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8-16 14:01:55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뒤섞인 난맥상
<행복의 나라>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법정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패를 가리는 장소라고 믿으며 각종 꼼수와 편법에 능통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 그는 감옥에서 암에 걸린 아버지의 가석방을 약속받자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 대령의 변호를 맡기로 결정한다.
군인 신분 때문에 재판 기회가 한 번 밖에 없는 박태주. 하지만 그는 변호인에게 쉽사리 협조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인 그의 눈에 정인후는 양아치니까. 그가 내란을 사전에 공모했는지, 아니면 위압에 의해 명령을 따랐는지가 재판의 쟁점인 가운데 박태주는 거짓 혹은 편법 증언을 요구하는 정인후와 거듭 부딪힌다.
한편, 10.26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어 권력을 잡겠다는 야욕을 품은 합수부장 '전상두'(유재명). 박 대령 재판을 자기 발판으로 삼기로 결정한 그는 실시간으로 재판관에게 쪽지를 전달하고 재판을 도청 및 녹음하며 정인후의 노력을 물거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무위에 그친 역발상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경호원들은 박정희 대통령 외 5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다룬 <행복의 나라>는 시간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어중간하다. 사건의 전후사정이 이미 영화화돼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의 동기를, <서울의 봄>은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을 영화화했다. 심지어 둘은 장르도 달랐다. 전자는 누아르를, 후자는 전쟁 영화의 속성을 강조했다.
이에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년의 밤>을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역발상을 했다. 10.26 사태나 주동자인 김재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은 공범 박흥주 육군 대령과 그를 변호한 태윤기 변호사에게 주목했다. 특히 그들의 인생사를 각색해 극명하게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게 되는 과정을 법정물로 포장해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행복의 나라>는 역발상의 힘을 스스로 포기했다. 신념과 규칙에 충실한 삶 대 생존을 위해 유연해야 하는 삶이라는 대립 구도를 깊게 파고드는 대신 쉬운 길을 간다. 무조건적인 악역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스케일을 키우고 군사 정권과 민주 시민의 대립을 강조한다. 문제는 같은 이야기로 천만이 넘는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선배들이 있다는 것. 결국 노선을 바꾼 순간 <행복의 나라>는 자기 자리를 잃고 말았다.
거대한 사건 속 개인적인 이야기
장르만 놓고 보면 <행복의 나라>는 <변호인>과 비슷해 보인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법정물이니까. 하지만 두 영화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 <변호인>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 달리는 작품이었다. 무고한 피고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군사정권의 무도함과 그에 맞서는 변호인의 투쟁. 이 명확한 선악 구도에 송강호라는 배우의 연기력을 더하니 마치 들끓는 불과도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행복의 나라>는 다르다. 선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고 있는 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성이 핵심이다.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두 주인공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인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을 꿈꾸며 판검사가 되려다가 실패한 변호사다. 법정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곳이라는 대사에는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박태주 대령이 앉아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인데도 판자촌에 집이 있을 정도로 청렴한 군인이다. 요직에 있지만 권력을 마다하고 최전방 전출을 거듭 요청한 참군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10.26 사태를 매개로 완전히 다른 두 삶을 충돌시킨다. 배경은 대한민국의 향배를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지만, 정작 내용은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감독의 전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와도 유사하다. <광해>도 중심 사건은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극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된 내용은 개인적인 이야기였다. 충(忠)으로 무장한 유학자 '허균'(류승룡)이 광해군으로 위장한 광대 '하선'(이병헌)과 지내면서 자기 신념과 사상의 문제를 깨닫고 새 나라와 새로운 왕을 꿈꾸게 되는 티키타카야말로 천만 관객을 휘어잡은 원동력이었다. <행복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두 인생의 충돌로 빚은 법정극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신념을 지녔다 보니 정인후와 박태주의 첫 만남은 엉망이었다. 정인후는 철저한 원칙주의자 군인 박태주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관등성명, 상명하복이 권위주의의 발현에 불과하다며 비웃는 사람이니까. 박태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법정에서 온갖 편법을 써가며 승리를 추구하고, 정의가 아니라 돈과 이익을 위해 변호를 맡는 정인후는 단지 변호사일 뿐, 신뢰할만한 변호인이 아니다.
