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4-09-06 13:49:00
선자의 역사는 '모두'의 이야기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서도 '파친코'에 열광하는 이유
이민진 작가가 집필한 동명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한 애플TV+ '파친코'는 공개된 뒤, 국내에서 많은 이목을 끌었다. 그동안 한국 근현대사 중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다룬 국내 미디어물은 많았으나, 국외 제작진과 글로벌 OTT 플랫폼(애플TV+) 속에서 한국(+한국계) 배우들이 중심으로 담아냈던 사례는 '파친코' 이전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시즌 1에만 무려 1000억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를 투입한 '파친코'는 공개되자마자 단번에 화두로 떠올랐다. 3월 25일 유튜브로 공개된 1회는 조회 수 천만 뷰를 가뿐히 넘어섰고, 4년 전에 한국어 버전으로 발간된 원작 소설은 절판을 앞두고 역주행하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한국서 접할 수 있는 OTT 중에선 후발 주자 격인 애플TV+ '파친코'로 틈새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파친코'를 향한 인기와 호평은 한국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해외 주요 매체들은 '파친코'의 수준 높은 연출력과 서사, 연기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로튼 토마토 신선지수 98%, 메타크리틱 점수 87점을 기록하는 등 작품성을 검증받았다. 이에 힘입어 애플TV+ 측은 '파친코' 시즌 2로 확장했다.
'파친코'가 화제의 콘텐츠로 떠오르면서 자연스레 제작 비하인드도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다. 4대에 걸쳐 80년간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의 삶을 다룬 '파친코'에 영화/드라마 제작에 손을 내민 곳은 애플TV+ 이외에도 많았다.
그러나 원작자 이민진 작가는 다른 러브콜을 거절하고, 애플TV+와 계약을 맺었다. 제일교포인 주인공을 다른 인종(백인)으로 바꾸자고 제안한 다른 곳들과 달리, 유일하게 애플TV+만 이 작가의 요구사항에 따라 원작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최근 '킹덤', '기생충', '미나리' 등 웰메이드 작품들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아시아인의 위상이 예전과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국을 포함한 서양 주류사회는 의도적으로 아시아인을 배척해왔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시아인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선자(김민하/윤여정)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을 백인으로 설정하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단순히 백인으로 각색해야 무조건 돈벌이가 되고 먹힌다는 의미로 접근한 건 아닌 것 같다. 한국의 아픈 근현대사부터 1980년대가 주요 시대적 배경인 '파친코' 속에서 다른 문화권에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쉽게 드러났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선자의 남편 백이삭(노상현)과 그의 형 백요셉(한준우)부터 선자의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소지 아라이), 그리고 선자의 손자이자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진하)까지 성경에 언급된 핵심 인물들의 이름을 차용했다. 그렇다, '파친코'는 기독교 코드를 한국 근현대사에 녹여낸 것이다. 원작자인 이민진 작가 또한 성경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파친코' 속에 기독교적 메타포가 눈에 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면서 점점 조선인들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1910년대, 선자의 모친 양진(정인지)은 선자가 태어나기 전 무속인을 찾아간다. 당시 태어난 아이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 이때 무속인은 "아가 생길 기다. 이 아는 살려 주실 기다. 꼭 살아가 대를 잇고 손을 이을 기다"라고 말을 건네는데, 이 장면은 성경의 누가복음 1장을 떠올리게 한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누가복음 1장 31절~33절-
다시 첫 회 도입부를 장식한 양진과 무속인의 대화 장면으로 돌아가면, 이 장면 구성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와 닮아있다. 언뜻 샤머니즘으로 아이가 점지되길 비는 것처럼 보이나, 기독교적인 메타포가 깔려 있는 셈이다. 동시에 양진은 신으로부터 아이를 선물 받은 성모 마리아, 예언된 아이 선자는 신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하는 '선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점으로 '파친코'의 메인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선자네 가족 4대는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을 넘어 행적도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다. 한 예로 한수(이민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선자는 죽을 뻔한 이삭을 살린 뒤, 그와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종교를 기반 삼은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이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보를 떠올리게 만든다.
동시에 이삭은 소설에서 호세아의 삶을 살겠노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구해준 선자를 정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준다. 세속적인 면을 버리고 종교적인 용서와 믿음을 실천하는 것까지 호세아가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
선자와 이삭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모자수(모세)와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그렇다. 고대 히브리인을 이집트로부터 독립하게 만든 모세처럼 조선인들을 일본에서 탈출시키진 못했으나, 파친코로 부를 축적한 자이니치들을 대변하는 인물 격으로 등장한다. 모세가 당시 고대 히브리인을 대표하는 리더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성쇠를 동시에 맛봤던 솔로몬을 닮아, 백솔로몬은 1989년 최절정을 찍었다가 버블경제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을 살았던 인물을 대변한다. 또 그가 유학생활을 했던 미국은 그 시기에 중산층이 몰락하던 시기를 맞이했다. 그 격동기를 경험한 세대들이 솔로몬으로 압축된 셈.
드라마로 제작돼 한국에서 관심받기 전, 소설 '파친코'는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까지 진출했다. 이는 이민진 작가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미국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성경과 이민의 역사를 적절하게 녹여내 큰 공감대를 형성한 공이 컸다.
특히 한국인 이름을 가지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선자는 한국과 기독교 가정을 연결 짓는 인물인데, 이는 미국인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이덴티티(기독교, 원주민, 뿌리를 중시, 이민자 출신)에 모두 부합하고 있다.
