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4-09-06 13:49:00
선자의 역사는 '모두'의 이야기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서도 '파친코'에 열광하는 이유
이민진 작가가 집필한 동명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한 애플TV+ '파친코'는 공개된 뒤, 국내에서 많은 이목을 끌었다. 그동안 한국 근현대사 중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다룬 국내 미디어물은 많았으나, 국외 제작진과 글로벌 OTT 플랫폼(애플TV+) 속에서 한국(+한국계) 배우들이 중심으로 담아냈던 사례는 '파친코' 이전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시즌 1에만 무려 1000억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를 투입한 '파친코'는 공개되자마자 단번에 화두로 떠올랐다. 3월 25일 유튜브로 공개된 1회는 조회 수 천만 뷰를 가뿐히 넘어섰고, 4년 전에 한국어 버전으로 발간된 원작 소설은 절판을 앞두고 역주행하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한국서 접할 수 있는 OTT 중에선 후발 주자 격인 애플TV+ '파친코'로 틈새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파친코'를 향한 인기와 호평은 한국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해외 주요 매체들은 '파친코'의 수준 높은 연출력과 서사, 연기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로튼 토마토 신선지수 98%, 메타크리틱 점수 87점을 기록하는 등 작품성을 검증받았다. 이에 힘입어 애플TV+ 측은 '파친코' 시즌 2로 확장했다.
'파친코'가 화제의 콘텐츠로 떠오르면서 자연스레 제작 비하인드도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다. 4대에 걸쳐 80년간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의 삶을 다룬 '파친코'에 영화/드라마 제작에 손을 내민 곳은 애플TV+ 이외에도 많았다.
그러나 원작자 이민진 작가는 다른 러브콜을 거절하고, 애플TV+와 계약을 맺었다. 제일교포인 주인공을 다른 인종(백인)으로 바꾸자고 제안한 다른 곳들과 달리, 유일하게 애플TV+만 이 작가의 요구사항에 따라 원작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최근 '킹덤', '기생충', '미나리' 등 웰메이드 작품들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아시아인의 위상이 예전과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국을 포함한 서양 주류사회는 의도적으로 아시아인을 배척해왔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시아인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선자(김민하/윤여정)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을 백인으로 설정하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단순히 백인으로 각색해야 무조건 돈벌이가 되고 먹힌다는 의미로 접근한 건 아닌 것 같다. 한국의 아픈 근현대사부터 1980년대가 주요 시대적 배경인 '파친코' 속에서 다른 문화권에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쉽게 드러났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선자의 남편 백이삭(노상현)과 그의 형 백요셉(한준우)부터 선자의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소지 아라이), 그리고 선자의 손자이자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진하)까지 성경에 언급된 핵심 인물들의 이름을 차용했다. 그렇다, '파친코'는 기독교 코드를 한국 근현대사에 녹여낸 것이다. 원작자인 이민진 작가 또한 성경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파친코' 속에 기독교적 메타포가 눈에 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면서 점점 조선인들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1910년대, 선자의 모친 양진(정인지)은 선자가 태어나기 전 무속인을 찾아간다. 당시 태어난 아이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 이때 무속인은 "아가 생길 기다. 이 아는 살려 주실 기다. 꼭 살아가 대를 잇고 손을 이을 기다"라고 말을 건네는데, 이 장면은 성경의 누가복음 1장을 떠올리게 한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누가복음 1장 31절~33절-
다시 첫 회 도입부를 장식한 양진과 무속인의 대화 장면으로 돌아가면, 이 장면 구성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와 닮아있다. 언뜻 샤머니즘으로 아이가 점지되길 비는 것처럼 보이나, 기독교적인 메타포가 깔려 있는 셈이다. 동시에 양진은 신으로부터 아이를 선물 받은 성모 마리아, 예언된 아이 선자는 신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하는 '선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점으로 '파친코'의 메인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선자네 가족 4대는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을 넘어 행적도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다. 한 예로 한수(이민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선자는 죽을 뻔한 이삭을 살린 뒤, 그와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종교를 기반 삼은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이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보를 떠올리게 만든다.
동시에 이삭은 소설에서 호세아의 삶을 살겠노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구해준 선자를 정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준다. 세속적인 면을 버리고 종교적인 용서와 믿음을 실천하는 것까지 호세아가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
선자와 이삭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모자수(모세)와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그렇다. 고대 히브리인을 이집트로부터 독립하게 만든 모세처럼 조선인들을 일본에서 탈출시키진 못했으나, 파친코로 부를 축적한 자이니치들을 대변하는 인물 격으로 등장한다. 모세가 당시 고대 히브리인을 대표하는 리더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성쇠를 동시에 맛봤던 솔로몬을 닮아, 백솔로몬은 1989년 최절정을 찍었다가 버블경제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을 살았던 인물을 대변한다. 또 그가 유학생활을 했던 미국은 그 시기에 중산층이 몰락하던 시기를 맞이했다. 그 격동기를 경험한 세대들이 솔로몬으로 압축된 셈.