1차 공판만 해도 정인후는 자기 의도대로 재판에 임한다. 군인이니 군법에 따라 단심제 군사 재판을 받겠다는 박태주. 정인후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군사 재판은 받지만, 단심제는 3심제로 바꿔달라며 위헌심사요청을 한다. 위헌심사요청이 기각되자 재판관을 교체해 달라며 재판을 여론 싸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2차 공판부터는 다르다. 정인후는 점차 피고인의 입장과 신념이 녹아든 전략을 수립한다. 군인에게 명령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저 명령을 따른 박태주의 책임을 부정하는 식이다. 대통령을 살해한 후 정보부가 아니라 육군본부로 가자는 의견을 박태주가 냈다는 진술에 착안해 내란죄 혐의를 부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태주도 정인후를 만나 변한다.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재판을 포기하려던 그. 그는 군인이고 원칙주의자면 규칙대로 재판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서 책임을 지라는 정인후의 일갈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는 법정극 특유의 쾌감으로 이어진다. 감정 호소로 일관한 <변호인>과 달리 <행복의 나라> 속 재판씬은 판세가 거듭 뒤집히다 보니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에 더해 흐름을 가져오려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변호인과 피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 팀이 되는 이야기가 병행되니 복합적인 재미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인권변호사가 되어가는 정인후를 보면서 박 대령이 웃음과 하이파이브로 화답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익숙한 맛으로 돌파하는 고구마
정인후와 박태주가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칫 고구마일 수 있다. 비록 역사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박태주라는 캐릭터가 다소 과하게 올곧은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 자기는 죽고, 아내와 두 아이만 남아 험난하게 살아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신념을 좀처럼 꺾지 못한다. 상관도 못 버리고, 명령에 충실한 군인이라는 자부심도 저버리지 못하고, 대통령을 살해했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도 내려놓지 못한다.
추창민 감독은 고구마를 익숙한 맛으로 뚫어버린다. 정인후의 아버지와 박 대령을 겹쳐 보이게 한다. 개척 교회 목사로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돕다가 수감되고,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버지. 정인후는 자기 신념대로 살아야 하는 아버지를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가슴으로 이해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가 박태주를 만나는 장면과 이어진다. 그 덕분에 자칫 답답할 뻔한 전개는 가족애로 변환되어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다소 양식적인 스토리텔링이기는 하다.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통해 시대적 사건에 접근하면서 특히 감정선을 자극해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유발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화법이니까. 야매 변호사였다가 사건을 맡은 후 진정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는 정인후나 <변호인>의 송우석이나 다를 바 없다. 또 정인후와 아버지의 관계성도 이러한 맥락에서는 신파를 의도한 구조 배치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욕과 함께 무너지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행복의 나라>는 이내 본연의 색을 잃는다. 의외로 초중반부까지 이 작품은 10.26 사태의 배경이나 실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학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김재규의 결단 정도로 언급할 뿐이다. 애초에 핵심 플롯 자체가 정인후와 박태주 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이는 의도적인 공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12.12 군사반란을 필두로 실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역사적 맥락의 공백이 서서히 두드러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도 무너진다. 배경이어야 할 사건이 돌연 주인공이 되다 보니 묻어 두었던 의문점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때문. 일례로 중반부까지만 해도 매력적이었던 입체적인 인물상은 중심점을 잃고 흩어진다. 정인후의 경우 단지 박태주를 살리려는지 민주주의 투사가 되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박태주도 명령에 의한 피해자인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투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가 청렴한 군인이고 신념에 맞는 명령을 따랐으니 민주주의 투사로 여겨야 하는지, 군사 정권에 협력한 군인을 살리는 게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인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10.26 사태의 본질과 맥락을 외면한 채로 시작한 미시적인 이야기를 무리하게 거시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장르적으로도 균형을 잃는다.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서울의 봄>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의 봄>처럼 쿠데타 과정을 자세하거나 긴장감 넘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26 사태는 지우고 12.12 군사 반란을 부각한 선택은 법정극이라는 장점도 희석시키고, <행복의 나라>만의 개성을 깎아먹는 악수가 되고 만다.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지막으로는 극 중 전상두, 곧 전두환을 다루는 방식도 <서울의 봄>과 비교를 피할 수 없다. 황정민의 전두광과는 달리 유재명의 전상두는 상대적으로 일차원적이다. 전자는 들끓는 성공욕,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보스 기질, 위기 때마다 빛나는 간교함이 어우러진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반면에 전상두는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살인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절대악으로만 묘사된다.
