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4-28 15:32:32
5월 첫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대거 개봉하는 대형 영화와 함께 맞는 문화의 날!

금주에는 오랜만에 대형 영화들이 대거 개봉합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오컬트 액션 영화로 돌아온 마동석 배우의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부터 마블의 새 시대를 열어줄 <썬더볼츠*>, 일본 청춘 영화의 계보를 이어갈 <해피엔드>, 구병모 작가의 동명의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과>까지!
특히 4월 마지막 주 수요일인 오늘은 ‘문화가 있는 날’이니,
극장 나들이 어떠신가요?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
Holy Night: Demon Hunters

개요: 액션 | 대한민국 | 92분
감독: 임대희
주연: 마동석, 서현, 이다윗, 경수진, 정지소
개봉: 2025.04.30.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줄거리
악을 숭배하는 집단에 의해 혼란에 빠진 도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어둠의 해결사 ‘거룩한 밤’ 팀 바우(마동석), 샤론(서현), 김군(이다윗)이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오컬트 액션.
썬더볼츠*
Thunderbolts*

개요: 액션 | 미국
감독: 제이크 슈레이어
주연: 플로렌스 퓨, 세바스찬 스탠, 와이어트 러셀, 올가 쿠릴렌코, 제랄딘 비스와나탄, 크리스 바우어, 웬델 피어스, 데이빗 하버, 해나 존-케이먼
개봉: 2025.04.30.
배급: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줄거리
초능력 없음, 히어로 없음, 포기도 없음! 마블 역사를 새로 쓸 별난 놈들의 예측불가 팀업이 폭발한다!
어벤져스가 사라진 세상, CIA 국장 '발렌티나'는 새로운 팀을 꾸릴 계획을 세운다. 그녀가 설계한 위험한 함정에 빠진 '옐레나', '윈터 솔져', '레드 가디언', '존 워커', '고스트', '태스크 마스터' 별난 놈들만 모인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한 팀이 되고,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와 맞서야 하는 위험한 임무에 투입된다. 서로를 전혀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생존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들은 진정한 팀으로 거듭나야만 하는데...
해피엔드
Happyend

개요: 드라마 | 일본 | 113분
감독: 네오 소라
주연: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하야시 유타, 시나 펭, 아라지, 이노리 키라라, 나카지마 아유무
개봉: 2025.04.30.
배급: 영화사 진진

줄거리
점멸등이 일렁이는 근미래의 도쿄. 음악에 빠진 고등학생 ‘유타’와 ‘코우’는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나날을 보낸다. 동아리방을 찾아 늦은 밤 학교에 잠입한 그들은 교장 ‘나가이’의 고급 차량에 발칙한 장난을 치고, 분노한 학교는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다. 그날 이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파과
THE OLD WOMAN WITH THE KNIFE

개요: 액션 | 대한민국 | 122분
감독: 민규동
주연: 이혜영, 김성철, 연우진, 김무열, 신시아
개봉: 2025.04.30.
배급: (주)NEW

줄거리
지킬 게 생긴 킬러 VS 잃을 게 없는 킬러 40여 년간 감정 없이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방역해온 60대 킬러 ‘조각’(이혜영). ‘대모님’이라 불리며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지만 오랜 시간 몸담은 회사 ‘신성방역’에서도 점차 한물간 취급을 받는다. 한편, 평생 ‘조각’을 쫓은 젊고 혈기 왕성한 킬러 ‘투우’(김성철)는 ‘신성방역’의 새로운 일원이 되고 ‘조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스승 ‘류’(김무열)와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약속했던 ‘조각’은 예기치 않게 상처를 입은 그날 밤, 자신을 치료해 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과 그의 딸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낀다. ‘투우’는 그런 낯선 ‘조각’의 모습에 분노가 폭발하는데…
삶의 끝자락에서, 가장 강렬한 대결이 시작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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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캡틴
더 캡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지만, 비이성, 광기의 시대에서는 나타날 수밖에 없는 블랙 코미디. 영화는 매우 역설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입장에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마치 '세르비안 필름'처럼 세르비아인 감독이 자기 나라에서 저지른 폭력을 포르노에 빗대어 고발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헤롤트가 우연히 발견한 장교복을 입으면서, 제복의 힘에 경도되는 과정과 인간성이 파괴되는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4월, 헤롤트 일병은 탈영한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 시기에 독일군 탈영병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전쟁 끝무렵이니 완전히 수세에 몰린 독일군이 계속 후퇴하고 있었고, 여기서 죽는 건 그야말로 개죽음이라고 생각한 병사들이 하나둘 탈영을 시도했다.
독일 헌병대에서는 이렇게 탈영한 군인을 잡아들이거나 즉결 처형하기도 했는데, 이 와중에 헤롤트 일병의 실화가 발생한다. 헤롤트는 탈영을 하지만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막막하다. 그러다 우연히 길가에 세워진 군용 짚차에서 트렁크를 발견하고, 그 안에 공군 대위의 제복과 군화를 비롯한 훈장 등 완벽한 세트를 발견한다.