드라마로 제작돼 한국에서 관심받기 전, 소설 '파친코'는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까지 진출했다. 이는 이민진 작가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미국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성경과 이민의 역사를 적절하게 녹여내 큰 공감대를 형성한 공이 컸다.
특히 한국인 이름을 가지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선자는 한국과 기독교 가정을 연결 짓는 인물인데, 이는 미국인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이덴티티(기독교, 원주민, 뿌리를 중시, 이민자 출신)에 모두 부합하고 있다.
이어 선자와 이삭 부부가 종교 때문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설정은 17세기 기독교 원리주의 목적 하나만으로 영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대륙에 발을 디딘 청교도들, 그들의 후예가 건국한 미국의 건국사와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여기에 선자 가족을 포함해 나라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들에게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수난기는 구약성경 내용과 같은 결을 띤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더럽다고 여긴 자이니치들이 꿋꿋이 버텨내며 뿌리를 내리는 건 고난과 역경을 거쳐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후예들을 암시한다. 이러니 한국 근현대사를 따르지 않고, 서양인으로 각색하려는 제안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결국 '파친코'가 한국을 넘어 다른 문화권에서도 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한국인들과 재일 교포 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아픈 역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일어났던 역사와 사건 등이 여러모로 겹쳐 보였던 것이다.
그 지점을 이민진 작가가 영리하게 성경을 차용해 '파친코'의 서사 속에 녹여낸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살았던 당시, 재일교포들이 겪는 차별을 고발하고 싶었고, 이것이 '파친코'의 출발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문제를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이해하고 공유해 같이 분노하기 위해 다른 문화권 코드를 잘 융합시킨 셈이다. '파친코'를 읽는 모든 이들이 한국의 역사와 재일교포에 과몰입시키고 싶었던 그의 목적은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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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의 방아쇠를 당기기까지의 여정
복수극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시원하고 짜릿한 맛이 일반적이겠지만, 영화 '리볼버'는 다소 다른 결을 띤다. "탕!" 복수의 총알을 한 방 발사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다양한 구성을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리볼버'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갔던 전직 경찰 하수영(전도연)이 출소 후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직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무뢰한'에서 호흡을 맞췄던 오승욱 감독과 배우 전도연이 약 10년 만에 재회해 눈길을 끈다.
영화 제목만 보면 마치 총기 액션이 난무할 것 같은 복수극을 떠올리게 되고, 실제로 하수영에게 리볼버 권총이 쥐어지면서 '언젠가 저 총으로 누군가를 겨냥해 발사할 것이다'는 예상과 함께 긴장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보기 좋게 다른 노선을 보여준다.
교도소에 가는 조건으로 돈 7억과 서울 아파트를 약속받았지만, 출소 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하수영은 연관된 이들을 차례대로 만나며 정보를 수집한다. 정윤선(임지연), 조 사장(정만식), 앤디(지창욱), 신동호(김준한), 본부장(김종수) 등이 정보를 흘리고 이를 추적해 나가는데, 매우 저속으로 나아간다. 이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로드무비처럼 다가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하수영이 되찾기 위해 나선 7억과 서울 아파트는 본부장 말마따나 하수영이 목숨을 걸기엔 '그렇게 큰돈도 아니지만, 무시할 만큼 작은 돈도 아닌 것'처럼 표현된다. 돈 찾기보다도 하수영, 그리고 그와 얽혀있는 주변 인물들의 감정선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이들은 하수영과 접촉한 이후 미묘하게 관계성이 달라져 균열을 만들어낸다. 각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진 않지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장면 곳곳에 던져주며 아슬아슬한 심리전의 재미를 만든다.
후반부에 모든 캐릭터가 한 장소에 모여 갈등이 본격 발화되면서 재미가 극대화된다. 여기에 조금씩 비튼 대사와 캐릭터성이 의외의 웃음보를 자극하기도 한다. 진득하기만 했던 '리볼버'가 막판에 가면서 다양한 매력을 분출한다.
'리볼버'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무뢰한'에 이어 영리하게 전도연을 활용하는 오승욱 감독의 '전도연 활용법'이다. 2년 전 하수영을 통해 파랑과 레드가 섞인 보라, 청색과 녹색이 모호한 청록 등 도드라지는 컬러로 부각했다면, 출소 후에는 어두운 의상을 입고 마른 수건처럼 생기를 잃은 무표정의 마른 얼굴을 보여준다. 코 앞에서 휘두르는 야구 배트에도 흔들림 없는 초점 잃은 눈빛과 함께 무조건 전진한다. 전도연의 새로운 얼굴이다.
