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3-08-24 12:04:09
'여성지휘자'라는 모순
‘여배우’ 라는 명사를 보며, 언제쯤이면 우리는 직업이나, 일 앞에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붙이지 않을 수 있게 될까 하고 생각해왔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우리 아이가 살아갈 시대엔 성별에 갇힌 사고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다양한 책을 읽고 부지런히 노력해 왔다 자부 했는데…‘여성지휘자’ 라는 말에 오케스트라 지휘자 중에도 여성이 있구나. 하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버린 나의 모순성에 아차 싶었던 영화가 바로‘ 타르TAR’ 이다.
연출의 훌륭함이나, 리디아 타르 그 자체 였던 케이트 블란쳇의 숨막히는 연기력에 대한 감탄보다 나를 더 숨막히게 했던 것은 나의 부족함을 깊이 뾰족하게 여러 방면으로 느끼게 했던 순간이 영화 내내 계속된 점이다.
영화는 몇백년을 이어온 견고한 남성의 세계에서 이미 소수자인 그녀를 ‘레즈비언’이라는 더 소수의 인물로 설정하고, 나처럼 무지했던 사람들에게 오케스트라 지휘의 세계에도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도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한 여성의 모습보다는 남성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린다.
그렇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내가 생각한 여성의 모습은 무엇이고 남성에 가까운 모습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권투를 하고, 폭력성을 가지고 있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리디아타르의 모습이 남성적이다…라고 라고 생각 하는 나야말로 정말 편협한 사람이구나.
엄마, 여자, 사람으로 나쁘지 않은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나의 어줍잖은 자신감을 비웃고, 깊은 내면에 뿌리 박혀 있었던 게 분명한 보수적인 생각과 성숙하지 못한 나의 사고를 반성하게 하며 뼈를 맞는 기분이었다.
2023년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은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 이다. ‘지금 여기, 변화할 듯 변화하지 않은 현실 속 여러 층위의 벽과 질문들을 끈기 있게 마주하는 우리’ 라는 영화제의 슬로건을 보면서, 끈질기게 ! 끈기있게 ! 마주해야 하는 것엔 여성을 향한 암담한 현실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나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성인지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마음에 취하지 않고, 은연중에 고정관념과 차별적인 시선에 사로 잡혀 있진 않은지. 끈기 있게 나를 마주해야 할 때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여배우’ 라는 명사를 보며, 언제쯤이면 우리는 직업이나, 일 앞에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붙이지 않을 수 있게 될까 하고 생각해온 것 자체가 비겁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바라지 않고 내가 지우면 된다. 여기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니까.
지휘자를 연기한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라고.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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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실라 | 별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궤도를 찾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서독에서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케일리 스패니).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서독 미군 기지의 파티에 참석하게 되고, 당대 최고의 팝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제이콥 엘로디)를 만난다. 군 복무에 치이고, 어머니와도 사별해 스트레스를 받던 엘비스는 평범하게 자기만 바라봐주는 프리실라와 대화를 나눌수록 점차 마음을 뺏긴다.
결국 나이 차이도, 부모님의 반대도 극복하고 엘비스와 연인이 된 프리실라. 전역한 뒤 미국으로 돌아간 엘비스와의 장거리 연애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엘비스의 집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프리실라의 인생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엘비스에게 프리실라는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기다려야 하는' 소중한 여자친구였으니까.
유명인의 아내에 주목하라
여성 서사의 핵심은 제도의 모순과 비합리성의 부각이다. 시대와 사회의 한계 안에서 바스러진 여성들의 비극을 보여주며 변화를 촉구해야 하니까. 그런데 최근 여성 서사 영화에서는 한 가지 색다른 트렌드를 볼 수 있다. 단순히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대신, '유명인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작품이 많아졌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속 펠리시아, <차이콥스키의 아내>의 안토니나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의 접근법은 기존 작품과는 다소 다르다. 관음증적 욕구를 적극 활용한다. 마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대중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연예인의 가십을 생산하듯이 유명인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를 먼저 내세우며 관객의 시선을 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유명인의 아내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명인의 아내가 겪은 비극을 소비하기 쉽게 만들어 메시지의 파급력을 높이려는 시도인 셈이다.
사랑이 아닌 관계에 주목하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매혹당한 사람들>을 연출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신작 <프리실라>도 이 조류를 타고 있다. 작년에 개봉한 <엘비스>가 엘비스 프래슬리의 음악 세계와 영향력을 펼쳐 보였다면, <프리실라>는 그 대척점에 있다. 엘비스의 아내 프리실라가 직접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여성을 옭아맨 일방향적인 관계를 드러내려 한다. 그 이야기가 설령 현실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더라도 개의치 않은 채로.
<프리실라>는 구성부터 그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로맨스로 시작한다. 최고의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동경하는 소녀 프리실라. 그녀가 서독에서 군복무 중이던 엘비스를 어떻게 만나고, 연애를 시작하고, 사랑을 키워 나가는지를 훑는다. 인간 소녀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만나 사랑을 키워나간 <트와일라잇>을 연상시키는 하이틴 로맨스다.