고작 스무 살의 어린 헤롤트였지만, 이미 1년 정도 전방에서 전투에 참전했었고, 초반에는 매우 영웅적인 군인이어서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로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 헤롤트가 어떤 이유에서 탈영을 한 것인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리지만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철십자 훈장까지 받은 경력을 보면, 나름 배짱도 있고, 머리도 있는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헤롤트는 장교 군복을 차려 입고, 스스로 장교가 된 것으로 자기 최면 및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탈영병을 모아 '헤롤트 부대'를 만든다. 그는 후방을 다니며 마주치는 탈영병을 규합하고, 농가에서 밥과 술을 얻어 먹으며 다니는데, 탈영병을 추적하는 헌병대를 만나 위기에 놓이지만, 헤롤트는 자기가 '최고지도자'의 직접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큰소리 치며 위기를 넘긴다.
헌병대 대위와 함께 탈영병들이 잡혀 있는 임시수용소에 도착해 수용소장 쉬테의 환대를 받는다. 쉬테는 탈영병들을 죽이고 싶지만, 그럴 경우 자신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불만만 터뜨리고 있는데, 헤롤트가 쉬테에게 '총통의 특명'을 받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탈영병들을 처리하겠다고 큰소리 친다.
헤롤트는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공군 장교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장교가 되었다는 확신에 차서 말하고 행동한다. 그가 일병이었을 때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판단과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탈영병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헤롤트와 그의 부대가 탈영병 약 90여 명을 대공포로 살해한다. 탈영병이라 해도 같은 독일인이고, 전선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임에 틀림없으며, 헤롤트 자신도 탈영병이었던 걸 생각하면, 헤롤트는 자신이 탈영병이라는 죄의식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헤롤트가 갑자기 장교복을 입고, 장교의 권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이때 헤롤트의 본성이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전투를 통해 선량한 청년이었던 헤롤트가 점점 괴물로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헤롤트의 행위가 자신이 의식하지 않고 있어도, 독일군이 같은 독일군을 살해한다는 점에서 나치의 폭력성, 전쟁광 히틀러와 독일군의 야만성을 풍자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헤롤트의 광기는 순박한 청년이 전쟁에서 미쳐가는 과정과 함께, 당시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광기와 폭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사건은 뒤에서 발생한다. 탈영병들을 살해한 헤롤트와 그의 부대는 신고를 받고 들이닥치 육군헌병대에 체포된다. 헤롤트도 이 과정에서 체포되며 그가 장교가 아닌, 일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헤롤트는 군사법정에 서게 되는데, 재판장은 장교사칭, 탈영병 학살의 죄를 물어 사형을 집행하려 하지만, 다른 장교가 헤롤트의 행동은 독일군인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행동이며, 독일이 전쟁에서 져도 나중에 독일군의 일부는 비밀 저항조직을 만들어 적들과 싸울 것이며, 이때 헤롤트 같은 군인이 필요한 인재라고 옹호한다.
독일의 군부는 연합군에 패배한 다음에도 어떻게든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헤롤트 같은 인물을 독일군의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독일군부는 히틀러처럼 이미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헤롤트가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무사히 탈출해 숲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실제 헤롤트는 그로부터 얼마 살지 못하고 참수형을 당한다.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독일이 패하고, 헤롤트는 항구도시이자 해군주둔지인 빌헬름스 하펜으로 가서 굴뚝청소부로 일하며 살았다. 그가 욕심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다면 아마 늙어죽을 때까지 살았겠지만, 1945년 5월에 빵을 훔치다 영국 해군에게 체포된다. 당시 영국 해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단지 빵을 훔쳤다는 가벼운 죄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헤롤트는 자기가 군인이었을 때 저질렀던 장교사칭과 탈영병 학살까지 모두 밝혀졌고, 영국 해군은 헤롤트를 끌고 수용소가 있던 아셴도르퍼모어의 수용소 부지로 이송되어 학살당한 장소에서 195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영국 해군은 헤롤트와 그의 부대원들을 검거했고, 모두 여섯 명이 체포되어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헤롤트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1946년 11월 29일, 볼펜뷔텔 교도소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모두 참수되었다.
이때 헤롤트의 나이는 불과 스물 한 살. 전쟁이 헤롤트를 괴물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헤롤트의 내면에 있던 괴물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권력을 가진 자가 광기에 휩싸이기 쉽고, 이성을 잃으면 얼마나 위험해지는가를 헤롤트의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어리기만한 헤롤트는 그래서 더욱 쉽게 권력의 노예, 권력의 광기에 영혼을 빼앗겼을 수 있다. 당시 독일 전체가 이미 미쳐버렸고, 나치의 광기에 휩싸인 뒤여서 청년들의 생각도 그렇게 세뇌되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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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기자와 국가, 그리고 한 개인의 변화를 논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뉴스 채널의 간판스타인 ‘프랑스 드 뫼르(레아 세두)’는 성공한 언론인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물론 그녀의 삶이 완벽하지는 않다. 소설가 남편과의 불화와 학업에 관심이 없는 어린 아들의 존재는 그녀를 괴롭힌다. 완성도 높은 그녀의 리포트는 현실과 조작 사이에서 줄을 타며 그녀의 약점이 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길 위에서 발생한다. 프랑스는 운전 중에 모로코계 이민자 출신 남성 바티스트의 오토바이와 충돌하고, 이 교통사고는 뉴스가 된다. 언제나 기자이자 동시에 프랑스의 대표자였던 그녀는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할지 알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점점 당황하고 흔들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신화는 그저 옛날이야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때때로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교훈을 준다.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의 형벌이 그렇다. 교활한 자로 알려진 그는 제우스의 치부를 드러내고, 하데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속여 두 번째 삶을 누리며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그러자 신들은 그의 죄에 대해 평생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내려 무의미한 노동 속에 시시포스를 영원히 가두었다.