그 결과 전상두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영화는 편의적으로 느껴진다. 전두환이 의문의 여지없는 악역이기는 하나, 그를 덮어두고 비난하면 메시지가 뻔해지고 재미도 덜해지기 때문. 정인후가 전상두 면전에서 욕을 하는 골프장 시퀀스가 통쾌하거나 희열이 느껴지는 대신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슈퍼맨처럼 압도적인 힘을 지닌 히어로를 잘못 활용해 액션의 긴장감과 쾌감을 모두 놓친 <저스티스 리그>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유독 짙다. 악명 높은 한 인물 대신 비교적 덜 알려진 이들의 서사에 우직하게 집중했다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이전 시대극들과는 또 다른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조정석과 이선균,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두 주연의 연기도 함께 빛이 바래기에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시대의 그림자에 가려진 개인을 비추기에는 조명이 너무 약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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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복》, 죽음이라는 철학적인 질문은 던졌지만 내용은 글쎄?
작년부터 공유와 박보검의 만남으로 굉장히 홍보를 열심히 하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미뤄지고 미뤄지고 결국 티빙과 함께 온라인, 오프라인 동시 개봉을 한 영화 《서복》. 굉장히 기대를 많이 했던 작품이었지만 솔직히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하는 작품이었다.
영화 《서복》 시놉시스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 그와의 특별한 동행이 시작된다!
과거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전직 요원 ‘기헌’은 정보국으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마지막 제안을 받는다. 줄기세포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실험체 ‘서복’을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일을 맡게 된 것.하지만 임무 수행과 동시에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되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기헌’과 ‘서복‘은 둘만의 특별한 동행을 시작하게 된다. 실험실 밖 세상을 처음 만나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서복‘과 생애 마지막 임무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은 ‘기헌’은 가는 곳마다 사사건건 부딪친다. 한편, 인류의 구원이자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서복’을 차지하기 위해 나선 여러 집단의 추적은 점점 거세지고 이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서복》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욕은 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아요,,, 공유씨
공유가 영화에서 욕을 해본적이 없던가? 공유가 나오고 나서 거의 첫대사가 친구에게 찾아가 약을 타면서 욕을 하는 장면이었다. 와,,, 정말 저렇게나 욕을 못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욕이 입에 하나도 안 붙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화만 냈으면 그게 더 감정이입이 잘 됐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육두문자를 섞은 욕들이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몰입이 깨져서 너무 안타까웠다. 그리고 굳이 욕을 안해도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욕 때문에 영화 전반적인 퀄리티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공유가 맡은 역할이었던 기현의 욕 때문에 몰입감이 중간중간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영화 자체의 몰입도가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면장면이 기억 나긴 하지만 그 장면 간의 연결성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었다.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과 캐릭터들 간의 연관성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영화의 어떤 캐릭터를 가져다놔도 상관없을 것 같은 특색이 하나 없는 연구소와 캐릭터의 깊이감이 채워지지 않아서 붕 뜬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서복이라는 연구의 필요성, 서복의 능력에 대한 의문이 자꾸 생겨서 답답했다.
죽음의 의미에 대해 찾아가다
아마 연구소라는 배경 설정과 서복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상세하게 해결해주지 않은 이유는 영화 《서복》의 초점이 복제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맞이하는 죽음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SF영화들의 전형적인 문법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가 인간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등과 같은 철학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그 대답을 찾아간다.
