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4-03 20:16:30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면?
삶 깊숙이 파고든 인공지능과의 삶을 다룬 영화들

‘시리’부터 ‘챗지피티’까지, 이제는 인공지능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요즘이죠.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그녀>가 개봉했던 2014년만 해도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 생경하게 느껴졌지만, 2025년에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면?” 같은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들을 준비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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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 ‘같은 곳을 바라봤던 소중한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
친구
개봉일 : 2001.03.31.
감독 : 곽경택
출연 : 유오성, 장동건, 서태화, 정운택, 김보경, 기주봉
"같은 곳을 바라봤던 소중한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
한없이 막역하고, 언젠가는 힘에 부칠만큼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는 단어 ‘친구’. 아주 진하고 가까우며, 그렇기에 한순간에 허물어져 버릴 수도 있는 관계를 담은 이 영화는 어쩌면 흔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친구’라는 단어를 영화 이름으로 선택했다. 눈에 잘 띄지 않을법한 이 평범한 제목의 영화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고유명사처럼 남아 마음 한편 어딘가에 구겨져있던 친구에 대한 수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나는 이 영화를 아주 최근에 처음 접했다. 너무도 유명해 항간에 떠돌던 여러 명대사들과 사진들로 인해 이미 영화를 다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항상 뒷전으로 미뤄뒀던 영화였다. ‘누아르’ 느낌이 섞인 장르를 크게 선호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고 말이다. 언젠간 봐야지~하고 있던 찰나에 아직도 그 영화를 보지 않았냐는 지인의 잔소리에 떠밀려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예상외로 마음이 찡해지는 영화였다.
<친구>는 폭력과 영역싸움, 분노와 욕설 같은 것들로 채운 일차원적인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아버지의 직업과 집안 환경, 물질적인 가치를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어울려 ‘친구’가 된 소년들의 유년시절부터 시작된다. 네 명의 소년은 친구의 조건을 재거나 따지지 않는다. 그저 함께할 때 즐겁고, 웃음이 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소년들은 한곳에 모여 하나의 우정을 맹세한다.
개인적으로 중학교 때까진 잘 몰랐다. 친구관계라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고 유치하지만, 보통 중학생이 될 때쯤이면 친구들 사이에도 ‘서열’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다. 대놓고 누가 1등, 2등이라 명하지 않아도 그 무리를 유지하는 중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친구>에서는 조폭 아버지를 둔 타고난 싸움꾼 준석이 이 무리의 1등, 동수는 2등이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 네 명의 소년들은 각자 갈 길이 달랐다. 더 이상 한곳을 바라볼 수 없었던 우정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이미 생겨버린 틈을 메우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아니면 애초에 우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푸른 바다의 품에 안겨 물장구를 치던 소년들이 차가운 길바닥에 내려앉는 순간을 함께하며 나의 어린 시절을 채워주었던 인연들을 떠올려보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지금까지 함께했다면 우리는 친구였던 사람이 아닌 친구로 남아있을까?
친구 시놉시스
추억은 마치 바다 위에 흩어진 섬들처럼 내 머릿속을 떠다닌다. 나는 이제부터 기억의 노를 저어 차례차례 그 섬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이 영화를 추억의 섬들에 살고 있는 나의 친구들과 그 가족들에게 바칩니다.’}
1976년 13살, 호기심 많던 폭력조직의 두목을 아버지로 둔 준석(유오성), 가난한 장의사의 아들 동수(장동건), 화목한 가정에서 티 없이 자란 상택(서태화), 밀수업자를 부모님으로 둔 귀여운 감초 중호(정운택). 넷은 어딜 가든 함께 했다. 훔친 플레이보이 지를 보며 함께 낄낄거렸고, 이소룡의 브로마이드를 보며 경쟁하듯 흉내 냈고, 조오련과 바다거북이 중 누가 더 빠를까 하며 입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는 세상이 온통 푸르게만 보였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동네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 준석, 이소룡을 좋아하는 중호, 3학년 때 전학 온 동수, 공부를 잘하는 상택. 비슷한 구석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넷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다. 어린 소년들은 바다에 함께 놀러 가 뜨거운 햇살 아래 ‘조오련과 바다거북이 중 누가 더 빠르게 헤엄칠까’와 같은 사소한 주제로 아웅다웅하며 시간을 보낸다. 특별할 일 없던 보통의 시간도 네 명이 함께 모이면 즐거운 시간으로 변한다. 이런 관계가 바로 ‘친구’다.
“친구 아이가."
네 명의 친구들은 잠시 각자의 인생을 살다가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상택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고, 중호는 여전히 까불거리며 친구들 사이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준석과 동수의 모습이다. 건달 아버지 밑에서 자란 준석은 예전부터 ‘싸움꾼’으로 통하는 학생이었고, 동수는 준석의 곁에서 함께 싸움에 뛰어드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준석의 뒤를 따르는 동수를 보며 “쟤는 부하냐?”고 묻는다. 같은 반 학생은 그 질문에 준석은 학교 통, 동수는 학교 부통이라고 답한다.
준석과 동수는 친한 친구지만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1등과 2등이라는 서열을 갖고 있다. 준석은 여전히 “친구 아이가?”라는 말을 던지며 동수와 상택, 중호에게 우정을 강조하지만 동수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 보인다. 동수는 준석에게 “내는 니 시다바리가?”라고 물으며 열등감을 보인다.
동수가 열등감을 갖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직업과 관련이 있다. 동수의 아버지는 장의사다. 3학년 때 이사 온 동수는 5학년이 될 때까지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아버지의 직업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동수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해하거나 존중하기보단 부정적으로 바라봤고, 그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수의 마음속엔 분노와 열등감이 가득 차게 되고, 동수가 학교의 유리창을 깨부수던 날부터 4명의 우정도 함께 깨지기 시작한다.
준석, 동수, 상택, 중호는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한다. 사실 선택했다기보단 애초에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달랐다. 상택과 중호는 대학에 진학했고, 동수는 감옥에, 준석은 마약에 빠지게 된다. 상택과 중호는 연락이 끊긴 준석과 동수에게 다시 찾아가는데,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이유로 망가져있는 상태였다.
모두가 연말 분위기에 들떠있는 크리스마스 길거리. 상택은 준석을 들러업고 함께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러 간다.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 약 후유증으로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준석의 뒤 어딘가에서 이런 외침이 들린다. 상택은 누가 봐도 처참히 망가진 준석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는다. 언젠가 불리한 싸움에 말려들던 날, 그리고 준석을 통해 좋아하는 진숙을 소개받던 날에 대한 보답을 하려는 듯 상택은 준석과의 의리를 지키려 노력한다.
“우리 넷 중 삶의 색깔이 비슷했던 녀석 둘마저도 또다시 각자의 색깔로 쪼개지고 말았다.”
그에 반해 동수는 의리보단 자신의 길을 택한다. 동수는 돈을 내밀며 의리에 대해 말하는 눈칼자국의 손을 잡는다. 새로운 조직의 행동대장이 된 그는 준석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동수는 준석의 조직에 쳐들어가 부하들을 살해하고, 준석은 부하들의 뼈를 찧는 소리를 들으며 분노를 삭힌다. 친할 친, 옛 구를 써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사이를 뜻하는 ‘친구’. 의리로 가득한 사이라 설명되는 관계 ‘친구’. 준석과 동수는 언제부턴가 친구의 범주를 벗어난다.
준석은 ‘친구로서 마지막 부탁’을 하기 위해 동수를 찾아간다. 동수는 준석의 제안을 거절하고 준석을 내보낸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꾼 듯 상택을 보기 위해 공항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준석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된다. 마지막 부탁을 통해 어떻게든 친구 관계를 잡아보려다 실패한 준석은 그 관계가 끝났음을 인지하고 빠르게 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그에게 동수는 친구 동수가 아닌 자신을 죽이려 한 새로운 조직의 행동대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상택과 중호는 준석이라도 살리겠다며 재판에 도움을 주려 안간힘을 쓰지만 준석은 그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수가 칼에 찔리던 날, 우정을 다짐했던 친구 준석의 존재도 함께 사라졌으니, 준석은 중호와 상택의 ‘친구로서 주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사라진 것이다. 동수의 친구였던 준석은 동수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진다.영화의 마지막, 다시 소년들의 모습이 나온다.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긴 작은 소년들은 튜브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 ‘조오련과 바다거북의 시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소년들은 “너무 멀리 온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발맞춰 육지를 향해 헤엄을 친다. 우정과 친구라는 단어로 뭉친 네 사람은 같은 목표를 위해 한 방향을 바라보며 발을 구른다. 하지만 현실 속 그들은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준석은 동수 편을 들었던 것도 같다는 말과 함께 준석, 동수, 상택, 중호의 찬란한 우정은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기 전까진 <친구>가 우정의 대상들에게 바치는 영화라는 누군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는 순간 확실히 알게 됐다. 이 영화가 맑은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달렸던 소중한 그들을 기리는 영화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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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The Last Duel, 2021)
개봉일 : 2021.10.20. (한국 기준)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해리엇 월터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프로메테우스>, <마션>, <바디 오브 라이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맷 데이먼, 아담 드라이버, 조디 코머, 벤 애플렉 등 짱짱한 배우 라인업을 보고 개봉날만을 기다린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편의상 <라스트 듀얼>과 혼용 표기)
<마션>에 이은 리들리 스콧 감독과 맷 데이먼의 만남, 그리고 <스타워즈>를 통해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어 버린 배우 아담 드라이버와 최근 <프리가이>로 눈에 들어온 조디 코머, <나를 찾아줘>를 통해 알게 된, 항상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배우 벤 애플렉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라니. 그것도 시대극?! 얼마나 멋진 작품이 나올까 잔뜩 기대했다.