이어 선자와 이삭 부부가 종교 때문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설정은 17세기 기독교 원리주의 목적 하나만으로 영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대륙에 발을 디딘 청교도들, 그들의 후예가 건국한 미국의 건국사와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여기에 선자 가족을 포함해 나라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들에게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수난기는 구약성경 내용과 같은 결을 띤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더럽다고 여긴 자이니치들이 꿋꿋이 버텨내며 뿌리를 내리는 건 고난과 역경을 거쳐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후예들을 암시한다. 이러니 한국 근현대사를 따르지 않고, 서양인으로 각색하려는 제안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결국 '파친코'가 한국을 넘어 다른 문화권에서도 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한국인들과 재일 교포 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아픈 역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일어났던 역사와 사건 등이 여러모로 겹쳐 보였던 것이다.
그 지점을 이민진 작가가 영리하게 성경을 차용해 '파친코'의 서사 속에 녹여낸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살았던 당시, 재일교포들이 겪는 차별을 고발하고 싶었고, 이것이 '파친코'의 출발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문제를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이해하고 공유해 같이 분노하기 위해 다른 문화권 코드를 잘 융합시킨 셈이다. '파친코'를 읽는 모든 이들이 한국의 역사와 재일교포에 과몰입시키고 싶었던 그의 목적은 달성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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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몰랐던 세계에 대한 깨달음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영화제가 많지만, 부산은 많은 상영작과 가까운 동선으로영화를 많이 보기 최적의 코스인데다가 가을의 뜨거운 햇빛과 차가운 공기, 그리고 바다까지 즐길 수 있어 매해 기다리는 영화제가 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열흘 동안 4개 극장 25개 스크린에서 69개국 209편의 공식초청작과 커뮤니티비프 상영작 60편등 총 269편을 상영한다. 많은 영화들 중에서 과연 어떤 영화를 고를 것인지는 사람들마다 기준점이 다를 것이다.내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 첫번째는 개봉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 두번째는 영화제에서 최초 공개 되는 영화다. 그리고 세번째는 영화제를 맞아 특별상영하는 고전들이다.
첫번째 기준의 영화에 부합하는 영화들은 미국이나, 일본 보다는 유럽이나 아시아 영화가 많다. 제 3국이라는 말이 참 모호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아름 다운 이야기들로 잘 짜여진 상업영화도 즐겁게 보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과거 때문인지…나는 조금 더 현실을 직시 할 수 있는 소재에 관심이 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영화들은 개봉이 어렵다. 극장에서 보고 싶지만, 그럴수 없으니 영화제에서 찾아서 볼 수 밖에.
예매 오픈일 전날, 영화 소개를 꼼꼼히 보며, 시간표를 짰다. 올해는 주말을 이용해 다녀올 생각이어서, 토요일에 최대한 많은 영화를 보려면 보고 싶은 영화의 러닝타임을 잘 계산하고 최적의 동선으로 움직여야 했다. 매진을 대비해 각 시간별로 1순위, 2순위로 영화를 배치하고, 메인 타임엔 3순위까지 영화를 정해 두었다. 오픈 시간인 오후 2시엔 외부일정이었지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모바일로 접속했다.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예매를 시작했지만, 꼭 보고 싶었던 토요일 17시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거의 1-2분 컷으로 매진이 되어버렸다. 아…제일 먼저 예매했어야 했는데…혹시나 해서 아침 영화부터 순서대로 예매했던 것이 실수 였다. <공드리의 솔루션북>을 제외한 영화 4편의 예매를 마친 시간은 2시 5분. 올해 예매 대전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1순위로 보고 싶었던 영화로 예매했으니, 이만 하면 충분하다.
작년에는 여성 인권과 난민에 관한 주제를 다룬 영화를 주로 보았는데… 올해 예매 내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슬림과 아시아 여성인권 영화에서 아프리카 여성 인권에 관한 영화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아프리카 난민에 관한 이야기에서 폴란드로 들어오는 중동 난민에 대한 영화로 지역이 바뀌었을 뿐이다. 세계의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기본권 조차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뜻일 것이다.
‘소수’나 ‘다양성’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이런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집단 대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수적으로 적지 않지만, 세상에 목소리를 낼 자본이나 힘이 적은 것일뿐. 영화가 필요한 이유는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들이 실상을 알도록,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충격적이고 먹먹했던 작년의 영화들에 이어서 올해는 어떤 현실을 직면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그리하여 나의 세계는 얼마나 더 커지게 될지, 올해의 영화제도 기대된다.
<지극히 사적인 인권에 관한 영화 기대작>
1.신부 납치
우무트는 간호 조무사로 일하면서 정식 간호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건실하고 밝은 청년으로 어머니와 함께 서로를 의지 하며 산다. 에게멘은 고철을 훔쳐 생계를 이러가는데, 늙은 아버지와 둘이 사는 집에 누이들이 와서 살림을 대신 해준다. 이들은 날마다 에게멘에게 결혼 할 것을 종용하는데, 그에게는 숨겨둔 애인 메예림이 있다. 메예림은 납치당해 결혼했다가 딸을 데리고 이혼한 처지로, 에게멘은 가족들에게 메예림을 떳떳이 소개하지 못한다. 여전히 키르키스스탄에 만연한 신부 납치의 악습을 고발하는 이 영화는 충격적인 수 많은 실화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시종 건조한 시선으로 인물들과 사건을 관찰자의 위치에서 따라간다. 묵직하게 서사를 쌓아가는 힘과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에도 길을 잃지 않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이영화의 강점이다.
