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2021-03-21 00:00:00
한국인입니다만
정이삭 <미나리>, 켄 리우<종이 호랑이>
영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말하게 되는 부분인데 픽션을 볼 때에는 어느 정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미나리>를 보고서 '우리의 뿌리는 소박하지만 위대했다' 같은 결론을 내린다던가, 결국 제이콥과 모니카가 같이 잘 살았을까 같은 해피엔딩을 유추한다던가, 냉전 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베이비부머들처럼 '부모님들이 저렇게 고생해서 우릴 키웠다'라고 눈물을 훔친다던가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런 감상들을 느낄 수야 있겠으나 어느 정도 영화를 꽤 많이 봐 온 일정 나이 이상의 성인이라면 그런 개인적 감상과 영화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 분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요즘의 픽션들의 트렌드인 것 같기도 한데, <미나리> 또한 어떤 특정 페이소스를 자아내기 위한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그저 개인적인 역사의 이야기를 사뭇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묘사한다. 그 가운데에서 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격동은 있지만 그것이 어떤 영향과 의미를 가졌는지 작품 속에서 굳이 풀어서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 영화를 보고 거진 "심심하게 끝났다" 혹은 "결말이 의아했다" 같은 평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이민자들에게는 좀 더 감정적으로 건드려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 입장이 아니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사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영화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자뭇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서사가 아니라 스티븐 연의 연기다. 윤여정과 한예리가 정말로 미국에 정착한 한국인의 연기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반면 스티븐 연의 한국어는 그냥 교포 말투 그 자체다. 정이삭 감독의 묘사와 연출이 얼마나 정확하냐면, 그렇게 어눌한 번역투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스티븐 연의 연기를 통해서도 땅과 자기 일(그니까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사업 그 자체)에 집착하며 개인적 만족과 자아실현을, 자신이 꾸려놓은 가정보다 우선시하는 답 없는 구시대 한국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 정확하게 전달했다는 점이다. 제이콥의 모습을 보며 사업 트라우마에 시달린 한국 가정 구성원들이 아마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나리>는 굉장히 한국 문화의 일종의 헤리티지를 예리하게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노릇을 하는 제이콥의 모습 외에도 외할머니가 자기의 집으로 데려가거나 혹은 아예 딸의 집에 와서 손주들을 키워주는 것이 가장 보편화된 보육 형식인 나라도 아마 한국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가부장적인 문화적 습성 때문에 한국에서는 부계 쪽 조부모들은 어떤 집안의 문화나 재산을 물려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모계 쪽 조부모들은 보육이나 가사 등 좀 더 노동에 가까운 자원을 제공해 주는 조력자로 인식되곤 한다. 흔히 '헤리티지'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래서 어떤 가풍이나 그의 뼈대가 된 재산과 성씨를 물려받은 집안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외가댁은 이런 집이었다, 정도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는데 사실 따져 보면 외할머니가 어릴 때 키워준 사람들 손 들어 보라고 하면 최소 10명 중 4명은 손 들지 않을까 싶은 한국에서 정말로 가족의 헤리티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외할머니를 포함한 모계 조상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켄 리우의 소설집 <종이 호랑이>는 <미나리>에 비해 좀 더 '아시아적'인 서사와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어려서 효도하지 않던 아들이 엄마가 돌아가신 후 후회막심에 눈물 흘린다는 전래 동화는 유치원 때부터 동양인들이 지겹게 들어오던 것이다. 어쩌면 그 전래동화의 21세기 형 리메이크려나. <종이 호랑이> 뒤로 이어지는 수 많은 단편들에서도 비슷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중화권 문화에 기반한, 완전한 당사자의 입장(authentic)보다는 이민자가 느끼는 몇 다리 건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인식을 묘사한다.
판데믹 시대에 아시안(이라는 단어로 하나로 묶이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에 대한 인종차별 정도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원래부터도 꾸준히 이야기돼 왔던 것이지만 자극적 사건이 터져야만 주목하는 대중들의 성격 상 2020년~2021년이 기점으로 느껴진다. <기생충>과 <미나리> 같은 영화들이 미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것도 그렇다. 그들은 무엇이 '아시안 헤리티지'를 대변하고, 그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실 '아시안 헤리티지'란 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데서부터 메타적으로 차별성이 들어있는 것이다. 1 세계에서 아시안이라는 단어에 코카서스인인 인도, 중동 사람들까지 포함해 부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백인들을 대상으로 아시안들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 정답은 '아무것도'다. 꼭 아카데미를 타지 않아도(나도 <기생충> 재밌게 봤음, 쿨병 걸린 매국노 아님) 그래미를 수상하지 않아도(BTS 좋아함 다이너마이트 완창 가능), 그러니까 "꼭 K-문화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리지 않아도"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다. <벌새>가 영화사에 남을 위대한 페미니즘 서사였던 것처럼,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집단의 영혼을 대변할 수 있다. 아카데미와 그래미가 아니더라도, 논밭에 집착하는 한국 아버지와 마사지샵에서 일하는 한국 어머니도 문화의 일부고 집단의 속성을 대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변은 그 누구도 설득할 필요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냥 존재일 뿐 타인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아시안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출신 외국인들 및 다른 여타 소수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윤여정 배우님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다면 한국인 여성으로서 기분은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나리가 아카데미 무관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고 아쉬울 것도 없다. 애초에 백인 할아버지들이 만든 시상식이 영화계를 과잉 대표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도 정론이 된 지 오래인데, 한국인들의 귀염둥이이자 아시안 스피릿의 수호자가 된 봉준호 감독도 오스카는 로컬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수상 결과에 기뻐하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총에 맞거나 평생을 더 가난하게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몇 억 명인 세상에서 우리가 그들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오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이 더 세상을 바꾸는 데에 효과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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