<듄>과 <베놈> 같은 대중적이고 커다란 작품들에 밀려 개봉 전부터 상영관 배정이 많이 부족해 보여 크고 좋은 관에서 보긴 그른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기에 개봉 전에라도 미리 보자며 프리미어 상영을 다녀왔다. 심지어 <라스트 듀얼>을 보려고 평소 팔자에도 없던 중세 시대와 봉건 제도에 대해 나름 공부까지 하고 갔다. (이 부분은 이동진 평론가님의 영상을 통해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라스트 듀얼>은 근세(1500년)가 시작되기 전, 1000년 정도에 이른, 아주 길었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극 중 배경은 중세 시대 중에서도 유럽에 창궐한 흑사병이 진정된 지 얼마 안 된 혼란한 시기였으며, 그 혼란함을 추스를 후세를 낳기 위해 주인공인 장이 두 번째 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장의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가 장의 절친 자크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영주와 왕은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 각자의 억울함과 분노를 표하던 장과 자크는 마지막 재판 방법인 결투 재판을 신청하게 된다.
잘잘못을 따질 수 없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됐던 결투 재판은 재판장에서 내리지 못한 결론을 하늘이 내려줄 거라, 하늘이 선한 자를 살려줄 거라 믿으며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재판이다. 말이 좋아 재판이지 사실 야만적이고 처절한 결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지배계급 사이의 주종 관계가 확연하게 정립되는 봉건 제도가 있던 시기이자 하늘과 신의 존재를 받들며 온 국민에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던 그 시기에 전투 재판은 하늘의 뜻을 묻는 정당한 재판에 속했다.
영화의 제목이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인 이유는 영화 속 인물들이 벌이는 결투가 실제 프랑스에서 행해진 마지막 전투 재판이기 때문이다. 봉건 제도의 몰락과 왕권의 확립,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에 앞서 합리적인 부분을 먼저 찾기 시작한 사회와 인식의 변화와 일어나기 시작했고, 지독하게 처절했던 이 마지막 결투의 영향으로 전투 재판 제도는 사라졌다고 한다. <라스트 듀얼>은 마지막 전투 재판의 기록을 인용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라스트 듀얼>은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권력과 자존심 다툼을 하는 두 남성의 까칠한 민낯을 보여주며 그 사이에서 용기를 내 무고함을 소리치는 여성의 시선을 함께 담아낸다. 겉으로 보면 한 여성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두 남성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 정도의 느낌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실상은 다르다.
영화는 장, 자크 두 남성의 시선과 사건의 중심에 있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나눠 진행된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상이 박혀있던 그 시기에 살아온 장과 자크는 마르그리트를 지키거나 그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결투 재판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의 소유물을 건든 자를,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자를 심판하기 위해 나의 운명을, 내 소유물인 아내의 운명을 함께 건 것이다. 아내는 물론 선택권이 없다.
하나의 사건을 둔 세 사람의 시선은 모두 다르다. 특히 유일한 여성인 마르그리트의 시선은 이 사건을 다르게 보고 있다.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통해 그 시절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잔인할 만큼 투명하게 보여준다.
불합리와 야만의 시대에서 여성은 아내의 도리를 다해야 했고, 집안에 틀어박혀 식모 살이와 온갖 수모를 견뎌야 했고, 아이를 잉태하는 수단에 불과한 취급을 받아야 했다. 모든 여성들이 포기하며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마르그리트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남편 장에게 호소한다.
나는 마르그리트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다른 분위기이긴 하지만 마르그리트를 보며 올해 7월에 개봉했던 <오필리아>의 주인공, 오필리아가 떠오르기도 했다. 남성이 절대적이었던 사회에서 일어난 남성들의 권력 싸움과 여러 사건 뒤에 묻혀있던 여성 주인공, 그리고 그들의 시선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담아낸 두 영화의 모습이 얼핏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 개의 시선에 따라 정의롭던 사람이 강압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희대의 바람둥이가 순수한 사랑에 미쳐버린 청년으로 변하고, 무고한 여성의 외침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사건의 진실은 신이 내려줄 수 있는 것인가. 왜 여성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는 건 남성뿐인가, 그리고 무고함에 박수받는 것 또한 왜 남성인 것인가.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보는 내내 불편함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속이 답답할 정도로 불편했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굉장히 높다. 중세 시대를 충실하게 복원해낸 세트와 의상, 미술,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그 긴 시간마저도 완벽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관객을 끌어당기는 배우들의 힘. 그리고 각자의 시선을 따라 조금씩 비틀어낸 카메라의 시선. 같은 사건을 3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같은 시간을 3번 반복해 보는 일인데, 그럼에도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던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라스트 듀얼>이라는 영화의 제목만 보고 중세 시대의 웅장한 전투를 기대한다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인물들의 위엄을 보여주는 짧은 전투 장면과 두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마지막 결투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의 결투는 충분히 처절했고, 단시간에 나를 압도했다. 하지만 그 결투 뒤에 숨겨진 진실들은 끝까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라스트 듀얼 시놉시스
부조리한 권력과 야만의 시대,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는 남편 ‘장’이 집을 비운 사이,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자크’는 ‘마르그리트’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자크’의 죄를 고발한다.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는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장’은 승리하는 사람이 곧 정의로 판정 받게 되는 결투 재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장’이 결투에서 패할 경우, ‘마르그리트’는 즉시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는데… 단 한번의 결투가 세 사람의 운명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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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과 세 개의 시선
세 사람을 둘러싼 사건은 여러 가지가 아닌 단 하나다. 하지만 세 사람은 모두 다른 시선으로 사건을 보고 있다.
장은 영주의 눈에 든 자크가 목숨을 살려준 자신과의 우정을 배신하고 아첨을 반복하며 권력을 얻은 놈이라 생각한다. 장은 자크가 아내 마르그리트의 결혼 지참금이었던 땅을 빼앗고, 나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던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며 무지향성으로 분노를 터트린다.
1장, 장의 시선으로 보면 자크는 분명 아첨꾼이자 배신자가 맞지만 자크의 시선으로 본 순간들은 사뭇 다르다. 자크가 난봉꾼인 건 맞지만, 그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 리모주 전투에서 다른 병사들이 장의 뒤를 따르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장을 뒤따라가야 한다고 선봉에 선 사람은 자크였고, 자크는 영주에게 장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한다. 자크는 권력을 얻으려고 영주와 함께 어울리긴 하지만, 꼭 장을 배신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 권력
하지만 막강한 권력 앞에서 두 인물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정과 이성을 가볍게 내버린다. 장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옳음 따윈 없어. 사내들의 권력만 존재하는 거야.”
장은 영주에게 인정받고, 좋은 땅을 받고, 본인 대신에 성을 물려받게 된 자크에게 분노와 열등감을 느낀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기로 했던 진짜 주인은 나인데,.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이 없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오가고 있는데, 기사 집안도 아니었던 친구 놈이 성에서 잘 놀고먹고 있다니. 앞서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입은 장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거다.
그래서 장은 자크를 이길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버지처럼 기사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전쟁을 끝마치고 영주에게 보고를 하러 간 자리에서 장은 자신을 가볍게 부르는 자크에게 자신은 이제 기사니 존칭(Sir)을 하라고 명령한다. 자크는 공격적으로 나오는 장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우선 그가 기사인 것은 맞으니 존칭을 붙여 대답한다.
기사가 되어 존칭을 받음으로써 이제 자크를 이긴 걸까 싶었는데, 장이 다시 분노할 일이 생긴다. 자크가 자신의 아내 마르그리트를 겁탈한 것이다. 아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나의 후세를 낳아줄 값진 암말, 나의 소유물을 말이다. 장은 마르그리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자크를 벌하는 것에 더 열을 내며 마지막 전투 재판까지 참여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장이 결투에서 지면 화형에 처해질 운명을 부여받고, 두 남성이 자유롭게 칼을 휘두를 동안 발목이 묶인 채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본다. 남성들의 권력싸움 앞에서 여성이었던 마르그리트는 무력하게 묶여 그들의 싸움에 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여성을 부조리한 시선으로 바라본 남성들
중세 시대 여성들은 인권을 존중받지 못한다. 사회적 지위가 없기에 남편 없이는 재판을 열 수 없었고, 여성은 무슨 일을 당하든 입을 열 수 없었으며 후세를 잇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 또는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른 집안에 보내지는 뇌물 정도로 인식된다. 여성은 그저 남편, 남성의 권력과 욕망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자 소유물일 뿐이다.
영화의 초반, 장의 시선으로 본 장의 모습은 마치 아내를 아껴 재판까지 참여한 꽤 멀쩡한 남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본 장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사건을 알게 된 순간엔 마치 자신의 물건을 뺏겨 화가 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아내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기보단 “나의 소유물을 건드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내거를 가져가려고 해?” 이런 마음과 비슷한 분노였다. 장은 마르그리트의 말을 듣자마자 “그놈은 왜!”라고 소리치며 나의 소유물을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는 듯 마르그리트를 침대에 눕힌다.