하지만 <프리실라>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프리실라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다. 엘비스의 명성을 빌리되 정작 아내의 이야기가 중심이듯이, 달달한 로맨스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후 본론으로 넘어간다. 로맨스와 멜로의 외양을 취했지만, <프리실라>를 정작 로맨스나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
그래서 <프리실라>는 프레슬리 부부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 자체를 묘사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 변화에 주목한다. 사랑이라는 관점보다는 한 여성이 결혼 생활에서 겪은 여러 풍파와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누가 힘을 갖고 우위를 점하는지를 드라마틱한 사건 대신에 미묘한 변화를 통해 드러낸다. 그 끝에서 영화는 두 사람의 일방향적인 관계를 폭로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엘비스는 프리실라를 철저히 통제했고, 그 과정에서 프리실라는 서서히 자신을 잃어간다. 어찌 보면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였다. 타국 땅에서 군복무 중에 어머니를 잃은 엘비스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했다. 때마침 앞에 등장한 평범한 여학생 프리실라는 바로 그 쉼터였다. 온갖 소문에 시달리고, 팬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커리어를 쌓기 어려운 가운데 자기만 바라봐주는 프리실라와 함께하면 안식을 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그녀를 자기가 원하는 이미지에 가둬버렸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하고, 친구를 사귀거나 초대하지도 못하도록. 그러면서 정작 프리실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 않았다. 평범한 부부 생활도, 데이트도, 일상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를 위해 대기하고 자기 욕구에 맞춰주기를 바랐다. 때로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행동과 언사, 다른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까지도 묵묵히 견뎌내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는 그들의 부부 생활에만 국한되지 않아서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프리실라를 통제하는 엘비스 역시 통제받고 있었으니까. 엘비스가 매니저인 파커 대령과 통화할 때 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장면처럼. 프리실라를 시작으로 연쇄적인 통제와 일방향적 관계를 드러내는 이 대목은 감독 본인의 자전적인 경험을 투영한 대목 같기도 하다. 소피아 코폴라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문가, 코폴라 가문의 일원이니까.
그러면서도 <프리실라>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암시와 복선을 제공하면서도 스포트라이트를 언제나 프리실라에게 맞추기 위해 명확히 선을 긋는다. 의도적으로 인간 엘비스만을 부각해 프리실라의 비극에 더 힘을 주려 한다.
그 일환으로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화려한 무대 매너나 공연을 딱 한 시퀀스에서만 등장시켰다. 엘비스의 음악도 철저히 외면했다. OST로도 활용하지 않는다. 스타 엘비스가 등장하면 그의 이야기에 더 힘이 생기고, 당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가지가 더 뻗어 나갈 테니 그 싹부터 자르는 셈이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이에 더해 <프리실라>는 이야기를 애써 극적으로 꾸미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명성에 비해 영화의 톤은 의외로 건조하다. 프리실라가 이혼을 결심하는 순간까지의 감정 변화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엘비스의 가스라이팅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가는 프리실라의 모습을 외양의 변화만으로 보여준다.
패션이 대표적이다. 프리실라의 옷은 엘비스의 취향대로 나날이 화려해진다. 화장도 진해지고, 머리에도 힘이 잔뜩 들어간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모습은 갑갑해진다. 철저히 엘비스에게 맞춰진 채로 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공허함만이 강해진다. 반면에 청바지에 흰 티를 자연스럽게 입은 그녀는 엘비스에게 이혼을 당당히 요구한다. 스타의 화려함을 벗어던지자 마침내 자기만의 궤도를 찾은 셈이다.
또 감독 특유의 세련된 연출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아닌 ‘프리실라 볼리외’가 되겠다는 그녀의 선택에 힘을 실어준다. 엘비스와의 행복한 한때를 보여줄 때는 옛날 필름 효과를 활용하고, 라스베이거스 여행 장면은 감독의 전작인 <블링 링>을 순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매번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엘비스의 저택과 대조를 이루면서 프리실라의 심경을 시각적으로 전달해 준다.
마지막 순간 드는 의문
다만 부작용도 있다. 우선 극적인 사건이 많지 않고, 프리실라의 불안이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과정을 다루다 보니 영화가 전반적으로 심심하다. 미묘한 감정선을 잠시라도 따라가지 못하면 전개가 급하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그들의 결혼이 본격적으로 삐걱거리는 대목이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영화를 보고 나면 미끼여야 할 두 사람의 연애시절이 본론보다 뇌리에 더 많이 각인될 정도다.
무엇보다 <프리실라>가 프리실라를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의문이다. <프리실라>는 의도적으로 현실의 맥락을 외면한다. 프리실라의 일생 중 비대칭적 관계, 일방향적 관계라는 모티브에 충실한 장면만 취사선택했다. 일례로 프리실라도 이혼 전에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누락됐다. 이혼 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자산을 활용해 회사를 경영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이 대목은 양날의 검이다. 명확한 주제를 보여줄 수 있어서 장점이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메시지와 화법이 충돌할 수 있으니 문제다. 엘비스가 프리실라를 자기가 원하던 여자친구와 아내의 이미지에 가두었듯이, <프리실라> 역시 실제 프리실라를 보여주는 대신 가상의 프리실라 안에 그녀를 가둔 것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이는 후반부를 다소 성급하게 전개한 이유로도 볼 수 있다. 그녀와 엘비스의 관계에서 이혼은 온점이 아니라 쉼표였는데, 영화는 쉼표 다음의 이야기를 안 보여주려고 일부러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버린 셈이다. 만약 이혼 후 프리실라가 엘비스와의 관계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엘비스의 새장에서 벗어난 그녀의 주체성을 더욱 강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형식과 내용의 충돌 가능성 또한 없었을지 모른다.