영화 《서복》 역시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노화로 인한 죽음을 겪지 않는 서복이 죽음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고, 그와 대비되는 영원함은 무엇이며 영원히 잠드는 것이라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잠은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모순에 대해 서복의 존재와 기현의 대화를 통해 그 물음을 제시하고 있었다.
영화 《서복》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모순적인 감정을 풀어내려 했지만 영화 자체의 줄거리는 맥락이 잘 와닿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배우들을 좋아한다면 볼 만한 영화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추천하지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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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번 믿어 보고 싶은 감독 '최동훈'
첫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인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마음을 열고 대하게 된다. 아, 너무 괜찮네…하고 느꼈던 사람의 다음 만남 그 다음 만남이 계속해서 좋으면 호감은 복리로 쌓이게 되는 법이다.
충격적으로 좋았던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나서,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작품이 누군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 찰진 대사, 속고 속이는 사건들. 잘 짜여진 구조와 세련된 연출.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한 새내기PD였던 시절.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을 넘어선 충격이었던 것이다. '천재가 나타났네.’ 내게 최동훈 감독은 첫인상이 좋은 그런 감독이었다.
타짜, 도둑들, 암살까지 …데뷔 후 10년동안에 연이어 대박을 터트리며 천만 영화를 두 작품이나 만든 감독. 그 작품들이 나의 취향에도 잘 맞아 믿고 보는 감독이었는데 외계+인 1부를 보고 나오며,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포스터를 보며 어쩐지 서늘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래도 감독 이름 하나만 보고 선택한 영화였는데… 알 수 없는 배신감과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외계+인> 1부는 잘되면 속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다른 시리즈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2부가 존재함을 드러내 놓고 개봉했다. (아니 이럴거면 OTT시리즈로 만들었어도 되었지 않나)
2022년 현재의 세계에 ‘가드’’와 ‘썬더’는 인간의 몸에 가두어진 외계인 죄수를 관리하며 지구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서울 상공에 우주선이 나타나고 형사 ‘문도석’은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한편, 630년 전 고려에선 얼치기 도사 ‘무륵’과 천둥 쏘는 처자 ‘이안’이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신검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속고 속이는 가운데 신검의 비밀을 찾는 두 신선 ‘흑설’과 ‘청운’, 가면 속의 ‘자장’도 신검 쟁탈전에 나선다. 그리고 우주선이 깊은 계곡에서 빛을 내며 떠오른다. 고려와 현재, 그리고 외계의 세계가 뒤섞여 스토리를 이해해야 한다. 2022년 인간 속에 수감된 외계인 죄수를 쫓는 이들 그리고 1391년 고려 말 소문 속의 신검을 차지하려는 도사들 사이 시간의 문이 열린다.
사실 1부는 자..이제 배경을 설명해줄게…정도의 느낌이랄까. 선명하게 줄거리를 말하기에 세계관이 복잡하지만 이상하게도 참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기이함. 미래형 SF와 오리엔탈 판타지가 섞인 영상은 어딘가 어수선하고, 캐릭터는 어디선가 본 것 같았고, 스토리는 뻔했다. ‘저기요 …감독님…왜그러셨어요?어디서 부터 잘 못 된건가요?’ 이해가 되지 않아 붙잡고 물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까지 감독에 대해 고민하는 나는 또 뭔가…나는 왜 그를 좋아했는지 반문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암살> 창작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소재에서 시작된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 왔다. 인물을 충분히 탐구하고 인터뷰하며 디테일을 놓치지 않아 캐릭터가 살아있었다. 영화적이지만 사실적인 그런 인물들이 어우러져 촘촘하게 극이 진행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외계+인>은 어쩌면 최동훈 감독이 ‘하고 싶은 거 다해’ 본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오롯이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세계관과 타임슬립이나 썬더, 하바와 같은 장치들. 아마도 내가 <외계+인>을 보고 그토록 당혹스러웠던 것은 화려한 CG나 숨막히는 액션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최동훈 다운 작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의 정체성이 명확히 보이지 않은 작품 인 것은 그가 변했기 때문이거나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 그가 만든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 그는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게다가 이 영화는 둘로 나뉜 영화의 겨우 1부 일 뿐이었으니까. 그가 펼쳐 놓은 것들을 어떻게 마무리 하려고 하는지. 나는 아마도 또 한번 그를 믿고 2부를 보러 갈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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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위대한 개츠비
워낙 유명한 영화이기에 호화롭게 잘 사는 장면만 나와도 바로 '그 장면'이 나오는 영화. 영화를 보기 전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아이리시 맨>처럼 메인 인물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영화일 줄 알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초반은 개츠비의 외적인 매력에 빠지고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점점 그의 내적인 매력에 빠진다.