여성 편력이 굉장하다고 소문난 자크 또한 여성을 육욕의 대상으로만 인지한다. 그는 축하파티 자리에서 처음으로 본 마르그리트의 미모에 홀려 혼자만의 착각에 빠진다. 욕심내면 안된다는 부하의 말에 자크는 “나를 향한 저 눈빛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박하며 일방적이고 사랑, 사랑보단 폭력에 가까운 욕망을 키워간다. 자크는 재판장에 서서도 끝까지 그것은 강제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마르그리트 또한 자신을 사랑했다고,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라고 소리친다.
거기에 얹어지는 남성 법조인들의 수치스러운 질문 퍼레이드를 보며 어이가 없다 못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이 시대는 대체 얼마나 야만적이고 지저분했던 걸까. 중세 시대라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위엄과 무게감 따위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장면이었다.
우리에 갇힌 암말과 같은 여성의 지위
영화의 세 번째 시선, 드디어 마르그리트의 시선이다. 마르그리트는 국가적 배신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아버지의 딸이다. 나름 돈도 많고 괜찮은 집안이었지만 배신자 딱지가 붙자 아무도 마르그리트의 집안과 연을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마르그리트와 혼인을 약속한 건 바로 장이었다.
흑사병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장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 명성과 집안을 이어줄 후세를 낳는 일이었다. 장은 마르그리트 집안의 돈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젊은 마르그리트의 몸을 이용하기 위해 마르그리트를 아내로 맞이한다.
장은 수차례 관계 후에도 임신이 되지 않는 마르그리트를 보며 첫 아내와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며 마르그리트를 압박한다. 장의 어머니 또한 아내의 의무를 다하라고, 여성은 겁탈을 당해도 아무 말 없이 집안에 있는 거라고 다그친다. 마르그리트의 친구 마리 또한 결혼의 무게감을 느끼며, 여성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 사회가 말하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모두 희생한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려던 여성, 마르그리트
마르그리트는 장이 꽁꽁 묶어둔 그의 번식용 값진 암말을 보며 자신 또한 그 암말의 존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혼 후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고립된 상태로 살아온 마르그리트는 장이 긴 전투를 떠나고 스스로 집안일을 처리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새하얀 얼굴이 아닌 조금은 탄 얼굴, 하인인 알리스는 얼굴이 타지 않았냐고 묻는 마르그리트에게 “얼굴에 색이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죠.”라고 답한다. 스스로 일을 하고, 성과를 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마르그리트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남성들의 욕망을 채워줄 도구 따위가 아니다.
여성의 침묵의 대가는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뿐이고, 만일 침묵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장도 친구 마리도, 마르그리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모두가 마르그리트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욕하며 자크의 편을 든다. 하지만 마르그리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장의 어머니는 자신도 겁탈을 당했지만 꾹 참고 견뎌 겨우 살아있다고, 재판을 진행하지 말라며 마르그리트를 말린다.
부조리한 일을 겪었음에도 여성은 침묵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찬스를 얻는 것뿐이다. 삶을 영위한다는 건 고귀한 일이지만, 여성은 그저 살아있을 뿐, 명예, 지위, 돈 같은 것들을 절대 탐할 수 없는 아이를 낳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마르그리트가 침묵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마르그리트는 장과 자크의 결투 재판에 끼인 채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그것도 자신의 손이 아닌 장의 손에 쥐어진 자신의 목숨을 반강제로 걸게 된다.
피 튀기는 마지막 결투
사실 점점 더 처절해져가는 결투를 보며 장과 자크 두 사람이 다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두 인물이 모두 미웠으니까. 하지만 발목이 묶인 채 결투를 지켜보는 마르그리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장을 조금은 응원했던 것 같다.
처음엔 말을 타고 꼿꼿한 자세로 시작된 두 사람의 싸움은 점점 처절하게 변한다. 장과 자크는 말의 죽음과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이내 괴성을 내며 무기를 휘두른다. 긴 창에서 도끼, 검, 그리고 단검까지. 두 사람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싸움은 더 치열하고 본능적인 모양새로 바뀐다. 장과 자크, 두 사람은 본인의 권력을 위해 한 명이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싸운다.
신의 손, 신의 심판인 결투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건 결국 남성이었다.
신의 손,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결투 재판이지만 사실 결투 재판은 싸움을 하는 남성이 언제 지치느냐, 언제 죽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남성들에 의해 내려지는 이 재판은 사회에서 남성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만든다.
남성들의 힘이 모든 걸 결정하는 그 결투에 자신의 목숨마저 걸라니. 마르그리트는 장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그대로 쥐여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말한다.
“이게(아이를 낳는 것) 내 삶이었어요.”
“엄마에게 정의가 필요한 것보다 더,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해요.”
마르그리트는 이러한 재판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재판은 과연 누굴 위한 재판이며 이 재판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은 제대로 된 것이었을까?
장이 결투에서 승리하고 마르그리트의 발목에 묶여있던 족쇄가 풀리지만 세상은 여전히 마르그리트가 아닌 신의 재판에서 승리한 장에게 집중하고 박수를 보낸다. 누구도 마르그리트의 무고함엔 관심이 없다. 이게 바로 그 시대의 진정한 민낯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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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발 떨어지니 더 격렬히 끓어오른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592년 4월, 왜군은 단 15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한다. 그러나 '이순신(박해일)'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거북선을 앞세워 남해안을 장악하자 이내 왜군은 보급에 난항을 겪는다. 이에 용인 전투에서 10만 명의 조선군을 격퇴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는 해전을 통해 이순신을 꺾고 보급품을 전달함과 동시에 명나라로 진격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부산포에 수군을 집결시키고, '나대용(박지환)'이 설계한 거북선의 도면을 훔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이순신(박해일)'은 '원균(손현주)'의 방해에 맞서가면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는 등 수세에 몰린 조선을 구하기 위한 최선의 작전을 고민하며 한산도로 출전한다.
전쟁 이론을 다룬 유명한 경구들을 이야기할 때 프로이센의 군인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속 다음 말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전쟁은 다른 수단을 동원하는 정치의 연장(延長)"이라며 전쟁이 대립하는 의지들의 충돌이라고 보았다. 모든 전쟁은 본질적으로 다른 국가에 자기 의지를 강요하려 하는 한 국가가 많은 수단 중 선택한 한 가지 옵션에 불과하다. 즉, 전쟁의 명분과 목적, 승패의 기준점은 그 전쟁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전쟁 영화들도 단지 전쟁과 전투의 양상을 그려내는 것만큼이나 그 전쟁의 명분과 정치적 의미를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일례로 <300> 시리즈는 (비록 역사 왜곡 논란이 있지만) 러닝타임 동안 자유 대 압제라는 이데올로기적 대결에서 전자가 승리하는 쾌감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해준 바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도 비록 패배한 전투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분기점이 되었던 덩케르크 퇴각의 의미를 스크린 위에 온전히 재현해냈다. <고지전>은 아예 전쟁을 통해 전쟁의 무의미함과 아이러니함을 꼬집은 바 있다.
1700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의 반열에 오른 <명량>의 후속작이자 프리퀄로, <최종병기 활>과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은 <한산: 용의 출현>도 다르지 않다. 1592년 음력 7월 8일에 펼쳐진 한산도 대첩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한산>은 전쟁의 두 주체, 조선과 일본의 의지를 각각 의(義)와 불의(不義)로 설명한다.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실과도 정합한다. 일본군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이유로 아무런 명분 없이 조선을 침략했기에, 조선과 일본은 순도 100%의 가해자와 피해자다. 그러니 임진왜란이 의와 불의가 싸우는 전쟁인 것은 명확하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의와 불의의 전쟁을 풀어내는 드라마적 측면이다. 특히 <명량>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은 <한산>의 선택이 인상적이다. <명량>은 전쟁을 왕과 종묘사직이 아닌 백성을 위한 싸움이라 규정하며,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실제로 왕에게 버림받았다가 다시금 전쟁에 나설 것을 명 받은 백전노장은 국가와 군주를 위한 충성심에 앞서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울돌목으로 향했고, 역으로 백성의 도움을 받아 기적처럼 승리한다. 이러한 정치적 함의는 2014년 개봉 당시 <명량>이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이 민심의 중요성을 전하는 방식이 다소 올드하고 일차원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말을 할 수 없어 치마를 흔들며 위기를 알리는 '정 씨(이정현)'의 모습이나 백성의 희생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던 '임준영(진구)'처럼 부자연스러운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극의 흐름을 툭툭 끊었다. 이 고생을 몰라주면 후손들이 전부 후레자식이라던 대사 역시 영화를 평면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한산>은 다르다. 오히려 형보다 더 낫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시점을 강조하며 이순신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 영화는 가장 먼저 부산의 일본군 진영을 비춘다. 또 일본군이 이순신과 거북선에 대비하는 모습을 착실하게 그려낸다. 걸핏하면 조선인들을 죽이는 평면적인 악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두려움이 곧 전염병이라면서 아군의 패잔병을 죽여 혹시 모를 불씨를 제거하는 주도면밀함, 간첩의 침투와 그로 인한 정보의 유출을 경계하는 치열한 첩보전, 군사적 약점을 지우기 위해 전력을 증강하고 작전을 가다듬는 철저함이 대신한다.