Acceptable 무난함
첫사랑에 유명인을 더한 대인관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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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보이는 자에서 보는 자로
시선의 방향
그리스로마신화에 아르고스(Argos)라는 이름의 괴물이 등장한다. 그는 온몸에 붙어있는 100개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자다. 아르고스는 제우스의 애인인 이오를 감시하다 제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헤라는 그 100개의 눈을 공작의 깃털에 붙여준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은 뛰어난 감시자를 뜻한다. 판옵티콘의 감독자들은 죄수들의 모든 것을 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 있는 자들은 결코 위를 볼 수 없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항상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관음되던 여성이 고개를 들고 관찰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곧 비난으로 이어진다. 은밀하게, 자기들끼리 관음하고 관찰하는 '보는 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다 한순간에 '보이는 자'의 위치에 서버린 관객들은 당황스럽다.
아시아단편 단편선은 아시아 여성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중 경쟁에서 선정된 작품들을 모아둔 섹션으로, 단편선 1부터 4까지 나뉘어 있다. 단편선 1에 속한 몇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들에서 여성은 더 이상 '보이는 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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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싶지만(Crack)(2021)
감독 : 이현주
상영시간 : 23분
시놉시스 : 25년 동안 혼자 살아온 민영은 함께 살게 된 조카 연정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연정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잘 지내고 싶지만>의 민영과 연정을 보자. 민영은 연정이 오기 전 집을 깨끗이 닦고 연정을 맞을 준비를 한다. 연정의 약봉투를 세심히 살피고, 배탈이 난 연정을 위해 죽을 배달시켜 준다. 연정은 연정대로, 민영이 기침을 하자 쌍화탕을 먹어 보라고 권하고, 민영의 몫까지 삼겹살을 사온다. 민영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방도 한 칸뿐이지만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 주인으로서 객식구인 연정을 관찰하고 살핀다.
그러나 민영은 혼자 산 사람이다. 혼자 오래 살아온 사람이 느끼는 양가감정이 있다. 혼자 있으니 쓸쓸해서 누가 옆에 있었으면 싶은 감정과 누구도 내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을 지키고 싶은 감정. 홍성은 감독의 <혼자 사는 사람들>(2021)에서 혼자 밥 먹고 혼자 TV보는 진아처럼, 민영도 혼자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제가능한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민영의 평화로운 삶에 조카 연정의 침입은 미세한 균열(Crack)을 만들어낸다. 호기롭게 '잘 지내보자'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 이제 민영의 집에는 연정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25년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의 눈. 그 눈으로 민영은 관찰당하기 시작한다.
아플 때 쌍화탕을 데워주었더라도, 밤에 시끄럽게 뭘 먹지 않았어도. 아침에 잠에서 깬 민영이 TV를 켰을 때 연정이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어도, 화장대 앞에 누워있는 연정의 다리를 치웠을 때 연정이 몸을 돌리지 않았어도 민영은 견디기 어려웠을 거다. 민영은 통제불가능한 연정의 눈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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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The Dress)(2022)
감독 : 스팡팅
상영시간 : 30분
시놉시스 : 리얼돌 호텔에서 일하는 원치는 어느 날 이상한 손님을 맞는다. 그는 매 방문마다 인형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 놓고 떠난다. 원치는 리얼돌이 되고픈 욕망을 난생처음 느끼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드레스>는 리얼돌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 호텔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눈으로 호텔을 관음한다. 호텔 청소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봐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른 척, 호텔을 드나드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모른 척 해주는 사람이다. 사람일까? 어쩌면 NPC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다시 <프리 가이>의 가이를 소환해보자. NPC였던 가이는 자신이 살던 세상의 수상함을 깨닫고 세상 밖 현실의 진짜 사람과 소통하게 되면서 감정을 깨닫는다.
호텔이든 모텔이든 여관이든 묵을 일이 생기면 이따금 청소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내 눈에 보이는 자들이며 그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못본 척 한다에 가깝지만). 리얼돌 호텔을 찾는 자들 역시 자신은 볼 수 있지만 인형은 절대 자신을 볼 수 없으므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무슨 짓이든 가능하다. 죽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히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
청소부 원치는 리얼돌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놓고 떠나는 남자가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원치는 보는 자다. 섹스돌에 드레스를 입히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남자를 훔쳐보는 자. 그는 원치의 존재를 모르고 보여지는 자로 전복된다.
호텔에 전기가 끊겨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된 날, 원치는 그의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그가 이용할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기다린다. 그는 보는 자로 들어갔으나 인형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이는 자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그는 호텔을 황급히 떠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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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중의 탑(The Top of the Tower)(2022)
감독 : 박은새
상영시간 : 22분
시놉시스 : 반지하에 살고 있는 지숙이네 가족. 어느 날 십자가에서 빛이 나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빛을 다시 보기 위해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침수피해만 겪은 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창문에다 대고 노상방뇨하고 구토하는 등의 일상적인 테러를 겪는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반지하 성범죄, 반지하 불법촬영 등의 뉴스기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권력을 가진다.
수험생인 지숙의 가족도 반지하에 산다. 지숙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갑자기 방에 걸어둔 십자가에서 빛이 나더니 천장으로 튀어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아! 드디어 성령을 본 것이다. 지숙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는 성령을 본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간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신도는 성령이 십자가에서 빛나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이후 아들이 연금복권에 당첨되었단다.
하지만 지숙은 반지하에 산다. 목사가 이르기를, 성령이 하늘로 올라가야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닿을 텐데, 지숙네 가족은 너무 낮은 곳에 있다. 이들이 반지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지숙이 잘 되는 것이다. 지숙은 서울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사실 택도 없지 싶다.