2. 푸른 장벽
2021년 하반기 벨라루스가 중동에서 흘러 들어온 난민들을 인접한 폴란드로 보내면서, 푸른 숲으로 우거진 국경 지대에서 양국의 군인들과 중간에 낀 난민들이 충돌하게 된다. 거장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최신작 <푸른 장벽> 은 철저한 조사에 기초해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취함으로써, 때로는 현실이 픽션보다 참혹할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영화를 만들지는 않지만 우리 세상 모든 면이 정치적”이라 했던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모든 등장 인물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하게 된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새우등 터지는 난민, 그들을 도우려는 인권 단체, 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주민, 그들을 몰아내야 하는 국경 수비대의 다양한 시점을 통해 우리가 선택을 내리는 순간, 그 희미한 선악의 경계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 짧은 에필로그에 이르러, 불과 일 년 후 폴란드의 또 다른 국경에서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3. 10년; 미얀마
10년 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옴니버스 영화 <10년>. 2015년 홍콩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일본, 대만, 태국을 거치며 국제적 연작이 된 <10년> 시리즈는 사회적 상상력과 영화적 상상력의 결합으로 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0 년: 미얀마>는 다섯 명의 감독이 다섯 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전 시리즈가 직관적이고 명쾌한 메시지를 그렸다면 미얀마 편은 보다 절제되어 있으며 관객에게 더 많은 상상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각 에피소드에서 연상되는 의문사, 정치범, 저항군, 폭력, 검열 등의 키워드는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의 엄혹하고 암울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홍콩을 비롯한 이전 시리즈의 제작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완성된 작품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아시아 국가들의 ‘밀크티 동맹’이 영화인의 연대로 재탄생하여 결실을 보았다.
4. 21주후
임신 21주 차인 여자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금지된 낙태를 결정한다. 유산한 아이를 몰래 묻어주기 위해 도시의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없다.
5. 꿈꾸는 청소부
슬럼가에서 딸 무니와 함께 사는 비르주와 쇼나 부부는 매일 아침 콜카타의 부촌을 돌며 손수레에 쓰레기를 수거한다. 쓰레기 가운데 쓸만한 물건들을 골라내 집으로 가져가고, 이 물건들은 매일 밤 딸에게 들려줄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 비르주는 관리자로부터 앞으로는 오토바이로 쓰레기를 수거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오토바이를 몰 줄 모르는 그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전작을 통해 인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선보여온 수만 고쉬 감독은 이 영화에서 쓰레기 수거일을 하는 부부의 일상에 근접해 들어가는 카메라를 통해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과 환영적 리얼리즘을 절묘하게 결합한다. 딸에게 들려주는 판타지가 비르주의 현실적 불안과 뒤섞이며 영화는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언급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꿈꾸는 가족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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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이 예정된 두 모성의 사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이 태어나기 172년 전, 칠왕국의 왕 '비세리스 타르가르옌(패디 콘시딘)'은 아들이 태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왕비 '아엠마 아린(시안 브루크)'는 출산 중에 사망하고, 갓 태어난 아들도 곧이어 세상을 뜬다. 이에 비세리스는 야망 가득한 다혈질 동생 '다에몬(맷 스미스)'의 반발을 무시한 채 유일한 딸 '라에니라(에마 다시)'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가문의 비밀인 '약속된 왕자'에 관한 '얼음과 불의 노래'를 들려준다. 몇 년 뒤, 비세리스는 라에니라의 소꿉친구이자 절친이었던 '알리센트 하이타워(올리비아 쿡)'와 재혼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왕의 장남 '아에곤 2세(톰 글린-카니)'가 태어난다. 이에 칠왕국은 왕의 공인을 받은 후계자이자 장녀인 라에니라를 지지하는 '흑색파'와 왕의 적자이자 장남인 아에곤 2세를 지지하는 '녹색파'로 분열된다. 이렇게 왕국과 대륙의 운명을 건 거대한 전쟁 '용들의 춤'이 발발한다.
HBO 오리지널 드라마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성황리에 첫 시즌을 마쳤다. 8월 21일에 공개된 첫 화는 당일 북미 시청률만 천만 명에 육박했고, 마지막 회는 9천만 명이 시청했다. 전작인 <왕좌의 게임>의 각 시즌 피날레 시청률을 압도하는 엄청난 흥행이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실망을 안긴 <왕좌의 게임> 때문에 기대감이 낮았기에 더욱 놀라운 결과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판타지 드라마 <반지의 제왕: 힘이 반지>를 압도한 건 덤이다. 그 원동력은 흥미롭게도 꽤나 고전적이다. 예정된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두 주인공의 비극, 특히 두 여성의 운명적인 비극이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왕과 왕자가 아닌 공주와 왕비의 이야기, <하우스 오브 드래곤>
<하우스 오브 드래곤>에는 <왕좌의 게임> 못지않게 수많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인공 감으로 손색없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주인공을 꼽으라면 당연히 라에니라 타르가르옌과 알리센트 하이타워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세계의 질서와 관습에 도전하는 여성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 파멸하는 여성의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왕좌의 게임> 버전 <선덕여왕>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라에니라와 알리센트는 주위에 가득한 수많은 남성 사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여성적인 리더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이들의 리더십은 그 남자들이 칠왕국을 분열과 붕괴로 이끌 획책을 꾸미고 있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우선 라에니라의 옆에는 다에몬이 있다. 선왕인 비세리스 1세의 동생이고, 라에니라의 숙부이자 남편인 다에몬 타르가르옌은 용의 불같은 성질로 악명이 높다. 형의 서거 직후 공인된 후계자인 라에니라의 왕위를 녹색파가 찬탈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즉각적인 선전포고와 수도를 향한 포위 공격을 주장한다.