반면에 스크린 속 조선군은 취약하다. 거북선을 잃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탈취당하며, 학익진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즉, 영화는 의롭지 못하다는 단편적인 인상 대신 신중하고 영리하며 강대한 불의 앞에 흔들리는 의로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순신의 학익진은,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거북선의 등장은 역으로 더 큰 감동을 준다. 철저하고 신중했던 불의가 의로움으로 쌓은 바다의 성 앞에서 필연적으로 궤멸되는 모습은 이른바 품격 있는 '국뽕'으로 이어진다. 한산 바다에 수군 군영을 구축하며 단단한 방패를 만드는 모습으로 영화가 결말을 맺는 이유이자, 작중 최고의 씬스틸러인 거북선이라는 소재가 단지 눈요기에 그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거북선을 장님 배라는 의미의 '메구라부네'라고 줄곧 부르던 왜군 장수들은 거북선을 마주친 순간 영화 초반 패잔병들이 그러했듯이 해저 괴물이라는 의미의 '복카이센'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군의 거북선에 대한 두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며, 곧 의로움의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자칫 억지스럽거나 정서적으로 과장될 수 있었던 항왜 '준사'의 서사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한산도 대첩과 맞물린다. 아군을 보호하지 않는 왜군의 악의를 경험한 왜장 준사는 이순신을 만나 마음을 고쳐 먹고 의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의병과 함께 전투에 임한다. 이 모습의 함의는 굳이 과장된 감정선이나 대사를 통하지 않아도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는 강력한 성인 학익진과 자연히 오버랩된다. 그렇기에 전쟁과 전투에 담긴 의미를 전달하는 <한산>의 방식은 전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련되게 느껴진다. '정보름(김향기)'와 '안준영(옥택연)' 캐릭터의 분량이 전편에 비해 적어서 인위적이고 신파적인 연출이 줄어든 것도 영화의 담백함에 기여한다.
또 영화가 이순신의 활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칼을 대조해 의로움의 필연적 승리와 그 쾌감을 강조하는 것도 흥미롭다. 와키자카의 칼은 명나라로 진격하려는 야욕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두려움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패잔병을 죽이는 그의 칼은 왜군끼리도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분열의 칼이며, 명나라까지 향하는 지도가 그려진 황금 부채로 변하기도 한다. 반면에 이순신은 죽을 위기에 처한 부하 나대용을 구하기 위해 총을 맞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활을 쏴 나대용을 보호하고, 약점이 드러난 거북선을 구해낸다. 그리고 나대용과 거북선은 찰나의 순간 이순신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보답한다. 그래서 와키자카의 칼도 조총도 이순신을 위협할 수는 없다. 의로움이 담긴 이순신의 활 앞에서 악의로 가득한 그의 무기는 무용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 대첩에서 갑옷에 화살에 맞았다는 역사적 기록을 영리하게 활용한 드라마의 힘이 돋보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장수가 자신의 무기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비되는 점도 드라마에 입체감을 더한다.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칼을 뽑는 와키자카와 달리, 작중 이순신이 활을 쏘는 장면은 딱 세 번 등장한다. 이는 신중함을 기하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경험을 답습하는 와키자카와 달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신중한 이순신의 차이를 드러낸다. 와키자카는 한산도 바다가 용인 전투와 같은 지형이라는 이유로, 또 이순신의 학익진이 과거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드러난 학익진의 약점을 공유할 것이라고 판단해 과거의 전술을 반복한다. 반면에 꿈속에서 녹둔도에서의 전투를 다시 한번 마주한 이순신은 와키자카의 선택을 예측한 후 마지막까지 확실한 한 수를 기다리다 왜군의 공격을 되받아 역공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두 배우의 서로 다른 스타일의 연기가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변요한은 본래 신중하고 치밀하지만 전투에 돌입하면서 야망에 부풀었다가 학익진 앞에서 좌절해 절망하는 와키자카의 입체적인 변화를 잘 짚어냈다.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대사와 비중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의 절제된 표정 연기가 지장(智將)으로서의 이순신을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유다.
물론 모든 드라마적 측면은 결국 전투와 전쟁의 양상을 알기 쉽게, 또 박진감 있게 펼쳐 보인 연출과 구성 덕분에 빛난다. 우선 당포에서 견내량과 한산으로 이어지는 전투의 흐름 속에서 매 순간 변화하는 조선 수군의 학익진과 일본 수군의 어린진이라는 진형을 넓고 수직적인 구도로 잡아내 그 형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밑바닥이 둥근 일본군 함선과 밑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의 차이점을 활용해 전투의 변수를 만들기도 하며, 거북선들의 충파로 인한 박진감이나 전방위 포격으로 적을 섬멸하는 모습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또 전반적인 임진왜란의 흐름을 활용하는 측면에서도 영리함이 돋보인다. 지형적으로 유사한 용인 전투의 전황을 상세히 설명해 한산도 대첩의 전술적 가치까지도 부각하는가 하면, 선조의 몽진을 강조하며 한산도 대첩이 지니는 전략적 측면에서의 의의도 스크린에 담는 데 성공한다.
역사적 사실을 영화적으로 각색한 지점도 눈에 띈다. 일례로 영화는 역사 속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의 특징을 합쳐 가상의 전투를 만들어 낸다. 본래 전주성이었던 일본군의 목적지를 전라좌수영으로 변경해 한산도 대첩 전후의 위기감을 더 고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적 서술을 충실히 따르며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원균의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다른 미디어들과는 달리 무능하고 비겁한 원균의 캐릭터성을 온전히 묘사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라는 외적 위기는 물론 진이 뚫릴 수 있다는 식으로 조선군 내부의 위기도 조성한다. 그 결과 거북선의 기습과 돌격 , 학익진의 위력, 평소와 달리 화약을 잔뜩 준비한 이순신의 지략 등의 임팩트는 모두 극대화된다.
특히 이는 영화를 제작할 때 한산도 대첩이 명량 해전에 비해 여러 핸디캡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명량 해전은 이순신 개인에게도,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도 절대적인 어려움이 있는 전투였다. 총지휘관은 억울하게 파직당하고 어머니를 잃은 상태였고, 조선 수군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12척의 판옥선만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130여 척이나 되는 일본군을 패퇴시켰으니 명량 해전은 별다른 각색 없이도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반면에 한산도 대첩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연전연승 중이었고, 전력도 온전했다. 이순신 개인 입장에서도 사천 해전에서 총탄을 맞아 부상당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일신상에 크게 특이한 부분이 없다. 즉, 한산 대첩은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중대한 승전이지만 오히려 처절함과 승리의 쾌감이 덜 직관적인 전투다. 이러한 핸디캡을 강렬한 스펙터클이 돋보이는 긴 분량의 해전 씬과 영리한 각색을 통해 극복했기에 <한산>의 임팩트는 결코 <명량>에 뒤처지지 않는다.
아쉬움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시리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안준영과 정보름 캐릭터는 왜군과의 첩보전을 담당하면서 이번에도 일정 부분의 분량과 비중을 분배받는다. 그런데 그들은 전반적으로 담백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신파의 감정선을 유지하면서도, 시리즈의 연속성을 부각한다고 보기에는 역할이 작다. 그러다 보니 찰나의 순간 삽입된 그들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영화의 최대 장점인 영리한 각색과 전투씬도 단점이 없지는 않다. 영화는 한산도 대첩 이후 조선 수군이 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런데 정작 부산진 전투가 한산도 대첩이 포함된 3차 출정이 아닌 이순신의 4차 출정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굳이 한 데 합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한편 거북선이 나타나는 전투씬은 배와 배가 충돌하며 원초적인 쾌감을 느끼게 해 주는데, 다만 거북선에 사용된 CG의 수준이 부자연스러운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유인 작전 도중 암초 바다를 해쳐 나오는 조선군과 그대로 좌초되는 일본군을 묘사할 때처럼 순간순간의 장면에서도 부자연스러운 그래픽이 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비해 적게 등장하고, 인간적인 고민이 두드러지지 않는 점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물론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명량 해전에서는 용장(勇將)을, 한산해전에서는 지장(智將)을 그려내고자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기는 하다. <명량>이 영웅 이면의 고뇌에 주목했다면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젊은 장군이자 리더인 이순신의 자질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량: 죽음의 바다>가 인간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한층 원숙해진 현장(賢將) 이순신을 그려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다면, 이 단점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산: 용의 출현>은 전편의 단점은 수정하고, 객관적인 접근법을 통해 같은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부각하면서, 품격 있는 사극이자 영웅전, 그리고 전쟁 영화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해낸다.
A(Acceptable, 무난함)
온 국민이 아는 해전에 영화적 재미를 더하는 데 성공한 의와 불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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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써 피운 촛불을 냉동고에 넣는다면
이거 왜 진짜야?