목사는 이 가족에게 옥탑방을 소개해준다. 엄마 아빠는 있는 돈 없는 돈, 친구 친척 사돈의 팔촌의 돈까지 끌어다가 무리하게 이사를 한다. 이삿짐 비용이라도 아껴보려고 세 가족이 죽도록 짐을 올린다. 이 집도 역시 엘베 없는 집이다.
마지막 매트리스만 올리면 이사도 끝인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지숙은 또 다시 성령을 목격한다. 지숙을 가여이 여긴 하나님의 은혜일까. 지숙은 성령의 빛을 따라 옥상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나 지숙의 눈 앞에는 거대한 고층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폭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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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단편 단편선1에는 위의 세 작품 외에도 <로봇이 아닙니다.>와 <거미>까지 총 다섯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거미>는 에도시대에 강도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동생의 복수를 하는 여자 이야기이고, <로봇이 아닙니다.>는 자율주행자동차가 백인이 아닌 여성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고를 다룬다. 서두의 아르고스 이야기는 <로봇이 아닙니다.>에서 가지고 왔다. 연구에서 과소대표되고 비표준화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선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묶어보기로 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시아단편 단편선1을 상영하던 날, 영화제 현장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아마 동시간에 나와 함께 영화관에 있었던 분들이 계실 것이다).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제법 큰소리였다. 양손으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짓을 몇십 분은 한 것 같은데(하필 나는 그 남자 근처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당하게 성기를 흔들고, 놀란 여성들을 보는 자로 군림하고 싶었겠으나 딱하게도 현장에서 그는 보이는 자, 아무리 봐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도 대꾸해주지 않는 자가 되어 있었다.
자동차 창문 열고 따라오며 똑같은 짓을 하던 성인 남성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던 교복 입은 어린 여자 아이도, 그런 사람을 보니 딱하더라는 글을 쓰는 어른 여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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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8월 27일 14:00~15:4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년 8월 29일 16:30~18:1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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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말 대중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제목을 봤을 때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흥부전을 각색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흥부전이 창작된 배경을 설명한 작품이었다. 당시 탐관오리들이 창궐하는 상황 속에서 백성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나라를 조금 더 살기 좋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 작품은 탄생했다. 이러한 기회 의도 좋았지만 초반 흥미로운 진행에 비해 영화의 부제와 딱히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작품이 전개되어서 고개가 갸우뚱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 시놉시스
아무도 몰랐던 형제, 흥부와 놀부. 양반들의 권력 다툼으로 백성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져 가던 조선 헌종 14년. 붓 하나로 조선 팔도를 들썩이게 만든 천재작가 ‘흥부’는 어릴 적 홍경래의 난으로 헤어진 형 ‘놀부’를 찾기 위해 글로써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한다.모두가 알고 있는 형제, 조혁와 조항리. 수소문 끝에 형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조혁’을 만나게 된 ‘흥부’는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며 백성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 받는 ‘조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백성을 생각하는 동생 ‘조혁’과 달리 권세에 눈이 먼 형 ‘조항리’의 야욕을 목격한 ‘흥부’는 전혀 다른 이 두 형제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흥부전’은 순식간에 조선 전역에 퍼져나가고, 이를 지켜보던 ‘조항리’는 그를 이용해 조선을 삼킬 음모를 계획한다.
대중 문화의 힘을 엿보다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자를 초반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대중 문화의 힘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는 남녀의 치정 소설을 쓰며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흥부와 이를 바탕으로 마당극이 형성되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민중들의 힘을 깨달은 양반들은 연흥부를 이용해 <정감록 외전>을 만들어내라고 지시한다. 자신들의 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민심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양반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흥부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형제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을 딴 흥부전으로 탄생시키면서 양반들을 풍자한다.
흥부전을 접한 양반들은 격노하고, 어떻게든 자신들에게서 돌아선 민심을 무마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양반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민심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 민심의 힘을 대중 문화를 통해 잘 구현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캐릭터들은 왜 갑자기 죽을까?초반 조선시대의 대중 문화를 보여주면서 흥미를 이끌었지만 급격히 그 집중도가 떨어지게 된 계기는 캐릭터들이 너무 갑자기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갑자기 선출이가 납치되고, 조혁이 붙잡혀 오고, 그리고 1분이 채 되지 않아서 조항리에 의해 단칼에 죽는다.
어떠한 설명 없이 훅훅 죽어나가서 당황스러웠다. 그저 기존 영화의 난폭한 양반 컨셉을 잡고 갑자기 이성을 잃은 조항리가 자신의 동생과 선출이를 왕의 명령도 없이 본인 손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여버린다. 물론 해당 장면에서 왕이 존재하지만 그 왕 위에 있는 조항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 권력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자신이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상태로 왕이 있는 상태에서 왕을 제압하고 군졸들에게 죽이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 훨씬 더 그 느낌을 잘 자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영화에서 표현된 방식은 그저 본인 화에 못이겨서 갑자기 사람들을 죽인 생뚱맞은 장면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영화의 부제와 후반부 내용이 연결되는 것일까?이 작품의 부제는 영어가 훨씬 더 와닿다는 느낌이다. 한국어 부제는 글로 세상을 바꾼 자이고, 영어로는 The revolutionist 혁명가 이다.
부제가 글로 세상을 바꾼자 였다면 결말이 그렇게 나면 안되는 것일 아닐까? 결말에서의 모습은 글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초반 영화의 내용 부제대로 글의 힘을 잘 보여준 전개였다. 하지만 후반부의 흐름은 글의 힘이라기 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대중 봉기에 불과했다.