#사진 밑으로 스포가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스틸컷
당시 미국
누구나 자신의 꿈이 있지 않은가. 돈과 명예, 남들 부럽지 않은 재력과 행복한 나날들 같은 꿈 말이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당시 미국에서 드리우는 '아메리카 드림'으로 엄청난 호황기를 누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희망찬 꿈과 포부를 안길 수 있는 시대에 개츠비 역시 그 꿈을 달성한다. 화려한 대저택과 신나는 파티, 언제나 밝은 그의 저택 조명은 개츠비의 능력을 과시하게 만든다. 개츠비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나오는 부자들의 파티 장면은 영화 중간마다 나오는 노동자들과 상당히 대비되어 나온다. 즉, 영화는 당시 1920년 호황기를 맞는 미국 사회에 따라 빚어지는 빈부격차와 계층 분화의 대립을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당시 갑작스러운 호황기에 따라 나날이 발전하는 물질의 변화에 맞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문화지체현상(culture lag)이 벌어진다. 영화는 이 현상을 역시 포커스를 맞혔는데 부패한 권력과 사치 넘치는 모습들, 거짓으로 꾸민 허상이 확장되가는 미국인의 모습을 드러내며 당시 미국 상황을 느낄 수 있다.
위대함
개츠비라는 사람이 왜 위대할까. 필자는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위대한'을 적은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의 시점 그리고 소설에서 말하는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개츠비가 가지고 있는 진심 즉, 데이지(캐리 멀리건)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닉은 첫 장면부터 각종 정신병을 앓고 있어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예전 만났던 개츠비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개츠비가 엄청난 돈을 벌고 싶었던 이유는 5년 전 헤어졌던 데이지를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포기하거나 오히려 그 꿈이 현실의 제안으로 메워버린다. 닉도 이 같은 과정으로 결국 정신병을 앓는 지경까지 이르러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츠비는 다르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돈을 인식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이용해 데이지의 사랑을 얻고 싶어 한다. 현재도 이어지는 물질적 욕망과 욕망으로 만들어진 허상 된 세상 속에서 물질적 욕망을 이기는 진정한 사랑. 이 얼마나 위대한가. 닉이 왜 마지막에 '위대한'을 적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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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싫어서 뉴질랜드로 떠난 여자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한국이 싫어서> 시사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장건재 감독의 <한국이 싫어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의 삶에 지친 계나가 모든 것을 뒤로 버려두고,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 뉴질랜드로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라면 꼭 한번쯤은 꿔본 우리들의 꿈,
그 꿈을 위하여 용감한 도약을 한 계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되고, 비로소 '행복'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안정적이지만 모든 것이 족쇄마냥 느껴지는 한국의 삶
VS
매우 불안정하지만 자유로운 뉴질랜드에서의 삶
이 두개의 선택지 중 옳은 선택이 있을까요?
이 두개의 선택지 중 진정한 행복이 있는 곳이 어디일까요?
우리는 행복찾아 떠난 뉴질랜드가 맞는 답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것 또한 정답은 아닙니다.
영화는 말합니다.
장소와 환경이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물론, 어느정도의 영향은 있겠지만
A라는 장소가 무조건 행복을 보장해주고
B라는 장소가 무조건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죠.