이 영화의 주인공은 기자 임상진(손석구)이다. 그냥 월급쟁이인 임상진. 하지만 월급쟁이 치고 실력이 좀 있는 편이다. 나름 업계의 경력자로서 임상진을 아는 사람이 좀 있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인지도. 그 인지도 덕에 제보가 들어왔다. 따르르릉. "임상진 기자님이죠?" 수화기 속의 남자는 대기업 만전에게 억울한 일을 겪었다고 제보했다. 상진이 듣기에 남자의 사연은 만연해서 기사 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더 들으면 들을수록 냄새가 진했다. 사건을 추적하는 임상진. 남자의 사연을 바탕으로 기사를 써서 제출한다. 대형 스캔들이 될 거라고 확신하는 임상진. 하지만 대형 스캔들이 반대로 돌아와 임상진을 공격했다. 동시에 연예인 마약 사건이 터지며 기사가 묻혔고, 만전은 임상진의 악의적 오보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임상진에게 들리는 소식. 임상진에게 제보했던 남자가 상진의 기사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순식간에 무너진 임상진. 재기의 칼날을 갈고 있다. 이런 상진에게 메시지가 날아온다. "기자님.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에요. 우리 어디서 만나요."
사이버 세상의 아쿠아맨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하면 글쓴이는 이야기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연출이라고 하고 싶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냥 재미있다는 뜻이다. 왜 재미있을까? 그거야 영화가 친절하게 돌다리를 하나하나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인물에 몰입할만한 근거를 영화가 안에서 친절하게 다 설명해 준다. 가령 초반부 굉장히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 중에 우리가 모를 법한 에피소드를 가져와 소개한다. 이 문장에서 핵심은 '잘 알려진 역사'라는 점인데, 배경지식 알고 비문학 문제 풀듯 익숙한 사실이 있으니 흥미로운 초반부가 빛을 발한다. 그다음은 임상진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거 간단하다. 임상진이 직업인으로서 취재하는 모습부터 보여준다. 어떻게? 하지만 이 인물에게 굉장히 강한 동기부여가 있다. 바로 자존심이다. 이 두 설정, 무작정 깊지만은 않지만 적당히 있는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이나 인물이 가진 자존심 같은 것들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데 있어 최적화되어 있다. 누구든 이 인물을 이해할 수 있으니 납득이 쉬운 것이다.
또 다르게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동력은 사실적인 디테일이다. 이 영화가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이니만큼 취재했던 내용을 르포처럼 끌고 가는 게 중요했다. 왜?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목표는 '미디어가 사람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좌지우지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게 목표라면 팀 알렙이 어떤 공작을 벌일 때 어떤 방식으로 여론을 장악하는지 그 자세한 부분을 각본으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흥미를 느끼는 방식은 '이걸 이렇게 꺾네'라는 일종의 변화구일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일반적이지 않아야 댓글부대가 가진 힘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영화가 논리적인 근거까지 잘 보여줘서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거시적인 부분만 건드리기만 하고 끝난 건 아니다. 팀 알렙과 영화 안의 등장인물들은 인간이다. 당연히 갈등도 있고 고민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영화 안에서 무의미하지 않게 소비한다. 대표적으로 이은채라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은 이 인물 하나만으로 특정 지을게 아니라 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한 여론이 움직이는 과정을 전부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침없는 영화의 화법이 주제를 풍부하게 만드는 좋은 수가 된 것이다.
'노빠꾸'로 달린다
이 영화의 다른 장점 중 하나는 온라인 세상 묘사다. 다른 영화/드라마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묘사할 때 작위적인 느낌이 강했던 것과 다르게 이 영화는 주저함이 없다. 일부러 인터넷 밈을 쓴다던가 하는 이상한 고증에 붙잡히지 않고, 또 그런 제약 없이 저속해서 영화/드라마에선 다룰 수 없던 것들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 대표적으로 영화에서 중요했던 두 장면이 있다. 찻탓캇(김동휘)가 임상진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은 사실상 영화의 승부수와도 같아서 관객 입장에서 몰입시킬만한 시발점이 되는데 자극적인 커뮤니티 글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적인 모습도 잘 포착한 감독의 저력이 빛난 장면이다. 다른 장면은 임상진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이 영화의 핵심과도 닿아있어서 구체적인 서술은 어렵지만 나름 MZ세대 중 하나고 커뮤니티 세상을 안다고 생각했던 글쓴이도 '이렇게 자극적이지만 자세할 수 있나'라는 감탄을 하게 됐다.
표면적으로 <댓글부대>는 온라인 세상을 광폭하고 세세하게 묘사했지만 사실 그 이면에 깔린 것도 중요하다. 이 영화의 각본은 철저하게 한 모티브를 반복하고 있다. 가령 영화의 첫 장면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제시한 이 사건은 한국사회의 거대한 파도와도 같아서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이 이 일에 영향을 받았다(는 전제 하에 영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댓글부대>처럼 여론을 움직이는 소수의 입김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영화가 초반에 제시한 사건처럼 긍정적으로 작동하면 좋겠지만 아닌 경우도 존재한다. 이 영화가 후자를 다룬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대해 약간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우리가 인터넷상에서 뭐든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세상이 변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댓글부대>는 그 무기력에 미스터리로 정면대결을 펼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면대결을 펼치는 임상진의 태도가 사실상 영화의 후반부까지 내내 통일감 있게 반복된다.
댓글부대 임지섭
영화가 흡인력이 있는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가 가진 힘 덕분이다. 우선 이 이야기를 전면으로 끌고 가는 손석구 배우는 감정적으로 일관된 척하는 연기가 좋았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열불이 터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영화 전면에 등장하면 이야기에 안정감이 떨어진다. 왜? 영화의 제일 첫 번째 과제가 임상진의 내면을 보여줘서 그의 영웅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임상진의 노트북과 시야 안에 들어오는 것을 오롯이 전달할 정도는 돼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과제가 있다. 이 인물의 행보가 사실상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 인물이 과하면 영화가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손석구 배우는 인물이 겪는 모든 감정을 체화하며 이야기를 견인한다. 이 연기가 후반부의 특정 인물과의 대화에서 폭발하는데 이 장면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머릿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팀 알렙 3인방의 연기도 인상 깊었다. 가장 좋았던 건 팹택 역의 홍경 배우다. 납작한 찻탓캇(김동휘)나 모호한 찡뻤킹(김성철)에 비해 이 사람은 감정적으로 낙폭이 크다. 이 낙차는 이야기 안에서 굉장히 좋은 승부수였다. 영화가 엔딩에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다. 이 핵심을 통해 찍는 감정적인 방점이 팹택이 아니었다면 밋밋하게 느껴지기 쉽다. 글쓴이는 홍경 배우가 시선을 잘 활용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왔다. 어디에서 어떻게 보면 이런 표정이 효과적일 거야! 를 잘 이해하고 연기하는 것이다. <D.P>에서도 조석봉을 괴롭힐 때 같은 웃음을 지고 모멸감 가득한 표정을 지어도 매 번 다르게 해석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본작 <댓글부대>에서도 이런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인물이 가진 내면을 아래에서 위로 찍는 카메라에 다 담기는 것이 감정연기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냉동고
글쓴이가 이렇게 <댓글부대>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엔딩에서 의문점이 찍혔다. 글쓴이가 이 <댓글부대>를 대략적으로나마 요약하자면 "온라인상을 구현하는데 진심이고, 손석구와 김동휘, 홍경, 김성철의 연기도 좋으며 미스터리로 끌고 가는 박력이 좋다. 그런데 여론에 좌지우지되는 인간의 삼라만상을 다 담았네? 또 거침없이 질주하기까지 하니 힘이 좋네?"라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좋은 영화다. 그리고 기획의도도 알 것 같다. 영화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이야기와 유리되면 안 되잖아? 그리고 이 영화도 <댓글부대>의 키보드가 품은 날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장점을 끌고 가는 하나의 특징으로 밀어붙이는 힘이 엔딩에서 느슨해진다. 글쓴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이 영화 초반부에서 한국의 현대사가 등장한다. 이 사건에서 디테일을 점점 추가하면서 이야기를 굴린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굴리는 힘은 '정말 있을 법한' 사건들이다. 커뮤니티 세상을 잘 알든 모르든 신선한 톤으로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허구의 이야기가 사실적인 부분에서 빛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흐름을 전면으로 영화 안에서 반박해 버린다.
영화가 자처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갑자기 뒤로 숨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가 고발한 한국사회의 부조리들이 좀 가볍게 느껴지는 측면이 좀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흑막인 한 집단에 대한 부분도 2024년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이다. 또 이 댓글부대와 관련한 정치적인 사건도 있었다. 이 둘에 대해 가감 없이 다루는 것이 영화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체화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그렇다면 이 인물들에게 신뢰도를 주고 기획의도를 살리는 선택도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열린 결말에 대한 불호? 글쓴이는 오히려 열린 결말로 끝내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고 생각한다. 기획의도가 체감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린 결말이기 이전에 너무 깊게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임상진과 찻탓캇의 행보에서 의문이 좀 많이 갔다. 영화가 후반부를 작위적으로 마무리를 지은 듯 했다. 오프닝과 엔딩크레딧에서 던지는 문장 몇 마디도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단서를 던져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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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 I want to know your parents, 2022
2017년. '디즈니의 20세기 폭스 인수'가 최종 결정되며 한국 영화의 투자도 자연스레, 철회되었다.