그러면서 투샷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하수영과 '무뢰한'의 김혜경(전도연)을 연상케 하는 정마담의 묘한 워맨스(?), 온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하수영과 임석용(이정재), 진짜 관계가 무엇인지 감이 오질 않는 투자 회사 대표 그레이스(전혜진)와 앤디 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 영화는 연기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하면서 아우라를 뿜어낸다. 이들이 있어서 '리볼버'의 흡입력을 더욱 끌어올리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건 지창욱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간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지질함을 장착하며 새 얼굴로 갈아 끼우는 데 성공했다.
다만, 다른 텐트폴 영화들에 비해 '리볼버'가 관객들의 관심까지 명중하기엔 장르나 분위기가 선택받기엔 쉽지 않다. '크로스' 대신에 여름 대전에 내놓은 배급사의 의도를 알겠지만, 모든 관객들을 사로잡기엔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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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바이든의 대선 승리를 자축하는 할리우드!!!
- 조 바이든의 대선 승리를 자축하는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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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집 남편 괜찮다!
결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 이미지들은 아마도 성장과정에 가정에서 보고 배운 바를 떠올릴 가능성이 크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첫문장은 아직까지도 명문장으로 손꼽힌다.
톨스토이가 이 책을 쓰던 1800년대에도, 지금까지도 수많은 가정이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기 때문이다.
현세대의 결혼기피현상을 집값으로 뭉뚱그려 보는 사람이 많다. 정말 돈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걸까?
남성의 입장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동물들도 수컷이 둥지도 없이 암컷에게 구애하지는 않을 테니까.
반면 여성의 경우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결혼적령기 여성들은 부조리한 가정 상황을 목도하며 자라왔고, 그것이 내 일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비혼을 말한다.
나도 그런 쪽이다.
이를테면 맞벌이를 하지만 요리청소빨래 집안대소사 모든 것을 감당하는 엄마와, 새벽 5시에 엄마가 일어나서 차려준 밥을 먹고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엄마가 차린 저녁 먹고 TV에 나오는 외화를 보다가 술 한잔 하고 자는 아빠. 그걸 다 치우고 녹초가 되어 잠든 엄마.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느라 집에 안 오는 아빠. 친구도 없는 엄마. 그리하여 온몸의 관절에 관절염이 왔으나 아직도 일하는 엄마와 단지 술로 인해 병든 것 외엔 건강한 아빠.
나는 결코 엄마의 삶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구한 차별의 역사쯤이야 일이 년만에도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악습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전복시켜버린 여자가 있다. 이름은 박강아름.
#역할전복
박강아름은 진보당 활동을 하던 정성만을 만나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먼저 결혼하자고 하고, 공부를 해야겠으니 프랑스로 가자고 제안한다.
이미 결혼을 해버렸으니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비혼주의자였던 정성만은 한국에서 요리보조로 일하며 소설을 쓰던 사람이었다.
박강아름과 달리 프랑스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박강아름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를 낳았다.
프랑스에서의 출산과정은 지난했다.
커뮤니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도와줄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박강아름은 모든 걸 감내한다. 어차피 아이를 낳는 건 본인 몫이니까.
그렇다. 아이를 낳는 건 여자의 몫이다.
토하고, 쓰러지고, 입원하고, 뼈와 근육이 제멋대로 놀고, 출산 후 손목 통증이 가시질 않고. 젖을 물리는 내내 젖꼭지에 피가 난다.
그러므로 출산에 관한 선택은 여자의 것이어야 한다.
정성만은 무엇을 하는가 하니, 살림을 한다.
박강아름의 표현에 따르면 '독박살림 독박육아'다.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아이를 돌보고, 놀아주는 모든 역할을 정성만이 한다.
박강아름이 학교에 다니고 작업을 하는 동안 정성만은 박강아름의 보조, 정성만의 표현에 따르면 '식모'다.
어디서 많이 본 시나리오가 아닌가.
남편을 따라 연고도 없는 곳에 가서 아이를 낳고, 밥을 짓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고, 놀아주고, '식모' 같다고 느끼는 삶.
가부장제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요새 맞벌이 안 하는 여자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돈도 벌고, 애도 키우고, 집안일도 하고. 결혼 전과 돈 버는 건 같은데 노동의 양은 몇 배로 증가한다.
또는 수 년간 쌓아온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내, 엄마로서 기능해야만 한다.
그러려고 공부하고 일한 건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 사람들은 웃는다.
성만이 살림할 때, 본인을 '식모'라고 부를 때, 살림의 고달픔을 토로할 때, 혼자 김장을 하면서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에게 말을 걸 때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과연 그 반대였더라면 웃음 포인트가 되었을까?
그저 일상적인 풍경을 보면서 웃기는 쉽지 않다.
나는 재능있는 여자들이 예술가 남편을 뒷바라지 하느라 재능을 갖다 버리는 걸 수도 없이 보고 듣고 겪었다.