흥미롭게도 시시포스의 형벌은 인간 삶에 대한 비유와도 같다. 바위를 산 정상에 올리는 행위로 시시포스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바위를 움직인다. 알베르 카뮈가 지적했듯이 설령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 해도 바위를 올리며 스스로 움직이는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시포스는 신들이 의도한 무의미함에 굴복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삶의 순간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즐길 때 비로소 진짜 살아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진정한 삶의 변화는 그 결과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2021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던 브루노 뒤몽 감독의 영화 <프랑스>는 이러한 시시포스의 교훈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는 '프랑스'라는 이름의 한 기자, 국가, 개인의 변화에 대해 말하지만, 그 변화를 결과로써 설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는 가시적인 변화를 만들지 못하는 굴레에 갇여 있다 하더라도, 시시포스처럼 지금 이 순간의 현재를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 자체가 변화라고 이야기한다.
기자 프랑스의 변화
기자 프랑스는 마크롱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이견 없이 가장 먼저 발언권을 얻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닌 스타다. 특히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인 프랑스의 모습은 왜 그녀가 스타 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진행자로서 국제사회 이슈를 전달하고, 냉철하고 중립적인 태도로 정치인과 평론가들을 상대한다. 필요하다면 사헬 지역의 폭탄 사이를 뛰어다니며, 대통령을 당황시키는 질문을 거침없이 던지기도 한다. 또 촬영과 편집까지 신경 쓰며 화면에 담길 자신의 모습을 기획하는 데 능숙한 프로페셔널한 기자의 모습도 보여준다.
반면 후반부에 묘사되는 프랑스는 앞서 만나 본 그 기자가 아닌 듯싶다. 특히 영화 후반 바다로 국경을 넘는 난민에 대한 취재에선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다른 이에게 업혀 배에 탑승하거나, 난민들이 탄 배에서 필요한 때에만 영상을 찍은 후 더 쾌적한 요트로 넘어가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식이다. 물론 최종적으로 편집된 리포트 속 프랑스는 여전히 현장을 뛰어다니는 열정적인 기자이지만, 그 과정에서 프랑스는 이전과 매우 다른 인물처럼 보인다. 실제로 리포트 속 거짓이 밝혀지자 그녀는 격렬한 비난에 직면한다.
그러나 영화는 겉보기와 달리 전후반부의 기자 프랑스가 사실 변한 게 없음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녀는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지만, 대통령의 답변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기 위한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전쟁지역을 생생히 담은 그녀의 리포트 역시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가로지르는 '연출'이라는 행위를 통해 얻어진 결과에 불과했다. 단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짓됨과 동시에 진실된 그녀의 행동이 어떤 모습으로 포착됐는지만 다를 뿐이다.
국가 프랑스의 변화
변화 없는 기자 프랑스는 변하지 않는 국가 프랑스와도 오버랩된다. 레아 세두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선명해지는 하얀 피부, 빨간 입술, 파란 눈동자의 조화가 상징적이듯이 영화는 '프랑스(국가)'와 '프랑스(레아 세두)'를 교묘하게 섞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강대국이지만 사회 내적으로 문화와 인종의 차이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되는 프랑스의 모습은 사회적 성공과 별개로 가족과 여러 불화를 겪는 프랑스의 일상을 닮았다.
이때 프랑스가 직접 취재하러 가는 사헬 지역은 변하지 않는 국가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하라 사막의 남쪽 경계인 사헬 지역은 아직 프랑스군이 주둔하며 테러집단을 막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프랑스군 주둔은 테러를 감소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지역 주민들의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키우고 있다. 과거 식민주의 제국으로서 북아프리카를 지배했던 프랑스가 모양새만 다를 뿐 다시금 식민주의적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정치, 경제, 군사⋅안보 영역에서 아프리카에서 과거 자신의 식민지였던 국가들과 프랑사프리크(Françafrique)라고 불리는 후견 관계 및 불투명한 인맥 네트워크를 유지해 왔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군의 주둔은 이 관계의 신식민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듯 보인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가 자신과 접촉사고를 당한 바티스트 집을 방문해 "제 행동의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프랑스 개인은 물론 국가의 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기자이자 국가로서 프랑스는 같은 선택을 반복하며 무의미하게 돌덩이를 정상까지 올리는 듯 보인다.
개인 프랑스의 변화
흥미로운 것은 미디어와 저널리즘 군상 혹은 한 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풍자나 비판처럼 느껴지려는 차에, <프랑스>가 반복의 무의미함을 벗어날 힌트를 한 개인인 프랑스의 내면으로부터 찾는다는 점이다. 뒤몽 감독이 자신의 관심이 “오직 프랑스라는 인물의 내면에 있다”라고 밝힌 것처럼. 실제로 국가로서도 저널리스트로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던 프랑스는 그저 한 개인일 때 비로소 균열과 변화를 경험한다. 항상 거시적인 차원에서 세상에 접근하던 그녀는 접촉사고를 계기로 타인과 일대일 관계를 맺게 되고, 그로부터 비롯된 인연은 한 가지 깨우침을 되돌아온다.