나에게 행복한 곳이 누군가에게는 그 어디보다도 지옥같은 곳일 수 있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결정합니다.
행복은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비로소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감사하게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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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계나처럼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저기 먼 핀란드같은 나라로 훅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짧게나마 외국의 삶을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한국을 떠나는게 온전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가족과 친구가 주는 온전한 안정과 행복은 외국에서 절대 가질 수 없는 행복이기 때문이죠.
결론은 이렇습니다.
일상적인 것에 감사하자.
거기서부터 행복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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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한국이 싫은 젊은 청년들에게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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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용주의 스승과 이상주의 제자의 이야기
삶은 배움의 연속이다. 유치원을 시작으로 정규 교육과정에 들어가서는 초중고등학교를 지나면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해 나간다. 그렇게 알게 되는 지식은 개인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준다. 다양한 종류의 책과 이론들을 배워나가면서 사람마다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배워 나간다는 것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선택지를 하나씩 줄여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던 조금씩 앞으로 나가다 보면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를 어느 순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에 또다시 향후의 방향성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놓인다. 그래서 무언가를 평생 배워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지를 계속 늘려가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배움의 한가운데에서 누구나 인생의 스승을 하나쯤은 만난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이나 동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스승과 깊은 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그것을 관찰하면서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그렇게 스승을 삼을 무언가를 만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 배움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시각을 알 수 있게 되는 기회가 된다. 만약 그 스승 또한 사람이라면 스승도 제자를 만나 다른 시각을 보게 된다. 제자가 가진 새로운 관점의 질문들과 패기, 열정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그것에도 무언가 다른 것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서로 한 뱡향으로 배움을 전달한다기보다 서로 상호 작용하며 각자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자산어보>는 흑산도 유배지에서 생활하는 정약전(설경구)과 흑산도에서 물고기로 생계를 이어가는 창대(변요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약전은 그의 동생인 정약종, 정약용(류승용)과 함께 그 당시 실학과 같이 들어왔던 천주교의 교인이 되었는데 이후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시작된 신유박해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반면 창대는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틈틈이 혼자 여러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탐구하는 청년이다. 그는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점점 난이도 높은 책을 읽음으로써 향후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길 원하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 이 두 인물은 서로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 정약전에게 창대는 그저 섬에서 일하는 젊은이로, 창대에게 정약전은 조정에 반하고 성리학을 욕보인 죄인으로만 보인다.
영화 속 정약전과 창대의 만남은 실용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만남같이 보이기도 한다. 유배 전까지 다양한 정치활동을 해왔던 정약전은 이미 성리학의 이상적인 길을 가려고 노력한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여러 가지 정치적 경험을 한 이후, 그가 흑산도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학문적인 탐구보다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나 활동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으로 유배 갔던 정약용이 올바른 정치에 대한 글을 무수히 써나갈 때, 좀 더 실용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대한 글을 썼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다 생물들에 대해 정리한 자산어보(玆山魚譜)다.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반면 창대는 글을 읽고 배우면서 성리학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길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대는 책과는 다르게 하찮게 보이는 백성을 위한 서적을 만드는 것처럼 다른 접근을 하는 정약전이 못마땅하다. 성리학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창대에게 정약전은 그저 잘못된 길을 가는 정치인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다. 정약전은 다양한 바다 생물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그것에 대한 책을 써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 작업을 하는 데에는 창대가 가진 바다 생물에 대한 지식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창대는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책에 대해 배우고자 한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는 데에는 그것을 쉽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에겐 박학다식하고 경험이 많은 정약전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 지식에 대한 배움은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성리학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생각과는 다르게 조금씩 가까워지게 된다. 이들이 가진 배움의 열망은 그들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의 색안경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보이는 지식과 인간적인 면들을 온전히 바라보게 만든다.