물론 흥부전 2탄을 준비하면서 그것을 이용해 조항리를 제압하는 내용이었지만 이는 글의 힘만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폭력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글이 부각되지 않아서 차자리 영어 부제처럼 혁명가가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자>는 후반 전개와 개연성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다소 많은 편이었지만 흥부전의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조선시대 말기의 대중 문화가 어떠한 힘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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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마술을 믿습니까?
지난 5월 6일 넷플릭스의 <안나라 수마나라>가 전세계로 공개되었다. 개인적으로 영화 중에서 '뮤지컬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만큼 한국의 뮤지컬 미디어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바로 보고 싶었으나 최근 일이 너무 밀려 어제 날을 잡고 1화부터 6화까지 한번에 정주행했다.
앞서 말하자면 드라마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뮤지컬 영화(드라마) 특유의 감성과 볼거리를 최대한 잘 살리고자 노력한 것이 눈에 보였다. 네이버 웹툰 원작 <안나라 수마나라>와는 다소 그 분위기가 차이가 있지만 오히려 리메이크된 드라마의 분위기가 더 좋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 글을 통해 '뮤지컬 영화(드라마)'의 간단 이야기와 함께 <안나라 수마나라> 간단 리뷰, 볼까 말까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 <뮤지컬 영화> 어디까지 아세요?
▶ 사실 뮤지컬 영화는 아주 아주 오래된 장르의 영화이다. 오래된 영화를 좋아하시지 않거나 영화사, 영화학에 크게 관심이 없다면 대부분 <맘마미아> <라라랜드> <레미제라블> 정도로 뮤지컬 영화를 처음 접할 가능성이 큰데, 뮤지컬 영화의 시초는 무려 1927년 <재즈 싱어>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오던 시절, 음악과 효과음에 관하여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시기인 만큼 20년대 후반 부터 TV가 대중에게 보급되기 전까지인 50년대 까지는 정말 무수히 많은 뮤지컬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1938)>를 필두로 <환타지아(1940)>, <피노키오(1940)>, <아기코끼리 덤보(1941)>, <아기사슴 밤비(1942)> 등 디즈니사가 뮤지컬 형식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최초로 시도한 시기도 이 당시이다.
▶ 다만 50년대 전세계적으로 TV가 차츰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영화 시장 자체가 상당히 침체되는데 이때 당시에 뮤지컬 영화는 특히나 심한 타격을 입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뮤지컬 영화 최고의 작품으로 뽑히는 <파리의 미국인 (1951)>, <Singin' In The Rain (1952)>, <The Band Wagon (1953)>, <7인의 신부 (1959)> 4작품 개봉하여 뮤지컬 영화는 역사로 사라지진 않고 잘 버텨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뮤지컬 영화 장르 특성상 20 ~ 30대 여성관객이 주를 이룬 터라 매니아틱한 한계가 있어 현재까지 넘어오더라도 다른 장르영화에 비하면 그 수가 현격하게 낮다. 그래서 가끔 한 번씩 나오는 뮤지컬 영화를 보면 개인적으로 환장하는 이유이다...ㅎ
※ 위에 언급된 작품 이야기도 더 디테일하게 하면서 뮤지컬 영화 자체에 대해서 더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긴한데 ,그렇게 하면 역사 수업마냥 너무 길고 재미 없어져서.. 나중에 반응이 좋으면 한 번 더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
? <뮤지컬 영화> 호불호가 왜 심한거야?
▶ 뮤지컬 영화는 영화가 가진 시, 공간적인 제약 없이 조금 더 사실적으로 시각적 효과를 사용해 흥미를 유발하고 영화를 보면서도 마치 뮤지컬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 이야기에 '노래'와 '안무'가 반드시 혼재되어 줄거리를 전진시키거나 등장인물을 발전시킨다. 즉, 기존 영화에서 당연하게 지켜지던 '인-과'와 '기-승-전-결'의 형태가 흔들리게 된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노래와 안무로 갑자기 모든 갈등 상황이 풀린다던가, 너무 슬픈 상황에 갑자기 주인공이 노래 한 곡 불렀더니 내적 발전을 이룬다던가 하는 것이 좋은 예시이다. 보통의 영화라면 갈등 해소를 위한 장치 혹은 사건이 있어야하고, 등장 인물이 내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만큼의 시련과 계기가 있어야하는데 '뮤지컬 영화'에는 이게 명확히 없다. 이렇듯 영화 감상에 있어 '서사(이야기)'를 중심으로 전해지는 대리만족이나 간접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이런 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 '뮤지컬 영화'는 다소 유치하고 '영화'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수 있다. 애초에 보통 영화는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뮤직비디오'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외에도 뮤지컬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뮤지컬 영화'가 갖는 이 고유의 특징 자체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 반대로 '뮤지컬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런 서사 중심의 이야기 전달이 아닌 뮤지컬 영화의 '연출'자체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 뮤지컬 영화 좋아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기엔 영화 자체의 압도적 연출에 반해 그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그 '장면'들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 뮤지컬에서는 할 수 없는 영화라는 미디어 장르에서만 가능한 극한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연출'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매력적인 특징이다. 영화라는 공간을 정말 영화처럼 쓰는 장르는 당연코 뮤지컬 영화가 최고이다. 현대 영화에선 찾기 힘든 정말 다양한 미장센이 쓰이고 시각적으로 화려한 다양한 색채와 효과가 쓰인다. 오히려 영화라는 편집이 들어가는 미디어 작품에 가장 어울리는 장르가 아닐까. 이러한 뮤지컬 영화의 특징은 어떤 장르영화 보다도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 앞서 말했듯이 뮤지컬 영화는 서사나 등장 인물의 감정을 노래와 안무가 이끌어간다. 이 부분 역시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이다. "나 너무 힘들고, 슬퍼."라고 한 마디 대사로 전달되면 되는 주인공의 감정이 노래를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굉장히 서정적이고, 한 마디 대사보다는 길지만 오히려 감정선의 공유는 함축적이다. 이 함축적인 감정의 공유가 영화(드라마)를 보는 내내 지속되고 끊이 없이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굉장히 뜬금 없는 타이밍에 나오는 '노래'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굉장히 함축된 타이밍에 나오는 '노래'라는 것이다.