#외길식당
이들 부부는 프랑스에 와서 자아가 없어진 성만을 위해 가정집 원테이블 식당을 열기로 한다.
원래도 요리를 잘했던 터라, 성만은 내심 기뻐 보인다.
부부의 식당에는 가난한 유학생, 집밥을 그리워 하는 유학생들이 찾아온다.
그릇을 사고, 좋은 재료를 고르는 성만의 표정이 밝다.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는 사람은 고립되기 마련이다.
성만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름 뿐.
뜨겁게 사랑하다 보면 세상에 너랑 나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없을 거라고 말하게 되지만, 실제로 세상에 단둘이 남겨지면 미쳐버릴지 모른다.
고립되어 가던 성만은 외길식당을 차린 후에, 한식부터 일식, 중식, 양식까지 뚝딱 만들어내며 자신의 쓸모를 다 한다.
하지만 집안 살림에 식당 영업까지, 아름은 작업에다 손님 대응까지 하려니 힘에 부친다.
결국 외길식당은 문을 닫고, 이사를 몇 번 다닌 후에야 다시 문을 연다.
이유는 역시나 그들의 고립 때문이다. 고립된 채 서로에게만 의지하는 부부에게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넌 이런 부분이 이기적이야, 너는 늘 이기적이야. 그래서 아름은 다른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외길식당2에 다녀간 여러 형태의 커플들 역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고민들을 안고 산다.
결국 아름은 외길식당2에서도 답을 얻지 못한다.
#덩케르크
누릴 수 있는 사치라고는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것이 전부인 그들.
아름은 영화제작 기금을 받으러 다니느라 바쁘다.
그런 그들도 여행이라는 걸 떠난다.
덩케르크 해변으로 가는 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성만은 왜 비오는 날 바다에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아름은 바다에서 찍고 싶기 때문에 가는 거라고 한다.
이들 부부의 주도권은 대부분 아름에게 있다.
성만은 투덜대지만 어쨌든 간다.
해변에 도착하자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날은 잔뜩 흐려 옥빛 바다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
모래사장으로 유모차가 들어가지도 않는다. 결국 성만이 앞에서 지고, 아름이 뒤에서 들고 바다 앞까지 간다.
덩케르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에서는 전쟁 상황과 대비하여 바다가 너무 예뻤다.
영화관에 앉아서도 그 대사를 떠올렸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조국(Home)."
<덩케르크>를 볼 때도 그 부분에서 속으로 으악... 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던 기억이 난다.
덩케르크 씬은 마치 조국 그 자체, 프랑스에 있어도 부부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성만 같은 남편이 있다면 한번쯤 결혼을 해봄직도 하다.
어쩌면, 행복한 가정의 서로 닮았은 모습이 박강아름과 정성만, 정보리강 가족에게서 보였던 것 같다.
*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박강아름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보니, 한편으로는 홈비디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애니메이션과 가수 이랑의 노래가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서두에서 박강아름 감독은 개인의 이야기가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옥랑문화상 수상 및 국내외의 여러 영화제에 초청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로 개인의 이야기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2020년 한 작가의 오토픽션(자전적 소설)이 문단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카톡으로 나눈 대화의 전문을 작품에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
조근식 감독이 <품행제로>를 촬영할 때 1980년대 본인이 살았던 동네의 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작품이 되느냐, 한 개인의 일기장이 되느냐는 개인적 관점이 전체를 관통할 때가 아닐까.
처음에는 '도대체 이건 뭘까' 싶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는 이런 관점과 용기와 행동력을 가진 여성들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작에서도 이미 여성의 몸에 관해 할 수 있는 말들을 다 했던 감독이다.
이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보고 듣기 쉽지 않았던 여성의 자궁과 질, 출산과 모유수유, 예쁘게 꾸미지 않은 여성의 몸을 여성이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직면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와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현 시점에서 박강아름 감독은 응당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는 남자 주인공 다미앵은 어느날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성중심사회로 간 이야기다.
물론 이 영화는 픽션이다.
그러나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리얼리티다.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 시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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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노동에 영화라는 즐거움을 잊을 수 없어서
※영화 〈내일의 기억〉, 〈더 파더〉, 〈노매드랜드〉,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이라고. 하지만 달리 보자면 또 그만큼 즐거운 외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 플랫폼에 적을 둔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독을 즐길 줄 알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생각만 쌓아 둔 채 글쓰기를 제쳐두었다. 그게 본심이 아니라면 나는 단지 외로운 노동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가 뭐라고 한 적 없어도 글을 쓰기 위해 앉아있는 거라면, 분명 나는 그 즐겁고도 외로운 감정이 그리웠던 것이다. 본 영화는 늘어만 가고 쓰고 싶은 글은 산더미다.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이 코앞으로 다가온지라 마음만 급하다. 이건 그간 봤던 영화들을 짧게 정리한, 말하자면 습작이나 초고와 비슷한 글이다. 아마 여기서 곧 발전할 글들이 생기리라 확신한다.