후반부 다니엘과의 대화는 그 정점이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체념했고, 더 이상 삶은 변화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듯한 프랑스. 그녀는 살인 강간범이라는 전과 이력을 알고서도 20년간 남편과 함께 살았던 그녀에게 정말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다니엘은 수 차례에 걸쳐 사람의 변화를 믿는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다니엘의 답은 영화의 첫 장면, 엘리제 궁에서의 기자회견과도 일맥상통한다. 프랑스는 "현재의 프랑스 사회를 관통하는 '반란적' 상황에 대해 무관심인지 무기력한 지" 묻는다. 마크롱 대통령은 "개선의 여지는 많고 무관심한 적은 없었다"라면서 국가인 '프랑스'와 영화 내 인물이자 기자인 '프랑스' 모두에게 답한다. 다니엘과의 인터뷰 후에 올 때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해변을 보면서 프랑스가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변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뒤몽 감독은 씨네유로파와 인터뷰에서 "이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하나의 '질적 변화(metamorphosis)'"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를 선과 악, 진실과 거짓으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대신 그저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현재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는 '죽다'와 '부활하다'의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 'de meurs'가 프랑스의 풀 네임인 'France de meurs'에 포함된 이유이기도 하다. 진보와 이상은 죽었고 현재만 남았다는 대사에 걸맞게, 프랑스는 달라지지 않는 반복 속에서 벗어나 현재와 순간 속에서 시시포스처럼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분명 뒤몽 감독의 다른 작품들처럼 난해하고 어렵다. 영화가 끝난 후 검색을 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프랑스의 사회 정치적 이슈들과의 연관성은 진입장벽이 된다. 또 쉽게 접하기 힘든 촬영 방식은 영화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카메라와 붐 마이크가 화면 안에 등장하는 것은 예삿일이다. 카메라는 차 안의 모습을 몰래 찍기도 하고, 인물의 바로 밑과 위에 위치하기도 한다. 제4의 벽을 넘어서는 듯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파란 두 눈은 그녀가 레아 세두인지 프랑스 드 뫼르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낯섦은 영화에 대한 호불호의 간격을 좁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낯선 접근법이 신선함이 될 때, 이는 상반된 이미지를 천연덕스럽게 오가며 서로 다른 세 층위의 프랑스를 하나의 접점으로 연결시키는 레아 세두의 연기와 만나 <프랑스>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기도 한다. 자칫 '유명인의 시련, 좌절, 그리고 극복'이라는 뻔한 이야기에 묻힐 수 있었던 '프랑스'의 변화가 기자, 국가, 개인의 맥락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을 드러내며 깊은 사유의 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이 복잡한 이야기를 얼굴과 표정, 눈물만으로 담고 또 전달하는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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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김향기, <우아한 거짓말> <증인> 잇는 관객공감 & 따뜻한 필모그래피에 주목!
출처: 네이버 영화
배우 김향기가 2021년 새해를 여는 따스한 위로의 힐링 영화 <아이>에서 아동학과 졸업반의 보호종료아동 '아영'역을 맡으며 그동안 따뜻한 메시지로 관객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선사해 온 필모그래피가 주목 받고 있다.
배우 김향기, 류현경, 염혜란 주연의 영화 <아이>는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 ‘아영(김향기)’이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초보 엄마 ‘영채(류현경)’의 베이비시터가 되면서 시작되는 따스한 위로와 치유를 그린 영화로 올해 설 연휴 극장가에 만날 따뜻한 감성의 작품으로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아이>가 전할 따뜻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와 함께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은 바로 주인공 ‘아영’을 연기한 배우 김향기이다. 2014년 이한 감독의 <우아한 거짓말>에서 아무 말 없이 세상을 떠난 14살 소녀 ‘천지’로 161만 관객의 가슴에 따뜻한 감동과 여운을 전하며 백상예술대상 여자신인연기상을 수상한 그녀는 2019년 253만 관객을 동원한 <증인>에서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소녀 ‘지우’역을 맡아 다시 한번 뛰어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무엇보다 <아이>의 ‘아영’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가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배우 김향기가 선택한 두 편의 작품이 선사한 쉽게 가시지 않는 울림과 그 속에서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한 배우의 연기력 때문이다. <우아한 거짓말>과 <증인> 두 작품 모두 따뜻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로 관객들의 가슴에 짙은 여운을 남기며 입소문 속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두 작품 속에서 각기 다른 캐릭터들의 발성, 표정, 움직임까지 완벽하게 연기한 김향기 배우 역시 큰 사랑을 받았다. 작품과 연기에 대한 신뢰감으로 김향기의 선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아이>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김향기 배우가 맡은 <아이>의 ‘아영’은 누구보다 강한 생활력을 가진 아동학과 졸업반의 보호종료아동으로,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초보 엄마 ‘영채(류현경)’와 함께 상처로 가득한 세상에서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치유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아이>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김현탁 감독은 “김향기 배우는 아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어떤 지점에서는 감독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내 역할은 김향기 배우가 연기하는 아영의 모습을 잘 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맡은 작품마다 완벽한 캐릭터 연기로 관객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전한 김향기 배우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우아한 거짓말>과 <증인>에 이어 <아이>까지 관객공감 200%의 따뜻한 필모그래피로 기대를 모으는 김향기 주연의 <아이>는 2월 10일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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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질서에 기우는 정의의 병폐 속 무기력한 개인
끔찍한 비명과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바깥과는 달리 고급 저택에서는 호화로운 결혼 파티를 펼치고 있다. 녹색과 빨간색으로 점점 물들고 있는 세상은 내부에 신호를 주지만 그저 불안의 기우일 뿐이라고 넘긴다. 한편 유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마리안느는 유모를 돕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마리안느가 나간 사이 들이닥친 시위대는 집 안의 곳곳을 무너뜨리기 시작하고 믿었던 집안의 피고용인들이 합세해 혼란과 피바람이 몰아친다. 이유 없는 폭력의 시위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참혹한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또다시 절망을 바라보며 새 질서를 거듭한다. 하지만 새 질서를 가져올수록 부패와 부조리함이 반복될 뿐, 더욱 혼란에 빠지며 폭력과 희생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수많은 혼란 속에서도 다른 계급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이는 마리안과 마르타 모자뿐이다.