2016년 <곡성>을 제외하고는 흥행작이 없었으나 <황해, 2010>을 비롯해 <런닝맨 - 슬로우 비디오 - 나의 절친 악당들 - 대립군>까지 만든 것을 보면, 외국 회사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었으니 아쉬움이 컸다.
그렇게, 마지막 작품으로 예고되었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개봉이 취소되었다.이런 이유에는 주연 배우 "오달수"분의 "미투"였고 "재촬영"까지 고려되었으나 결국, 이를 포기했다. (이미, 사업에서 손을 떼었으니...)
이후 "김지훈"감독은 작년 <싱크홀, 2021>로 <타워, 2012> 이후 9년 만에 복귀했으며, 이 작품으로 처음으로 합을 맞춘 "설경구 - 천우희"는 나중에 찍은 <우상, 2019>이 개봉하기도 했다.
아무튼, "신세계"의 자회사 "마인드 마크"에 이관된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4년 만에 극장에 걸게 되었다.1. 그가 쭉 만들어왔던 작품
앞서 말한 <싱크홀, 2021>과 <타워, 2012>말고도, <7광구, 2011>와 <화려한 휴가, 2007>까지 "김지훈"감독은 큰 규모의 영화들을 만들어 온 연출가이다.
무엇보다 해당 영화들은 재난 및 사고들을 소재로 만든 작품들로 이번 작품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제작 규모는 작을지언정, 그가 만들어왔던 영화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점에서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가 '보여줄 사고는 어떨지?'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공존했다.해당 작품은 한 아이가 "학교폭력"에 의해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부모들로 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소위, "고구마"와 같은 전개에 많은 걱정도 있을 텐데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은 가해자들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이에 답답함은 더 배가 되지만, 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몰입보다 "제3의 입장"을 취하게 만들어 객관성을 갖추게 한다.2. 늑대는 했지만, 부모님은 못했다.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2013>도 적법한 행위를 저지르는 캐릭터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해당 작품에서는 "데드풀"처럼 "제4의 벽"을 깨는 방법까지 추가해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데, 이로써 얻어 가는 것이 뭘까?
'그들보다는 낫다'라는 "도덕적 우월감"이 우선되겠지만, 위법한 행동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배덕감"은 오묘한 재미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의 자세는 두 번째까지 이어지지 않는다.이런 이유에는 해당 작품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담임교사 "정욱"과 피해자 "건우 엄마"의 시점에 있다.
앞서 가해자들에게는 관객들의 몰입보다 "제3의 입장"으로 객관성을 갖추게 하는 것과 달리, 몰입시키려는 카메라를 보여줘 논리보단 감정을 먼저 읽게 만드는 일정하지 못한 설명은 답답함으로 연결된다.
이런 가운데, 영화의 설명력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한다.3. 아쉬운 설명들과 장면들
여기, 설명의 차이 외에도 해당 가해자들의 부모가 "병원 이사장 - 변호사 - 전직 경찰청장 - 교사"와 다르게 피해자의 부모는 "사회 배려자"로 소개된다.
그러면서, 이들의 논리는 '약자는 무조건 선(善)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惡)하다'는 "언더도그마"로 보인다.
물론,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선 그들의 행동에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척점에 서있는 입장에도 우는 것이 전부일만큼 할애되지 못한 분량과 설명력은 아쉬움을 넘어 안타까운 현 모습이 아닌가?결국. 영화는 가장 눈살이 찌푸리게 만드는 "학교폭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해당 작품의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불가피한 부분이겠지만, 고통을 가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설명이 설명으로 쌓여질까?
앞서 말했듯이 눈살이 찌푸려지듯이 불쾌한 감정부터 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장면들이다.
이미, 영화의 첫 시작에서 물에 건져낸 "건우"와 병상에 누워 관들과 몸에 있는 상흔만으로도 유추도 가능한데도 말이다. - 너무 친절하다.4.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
밝은 거울과 정지된 물이라는 뜻으로,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
명경지수(明鏡止水), 한자사전앞서 "건우"를 건져올린 강부터 "조정"과 '다 같은 배를 탔다'라는 비유까지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 물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재밌는 건 "물"은 식물들을 성장시키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 요소임에도 "공무도하가"와 "스틱스 강" 등의 일부 문학과 설화에선 "죽음"을 뜻한다.여기, '씨도둑은 못한다'라는 어른들의 말은 점점 닮아가는 외면도 있지만 자식들이 보여주는 행동에도 있다.
이런 이유에는 자녀들은 부모들을 보면서 그 행동을 따라하기 때문이다.
결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마지막 거울과 같은 뿌연 물속에서 "호창"이 바라본 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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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워즈 영화 랭킹 Star Wars Film Ranked
조지 루카스가 구상한 [스타워즈 9부작] 혹은 [스카이워커 사가]은 한마디로 '다스 베이더의 비극'라는 거대한 서사시다. 그 비극을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파토스(Pathos, 연민을 자아내는 힘, 측은지심)'을 자아내기 때문에 전설의 위치에 올랐다.
마블과 DC를 포함한 대부분의 장르물이 그렇듯이 [스타워즈] 역시 개연성을 지닌 영화는 아니다. 지난 42년간 [스타워즈]는 MCU처럼 독창적인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무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이전에 팬들에 의해 대중문화 최초로 ‘확장세계관(EU)’를 정립했다. 그런데 [시퀄 3부작]은 [스타워즈] 특유의 ‘설정 놀음’을 간과했다. 특히 캐슬린 케네디 루카스필름 대표와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이 그랬다.
◆평가 기준
1순위 시리즈로써 의의
2순위 공유 세계관 기여도
3순위 단일 작품으로써 완성도
#11 : 에피소드 9: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Episode IX: The Rise Of Skywalker, 2019)
디즈니는 ‘스카이워커 사가의 종결’을 홍보했지만, 9편의 실제 임무는 ‘브랜드 관리’다. J.J. 에이브람스의 최우선 과제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라스트 제다이]에 대한 팬들의 반발을 잠재우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이 던져놓은 7편의 떡밥을 회수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따지고 보면 라이언 존슨이 8편에서 7편의 떡밥을 싹 무시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제작을 맡은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이 ‘팬 서비스’를 핑계 삼아 8편의 아이디어를 깡그리 쓰레기통에 버린다. 속편이 나올 때마다 전편을 부정하는 [시퀄 3부작]은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팬들의 반응만 살피며 돌려 막기 하다 보니까 캐릭터, 설정, 세계관, 스토리 전부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거기다 캐슬린 케네디가 꺼내 든 황제 클론 아이디어는 그 자신이 2014년 4월 25일에 폐기한 레전드에서 가져왔다. 캐슬린 케네디의 '빈곤한 상상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라 포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만능키)' 되고, 레이는 '메리 수(천하무적)' 화 되어 시리즈 전통을 더더욱 망가뜨린다. 이게 다 라제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부 다 수습하려고 노력하면서, 9편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시퀄 3부작 내내 기존 시리즈에 대한 지나친 오마주를 하면서 전통 파괴를 일삼는 모순을 매번 일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통 [시퀄 3부작]의 주제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세 편 모두 제각각 따라 놀며 [시퀄 3부작]의 정체성과 주제를 전부 잃어버렸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는 빈곤한 상상력과 방향성의 부재다. 이것이 디즈니가 '새로운 스타워즈'를 내세우면서도 [스타워즈 6부작]을 의존하는 [시퀄 3부작]의 한계다. 고로 창의적인 비전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진이 [스타워즈] 시리즈 자체를 오독하고 있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실로 안타깝다.
#10 : 에피소드 8 : 라스트 제다이 (EPISODE VIII - THE LAST JEDI, 2017)
당연하게도 시리즈물은 단 한 편의 완성도로 평가할 수 없다. 라이언 존슨은 우리가 익히 알던 스타워즈의 영웅 서사를 해체시킨다. 영화 전체에 걸쳐 낡은 스타워즈를 새롭게 갈아엎지만, 5편 [제국의 역습]처럼 하는 일마다 죄다 실패하는 통에 다 보고 나면 허무하다. 왜 [제국의 역습]을 레퍼런스한 [라스트 제다이]는 감흥이 적을까? 비극은 공포와 연민을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 [제국의 역습]은 '부살(父殺·Patricide)' 모티브를 차용해 루크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지만, [라스트 제다이]의 성장 자체가 없는 레이에게 어떻게 연민과 공포를 가지겠는가?
라이언 존슨이 전통에만 기반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는 '미래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건 좋다. 해체하기에 앞서서 우선 시리즈의 본질을 제대로 통찰했어야 했다. 아니면 아예 과거와는 선을 긋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덧붙여서 차라리 [라스트 제다이]를 첫 번째 영화로 내세워 [시퀄 3부작]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되었다면, 훨씬 순조로웠을 것이다. 결국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일부터 저지르는 8편은 J.J. 에이브람스를 포함한 스타워즈 팬들에게는 40년 동안 쌓아왔던 공유 세계관에 대한 '반달리즘'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라이언 존슨은 제다이와 시스로 구분 짓지 말자고 계속 설득하지만, 정작 '저항군 VS 퍼스트 오더' 선악구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또, 영화 내내 탈영웅 서사를 부르짖지만, 결국 시련과 고초를 한 번도 겪지 않는 완전무결한 레이의 영웅 서사를 보면 자기모순처럼 읽힌다. 거기다 서스펜스에 약한 라이언 존슨의 약점이 겹치면서 저항군을 계속 위기로 몰아넣지만,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서 긴박감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나이브스 아웃]을 보면 그는 미스터리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다.) 전부 라이언 존슨이 별다른 설득 없이 시리즈의 요소들을 본인 입맛대로 취사선택하고 변용한 결과였다. 왜 그랬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두, 자크 데리다는 흔히 '선과 악' 같은 이항대립 체계를 종언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 가르침대로 라이언 존슨 역시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을 종식시키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사실 데리다는 이항대립의 경계, 울타리를 이야기할 뿐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 데리다는 이항대립을 해체하되 이항대립 그 자체가 종결될 수는 없다고 봤다. 왜냐하면 성경을 포함한 서구인의 사고체계 전부를 뜯어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언 존슨도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맹점에 빠졌던 것이다.