한편 알리센트의 옆에는 아버지이자 왕의 수관인 '오토 하이타워(리스 이판)'가 있다. 그는 왕비인 알리센트 몰래 그녀의 장남이자 자신의 외손자인 아에곤을 왕위에 올릴 공작을 꾸민다. 또 후계 구도에 필연적인 위협이 될 라에니라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여성의 리더십을 부각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두 여성은 각자의 진영에서 가장 이성적인 리더로서 상황을 통제한다.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정세를 읽고, 마지막까지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라에니라는 왕이 후계자에게만 직접 알려주는 왕가의 비밀을 무기 삼아 다에몬의 폭주를 제지한다. 왕의 동생이자 후계자의 부군인 다에몬은 라에니라 못지않게 철왕좌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라에니라는 다가올 겨울과 약속된 왕자에 대한 '얼음과 불의 노래'의 존재를 다에몬이 모른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주도권을 빼앗아 온다. 아무리 혈연적으로 왕좌에 가깝다 하더라도, 왕의 자격이 그에게 없음을 일깨운다.
항상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던 알리센트도 녹색파와 흑색파의 전면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리더의 면모를 보여준다. 행방이 묘연했던 아에곤을 오토보다 먼저 찾아내 그의 음모를 좌절시킨다. 타르가르옌 왕가의 가장 큰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알레니스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타협안을 제시한다. 라에니라가 목숨을 건 정적이 되어 버린 순간에도 어릴 적 둘도 없는 친구였던 추억을 상기시키며 마지막까지 전쟁을 피해보려고 애쓴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갈등, 권력 투쟁일 수 있었던 두 절친의 대립에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여성 리더십이 실패한 이유, 모성애
아이러니하게도 분쟁을 막아보려는 필사적인 여성적 리더십은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의 서막을 알리고 만다. 그들의 통솔력이 그 자체로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발판의 근본적인 한계까지는 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모성애라는 왕비와 공주의 공통분모가 왕국을 절반으로 쪼갤 전쟁을 유발하는 결정적 원인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알리센트는 라에니라가 공인된 후계자로서 왕위를 계승한다면 자신이 낳은 아들들이 모두 정치적 이유로 죽거나 탄압받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라에니라에게는 이미 아들들이 있으니, 왕위 계승 구도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라에니라가 배다른 동생들을 숙청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무조건 왕좌를 가져와야 한다.
라에니라의 판단도 다르지 않다. 이미 자신의 아들들이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위협을 느끼던 그녀는 아에곤이 왕이 될 경우 곧장 숙청될 수 있다는 위협을 직감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능한 전쟁을 피하려고 애쓴다. 심지어 녹색파가 왕의 소협의회와 수도를 모두 장악하고, 아에곤을 일방적으로 왕위에 올린 후에도. 그녀는 가급적 평화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지지 세력을 규합한 후 계승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하지만 사절로 떠났던 차남 루케리스가 녹색파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다음 시즌에서 본격화될 흑색파와 녹색파의 전면전을 예고하고 만다. 다혈질인 다에몬의 충동까지 이성적으로 자제시키는 데 성공했던 그녀였지만, 결국 그녀의 이성도 모성애를 통제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중요한 건 모성애가 결국 혈육에 대한 애착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성애는 끝내 라에니라와 알리센트의 발목을 잡는 고질적인 문제다. 모성애는 결국 피로서 이어지는 관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들이 패망하는 근본적인 원인 바로 혈연이기 때문이다.
피에만 의존하는 이들의 사투
라에니라 개인은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왕가의 일원이자 정치인으로서 라에니라는 그렇지 않다. 그녀의 힘은 온전히 피에서 비롯된다. 장녀이자 공인된 후계자라는 명분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왕의 자격은 없다. 칠왕국에서 가장 힘이 강한 가문 중 하나인 발레리온 가문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도 타르가르옌과 발레리온 가문 간의 혈연관계에 기댄 바가 크다. 그녀가 다에몬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던 이유인 '얼음과 불의 노래'도 존재 자체로 핏줄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왕에 걸맞은 통치력, 지도력, 정치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다른 대가문을 포섭할 때도 그녀는 혈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권위로 만들어낸 과거의 맹세를 상기시켜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려 한다. 혼인을 통한 동맹이라는 녹색파의 열매에 비하면 결코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없다.
알리센트도 핏줄에 얽매어 상황에 끌려다닌다. 초반부에는 아버지 오토의 졸에 불과해 보인다. 그녀는 아버지의 명령에 충실한 딸이 되기 위해 아내와 사별한 비세리스 1세에게 접근한다. 한 번도 원한 적은 없지만 왕을 유혹해 왕비가 되고, 끝내 새로운 후계자가 될 왕자들을 낳는다. 알리센트는 왕가의 외척이 되어 자신의 피를 받은 왕을 만들고자 하는 오토의 도구에 불과하다. 또 비세리스 1세가 죽은 뒤 오토의 공작을 저지한 후에도 다르지 않다. 라에니스가 지적했듯이, 그녀는 핏줄 때문에 다시 주도자가 될 기회를 놓친다. 경쟁자를 제거하고 장남인 아에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결국 알리센트는 훌륭한 딸이자 엄마였을지는 몰라도 자신을 둘러싼 외적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라에니라와 알리센트는 '왕좌의 게임'에서 처절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게임의 규칙은 두 개다. 왕좌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또 왕에게서 후계자로 넘어가야 한다. 라에니라는 후자에는 해당되더라도 전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신의 능력이나 힘 대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피의 권위에 의존해 왕좌를 요구한다. 알리센트도 마찬가지다. 아에곤은 전자에는 해당되나 후자의 조건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의 이유만을 앞세워 또 다른 정당성을 확보한 정적을 제거하려 한다. 완전히 다른 판에서 새로운 규칙을 내세워야 할 이들이 누구보다도 혈통이라는 기존 규칙을 따르기에 급급하다. 결국 이 굴레를 끊어내지 못하는 이상 두 여자는 원작대로 대부분의 아이를 잃고 죽거나 죽을 때까지 유폐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내 자신들을 파괴할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마치 그리스 비극을 보는 듯하다.