? <안나라 수마나라>는 어땠어? 볼까 말까?
▶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이태원 클라쓰>의 연출을 맡은 김성윤 감독님의 작품 <안나라 수마나라>는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드라마 자체는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정서적인 지지를 받는게 쉽지 않은 사회에서 꼭 사회가 정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단 한 사람만 믿고 지지해준다면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메시지 말이다. 너무나 동화같은 소재지만 현대를 살면서 이보다 필요한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드라마는 총 6부작으로 '아이', '일등', '리을'의 관계를 통해 서로 발전하고 치유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게 보니 감독님이 예전에 연출하신 <드림하이>가 생각도 나네요.. 보신 분이 있으시려나ㅋㅋ)
▶ 드라마가 '뮤지컬 드라마'라고 하여 크게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솔직히 엄청 심하게 '뮤지컬'적 요소가 강하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애초에 김성윤 감독님이 <안나라 수마나라>를 "감성 성장 드라마"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음악은 작품 속 인물의 성장에 따른 순간 순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요소지 엄청나게 이야기의 중심 축을 이끌고 갈만큼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뮤지컬 영화'를 극불호 하시는 분이 아닌 이상 <라라랜드>정도는 엄청 재밌게 보진 않았지만 적당히 재밌게 봤다하시는 분은 한국적인 뮤지컬 드라마의 만남이 너무 어색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혹시라도, 그래도, 애매하다면 1화 정도 보시고 나머지를 볼지 말지 결정하셔도 괜찮을 것이다. 1화 분위기가 거북하지 않다면 나머지 5개의 회차도 비슷한 분위기이다.
? <안나라 수마나라> 원작과는 어때?
▶ 개인적으로 웹툰이나 소설등으로 원작있는 작품의 영화나 드라마화에서 원작과 비교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원작의 오래된 팬 분들이 무작정 깎아 내리는 것도 싫고, 매체 자체가 다른 두 작품을 그렇게 비교하는 게 그리 의미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안나라 수마나라>도 원작이 흑백 웹툰인 것에 반해 드라마 내내 상당히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고 빛을 굉장히 신경써서 사용한다. 나아가 각 캐릭터의 성격도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딱히 비교할 것이 없다. (원작과 다르다고 해서 작품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나.. 작품이 나쁘면 그냥 작품이 별로인것이지..) 다만 웹툰이든 드라마든 <안나라 수마나라> 속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변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원작의 팬이라면 원작과는 이런 차이가 있구나 하면서 감상하셔도 재밌을 것이고 원작을 아예 모르시는 분이라면 이런 소재의 뮤지컬 드라마가 있구나 하면서 감상하시면 좋을 것이다.
▶ 최근 넷플릭스에서 주목받는 작품들이 장르물 중심이었기 때문에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담은 <안나라 수마나라>를 통해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받고 아름다운 연출을 감상하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추천하는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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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름, 영화관으로 피서 가야만 하는 이유
정말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더위네요!💦
이번 여름 피서는 아무래도 영화관으로 가야겠어요.
여름에도 기대하던 작품들이 줄지어 재개봉을 앞두고 있는데요.
씨네랩지기는 6천원 할인 쿠폰으로 든든하게 재개봉 파티를 시원하게 즐겨보려구요..🫠
여러분도 더위 조심하시고, 즐거운 여름 보내세요!! 🌊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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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갑자기 친한 척 하지 맙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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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부친들에게.
자식과 친해지고 싶나요? 물론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니까 아이들에게 손 많이 가던 때는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낚시도 하고 여행도 가고, 직장도 쭉 다니며(혹은 때려치우기도 하며) 커리어를 쌓고, 도전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며, 내가 번 돈을 놀고 먹는 부인과 자식에게 쓰는 게 때로는 좀 아깝기도 했지만.
자식이 아버지를 존경하거나 다정하게 대하지 않아서 기분이 나쁜가요? 옛날이고 지금이고 돈을 벌어다 주면 된 거 아니냐고 화를 내기는 했지만. 다른 집 자식들은 주말마다 찾아오고 전화도 자주하고 용돈도 주고 여행도 보내주는데, 왜 아버지에게는 늘 데면데면할까요.
이제 자신이 가정 내에서 쓸모 없는 것 같나요? 정답입니다. 아이들의 발달과정에서 애착형성이 아주 중요하던 시기에나 당신이 필요했지, 말 좀 통하고, 이제 손도 안 가는 자식들에게 당신과 지나가는 아저씨의 차이점은 외형이 닮았다는 것뿐이랍니다.