결국에는 괜찮은 완성도임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그 즉시 기록 말살 형에 처해진다. 이제 루카스 필름 내부에서조차 ‘흑역사’로 공인된 셈이다. 그러나 조만간 재평가 받을지도 모른다. 현재 라이언 존슨이 집필하는 구 공화국 시점의 신규 3부작(10,11,12편)이 2022년 12월, 2024년 12월, 2026년 12월 개봉 예정으로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케빈 파이기가 제작하는 스타워즈 작품 역시 2022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어 동일한 프로젝트로 예상된다.
#9 : 에피소드 7 : 깨어난 포스 (EPISODE VII - THE FORCE AWAKENS, 2015)
첨 볼 때는 클래식 느낌이 나서 반가웠다. 다시 보니 [깨어난 포스]는 [에피소드 4·5]을 리뉴얼했을 뿐 아니라 개봉 당시 과대평가보다 실제 완성도가 떨어지고, 의미 없는 서사가 많았다.
물론 당시에는 이러한 구멍들이 차기작을 위한 떡밥으로 간주하고 넘어갔었는데, 라이언 존슨의 8편 [라스트 제다이]이 떡밥 자체를 무시하고, 세계관 자체를 붕괴시키는 바람에 에이브람스가 직접 연출한 9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망가진 세계관을 수습하고, 설정 구멍을 막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문득 왜 에이브람스가 ‘떡밥의 제왕’이 되었을까? 가 궁금해진다. ‘쌍제이 특유의 떡밥 투척’은 독창성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다, 맥거핀(떡밥)을 많이 설정해서 재빨리 흥미를 유발하고, 연속된 위기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며 돌려 막기일 뿐이다. 7편과 9편에서 쌍제이의 단점이 크게 부각되는데, 새로운 맥거핀이 파생될 때마다 또 다른 플롯 포인트가 생긴다는 점이다. 무언가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긴 하는데 전체적인 흐름은 전진된 게 없다. 게다가 쌍제이가 캐릭터들조차 도구적으로 정보와 아이템을 주는 용도로 쓴다. 아마 데이지 리들리조차도 레이가 어떤 역할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3편 내내 자꾸 설정이 바뀌니까 말이다. 핀과 포 다메론도 마찬가지다.
디즈니가 안정된 돈벌이를 위해 ‘추억 팔이‘에 안주한 결과, 시리즈로의 신규 관객 유입에 실패한다. 진부한 [시퀄 3부작]으로 스타워즈를 처음 접한 세대들에게 "개연성도 부족하고 재미없는" 시리즈로 받아질 수밖에 없다. '영혼 없는' 팬 무비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시퀄과 프리퀄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깨어난 포스]에서 레이가 모아 온 고물을 수거하는 배급소 주인 '운카 풀럿'은 뚱뚱한 구두쇠 정도로 단편적으로 묘사한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부품가게 주인으로 나오는 '와토'는 어떤가? 이방인 '콰이곤 진'을 경계하지만 장사치답게 흥정을 건다. 자신의 노예인 아나킨의 포드 레이싱 재능을 인정해서 포드를 제공해준 적이 있으며, 경주 도박을 하기도 한다. 또, 자바 더 헛을 두려워하고, 세불바가 아나킨에게 해코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루카스는 '단역'이라고 해도 그 전후 배경와 상호작용을 미리 설정해둔다.
그렇기에 루카스의 형편없는 연출력에도 불구에도 [스타워즈]가 확장세계관의 선구자로 매김 할 수 있었다. 간과하기 쉽지만, 조지 루카스 세계관과 캐릭터를 설정할때 입체적 사고로 그린다. 거대한 세계관을 창조하려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언뜻 별 관계가 없는 대상과 우리는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 표시되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와 관습이 있지 않은가? 제임스 카메론도 조지 루카스처럼 인류학적·미학적 맥락을 철저히 따진다. 그는 [아바타]를 제작할 때 나비족 언어와 종교, 규범, 문화, 지리까지 미리 설정한 다음에야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6편 [제다이의 귀환]에서 은하 제국이 멸망하고, 들어선 신 은하 공화국이 어떤 과정으로 붕괴되었는지 7편 [깨어난 포스]가 전혀 설명하지 않아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즉, 정체불명의 퍼스트 오더가 왜 위협적인지를 관객 입장에서 와닿지 않기에 [시퀄 3부작] 내내 ‘긴장감의 부재’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부실한 세계관 구현이 2020년 현재 [시퀄 3부작] 관련 작품보다 이전 [프리퀄 3부작] 혹은 [클래식 3부작]에 기반한 미디어 믹스 및 파생상품이 더 많은 이유다.
#8 : 솔로 : 스타워즈 스토리 (SOLO: A STAR WARS STORY, 2018)
크리스 밀러 & 필 로드의 급작스러운 해고로 말미암아 캐슬린 케네디가 싹 다 갈아엎도록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워즈] 간판을 떼고 보면 괜찮은 하이스트 무비다. 다만, 구원투수로 등판한 론 하워드가 산으로 갈 뻔한 작품을 겨우겨우 수습한 티가 난다. 예를 들면, 항공권이 없는 한은 제국군에 의해 수배령이 내려지지만, 정작 제국군 입대 담당관은 그에게 성을 붙여준다. 이렇듯 얼렁뚱땅 넘어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베테랑 론 하워드가 촉박한 제작 기한 내에서 균열을 최소화했다.
해리슨 포드를 닮지 않은 엘든 이렌리치는 차분하게 연기를 잘했고, 까칠한 드로이드 L3-37과 도널드 글로버의 랜도 칼리시안은 씬 스틸러다. 그럭저럭 즐길만하지만,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되어서 그런지 속 시원한 기원담을 들려주지 않는다. 꽁꽁 싸맨 채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다 보니 자꾸만 여타의 SF 영화들이 연상될 뿐 특별한 인상을 안겨주지 못한다. 문제작 [라스트 제다이]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프랜차이즈 최초로 적자 흥행을 기록하게 된다. 이 사단의 원흉인 캐슬린 케네디는 어쩔 수 없이 한 솔로의 속편 계획과 [오비완 케노비], [보바 펫]의 앤솔로지 시리즈를 취소한다.
그러나 [더 만달로리안]에 앞서 시리즈 최초로 '암시장의 밀수와 범죄'를 조명한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자바 더 핫이 이끄는 핫 카르텔, 코렐리아 행성에서 제국 전함이 건조되는 장면, 우주 공항의 묘사, 코악시움 광산의 묘사, 츄바카와 우키 종족의 묘사 등 [시퀄 3부작]이 등한시했던 세계관 구현에 노력했다.
#7 :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 (EPISODE I - THE PHANTOM MENACE, 1999)
[프리퀄 3부작]의 밑바탕을 깔기 위한 거대한 예고편에 불과하다. 포드 레이스 장면과 다스 몰과의 검투신만 보거나 [보이지 않는 위험]을 통째로 건너뛰더라도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시퀄 3부작’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위험]의 세계관 확장이 긍정적인 평가로 돌아섰다. 살다 살다 [프리퀄 3부작]을 응원하는 날이 오다니
무역협상, 분리주의 연합 등 진지한 정치적 담론, 자자 빙크스의 고통스러운 CG 슬랩스틱, 부재한 주인공, 처참한 대사, 느슨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3부작과는 확연히 차별화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바로 로마 공화정이 제국화되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결함으로 인해 자신과 주변인이 파멸로 치닫는 셰익스피어리언 비극을 시리즈에 훌륭하게 이식시켰기 때문이다.
또, [클래식 3부작] 과는 이질적이었던 디자인이 클래식의 변영에 지나지 않는 진부한 디자인을 선보인 [시퀄 3부작]으로 말미암아 지금에 와서는 과감한 도전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끝으로 미디클로리언을 통해 '기(氣)'에서 착안한 포스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 개념으로 노예 신분인 아나킨을 '선택받은 자'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8편 이전부터 누구나 포스를 가질 수 있다는 '포스 에브리웨어' 설정은 이미 존재했었다.