1. 내일의 기억 Recalled | 2021 | 서유민 | 99분
기시감, 흔히 ‘데자뷔 Déjà Vu’ 로 불리는 이 현상은 프랑스어로 "이미 본” 이란 뜻으로 최초의 경험을 마치 이전에 봤다고 느끼는 착각을 말한다. 처음 온 장소가 과거에 와 본 것처럼 익숙하고 방금 한 행동이 예전의 기억과 어렴풋이 일치하는 순간은 누구의 일상이든 찾아온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든 큰 사고를 당해 이제야 의식을 찾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누구든 그 진위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기억을 잃은 수진이 단란한 가정에서 겪는 기이한 데자뷔로부터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관객을 집중시키는 스릴러의 장르적 쾌감과 조각난 기억을 함께 맞춰가는 추리의 맛이랄까. 이미 여러 영화에서 써먹은 소재와 구상에도 이 정도 재미를 뽑아내는 감독의 역량은 눈길을 끈다.
그런데도 플롯을 영화가 쫓아가지 못한다는 기분을 받는다. 실마리를 풀어가는 흥미로운 아이디어와 무의식의 깊이를 구현한 수직적 이미지가 툭툭 끊기는 영화의 편집을 만난다면 관객은 수진과 함께 혼란에 빠지고 만다. 모든 감독은 비장한 각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구현한다. 물론 그게 영화의 만듦새와 함께 가는 경우는 드물다. 이제는 ‘한국적 신파’에 치가 떨린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간의 경험에 크게 덴 나머지 나름의 인장으로 넘길 수 있는 장면도 과민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결말의 신파적 요소가 굳이 거슬린다면 〈해운대〉의 신파를 되새겨보며 이 정도면 영화적 기능으로 인정해 줬으면 한다. 만약 누군가가 등장 배우의 논란으로 영화도 보지 않은 채 덮어놓고 비판을 하고 싶다면 성인 수준의 상식에 미치지 못한 판단으로 드라마 전체를 망가뜨린 인물과, 이를 덮을 만큼 가십과 의혹만으로도 매장의 위기를 받는 인물 중 누가 현재의 가시적 해악에 더 가까운가를 생각해 보자.
2. 더 파더 The Father | 2020 | 플로리앙 젤러 | 97분
〈리어왕〉에서는 권력의 소용돌이에 비극적 선택의 첨병이 된 아버지로, 〈두 교황〉에서는 종교적 상징이자 시대와 평화의 ‘아버지’로 자신의 존재를 질문하고 토론하며 결국 내게 주어진 자리의 무게를 깨닫는 인물이 된다. 심지어 〈토르〉에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의 기원이자 두 슈퍼히어로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안소니 홉킨스’에게 〈더 파더〉만큼 노골적으로 현대의 아버지를 연기하는 것이란 어쩌면 심심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탄탄한 각본을 여전히 놀라운 연기로 끌어가는 80대의 배우가 보여주는 진가는 그 모든 아버지의 모습이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에서 조금씩 드러나도록 완급조절을 한다는 사실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의 눈에 이 세상은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다. 시공간의 왜곡과 변주는 원작인 연극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였기에 가능했던 탁월한 지점이다. 내 눈앞의 무엇인가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내가 알던 세계가 의심받는 상황만큼 공포를 자아내는 것도 없다. 돌이킬 수 없어 더 안타까운 진실에 이해하려 애쓰는 안소니의 모습은 숙연하며 시종일관 놀랍다. 극적인 감정의 파고를 홀로 묘사하는 장면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화의 제목이 ‘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인 이유는, 그를 지켜보는 딸 ‘앤’이 바라보는 시선이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달라지는 아버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딸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먼’의 연기 또한 눈을 뗄 수 없다. 어떤 감정이든 금세 관객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능력은 미묘한 표정과 눈빛이 대답해주고 있다. 결국 모두의 삶을 위해 내리는 어떤 선택의 장면에 보이는 처연함과 머뭇거림, 슬픔과 확신이 뒤섞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뇌와 우주는 놀랄 만큼 비슷한 구조와 패턴을 보여준다고 한다. 달리 ‘소우주’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우주 宇宙라는 단어에는 ‘집’이 두 번이나 들어간다. 영화 속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주인공인 안소니의 집은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집과 실제 물리적 공간인 집이 교차하고 어긋나며 공포와 혼란을 극대화한다. 뇌라는 우주가 사라지는 동안 나를 지탱하고 보호했던 집 역시 희미해져만 간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막막함이란 우주 공간에 홀로 남겨진 안소니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불가역적 소멸의 정서와 조응한다.