왕실의 비극을 보여주는 방식 역시 인상적이다. <왕좌의 게임>의 후반부 시즌에서 '하드홈 전투', '서자들의 전투', 바엘로르 대성소 폭파 장면 등을 연출한 바 있는 미겔 서포크닉 수석 감독의 역량이 온전히 발휘된 듯 보인다. 우선 설명이 아닌 묘사에 초점을 맞춘 연출이 두드러진다. <왕좌의 게임>과는 다른 시대적 환경과 인물 및 가문들의 관계를 내레이션 등을 활용해 읊지 않는다. 라에니라, 다에몬, 비세리스 1세에 집중하여 그들의 상호작용 안에서 타르가르옌 가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또 기회가 나면 새 가지를 내어 하이타워 가문과 벨라리온 가문 등 다른 캐릭터들의 서사도 하나하나 덧붙여 간다.
이로 인해 사실 자칫 호흡이 느려지거나 템포가 끊길 수도 있었다. 다만 애초에 왕실의 비극을 다루는 작품이다 보니 시대극다운 웅장함과 결연함, 비극으로 향하는 인물들의 우수를 세밀하게 담는 게 실보다 득이 클 것이라 판단한 듯 보인다. 또 단점을 상쇄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성과를 거두면서 우려는 기우에 그친다. 드래곤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타르가르옌 왕조의 전성기답게 수많은 드래곤이 개성적인 외양을 뽐내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액션 시퀀스나 협상 장면 등 적재적소에 등장하여 순간적으로 극의 흐름을 휘어잡기도 한다. 징검돌 군도 전쟁과 같은 이벤트도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지면서 정치극에 부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 시즌 2는 이미 제작이 확정됐다. 다음 시즌의 과제는 적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다음 시즌에서는 스타크 가문의 크레간 스타크를 비롯한 더 많은 캐릭터, 더 많은 전투 시퀀스와 액션씬이 등장해야 한다. 주인공들의 감정선도 한층 더 복잡해지고 깊어질 예정이다. 하지만 시즌 1의 완성도를 보았을 때,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왕좌의 게임>의 전철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할 수 있다. 시대적 흐름을 담으려는 야심과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한 우수가 뒤섞인 웅장하고 결연한 사극 판타지를 거부할 팬들은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시대적 변화를 담으려는 야심과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한 우수의 만남. 이보다 완벽한 출발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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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바하> 잘 만든 한국형 오컬트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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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사제들> 이후로 꽤 기대되는 장재현 감독의 작품이었다.
오컬트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지 않지만 감독의 디테일들이 매력적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강동원에게만 비친다는 소문의 후광을 못보았다.
사바하에 대한 해석이 굉장히 많다. 그만큼 수용자로에게 많은 걸 던져주고, 인과관계를 엮기 좋은 영화다. 어떤 종교적 상징들은 굳이 수수께끼처럼 풀지 않아도 눈에 보인다.
사바하는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뜻을 같이 하는 진언이다.
불자가 아니어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반야심경>의 마지막 경구도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못지 사바하'로, 무언가를 바라는 간절히 바라는 산스크리트어다.
그렇다면 뭘 바라는지가 중요하겠다.
영화는 종교계 이단을 파헤치고 다니는 박웅재 목사의 설교로 시작한다. 자신들의 믿음을 이단이라 하는 목사를 공격하는 집단도 보인다.
우리나라 종교는 큰 줄기가 몇 개 있다. 거기에서 뻗어나온 잔가지들이 굉장히 많아 해석에 따라 어디까지를 이단으로 볼 것이냐가 달려있다.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자들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았다.
어찌됐든 박 목사는 이단을 찾아다니는 게 돈벌이다.
이번에 파고들어간 '사슴동산'은 불교의 한 종파처럼 보이지만 수상한 냄새가 난다.
강원도 영월에서 의문의 살인사건들이 발생하고 수많은 아이들이 실종된다. 그리고 영월에는 '그것'이라 불리는 아이와 그 때문에 역시 숨어 지내는 금화가 있다.
금화는 16년 동안 감금되어 있는 쌍둥이 언니에게 밥을 준다. 그것이 죽어버렸으면, 그것이 없어졌으면 하며 평범한 일상을 바라는 중학생이다.
크리스마스날 그것의 밥에 농약을 타고 집을 나가려고 하지만, 다시 돌아와 밥그릇을 차버린다. 따뜻한 스웨터도 놓고 간다.
'광목'은 수많은 살인을 사주하고 직접 행하기도 했으나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불안할 때마다 경전에 있는 그 문구들을 외워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건 아주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들었던 자장가.
'그것'은 얄궂은 소리를 내며, 뱀을 보내며, 갖은 수를 써서 그에게 접근하는 이들을 쫓아낸다. 하지만 광목만은 예외다.
광목은 그것에게 다가갔다가 뱀 대신 그것의 손에 발목을 붙잡힌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친 광목은 금화를 납치하여 지금까지 영월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이 죽임을 당한 방식으로, 팥과 부적을 두고 기도한다.
금화는 묻는다. 왜 죽어야 하냐고.
그리고 죽일 거라면 쌍둥이 언니도 같이 죽여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광목은 '그것'을 찾아간다. '그것'은 땅을 파고 파고, 끝없이 파내려가 무언가를 발견한 뒤 자신의 몸을 뒤덮은 털을 깎아내고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부처의 모습으로 그를 기다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광목만을 기다렸다.
"나는 울고 있는 자니라. 너를 기다렸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광목에게 그것은 엄마의 자장가를 들려준다.
미륵이라 불린 김제석. 김제석은 소년 교도소에 있던 네 명의 아이를 양자로 삼는다.