영화의 무자비한 폭력에 어떤 사회에서도 공평함을 발견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체제 변환 이후의 모습이 아닌 파국 이후의 새 질서를 그리면서 최악을 생각했지만, 그 보다 더 최악인 순간에서 끊임없이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고 배신과 폭력의 연속은 체제 변환의 전쟁일 뿐이다. 무채색과 유채색의 대비는 또 다른 대비를 불러와 거꾸로 비치는 제목이 머지않은 미래를 비추듯 관객을 비춘다. 부패가 청산되고 갈등이 해소되는 대신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다.” 이 말과 함께 그저 이름뿐인 전쟁 같은 새 질서가 펼쳐진다.
*멕시코의 국기는 초록색, 하얀색, 빨간색 그리고 가운데엔 멕시코의 국장이 그려져 있다. 초록색은 독립과 대지, 하얀색은 순결과 통일, 빨간색은 백인과 인디오, 메스티소 등 인종의 통합과 국가 독립을 위해 바친 희생을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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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도와 비유의 방법론
수학여행 하루 전날을 배경으로 두 여고생 세미와 하은의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다루는 영화인 <너와 나>는 무엇보다도 감독 조현철의 연출적 야심이 여실히 드러난 영화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수학여행이라 함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게 될 그 수학여행이다. 두 여학생의 로맨스와 세월호 참사의 조합. 이 영화는 바로 이 이질적인 조합에서부터 출발하는 영화이다.
우선 '왜 두 여학생의 첫사랑과 세월호 참사를 결합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찾기 어려울 것 같다. 조현철 감독은 인터뷰에서 모종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고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세월호 참사 역시 자신에게 특별한 사건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창작 동기는 조현철 감독의 개인적인 그 무엇으로 남겨놓자. 그렇다면 그 다음 질문은 이 영화가 그 둘을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감독 조현철의 연출적 야심이 드러나는 지점과 이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순간은 바로 이 질문을 떠올릴 때이다.
이 영화는 두 여학생의 로맨스와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 중 어디까지나 전자를 우선시하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에서는 세월호와 관련된 직접적 언급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세월호 참사 당일이 되기도 전에 영화가 끝난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이 세월호에 관한 영화임을 환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매우 문학적이다. 세미는 하은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하은(그리고 이후에 꿈속에서 하은이 된 자신)이 풀밭에 죽은 것처럼 누워있었다고 했고, 또 온 동네가 텅 빈 채로 동네의 알던 모든 사람들과 친구들이 똑같이 누워있었다고, 이유없이 하은이 걱정되고 불안하다고 말한다. 또 그 꿈 속 하은이 된 세미가 버스에서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태풍에 관한 뉴스가 효과음으로 흘러나오며, 개 똘똘이를 찾은 똘똘이의 주인 아주머니는 똘똘이를 자식처럼 아꼈다며 생각보다 훨씬 깊은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정황상 이 영화의 사건과 단서들이 세월호를 가리킨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비유와 상징, 환기의 방법을 통해 애써 '세월호'라는 단어를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미의 꿈속 오열하는 하은이 탑승한 버스에서 태풍 재난 뉴스가 흘러나올 때, 그것은 누가 봐도 그 다음날 있을 재난을 환기하는 것이다. 또, 똘똘이를 잃은 줄 알고 펑펑 우는 주인 아주머니의 눈물은 누가 봐도 똘똘이 이상의 것, 자식을 잃은 부모의 눈물인 것이다(공교롭게도 아주머니 역을 맡은 길해연 배우는 <벌새>에서도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 역할을 연기했다.). <너와 나>는 세월호 참사를 그것의 일부분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 보조관념들을 가져와 환유의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사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에서 해당 사건을 애써 에둘러 표현하는 것은 낯선 일은 전혀 아니다. 같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 <생일>을 봐도 영화 속에서 지나가듯 '세월호'라는 단어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 사건을 전면에 드러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와 나>는 그 방법에서 <생일>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생일>이 '세월호'라는 단어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면, <너와 나>는 '세월호'라는 단어를 우회하거나 회피한다. 그래서 <생일>은 결과적으로 천천히 간다고 할지라도 명백히 세월호에 관한 영화이지만, <너와 나>는 아무리 돌아서 가도 명백히 세월호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너와 나>는 세월호를 '비유'한 영화고 '환기'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질문은 그 방법이 과연 옳은 방법인지 묻는 것이다. 우선 결론적으로, 나는 이 질문에 대답을 내리지 못했다. 조현철 감독의 이 방법론이 본인의 연출적 야심을 과시한 개성적이고 독특한 방법론인지, 아니면 원관념에 끝내 다가서지 못한 채 보조관념에만 머무르는 머뭇거림인지, 아니면 거대한 참사에 대해 우선 대기한 뒤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신중하고 윤리적인 방법인지는 관객들 각자에 따라 그 판단이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 시점까지 <너와 나>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평단과 관객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을 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조현철의 이 방법론에 대해 첫 번째, 혹은 세 번째의 경우로 판단을 내린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두 번째 경우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하겠다.