3. 노매드랜드 Nomadland | 2020 | 클로이 자오 | 108분
올해 보았던 영화 중 최고를 꼽자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금융위기 이후 집과 일터,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펀’은 밴 하나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을 유랑한다. 동명의 원작이 사회 현상을 포착하고 기록한 르포라면 영화는 책에 담긴 여러 인물을 펀이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입해 미국의 역사와 사회를 헤쳐가는 유목민들,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과 삶, 영화의 근원에 관해 화두를 던진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클로이 자오 감독은 집을 소거한 삶의 공백에 우리가 놓거나 놓지 않는 것들을 찾아가는 한 인간으로 대답한다. 제작에 참여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직접 출연한 영화 속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떠도는 인물의 고독과 치열한 생의 모습을 마치 실존 인물처럼 연기한다. 사회 영화를 연상시키는 끊임없는 노동의 이미지는 배우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치와 능력을 한껏 발휘한다. 해답을 바라는 구도자의 순례는 결국 출발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과거의 그와 지금은 다르다. 기억으로 가득 찬 집과 사막을 뒤로한 채 다시 떠나는 밴의 뒷모습은 영화의 완벽한 엔딩이다.
배우가 아닌 실존 인물을 그대로 영화에 녹여내 가상의 상황을 연기한 등장인물들은 현실감을 더욱 높여준다. 연출과 실제를 넘나드는 영화의 연출은 가상 인물인 펀에게도 유효하다. 사실 펀을 연기한 프란시스 맥도먼드도 영화의 절반까지는 ‘펀’보다는 프란시스 자신처럼 보인다. 유목민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는 펀의 모습은 영화의 인물이 아닌 다큐멘터리의 호스트로도 보인다. 그래서 〈노매드랜드〉는 중반까지는 미국의 사회 현실을 포착한 다큐멘터리에서, 그 이후 펀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그의 서사로 채워진다. 펀과 맥도먼드라는 두 인물이라는 정체성이 동화되고 중첩되는 과정은 영화라는 예술이 왜 인간에게 유효한가를 잘 드러낸다.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며 결국 커다란 서사가 자신의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이 곧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깨닫는다.
흔히 미국은 자동차의 나라라고 불린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한 나라의 정체성과 상징을 드러낸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단단한 금속에 몸을 실은 유약한 인간은 그 넓은 땅덩어리를 쉼 없이 움직이며 지금의 미국을 만들었다. 유목민은 미국이 어떻게 건국하였고 여기까지 오게 된 그 정당성을 알려준다. 하지만 거창한 의미 안에는 피와 눈물로 맺힌 비운의 삶이 녹아있다. 노매드 nomad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주 transfer 하기 위해 돌아다니지만 이는 곧 밀려난 이들의 피난처 shelter를 전제한다. 필그림과 아메리카 선주민, 개척시대에 희망을 찾아온 이들, 그리고 부동산과 경제위기가 몰아낸 차 안의 노매드들. 상징으로 추앙받는 한가한 말들에는 나라는 존재가 부유하는 미국인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들은 여전히 떠돌아다니며 외면받는 존재이지만 바퀴 자국으로 미국이라는 땅에 궤적을 남긴다. 영화 속 미국이라는 땅에 잠든 오랜 역사가 새겨진 돌과 화석은 그래서 노매드를 닮았다. 단단한 돌에 새겨진 바람구멍은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연약한 인간의 발자취,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단단하게 남아 있는 미국의 수많은 자동차에 담긴 인간의 삶과 기억을 나타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은 더는 그 자리에 없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빌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한 화석처럼 영원히 살아남아 흔적을 남기고 말 것이다.
4.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Judas and the Black Messiah | 2021 | 샤카 킹 | 126분
흑인 민권 운동사에 빠질 수 없는 1968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서거로 혼란스러웠던 미국에는 극좌파 민권 운동단체 ‘흑표당’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당의 두 창립자 휴이 뉴턴과 바비 실은 각자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압적인 재판을 받고 있었다. 흑인 민권 지도자의 잇따른 부재로 구심점을 잃기를 바랐던 미국 정부와는 달리 위대한 혁명가는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장으로서 투쟁을 이끌었던 20살의 대학생 프레드 햄프턴은 뛰어난 언변과 협상력으로 대중을 선동하며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에 FBI는 그를 반체제 인사로 규정, 그를 감시하기 위해 비밀 정보원을 투입한다. 차량 절도와 FBI 사칭으로 구속 위기에 놓인 윌리엄 오닐에게 이 은밀한 제안은 거부할 수 없었다. 흑표당에 들어간 오닐은 그를 감시하는 동시에 점차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직면하고 헴프턴에 동화된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오로지 민중을 위한 혁명을 외친 ‘블랙 메시아’와 그를 감시한 ‘유다’의 삶으로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미국의 역사를 보여준다.