네 명의 아이들은 각자 미륵의 곁에 있는 사천왕이 된다.
1899년생 김제석이 태어난 땅에서 100년 뒤 그의 천적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사천왕들은 1999년생 여자 아이들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김제석을 지킨다.
그러므로 교도소에서 네 명의 남자아이들을 살인병기로 쓰는 동시에, 너희들의 시궁창 같은 삶 또한 구원받으리라, 하고 아이들을 꼬셨을 것이다.
한때 김제석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신이라 불린 사나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선(善)이 타인의 시선을 받을 때 목적없던 선에 목적과 욕망이 생긴다.
남의 손에 피를 묻혀 목적을 이루던 김제석은 시종일관 흰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코끼리와 광목을 총으로 쏜 뒤에는 동물의 털로 된 검은 옷을 입는다.
'그것'이 광목의 발목을 붙잡은 것처럼, 전복된 차에서 광목은 김제석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것'이 건네준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김제석은 불에 타고, 그때 하늘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불꽃이 터진다.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위해 수많은 아이들이 대신 죽어야 했던 슬픈 날이라는 박 목사의 말처럼, 김제석이 신이 되기 위해 수많은 99년생 여자 아이들이 죽어야 했던 날들이 끝났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유신론자에 가깝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화론을 믿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신이 어딘가에 있긴 한 것 같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니, 그 모습이 필시 건강한 백인 남자의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신이 있다면 외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수많은 장면들을 우리는 매일 목격한다.
신이 있다면 세상을 이렇게 두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곳이 신이 만든 지옥이라면 어떨까. 생로병사가 존재하는 이 세계가 지옥의 모습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붓다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고행했다.
니체의 영원회귀와도 비슷하다. 영원히 다시 태어나서 고통받고, 병들고, 죽기를 반복하는 지옥.
<무간도>에서 무간지옥을 죽지도 못하는 지옥이라 한 것처럼. 그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뿐이다.
차라리 이 세계가 지옥이라 생각하면 지옥을 잘 즐길 방법을 찾는 편이 마음 편하겠다.
그보다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다시 안 태어나는 쪽이 좋겠다.
광목은 금화를 죽이려 하기 전에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 말한다. 미륵을 위해 희생했으니 말이다.
김제석은 사천왕의 순교로 신이 되기를 바랐다. '그것'은 김제석을 죽이기를 바랐다. 광목은 믿음에 의지하여 구원받기를 바랐다.
티벳 승려의 예언은 적중했다. 1999년에 태어난 그것은 김제석을 죽일 광목을 기다렸다.
광목은 깨달음을 얻은 불교 성자 나한처럼, 잘못된 믿음이었음을 깨닫고 그것을 대신하여 김제석을 죽인다.
그것 역시 김제석의 죽음과 함께 죽는다.
광목의 본명은 정나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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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삶을 좀먹는다. 외로운 자는 잘못된 믿음에 빠지기도 쉽다.
어떤 악인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한다. 우리는 나약하고, 지옥(같은 곳)에서 매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곳에 이유도 모른 채 내던져졌다.
나는 지옥의 수많은 미끼들ㅡ삶을 더 지옥으로 만들어주는ㅡ에 쉽게 중독되어 무지몽매해지기 일쑤이지만, 어쨌든 깨어있어야 한다.
무엇을 바랄 것인가.
신이 되기를, 영원히 죽지 않기를, 부자가 되기를, 사랑받기를, 신은 우리의 바람들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끝무렵 박 목사의 내레이션이 인상 깊었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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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짝 맛만 보여준, 그래서 다음이 기대되는 영웅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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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e, 모래 사막이라는 뜻이다. 푸릇푸릇한 생명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듄, 아라키스는 그 곳의 원주민인 프레멘들에게는 생존해야만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다른 민족들에게서 지켜내야만 하는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라키스는 다른 민족들의 정복 전쟁의 중심에 서있는데, 그 이유는 아라키스에 우주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물질인 신성한 환각제 스파이스가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라키스의 새로운 주인, 아트레이디스의 후계자인 폴은 자신이 보는 것이 그저 꿈인지 아님 미래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예지 능력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자신이 이른바 선택된 자, 메시야라는 예언을 듣는다. 과연, 혼란 속에서도 그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아라키스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는 아트레이더스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1. sf영화에 투영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
이 영화는 시간적 배경이 10191년이고, 공간적인 배경은 범우주인 만큼 외계의 존재들이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주인공인 폴도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외계인이다. 하지만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간 관계에서 비롯된 여러 사건들은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막을 두고 정복 전쟁을 하면서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는 모습, 전쟁을 치르느라 자연의 섭리는 그저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탐욕, 큰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집단과 동맹을 맺는 모습, 이 모습은 인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해, 이 영화의 거시적 메시지를 담은 대사가 있다면, 어찌할 수 없는 모래바람을 컨트롤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자연을 컨트롤해 인간의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간들의 욕심을 꼬집은 듯한 대사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협조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 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기술의 발전으로 밀어붙여 무시하는 현생의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메시지로 보여진다. 결국, 배경만 sf일 뿐이지, 이 영화는 인간의 세력 다툼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탐욕적인 모습, 그 과정에서 무시되는 자연에 대해 수려한 비주얼적 배경으로 자연은 결코 무시당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설명하는, 생태주의적 관점도 엿보이는 영화라고 보면 될 것 같다.