#6 :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EPISODE II - ATTACK OF THE CLONES, 2002)
[클론의 습격]은 조지 루카스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사와 형편없는 연출, 헤이든 크리스텐슨의 발성 문제가 겹치면서 '역대 최악의 로맨스 영화'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100% 디지털 촬영으로 완성된 첫 블록버스터이며, 이 영화를 기점으로 영화 산업은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다와 두쿠 백작의 라이트세이버 결투, 제다이 기사단와 분리주의 연합의 드로이드 간 전투 등으로 액션을 강화했으며, 의회를 장악한 팰버틴 의장이 무역 연합에 대항하고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은하 공화국을 방어할 목적으로 비상 권한을 부여받는다거나 보바 펫과 클론 트루퍼를 결부 짓는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이다. 루카스의 탁월한 기획력에 비해([시스의 복수]을 위해 아껴둔) 드라마의 부재를 막을 캐릭터 묘사에 실패하면서 시리즈 사상 가장 지루하다는 혹평을 면치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조지 루카스가 프리퀄을 만들게 된 직접적인 동기인 '클론 전쟁'의 개전만을 알린다는 점이다. 추후 전쟁의 진행 상황은 [클론 전쟁(2003/2008)]로 대체됐다. 있으나 마나 한 ‘제다이의 결혼 금지 규율’ 따위보다 '클론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뒀다면, [에피소드 1·2]가 이리 허무하게 낭비되지 않았을 터, 무척 안타깝다.
하지만 2편의 숨은 장점은 비극의 단초인 ‘하마르티아(Hamartia)’를 제공했다는 데에 있다. '하마르티아’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가다’ ‘길을 잃고 헤매다’이지만, 하마르티아는 주인공이 지닌 결함으로, 아나킨은 금혼 계율을 어기고 파드메와 결혼하고, 제다이답지 않게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이것이 아나킨의 하마르티아다. 그의 판단 실수는 '비극'이라는 커다란 기계를 작동시킨다. 마치 브레이크 페달이 고장 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자동차의 결함처럼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2편의 빌드업이 있었기에 3편에서 극적으로 반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 (EPISODE VI - RETURN OF THE JEDI, 1983)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처럼, 3부작을 마무리 짓는 일은 어렵다. [제다이의 귀환]은 전편 [제국의 역습]이 근사하게 던져놓았던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고, 지금까지 끌어온 시리즈의 결말을 내야 하는 힘겨운 미션이 남아있었다. 그럼 [스타워즈]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동일하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어떻게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제다이의 귀환]라는 제목은 아나킨이 메피스토펠레스(팰 버틴)을 원자로에 던져버리며, 인간성을 회복하는 걸 의미한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들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부자간의 화해가 이뤄진다. 여기서 그리스 비극과 [스타워즈]의 차이점이 발견한다. 그리스 비극은 신이 정한 운명론에 의존하지만, 팰버틴에게 끌려다니던 다스 베이더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금 아나킨 스카이워커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타락한 영웅이 스스로 선택해서 악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포스의 균형'이다.
더욱이 6편은 분명히 4편 [새로운 희망]의 아이디어를 재탕하고, 인물 간의 갈등구조가 할리우드 영화답게 안전하다.
그것이야말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게 [배트맨 비긴즈]을 참고하라는 교훈으로 받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제다이의 귀환]는 클래식 3부작이 남긴 수많은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무용담을 장중하고 우아하게 마무리했다. 이후 루크와 레아를 중심으로 레전드 확장 세계관(EU)이 진행되고, 팬들로 하여금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악당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뒤에 팬들의 소원은 마침내 이뤄진다.
#4 :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 (ROGUE ONE: A STAR WARS STORY, 2016)
드디어 디즈니 스타워즈가 재탕을 멈추고, [스타워즈]의 감춰진 이면을 파헤친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저항군 특공대들의 희생을 다룬다. 원래 [스타워즈] 자체가 제2차 대전 전쟁 영화들에게서 착안한 작품이었다. 은하제국 군복은 나치 독일과 매우 유사하며, 저항군은 연합 군을 연상시키지 않은가? [로그 원]은 한발 더 나아가 ‘레지스탕스‘의 이미지를 덧입힌다.
다시 말해 스타워즈 특유의 유치한 가족영화의 틀을 버리고, 본래 스타워즈 세계관에 지니고 있던 2차 대전 특공대를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스타워즈 6부작]과 연결성을 중시한다. 무엇보다 가렛 에드워즈의 장단점이 다 발휘됐다. 무미건조한 캐릭터 구축과 초반부의 산만한 드라마가 아쉽지만, 스펙터클하게 규모를 살리는 연출이나 사실성을 강조한 서사구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요즘 미드 [만달로디안]가 호평을 받는 이유는 [로그 원]과 동일하다. 기존 스타워즈 설정을 존중하면서도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참신한 시도가 병행되었다는 점이 성공 비결이다.
#3 :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EPISODE III - REVENGE OF THE SITH, 2005)
조지 루카스의 여전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선다. 아나킨은 한 개인이 막을 수 없는 불행이 연달아 닥치며 타락하게 되고, 공화국 역시 멸망하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가지게 한다. [프리퀄 3부작]을 통해 ‘제다이 vs 시스’로 세계관이 확장하게 되면서 클래식 3부작의 ‘부자간의 골육상잔'은 수 천 년간 이어진 제다이와 시스의 대립 중 하나로 재정립한다.
시스 로드인 황제가 제다이 기사단의 '선택받은 자'를 회유하며 시스의 복수를 완성한다. 스타워즈 팬들은 아니킨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가 되는 결말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창시자가 새롭게 공개한 사실들에 놀람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승과 제자의 처절한 혈투는 물론이고, 요다가 황제 암살에 실패하면서 은거한다거나 오더 66에 의한 제다이 기사단이 몰락하고, C3P3와 R2D2가 기억을 잃는 과정, 오비완이 포스의 영이 되는 법을 요다에게 전수해준다거나 파드메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들쑥날쑥한 [프리퀄 3부작]을 매끄럽게 마무리하면서도 [클래식 3부작]에서 빠진 빈틈을 세심하게 메웠다.
또, 시리즈 최초의 배드 엔딩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세이버가 누군가에 전해지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다. 서사와 액션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유일한 스타워즈 작품이며, 밝고 유쾌한 [클래식 3부작]과는 180도 다른 어둡고 진지한 [프리퀄 3부작]을 성공적으로 완결 지었다.
만약 ‘현자 다스 플레이거스의 비극’이 없었다면 9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의 황제 클론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될 만큼 확장 세계관과 캐릭터 정립에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2 :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EPISODE IV - A NEW HOPE, 1977)
대중문화를 영원히 바꾼 영화다. 처음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정의 내리고, '콘텐츠 산업'으로의 패러다임을 바꿔, 부가상품을 대중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산업 역시 [스타워즈]를 기점으로 현실의 영역에서 ‘판타지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국내에서 [스타워즈]가 유치하다고들 하는데, 실제로 그러하다. 원래 조지 루카스가 어릴 적 즐겨본 코믹스 [플래시 고든],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 조지프 캠벨의 원형 신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동양의 '기(氣)' 개념을 서양식으로 재해석한 포스 등의 철학적 우화, 전쟁영화, 갱스터, 호러, 뮤지컬, 서부극의 요소를 섞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가족영화이자 밝고 경쾌한 어드벤처 SF 영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복합장르 전략은 이후 영화 제작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스타워즈]는 조지프 캠벨의 원형 신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칼로 총알(빔)을 막거나 우주가 배경인데 18세기 라인 배틀을 펼치는 광경이 의아할 것이다. 이는 시대와 문화권에 구애받지 않는 원형 신화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편부터 '다스 베이더'를 그리스 비극처럼 그리면서 시리즈로써 환골탈태한다. 이때부터 할리우드 극작술에 '원형 신화'가 도입된다.
#1 : 에피소드 5 : 제국의 역습 (EPISODE V - THE EMPIRE STRIKES BACK, 1980)
루소 형제의 말마따나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이 관객의 예상과 기대를 배반한 용기는 [제국의 역습]에서 배웠다. 당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도대체 뭘 본 거지?" 싶었다고 한다. 악에게 패배한 주인공, 어긋난 로맨스, 새드 엔딩은 상업영화의 오래된 금기들이었다.
전편 [새로운 희망]이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완결성을 갖춘 반면에 [제국의 역습]은 어떻게 이야기를 확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선례로 여전히 남아있다. 스타워즈 9부작의 밑그림은 여기서 출발했다. 한편 팬들은 [새로운 희망]과 [제국의 역습] 사이의 설정 구멍을 메우며 [확장 세계관 (EU)]를 만들고 놀았다. 바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기원’인 것이다, 이것이 ‘스타워즈’를 신화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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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에서 만난 타노스와 콜렉터 #7
환몽(幻夢) CINE 리뷰 7화_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Sicario, 2015) 리뷰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의 후속작 '시카리오 : 데이 오브 솔다도'가 개봉했습니다. 숨 막히도록 건조하게 설계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세계관이 그만큼 인상 깊었다는 의미겠지요.
기념하여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조금 깊게 이야기 해봤습니다!
(공교롭게도 멕시코라는 땅에서 어벤져스의 타노스와 가오갤의 콜렉터의 조우네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연출 특징!
- 정의를 위한 악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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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줄평 / 몽줄평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시카리오 #시카리오암살자의도시 #드니빌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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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파티를 앞둔 교내는 설렘으로 가득하지만,
조이는 좀처럼 분위기에 섞이지 못한다.
그러던 중, 총을 든 학생들이
교내 식당에 침입해 학생들을 인질로 붙잡고,
가까스로 학교에서 빠져나온 조이는
학교에 남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