왜 여러 부친들이 맥락도 없이 갑자기 친한 척을 할까요? 이제와 가족애 같은 말로 친한 척을 하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난감할까요. ATM이 된 아버지, 외로운 아버지, 실컷 키워놓았더니 제 엄마만 아는 자식들, 그런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영화든 소설이든 만화든 어떤 작품에서도 보고 싶지도 않답니다. <가시고기>에서 끝냈어야 하는 아버지.
아아 진절머리나는 아버지의 외로움. 한 번도 친한 적 없었는데 왜 뜬금없이 자식과 당신이 친한 사이라고 상정하는 걸까요. 친하지도 않은데 왜 갑자기 당신의 외로운 영혼, 혹은 아픈 몸을 가족들이 구원해야 할까요.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도 안 친했던 아빠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
구원, 영화는 '구원'을 말한다. 나는 찰리를 신경쓰지 않겠다. 세상이 찰리를 연민할 것이다. 300kg에 육박하는 초고도비만이라 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하는 몸뚱이를 가진 남자,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남자, 시간강사 일을 하며 자식을 위해 돈을 저축하고 있지만 자식으로부터 외면받는 아버지이니까.
대신, 오직 찰리를 구원하고자 했던 세 명의 여성만을 신경쓰겠다.
리즈
간호사인 리즈는 찰리의 거의 유일한 친구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찰리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지난 겨울에는 차가 고장나서 춥고 먼 길을 걸어 찰리에게 와 줄 정도로 지극정성이다.
찰리는 리즈에게 미안해,라고 계속 말하지만 말뿐이다. 리즈는 찰리가 울혈성심부전을 앓고 있고, 머지 않아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찰리의 끼니를 챙기는 사람은 리즈뿐이다.
딸 엘리를 만나는 것도 만류한다. 현재 찰리의 상태에 악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찰리의 집에 새생명교회 전도사라는 놈(토마스)이 찾아오는데, 리즈는 토마스를 쫓아낸다. 토마스는 고장난 라디오마냥 똑같은 소리만 반복한다. '주님이 저를 보내신 이유가 있다' '이 육신을 버리고 빛으로 다시 태어나' 같은. 토마스가 다니는 새생명교회에서 '종말', '144,000명이 구원받고' 같은 말을 하는 걸로 보아, 미국의 신천지교회인가 보다(신천지에서도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심판, 종말, 144,000명 구원 등을 말한다. 대충 신천지라 보면 되겠다).
토마스는 자꾸 찰리 주변을 찝적거린다. 마치 신천지처럼... 그러다 리즈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된다. 리즈는 새생명교회 소속의 가정에 입양되었다. 아마 가족 모두가 신천지교도마냥 종교에 빠져있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리즈의 오빠 앨런을 같은 교회 여자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그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족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앨런은 결국 가족과 종교를 등졌다는 고통으로 거식증을 앓다 강물에 투신하여 죽는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토마스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신이 자신을 보낸 이유가 있다느니, 빛으로 만든 육신을 받고, 어쩌고 저쩌고를 반복한다.
리즈가 찰리를 돌보는 행위는 죽은 앨런에 대한 애도다. 앨런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기에, 찰리만큼은 구하고 싶다. 그렇기에 찰리에게 줄 치킨과 샌드위치와 도넛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다 준다. 리즈는 머지않아 또 다시 실패하게 될 것이다. 또 다시 오빠의 죽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리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찰리를 구하기 위하여.
엘리
찰리의 딸,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는 중인 16세. 세상 모든 것을 싫어하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량학생.
찰리가 떠날 때 엘리는 고작 8살이었다. 아버지는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제자였던 남자를 사랑하게 된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다. 매달 양육비를 부쳐주었으나 엘리는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 쓰레기다.
그런 엘리는 학교에서 정학을 먹고, 뜬금없이 아버지를 찾아간다. 개연성은 없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엘리가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서는 에세이를 잘 써서 내야 한다.
찰리는 엘리와 가까워지고 싶어 딜을 한다. 에세이를 대신 써 주는 걸로, 그리고 그동안 모은 12만 달러(현재 환율 1,300원으로 계산했을 때 약 1억 5천만 원)도 엄마 몰래 엘리에게 주겠다고 한다. 정말 달콤한 제안이다. 엘리의 입장에서는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나 숙제도 해주고 돈도 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아버지라는 존재를 평생 그리워했고, 또 앞으로도 그리워 할 테지만.
죽음을 앞두고 엘리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은 폭력적이다. 엘리에게 아버지가 필요한 시기에는 사랑에 빠져 외면하다가 이제서야 자식과 가까워져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죽음을 앞두고 있기까지 한데.
이런 점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두 남자가 더 신사적이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자식은 다 키워놓고 커밍아웃을 했으니 말이다.
찰리는 엘리에게 끝없이 넌 완벽하고, 멋지고, 똑똑하다고 세뇌를 시킨다. 과연 엘리를 위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엘리의 취향, 엘리의 교우관계, 엘리의 관심사, 엘리의 장래희망, 엘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자기가 한 선택이 다 틀리지는 않았다는 믿음을 얻기 위해, 오직 자기 자신만을 구원하기 위한 발화에 불과하다.
엘리는 집에 자꾸 찾아오는 토마스의 뒷조사를 하여 그의 정체를 밝혀낸다. 구원 타령 하는 토마스도 사실은 교회 활동비 횡령으로 도망다니는 신세에 불과했다(니 팔자나 구원해라).