BLM 운동과 트럼피즘의 후폭풍,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어느 때보다 소수자의 입지가 좁아 든 작금의 시기에 영화는 60년 전으로 돌아가 혁명과 변혁, 진보의 길에 둘러친 억압과 폭력을 드러낸다. 제목처럼 영화는 ‘유다’의 시선으로 ‘메시아’를 들여다본다.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광풍에 ‘유다’ 윌의 배신이란 너무도 평범한 시민이 사회와 상황 앞에서 생존이라는 목표에 움직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오닐 역의 ‘라키스 스탠필드’는 고뇌와 갈등 앞에 선 불안한 심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된 사회에서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오닐의 피폐한 모습은 인간성과 도덕을 상실한 파시즘의 권력에 신념을 강요받는 무력한 인간을 묘사한다.
공포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생리에 헴프턴은 단호히 부정한다. 직설적이지만 정확히 핵심과 구조를 꿰뚫는 화술을 지닌 그는 권력이라는 적에 대응하기 위해 연대와 사랑을 내세운다. 뛰어난 선동가이자 정치가인 그는 누구와도 손을 잡을 배포로 무지개 연합을 만들어 세력을 규합한다. 맹방기가 걸린 백인 빈민 교회에 당당히 들어가 고통의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결국 그들을 설득해 당당히 남부의 깃발 앞 연단에서 백인들을 설득시키는 모습은 경이로우면서도 현대 정치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사유하도록 만든다. 위대한 인물을 연기하기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다니엘 칼루야’는 그의 삶을 되새기며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 클로즈업으로 잡아낸 연설 장면에서도 머뭇거림 없이 카메라의 시선을 이겨내는 칼루야의 모습은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이념의 특성상 여성의 권익에 적극적이었던 흑표당과 국가의 대립에 한 축을 담당하는 뛰어난 여성 인물들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헴프턴의 연인이자 운동가인 데보라 존슨은 그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새로운 세대에게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지적한다. 인간적이면서 강인한 여성으로 모든 상황이 종결된 마지막 장면에 잡히는 그의 감정은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든다. 헴프턴의 동료 주디 하몬은 영화 내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진보적인 조직의 면모를 보이며 신념 앞에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소화한 ‘도미니크 손’의 커리어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영웅과 비극적 최후, 그리고 배신과 선택은 범죄 영화 〈무간도〉를 떠올리면서도 탁월한 정치 영화로서 그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특히 소수자를 결합하는 연대의 유산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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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를 정의하는 시선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오와 레미, 두 소년의 친밀한 관계는 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변화한다. 서로의 집에서 서로의 가족과 함께할 때는 전혀 이상하지 않던 것들이 학교에서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하게 되면서부터 다른 아이들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된다. 매일같이 당연스럽게 여겨지던 이들의 두터운 관계는 타인의 시선이 입혀지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친구치곤 너무 가까운 사이’로 여겨진다. 첫 등교일에 자기소개 시간부터 서로에게 기대며 다정한 둘을 바라보는 같은 반 아이 시선부터 시작해 둘이 사귀는 사이냐는 다른 아이의 직접적 질문이나 보통의 남자아이들과 다른 행동을 한다며 놀리고 괴롭히는 일부 아이들은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 레오와 레미에게 직간접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관계가 틀어지는 계기가 되는 주된 장소가 '학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학교는 가족을 제외한 타인을 사실상 처음 마주하게 되는 공간이며, 사회화 과정의 본격적 시작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학교라는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사회의, 세상의 폭력을 처음 마주하게 되는 두려운 곳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시선이라도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쉽게 정의하고 사고의 범주 안에 있지 못한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떠한 시선이 말이다. 레오와 레미를 자신들과 다르게 본 아이들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그것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고, 그중 한 사람, 레오가 레미를 스스로 멀리하게 만들었다. 같은 상황에 놓인 두 소년의 태도는 달랐다. 레오는 그러지 않길 택했고, 레미는 놀림받는 것보다도 자신을 배척하는 레오의 행동을 견디지 못한다.
<클로즈>는 트랜스젠더 발레리나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던 <걸>에 이은 루카스 돈트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감독 자신이 밝혔듯 이번 영화는 자신의 유년시절 자전적 경험과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 전작에서 감독은 영화의 초점을 온전히 주인공 '라라'에게 맞춰 라라의 내면 변화를 세밀하게 따라갔다. 신체와 환경의 변화를 겪으며 혼란스러운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형식의 연출을 취하며 관객이 여성성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통받는 라라에게 간접적으로 동화되도록 만들었다. 인물을 그려내는 감독의 분명하고도 명확한 시선은 공감의 깊이를 더해 많은 당시 많은 호평을 받았다. 감독은 <걸> 이후 남성성과 관련된 영화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지금의 어린 소년들의 우정이 사회의 요구와 압박에 의해 파괴되는 이야기를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 영화의 경우 전작보다 개인적이고 사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반면,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정치적인 영화라 칭하는 점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레오와 레미가 함께 전쟁놀이를 하며 놀던 요새는 둘을 지켜내지 못한다. 서로가 전부여도 다라고 할 만큼의 평화롭고 친밀했던 관계를 보여주는 초반부가 지나가고, 다른 아이의 "너희 둘이 사귀어?"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둘은 서로의 관계를 의식하게 된다. 둘이 같은 침대에서 자다가 몸장난으로 시작하던 것이 몸싸움으로 번져 서로 돌아누워 가쁜 숨을 내쉬는 장면은 묘하게 생긴 둘 사이의 거리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신들 스스로가 정의할 틈도 없이 두 사람의 사이는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간다.