위에서 '조현철의 방법론'이라고 지칭한 이 영화의 연출은 비단 세월호 참사를 환유의 방식으로 환기하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세월호 참사보다도 두 여학생의 로맨스를 우선시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서사를 진행해가는 데도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비유하는 떨어지기 일보직전의 물컵, 인물들 그 자체를 은유하는 동물들 등 비유와 상징을 적극 활용한 '조현철의 방법론'이 드러난다. 여기서 조현철의 방법론이 불편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두 번째 경우와 역시 일맥상통한다. 누가 봐도 명백한 원관념을 굳이 보조관념을 거쳐서 표현하는 것이다. 조금 더 과격하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노골적인 비유와 상징이 과도하게 많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누구나 아는 사실을 애써 감춰 말하는 이 영화의 화술은 가끔은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에 대한 찬사가 순전히 이 화술에 대한 것이라면 그 부분에서만큼은 온전히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을 아직 보류하는 이유는 세 번째 경우 때문이다. 조현철의 방법론을 비극적 참사에 대한 섬세하고 신중한 접근이라고 해석할 때, 위의 두 번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비단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에만 적용되는 연출은 아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그 흔한 사랑해라는 말을 이처럼 간절하고 사무치게 전한다'고 말했다. 즉 이 말은 <너와 나>는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도 감정적 측면이 강력한 영화라는 뜻일 테고 나 역시 동의한다. 그런데 <너와 나>는 그 감정적 에너지에 신파적으로 휘둘리지 않은 채 의외의 지점들에서 거리를 두고 객관성을 확보한다. 그 첫 번째는 이 영화의 과도하리만치 뽀샤시한 화면 톤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세미와 하은이 주고받는 일상적 대화들과 장난들을 보면 상당히 유치하다. 물론 그것은 이 영화가 10대 청소년들의 일상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수많은 tv 드라마들이 10대 청소년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다룰 때 그 현실적인 유치함과 젊은 에너지를 오해한 채 거기에 매몰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것처럼 '오글거려'지게 되는 것인데, 이 영화는 오히려 그러한 장면들을 과하게 뽀샤시한 화면이라는 또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음으로서 하나의 풍경으로 보이게 만든다. 두 번째는 이 영화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강력한 장면 중 하나인 세미의 <체념> 열창 장면이다. 이 장면은 상당히 간단히 설계되어있다. 우선 머뭇거리며 노래를 시작하는 세미를 담은 다음, 가사와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노래방 기계를 바라보는 세미의 시점숏을 보여준다. 그 뮤직비디오에서는 세미와 하은이 제주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이 흘러나온다. 그리고나서 이번엔 세미의 열창하는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은 다음엔, 다시 뮤직비디오 화면을 보여주는데 이번엔 노래방 기계 속 화면이 아니라 진짜 프레임에 담긴 장면이다. 말했듯이 이 장면은 세미의 감정이 완전히 폭발하는 장면이고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감정적으로 강력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런 장면을 연출할 때도 노래방 기계 속 뮤직비디오 화면이라는 이중의 프레임을 한 번 거쳐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 연출은 이후 노래방 기계가 없는 뮤직비디오 장면의 감정적 효과를 극대화함과 동시에 강력하고 단순한 감정에 접근하는 데 있어 객관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세미와 하은이 뮤직비디오에 등장한다는 장면 자체는 오글거리는 것을 넘어서서 자칫 코믹할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여기에 이중의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그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도록 유도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이후 노래방 기계가 없어진 장면에서도 이중 프레임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감정을 폭발시킨 듯 보이지만 <체념>이라는 노래가 계속되고 있기에 여전히 일말의 객관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강력한 감정에 섣불리 접근하는 것을 피하고 신중하게 객관성을 확보하는 태도는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에도 똑같이 관통한다. 이 영화는 세미와 하은 두 인물의 가장 감정적인 순간들마다 두 인물의 대사를 보이스오버 처리하고 그 대신 수많은 평범한 학생들과 사람들의 몽타주 화면을 비춰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두 여학생의 로맨스와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이 영화의 대답이다. 이 영화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랑에 대한 영화다. 세미와 하은의 애틋한 사랑은 다른 수많은 학생들과 평범한 사람들에게로 확장된다. 세미가 조이에게 건네는 '사랑해'라는 말이 화면이 암전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작은 속삭임들로 확장되는 마지막 장면, 나는 세월호를 애도하는 이보다 아름다운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나는 <너와 나>를 열렬히 지지함과 동시에 비판하고 또 그래서 아직 이 영화와 감독 조현철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현철은 이 장편 데뷔작으로 자신의 연출적 방향성에 대한 선언을 분명히 했으며, 관객들에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더불어 세월호 참사를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애도하는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올해 한국영화 가장 빛나는 성취'라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은 바로 이 질문과 애도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로 한다. 그리고 일단 조현철의 다음 영화를 학수고대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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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표 없는 끝이라도
1994년. 중학교 2학년이었던 은희에게 한문학원 영지 선생님이 묻는다. "뭘 좋아해요?" 은희는 주춤거리며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2019년, 은희 나이의 두 배도 넘은 나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에게.