토마스에게 마리화나를 권하고 토마스의 사진을 찍고 음성을 녹음한 결과는 결국 토마스 가족과 교회가 토마스를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찰리는 엘리가 나빠 보이지만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 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기자신도 엘리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됐는데(이거 <애프터 썬>의 아버지도 했던 대사다) 미안하다.
어쨌거나 찰리는 엘리에게 사과를 했으니 마음은 좀 편해졌겠다.
메리
이 이야기의 가장 큰 피해자 메리의 비중이 적다는 것이 안타깝다. 사실 세 여자 모두 비중이라 할 게 없다. 찰리 때문에 인생이 꼬인 세 여자라는 것뿐. 메리는 어린 자식을 두고 남제자와 바람이 난 남편의 소문을 혼자 감당하며 어린 딸을 키웠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은 변심했고(1콤보) 심지어 그 대상은 남자고(2콤보) 떠났으면 잘 살기라도 하지 초고도비만이 되어 죽음을 앞두고 딸 앞에 나타났고(3콤보) 심지어 모아둔 돈은 자신에게 한 푼도 안 주고 딸만 준다고(4콤보) 하니, 도대체 몇 대를 얻어맞은 것인가.
그래도 메리는 찰리를 용서한다. 찰리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에 마음 아파 한다. 나라면 배신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까. 난 못한다. 남편은 동성 제자와 바람났고, 자식은 엇나가고, 기댈 데는 술뿐이다.
찰리에게는 엘리의 좋은 점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메리는 엄마로서도 실패한 것이 될 테니까. 그러니 찰리는 엘리에게 "넌 완벽하고, 똑똑하고, 멋진 아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다.
찰리가 사랑을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을지는 몰라도, 대가는 너무도 컸다. 모두를 희생하게 하는 사랑도 사랑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인에 대한 애도도 틀려먹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혐오하며 끝없이 폭식이라는 자해를 하는 것은 실패한 애도다.
찰리는 심장에 통증이 있을 때나 곧 죽겠다 싶을 때 누군가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고 쓴 에세이를 읽으며 안정을 취한다. 신경안정제 같은 이 에세이는 자기가 읽은 에세이 중 최고라고 한다. 그리고 엘리가 집에서 낙서하듯 쓴 몇 문장도 운율이 맞다는 이유로 전율한다. 자기 손으로 키우지도 않은 자식이지만 재능이 있으니 감동적인가. 웃기는 소리다.
모든 이상한 지점들에도 불구하고 찰리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애도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때로는 목숨 걸고 한 선택이 다 틀려먹었고 돌이킬 수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때 가장 원망스러운 건 내 뜨거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도 아니고 먼저 떠난 애인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다. 찰리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혀왔다는 것을, 찰리를 보고 있는 세 여자뿐 아니라 영화 밖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삼키지 못하는 애인에게 음식을 먹이지 못했던 통탄을 자신의 입에 욱여넣음으로 애도를 선택한 마음까지도.
<더 웨일>은 자신의 모든 선택이 틀렸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한 남자를 구원하기로 한 영화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어리석고 이름값 못하는 호모 사피엔스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찰리와 다를 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구원은 셀프. 남을 구원하겠다는 주제 넘는 생각과 타인으로부터 구원받겠다는 나약한 마음가짐을 멀리하자. 그저 방을 청소하고 건강하게 식사하자. 운동을 하고 잠을 푹 자자. 인정하기 너무 싫지만 내가 했던 정신나간 선택들이 그때는 최선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리즈와 엘리와 메리처럼 모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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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라3> 이후 그렇다할 인상을 남기지 않았던 브렌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의료보험은 매우 중요하다. 의료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
더 웨일(The Whale)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주연: 브렌든 프레이저, 세이디 싱크, 홍 차우
상영시간: 117분
개봉일: 2023. 03. 01.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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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페서 앤 매드맨 영화 후기 / 멜 깁슨, 숀 펜 주연 / 대배우들의 연기대결 /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탄생비화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프로페서 앤 매드맨”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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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 리뷰]이케아 옷장에 들어가면 일어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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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리뷰 후기입니다.영상소스
https://www.youtube.com/watch?v=9bswL...
https://www.youtube.com/watch?v=c1WjG...
https://www.youtube.com/watch?v=VbjW9...
음악 출처
Kevin MacLeod의 Heartwarming은(는)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라이선스(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 따라 라이선스가 부여됩니다.
출처: http://incompetech.com/music/royalty-...
아티스트: http://incompete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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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 '멀티버스의 역습' 30초 예고편
멀티버스의 그 무엇도 함부로 예측하지 말것!
상상의 경계를 벗어난 광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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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벚꽃 같은 나의 연인> 공식 예고편
"그래서 난 봄이 오면 늘 당신을 떠올려요, 벚꽃 같은 나의 연인을" 70만 부 이상 판매된 인기 연애소설, 마침내 영화가 되다! 사진작가 지망생 하루토와 남들보다 몇십 배 빠르게 늙는 난치병에 걸린 미사키 사이에 덧없이 흘러간 사랑 이야기. 벚꽃처럼 짧게 피고 졌지만 소중했던 두 사람의 사랑. 하루토의 필름에 새겨진 미사키의 미소는, 벚꽃이 지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의 가슴 속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출연: 나카지마 켄토, 마츠모토 호노카, 나가야마 켄토, 사쿠라이 유키, 오이카와 미츠히로 주제가: 'Eien', 미스터 칠드런 원작 소설: 우야마 케이스케 《벚꽃 같은 나의 연인》(슈에이샤 분코 출간) 넷플릭스 영화 《벚꽃 같은 나의 연인》, 곧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