창대는 정약전에게 여러 책에 대해 배워 나가며 자신 만의 지식을 쌓아간다. 그러면서 그는 성리학에서 내세우는 것을 바탕으로 좋은 정치를 실제로 행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영화 속에서 창대는 양반인 아버지(김의성)의 혼외 자식이다. 하위 계층인 그에겐 관직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과거 시험 조차 볼 수가 없어 계속 공부를 해나가서 자신의 배움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시험의 기회가 주어져 관직에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창대가 보기에 그저 앉아서 쓸데없어 보이는 책을 쓰고 있는 정약전이 답답하기만 하다. 반대로 창대를 바라보는 정약전의 마음엔 성리학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그런 정약전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
스승은 제자에게 다양한 지식을 알려주지만 그것을 활용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결국 제자의 몫이다. 그것에 대해 스승이 어떤 의견과 방향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제자는 그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정약전의 지식과 혜안에 감탄하며 책을 배우던 창대는 스승으로 삼은 정약전의 총명함에 완전히 빠져든다. 하지만 한참을 그에게 책을 배운 이후 그가 선택한 삶은 스승 정약전이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둘은 서로 아주 먼 관계였다가 조금씩 가까워져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가, 이내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영화 속에는 크게 위기상황이 있지는 않지만 이 스승과 제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그 상황 자체가 두 사람에게 닥쳐오는 가장 큰 위기이자 또 다른 배움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보는 관객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유배시절 쓴 자산어보의 서문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을 가미해 구성한 영화다. 서문에 등장하는 창대는 물고기에 대하여 박학다식하다고 적혀있고 자산어보를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둘이 실제로 스승과 제자 관계였는지 그리고 각자 어떤 길을 가게 되었는지는 상상의 영역이다.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흑산도(黑山島)의 모습을 아주 정갈하고 깨끗하게 담는다. 마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영화에는 흑과 백으로 구성되어 빛바랜 앨범을 꺼내어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흑백으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비추는 흑산도 주변의 모습이나 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을 비추는 카메라는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친다.
자산어보가 흑산어보가 아닌 이유는 창대라는 인물의 의견이 영향을 주었다고 실제 자산어보의 서문에 적혀있다. 흑(黑)은 검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어둡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검다는 뜻을 가지면서 부정적 의미가 없는 또 다른 글자인 자(玆)를 가져와 자산어보라는 이름으로 책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책의 제목까지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정약전이라는 인물은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일 줄 아는 학자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 걸쳐 보이는 정약전의 모습은 일반인들의 삶과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들 또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이런 생각을 가진 정약전이 만인이 평등하고 모두가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약전이 최하층 계급인 창대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최대한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의 됨됨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정약전의 열린 생각은 가거댁(이정은)과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가거댁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수발을 드는 가거댁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양반이지만 집의 청소를 하려고 한다거나 최대한 빚을 지지 않으려고 돈을 건네는 등의 행위가 그것이다. 또한 관련하여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가거댁과 창대가 이야기하는 장면인데, 그때 가거댁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씨만 중하고 밭은 귀한 줄 모른다”. 실제 농사에서 좋은 씨앗 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 가거댁이 한 말이다. 여기에는 그 당시 아이를 낳는 여자는 홀대받고 씨를 뿌리는 남자들만 대우를 받는 그 시대 상을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거댁의 말을 들은 정약전은 그에 대해 특별히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 당시 하찮게 취급받던 여인의 말에도 반발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영화적 설정일지라도 그런 정약전의 열린 모습은 보는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창대, 즉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로 보인다.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가르쳐주고, 제자가 품고 있는 이상향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가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있다. 이번이 첫 사극 연기인 설경구는 열린 생각을 가진 정약용처럼 보이고, 변요한은 그가 가진 퉁명스럽지만 총명한 이미지로 청년 창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영화의 이야기에 허구가 다수 섞여있다 할지라도 이 영화가 담은 내용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감정과 지식을 담고 있다.
