병원을 가고, 밥을 먹고, 웃고, 떠들고, 목욕을 한다. 클레오에겐 아마도 글로리아가 엄마같은 존재일 것이다. 온 세상의 전부.
어느 날, 글로리아에게 카보베르데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오고, 안전하고 따듯해 보였던 둘만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슬픔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아이를 챙기는 글로리아의 모습에서 글로리아의 세상의 많은 부분에도 클레오가 차지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글로리아는 클레오가 모르는 글로리아의 세상 카보베르데로 돌아가야 하고, 클레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글로리아가 떠나는 날 , 인사 대신 숨어서 지켜 보며 우는 클레오를 보며, 내가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서로를 위해 슬픔의 감정을 눌러 담은 클레오와 글로리아.
글로리아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클레오는 마음이 텅 비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글로리아가 클레오의 아빠에게 부탁한 대로 카보베르데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 곳은 클레오가 몰랐던 글로리아의 세계가 있다. 임신중인 딸 페르난다와 프랑스에서 클레오를 돌보는 동안 할머니 손에 자란 아들 세자르가 있다.
클레오가 도착한 순간 위태롭게 클레오를 지켜 보는 글로리아의 아들 세자르, 클레오는 상관없이 글로리아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어하지만, 페르난다가 출산을 하여 갓난아이가 태어나 글로리아가 손주를 돌보는 일에 마음을 쓰자, 클레오는 또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아기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클레오의 세계는 조금씩 무너지고, 클레오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마도)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집밖으로 내 달려 절벽의 바다로 뛰어든 순간 , 클레오는 어쩌면 다른 세계로 알을 깨고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클레오가 ‘아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영화의 처음 창문 밖으로 숨어 울던 클레오에게, 질투와 분노 부정적인 감정들 까지 표현하게 되어서, 더 꽉 안아 줄 수 있구나.
이제 둘은 깊이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새롭게 쌓고 있는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한발 물러서 지켜봐주어야 하는 때 임을 알아간다. 공항에서 클레오를 떠나 보내며 우는 글로리아를 보며, 이 영화는 클레오의 성장기이며, 글로리아의 성장기이며, 이는 돌봄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품에 안고 있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영원처럼 사랑했고 또 멀리 스스로 설 수 있게 떠나보내야 하는 그런 관계는 보모와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와 아이도 마찬가지니까. 두 아이를 육아하며, 이리 저리 흔들거리는 나에게 돌봄을 하는 사람이란, 그렇게 한 사람의 세계를 이루어 만들도록 돕고 지켜보며 또 응원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