2. 두려움을 극복하는 폴에게서 나의 두려움을 보다
폴은 아트레이디스의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선택받은 자로 자신이꾸는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예언이라는 말을 듣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선택받은 자로서 미래에 있을 정복 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의 미래를 보고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지게된다. 그가 두려움에 빠질 때마다 나오는 대사,
두려워하지말라, 두려움은 정신을 죽이고 , 세계를 소멸시키는 작은 죽음이다
이 대사가 이 대서사시의 파트 1을 관통하는 대주제이다. 선택받은 자로 태어나고, 알게 모르게 트레이닝 받아왔지만 그는 아직 자신의 능력도 제대로 모르고, 실전에 내던져진 경험이 없었기에 나약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나약함은 곧 자신이 짊어질 책임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전하는데, 이 두려움을 극복해내어 생존 전사로 성장을 하는 것이 이 파트 1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모습에서 난 내 자신이 계속 투영되는 걸까. 시간적배경, 공간적 배경 모두 낯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를 들으면, 누군가 나에게 힘내라고 외쳐주는 것 같아서 묘하게 위로가 되고, 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내 모습이 보이는 폴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 인물이 생존 퀘스트를 하나씩 깨어갈때마다 내 자신감까지 올라가게 되어, 이 인물을 계속 응원하게 된다.
3. 총평
영화는 우선 스케일이 크고, 내용도 미완성 상태의 주인공의 각성을 담은 대서사시의 극히 일부만 본 것이라 긴 호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지점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영화의 집중도가 올라가 지루하다고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폴이 꿈인지 예지인지 모를 이미지를 볼때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슬로우가 걸린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음악이 주는 사운드 임팩트가 영화를 집중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막에 내던져졌을 때에는 더이상 첨단 기술로 무장한 외계인이 아닌, 그저 생존에 목마른 피난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막벌레에게 쫓기고, 하코넨 일당에게서 쫓기는 장면 등에서 충분히 속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의 속도감이 느려졌다 빨라졌다가 반복되니, 2시간반의 러닝타임이 걱정한 것 보단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폴이 나약함에 벗어나 위대한 자가 되는 과정에서 프레멘과 어떤 관계를 구축할지 파트2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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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을 끝까지 속이는 스릴러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에겐 일상의 환기의 영역이 크다. 영화를 보면서, 쉬거나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는 게 영화를 관람할 때 첫 번째 포인트이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봐야 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 선택이 되었다. 아름다운 것만 봐도 모자란 시간에 두려움에 떨거나, 피가 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소 확고한 영화 취향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두 번 용기를 내어 보게 만드는 건, 잘 만들었다고 소문난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다. 불안하고 긴장이 되어 조마조마한 기분을 계속 느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촘촘하게 설계된 이야기 구조의 놀라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장르니까. 세상에 천재가 많구나 하는 감탄과 동시에 뇌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어 다른 의미로의 일상의 환기가 된다.
이 감독 천재인가? 이 작가 천재인가? 리스트는 한 둘이 아니지만, 나에게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장르의 매력에 눈 뜨게 해준 영화는 <인비저블 게스트>이다 (이상하게도 넷플릭스에만 ‘세 번째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있다.)성공적인 사업가 아드리안은 누군가의 지시로 호텔에서 내연녀 로라와 만난다. 의문의 습격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로라는 죽어 있고, 들이 닥친 경찰에 체포된다. 밀실살인사건이니 만큼 아드리안은 유력한 용의자가 되고 만다. 한번도 패소 해 본적이 없다는 변호사 버지니아를 선임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하고, 검찰 측 증인이 나타나 3시간 후면 아드리안이 법정으로 소환될 상황이 되어, 그 시간안에 사건을 재구성하기로 한다.
인비저블 게스트는 한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다른 사건들이 연관되어 나타나며 이를 엮어서 이야기진행시키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런 구조 자체는 특별히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추측할 만한 등장인물은 그리 많지 않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는 이야기의 흐름이 관객들에게 혼란을 주며 제한된 인물들 가운데, 범인을 추리 하도록, 그리고 진실에 대해 궁금증을 일으키도록 끝까지 끌고 가도록 하는 힘이 좋았다.
매력적인 스페인어와, 으슬으슬한 겨울 공기 마저도 이 영화의 조연처럼 느껴지는 연출, 긴장된 공기 속에 강렬한 눈빛과 카리스마 있는 말투로 같은 사건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결말이다. 범인은 바로 너 ! 추리 꽤나 한다는 나도, 함께 본 지인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을 향해 달려 간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영화속의 많은 장면들이 다시 플래시백으로 관객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뒤늦게 아 –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영화.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 추리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지 끝까지 보길. 그리고 이 결말을 맞춘 천재가 있다면, 널리 널리 자랑하길. 마음을 다해 감탄하고 부러워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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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애프터썬' 리뷰
어린 시절의 질문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그때의 나는 아빠한테 무슨 질문을 하던 아이였을까? 하늘은 왜 파랗냐, 롤러코스터는 언제부터 탈 수 있냐 내지는 이런 질문도 해본 적 있겠지. 아이는 어떻게 생겨요? 같은 짓궂은 질문들. 나는 어른들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은 알아서 자제하던 눈치 빠른 아이였을까? 아니면 그런 질문들만 골라서 물어보는 개구쟁이였을까? 아이와 어른의 관계는 무엇하나 선명하지가 않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질 때도 있고, 질문이 없는데 정답이 나올 때도 있는 법이다. 완성하지 못한 문답들이 넘쳐나는 관계는 명확할 수가 없다. 흐린 눈으로 봐야만 한다. 빠르게 철들어 시간을 건너뛴 아이에게서는 애잔함이 남아있다. 일찍 크면 그때의 질문들이 몸과 마음속에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흐린 눈으로 보아왔던 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진짜로 눈이 흐렸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땐 일부러 안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뿌옇게 하고 지냈다. (당연하게도) 엄마는 항상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뿌옇게 있으면 앞이 보이느냐고. '보이니까 이러고 다니지.' 대충 이런 대답을 했다. 한숨을 쉬면서도 엄마는 꼬박꼬박 주방세제로 안경을 닦아줬다. 그러면 안경이 좀 더 오래 선명했다. 수경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은 그렇게 닦는 게 싫었는데 이상하게도 수경은 세제로 하는 게 좋았다. 물속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을 싫어했다. 바닷가를 가서 바다수영을 할 때도 수경은 꼭 챙겨서 갔다. 언제부턴가 안경은 잔기스도 덜 났다. 긁히거나 상하는 일 없이 점점 두꺼워져 갔다. 그러면서 일부러 안경알을 문지르는 일은 그만두게 되었다. 안경이 선명해져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대충 그때부터 무릎도 덜 까지기 시작했다.