영화는 정약전과 가까웠던 정약용이 서로 주고받았던 시를 배우의 목소리를 빌어 들려주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동안 관객들에게 그 시의 한자를 그대로 화면에 보여준다. 그 한자로 된 시의 구절들을 실제로 모든 관객이 이해하며 읽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화면으로 제시되는 한시는 실제로 감정을 담아 그 한시를 읽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 화면과 함께 하나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런 한시와 어우러진 이 영화는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담은 수묵화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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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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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포효 혹은 절규
감독: 루아나 바즈라미
출연: 안디 바이고라, 플라카 라티피, 에라 발라지, 루아나 바즈라미
시놉시스: 코소보의 한 작고 후미진 마을에 사는 세 젊은 여성은 자신의 꿈과 야망이 억압받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암사자들의 포효를 들을 시간이다.
<암사자들이 포효하는 언덕>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학교는 끝났다>, <레벤느망>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두각을 나타내는 중인 배우 루아나 바즈라미의 감독 데뷔작이다. 바즈라미 감독은 자신의 출신지인 코소보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로 이번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주간 최연소 감독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코소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세 친구 체, 리, 젬은 자신들의 꿈과 자유가 억압받는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한다. 언덕 위에서 시작부터 장난치듯 힘껏 내지르던 이들의 포효는 점점 절규로 들리는 듯하다. 이 영화는 코소보라는 특수한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영화이기도 한데, 물론 이것이 영화를 봄에 있어 필수조건은 아니겠지만 이들의 일탈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동하는 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칠 것이다. 코소보는 전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고, 다수를 구성하던 알바니아계인들이 상대적 소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을 대상으로 분리독립을 주장하면서 코소보 내전이 발발했다. 이에 세르비아군이 인종 청소로 대응하며 알바니아계인들을 학살하다시피 했고, 국제사회의 개입이 있고서야 코소보는 독립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독립을 지금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자치주로 인식하고 있고, 코소보는 그만큼 아픔을 가진, 과거의 폐허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나라다.
멀리 위치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그리 가까운 관계의 나라도, 잘 알 만한 나라도 아닐뿐더러 이 영화의 핵심이 여기에만 있지는 않지만 위의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코소보라는 배경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그렇다. 세 주인공 체, 리, 젬은 이런 나라 코소보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감독 자신이 등장해 연기하는 인물 '레나'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코소보에서 파리로의 실제 이민 경험과 흡사한 설정의 인물인 만큼 그 입을 빌려 직접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코소보 출신 이민자의 위치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들과 달리 파리로 가 살고 있는 레나가 부럽다는 세 친구의 말에 레나는 파리보다 코소보가 좋다며 오히려 너희가 더 자유롭다 말한다. 이 말은 그의 위치를 동경하는 세 명에게는 와닿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파리에서 외지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의 입장에 대해 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코소보에 사는 이들이 동경하던 파리로 간 이민자 또한 더 나아 보일지는 몰라도 겪게 되는 차별과 억압이 있고 이들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스쳐 지나가듯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자전적 경험이 녹아들어 간 가장 특별한 장면이다.
가게를 터는 등 점점 강도 높은 일탈을 즐기며 마음껏 포효하던 세 친구는 결국 자신들의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유일한 '실수'라 칭해지긴 하지만 이들이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다는 전개는 인상적인데, 이 점은 두 가지로 읽혔다. 하나는 결국 고향을, 정체성을 잊을 수는 없다는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실패'의 의미였다. 마지막의 현실인지 가상인지 모를 핏빛 엔딩으로 미루어봤을 때 이들의 복귀는 후자의 의미로써 다가왔다. 그래서 이들의 복귀는 이들이 유일하게 가진 곧 터져버릴 심장 즉, 젊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최후의 유일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마치 시작부에서 힘껏 내지르던 언덕 위 포효 혹은 절규처럼.
데뷔작에서만 느낄 수 있을 법한 날 것 가득한 이미지들이 좋게 다가오면서도 영화 자체는 예상보다 평이해 아쉽게 느껴지지만, 이 영화를 봄으로써 감독 루아나 바즈라미의 차기작이 궁금해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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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리멘탈> 티저 예고편
?과 ?처럼 서로 정반대이지만 그래서 더 신비로운 우리의 첫 만남 모두가 손꼽아 기다려온 디즈니·픽사의 2023년 신작 [엘리멘탈] 티저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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