두 사람의 다툼은 한 번 더 등장하는데 이번엔 돌이킬 수 없다. 다투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회복되던 관계는 레오의 행동 하나에 결국 어그러지고야 만다. 먼저 간 레오를 기다리다가 나중에야 학교에 도착한 레미는 레오에게 화가 나 그를 마구 때리는데 앞선 다툼과 마찬가지로 핸드헬드로 비교적 거칠게 찍었다. 울분에 차 서럽게 울며 주먹을 휘두르는 레미의 얼굴만큼 현재 상황을 파악하면서도 레미의 행동까지는 예상하지 못해 당황한 레오의 얼굴이 들어온다. 당연히, 레오는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 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미가 보이지 않아 신경 쓰이던 불안감은 점점 커지고, 결국 레오는 친구의 상실을 맞게 된다.
레미는 영화의 일반적인 구성을 생각한다면 정말 갑작스럽게 사라지게 되는데, 이 점이 처음엔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두 인물이 주인공인줄 알고 러닝타임의 반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한 인물이 사라지다니. 하지만 이 영화의 방점은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사회적 원인과 갑작스럽게 친구의 상실을 맞이하게 된 레오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지, 바로 그 과정에 있다. 꽃밭에서 함께 활짝 웃으며 달리던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이 웃을 수 없다. 이젠 레오 만이 그곳에 남아있다. 레오 가족의 생업으로 보이는 화훼농사 즉, 꽃은 레오와 레미 두 사람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꽃의 수확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레오와 레미처럼 사회의 시선과 기대에 억눌리게 되는 많은 어린 소년들을 은유하는 것 같다.
레오는 처음엔 크게 티 내지 않지만 레미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레미에 관해 좋게 얘기하는 반 아이들의 말에도 화가 난다. 레미를 보던 레오의 시선은 이제 레미의 엄마에게로 향한다. 아마도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레미가 그렇게 됐다는 생각에. 하지만 레오는 용기가 나지 않아 주변을 서성일뿐이다. 학년이 다 끝날 때가 되어서야 용기를 냈다. 자기 자신 만이 멀어졌던 관계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에. 레오는 그렇게 레미의 엄마에게 숨겼던 사실을 말하며 레미와의 관계를 닫는다. 어쩌면 그럼으로써 레미와 다시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친구와의 예상할 수 없던 갑작스러운 이별을 레오는 그렇게 스스로 마무리짓는다. 타인의 시선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레오의 시선으로 끝을 내며 모든 과정을 본 우리에게 당신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봤는지 묻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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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3주 최신 개봉영화(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매트릭스 리저렉션, 드라이브 마이 카, 신데렐라2 마법에 걸린 왕자, 호두까기 인형)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2월 3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킹스맨퍼스트에이전트 #매트릭스리저렉션 #드라이브마이카 #신데렐라2마법에걸린왕자 #호두까기인형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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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위키드> 1차 예고편
장르: 뮤지컬 영화 출연: 신시아 에리보, 아리아데 그란데, 미셸 여, 제프 골드브럼, 조나단 베일리, 에단 슬레이터, 마리사 보데가, 보웬 양, 브론윈 제임스, 케알라 세틀 감독: 존 추 각본: 윈니 홀즈만 그레고리 머과이어의 소설 원작, 작곡 작사 스티븐 슈워르츠, 윈니 홀즈만이 각본을 맡은 뮤지컬 위키드를 원작으로 한다. 제작: 데이비드 닉세이, 스티븐 슈워르츠, 자레드 르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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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크라임 보스> 30초 예고편
얼굴도 본명도 절대 드러내지 않는 마약왕 a.k.a ‘개구리’는
미국 아칸소주를 지배하는 최대 마약 조직의 보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원 딜러 ‘카일’과 ‘스윈’은
위장 작전 중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이를 수습하려고 하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최악으로 흘러간다.
그날의 잘못된 선택이 세 사람을
아슬아슬한 만남으로 이끄는데...
위험에 빠진 마약왕의 마지막 작전!
목숨을 걸고 완전 범죄를 완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