내 나이는 은희 나이의 두 배보다 큰 숫자가 되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영화와 책, 정도로 성글게 말해도 좋지만, 어떤 영화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콕 발견할 때마다 희열을 느끼니까. 올해는 작정하고 그런 해로 보내겠다 다짐했다. 풍성한 텍스트의 세계를 바지런히 산책한 2019년, 영화 딱 한 작품만 꼽으라면 나는 <벌새>를 고르겠다.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별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벌새>는 은희라는 아이의 삶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SNS가 발달한 요즘은 좀 다르겠지만, 20세기 말의 보통 중학생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대치동에서 떡집을 하시는 부모님, "공부 못해서 강북까지 버스 타고 학교 다니는" 언니, 외고-서울대 코스를 밟으리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빠, 학원에서 같이 킥킥거리는 친구, 서툴고 어색한 애정 표현을 주고받는 남자친구. 조금씩 변주하면 수백 명을 비슷하게 찍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은희는 그렇게 살고 있다.
언제나 거시적인 통계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속인다. 은희는 하나뿐이다. 수백 명은 고사하고 다섯 명뿐인 가족 중에서도, 아니 친구나 남자친구와의 일 대 일 관계에서조차 소홀하게 치부되는 때가 많지만 은희는 사실 하나뿐이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도 여기 있다고, 벌새 날갯짓처럼 은희는 계속해서 외친다. 바라보는 시선으로, 내리깐 시선으로, 꾹 다문 입술로, 참아낸 한숨으로, 그런 것들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열네 살의 삶에도 중요한 일은 쉴 새 없이 일어난다. 친구 지숙, 남자친구, 후배 유리, 오빠, 언니, 아빠, 엄마, 선생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모든 상황 대부분이 은희를 그냥 지나칠 때, 은희의 앞에 따뜻한 우롱차를 한 잔 내어주고 은희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한문 선생님 영지가 있다.
은은한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 누구도 묻지 않는 질문을 은희에게 건네는 사람, 누구도 위로용으로는 부르지 않을 법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 반듯한 얼굴을 하고 일상을 사는 어른들에게도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 있음을 숨기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한 기분이 듦을 인정하고 손가락을 움직임으로써 그 상태를 벗어나는 법을 아는 사람.
그런 영지는 은희의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다. "미성년"의 "어린" "여자"를 둘러싼 세상은 일상 구석구석까지 폭력이 스며 있어, 영지 같은 존재는 흔치 않다. 어쩌면 여기에 '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과도해 보일지 모르겠다. <벌새>는 분명 <박화영>이나 <파수꾼>이 아니지만, 세상 모든 단어가 그렇듯 폭력이라는 말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촘촘하게 들어있다. 하물며 90년대,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이들이 지금보다 많던 시절이었다.'날라리 색출'을 하겠다며 '날라리' 친구 이름을 써 내게 시키고 불도저 같은 구호를 외치게 하는 학교 선생님의 태도에서도, 선명한 외도의 흔적을 숨기지 못한 주제에 당당하게 밥상머리 훈계를 늘어놓는 아버지의 태도에서도, 그 뒤에서 괴롭게 머리를 쥐뜯는 것밖에 못하면서 동생에게는 폭력을 수시로 쏟아내는 오빠의 태도에서도, 언니 수희에게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비난에서도... 폭력은 보인다. 일방적으로 비틀리고 상처 받는 사람이 분명 그곳에 있었다.
폭력은 기묘해서 저절로 흐른다. 각자를 죄고 있는 억압은 각자만 쥐고 흔드는 게 아니라 약자에게까지 흘러간다. 이야기를 비극으로 만드는, 겉으로 보이는 폭력뿐이 아니다. 일상 구석구석에 선연하게 녹아 있다. 하얀 커튼 휘날리는 부엌이며, 평범한 갈색 가구가 놓여 있는 거실, 화분이 있는 베란다... 복도식 아파트 1012호 구석구석에. 그건 마치 소파 밑의 유리 파편처럼 어딘가에 숨어 있다.
90년대를 섬세하게 담아낸 이 영화의 공간 배경은 정겨울 정도다. 금방이라도 행주가 마르는 것이 눈에 보일 듯한 부엌, 의자를 뺄 때 어떤 소리가 날지 알 것만 같은 은희의 방, 눈에 익은 교복... (나는 2000년대에 중학교를 다녔지만 은희와 똑같은 교복을 입었다. 그때 보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교복은 커서 보니 더 이상했다.) 그 평범한 공간마다 그토록 여상하게 폭력성은 묻어 있었다.이 폭력성이 단순히 은희 오빠가 은희를 때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심한 듯한 엄마의 표정조차 은희를 할퀸다. 그런데 은희의 그런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 폭력은 핏빛이 아니라 투명한 색이다. 그것도 물풀처럼 끈적하게 묻어나는 투명함이다. 이 잔잔한 일상 속의 폭력을 피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메타메시지로 전해지는 폭력이 훨씬 더 깊고 진하게 멀리 간다는 것도.
지진을 예감하는 작은 새처럼 예민하게 피부로 그걸 감지하던 사람들. 선명했지만 너무나 공공연해서 아직 언어로 정의되지도 않았던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작은 벌새 같았던 이들. 그들은 맞설 수 없는 대신 그렇게 서로를 챙겼다. 아무도 자신을 중히 여겨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같기도 한 너를, 너 같기도 한 나를.그 시절의 그 감정은 소설 <항구의 사랑>에도 나오듯 집단적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찰하고 기이하게 여겼음에도, 대부분이 그 마음을 소위 말하는 '퀴어'로 분류하지 않는다. 뉴스에서도 연구 논문에서도 '이반'이라는 한시적 용어로 담았고, 주변 어른들의 말로 통역하면 "다 한때야."일 것이다.