딸 소피와 아빠 캘럼은 튀르키예로 여행을 왔다. 캘럼은 소피와 함께 이곳저곳 휘적휘적 돌아다닌다. 방학에 잠깐 시간을 낸 여행인지라 마냥 자유스럽지는 않다. 패키지 여행이기도 하고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돈을 쓰는 데 눈치도 보인다. 캘럼이 애써 감추려는 모습들은 티가 난다. 애써 '감추려'해서가 아니라 '애써' 감추려 해서 티가 난다. 행동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노력하고 있어서 보인다. 사춘기 소녀는 그 짧은 여행 기간 동안에도 자라난다. 의도치 않은 무심함과 조숙한 배려심이 부딪힌다. 두 세계는 충돌하면서 부서지고 충돌의 여파로 기억은 흐릿해진다. 단편적인 사실들은 먼지 구름이 되어 주관을 뒤덮는다. 기억을 반추하는 과정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리는 것들은 이제야 보이는 아빠의 이야기다.
캘럼은 잘 들어가지 않는 잠수복을 억지로 입기 위해서 몸을 구겨 넣는다. 요령이 없던 그는 청년의 도움을 받고 옷을 입는다. 계절마다 여행을 떠나던 청년은 아기와 함께 고향에 머무르게 되었다. 40살의 자신이 상상하기 어렵다는 청년을 보면서 캘럼은 몸을 구기느라 가쁜 숨을 몰아 내쉰다. 기나긴 한숨을 푸른 바다에 흘러 보낸다. 아빠는 차분하게 가라앉고 딸은 솟아오른다. 푸르른 대자연 속에서 캘럼은 꾸준하게 운동을 한다. 수련보다는 수양의 형태이다. 호텔방 TV 옆에는 태극권 비디오가 놓여있다. 명상과 태극권, 어린 소피는 아빠를 캠코더로 촬영하고 영상을 본다. 녹화하지 않은 채로 아빠에게 묻는다. '11살 때 아빠는 뭘 했나요.' 그리고, 이윽고 아빠의 대답이 이어진다.
다 큰 소피는 기억을 되짚어 아빠를 상상한다. 이제는 아빠의 상태를 대신 답할 수 있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비슷한 상황이었겠거니 넘겨짚으면서 답을 고민한다. 마음속에만 넣어두고 있던 감상을 끄집어 올린다. 추억하는 일이 어려운 건 묵혀두었던 감정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주로 좋은 감정보다는 싫고 슬펐던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추억은 언제나 즐거운 행위이기 마련이다. 오랜 친구들을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과거의 특정 시점과 사건들에 고정되어 있는 걸 떠올리면 명확하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상황을 판단하기엔 지나치게 함축적이거나 암시적이다. 상상과 추리의 영역에서 해석하면 영화는 더없이 무거워진다. 나풀나풀한 한여름에도 세계는 절망스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그렇지마는 여름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공평하니까. 추울 때는 껴입어야 하는데 더울 때는 벗으면 되니까. 여름은 돈이 많건 적건 티가 덜 난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니 그나마 여름이 낫다. 공평하게 견디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궁핍한 건 마음으로 족하다. 캘럼은 열심히 소피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준다. 소피도 아빠에게 선크림을 발라준다. 소피는 아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소피는 의젓한 아이다. 아니, 세상에 선크림 바르는 걸 좋아하는 아이가 어디 있나. 끈적끈적한 피부는 다들 싫어한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건 소피가 충분히 아빠의 처지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다. 눈으로 보이는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게 아니다. 선크림처럼 그냥 스며들기를 바라는 거다. 덜 따갑고 덜 아프게끔. 두 사람은 서로를 정성껏 발라준다. 그저 여름을 견뎌내기 위한 손길이다. 그러니 이미 탄 피부에도 발라야 한다.
그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던 질문과 대답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는 시점이 온다. 명확하지 않은 문답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다 이해하진 못해도 사랑의 흔적이었다는 건 알 수 있다. 사랑은 정확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흐린 눈으로도 볼 수 있다.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어른이 되면서 어릴 때의 질문은 잃어버렸는데, 어렴풋하게나마 답은 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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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름끼치는 결말까지 시즌1 34분 만에 몰아보기 결말해석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지옥 결말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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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파이더헤드> 공식 예고편
뛰어난 과학자(크리스 헴스워스)가 운영하는 최첨단 교도소. 이곳에서는 재소자들을 상대로 감정을 조절하는 신약 임상 실험이 이루어지는데. 실험에 자원한 두 재소자(마일스 텔러 & 저니 스몰렛)가 각자의 과거와 싸우며 연대를 맺는다. 조지프 코신스키(《탑건: 매버릭》 《트론: 새로운 시작》) 연출. 《뉴요커》에 실린 조지 손더스의 단편 《Escape From Spiderhead》에 바탕을 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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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가 끝이야> 메인 예고편
전 세계가 주목한 용기 있는 선택 로튼토마토 팝콘지수 92%🍅 북미 박스오피스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