90년대 여중생 혹은 여고생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그러나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그러한 양상. 연구하는 이들은 아이돌-팬픽-이반이라는 '현상'들을 일직선으로 긋는다. 이 일직선 안에 사랑이라고 이름 붙는 감정이 있다면, 그 사랑은 섬이 아니었을까. 일상 속 폭력의 안전지대. 실은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줌으로써 서로를 철저히 이해하는 이들의 도피성. 그래서인지 이 사랑은 자아 의탁 정도가 유달리 높아 보인다.
사랑하는 대상에 나를 투사하는 마음은 어떤 사랑에서나 빠질 수 없겠지만, 어쩌면 이런 마음이야말로 벌새가 돌아갈 집이었는지 모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House of Hummingbird, 벌새의 집이다.) 실제 벌새의 둥지는 아주 작고, 포식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거미줄의 점성을 이용해 이끼와 잎으로 뒤덮는다고 한다.
변영주 감독의 강연집에서 읽은 말이 생각났다. 20대 때 그가 꽂혔던 말이 "여성성은 모든 약한 것들과의 연대"라고. 읽을 땐 '좋은데?' 하고 슥 지나간 말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말을 내 식대로 소화했다. 세밀하게 흔들리는 감정들을 무시하지 않고 눈여겨보고, 위로하기 위해 차 한 잔과 작은 음식들을 기꺼이 내어주고,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 그렇게 서로 배려하고 챙기고 다독이며 함께하는 것. 변영주 감독이 꽂혔다는 말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벌새는 철저히 여성 서사다. 은희가 (유리와 지숙 또한 마찬가지로) 서투르게 그런 세상을 찾으며 조금씩 성장할 때, 이미 어른이 된 영지가 너그럽게 차를 내어주는 아름다운 성장의 서사.
아름다운 서사에도 예외는 없어서, 삶에는 죽음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러나 호의적이지 않은 것들 사이로 호의적인 것들만이 흐르는 죽음을 역행한다. 연어가 옆구리 찢어지도록 강을 거스르듯. 그렇게 세상을 거스를 수 있다면, 묵묵히 바른 그런 사람 하나 곁에 있다면 나 무서울 것이 없겠다.
그러나 알고 있다. 그런 이들도 그저 시간의 강물에 몸을 내맡긴 또 한 마리 물고기와 같다는 걸. 영지와 은희에게 일어난 일은, 특수한 일인 동시에 사실 삶을 풍경으로 매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차마 마침표 찍지 못한 끝이 어디선가 숭덩 나타나곤 한다는 걸.
우리가 살결을 맞대고 마음을 마주볼 수 있는 시간이 영구히 허락될 수는 없다는 걸. 그러니 우리가 기대봄직한 건 그저 친절한 타인이 되어, 팔딱이며 물방울을 폭죽처럼 튀기는 것뿐이라는 걸. 삶의 한 순간을 들여, 그 순간을 서로에게 축제가 되게 할 뿐이라는 걸. 순간에 거하면서도 그 순간을 영원에 가 닿게 하는 방법은 오직 누군가의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것뿐이라는 걸.
은희는 친절한 타인을 만나면서 죽음을 거슬러보았다. 맞고 있지만 않았다. 맞서 싸웠다. 혹을 떼냈다. 병원에서 새하얀 햇살 아래 친절한 아주머니들이 예쁘다 안쓰럽다 말하며 놓아주는 반찬을 먹었다. 끝내 마지막에 감자전을 허겁지겁 씹어먹는 은희를 예리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엄마가 있었다. 딸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음을 감지하는 엄마의 눈. 실은 마찬가지로 한 마리 벌새였던 엄마의 눈.
그러니 은희는 무사할 것이다. 무사히 자라 어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과거의 자신을 떠오르게 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에게 차를 가만 놓아줄지 모른다. 철근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끊어진 어느 갑작스러웠던 날, 마침표 없이 끝나버린 어떤 이의 문장을 떠올릴지 모른다. 언젠가 제 인생도 빛이 날까요, 묻던 그의 날갯짓에선 이미 빛이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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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결산 - 리뷰는 못 했지만 추천하는 독립영화 7작품 l 상 2편 ( #최선의 삶 #비밀의정원 #좋은빛좋은공기 # 십개월의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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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렇게, 제가 극장에서 관람은 했지만, 여러 이유로 리뷰를 남기지 못했던 작품들, 그 중에서 특히 추천드리고 싶던 국내 독립영화 7편(로그인 벨지움, 빛과 철, 혼자 사는 사람들, 비밀의 정원, 좋은 빛 좋은 공기, 최선의 삶, 십개월의 미래)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해당 작품들은 [로그인 벨지움]을 제외하고 유튜브를 포함한 VOD서비스를 통해서 만나보실 수 있고요. 다들 좋은 작품들이니 한번쯤 만나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영화등대 채널에서 준비한 2021년 독립영화 연말결산 [상1, 2]편 마무리 짓고요. 저는 다음번에 연말결산 중편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번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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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9] 실망스러운 리메이크 액션영화-모탈컴뱃
영화 모탈컴뱃이 리메이크 되어 개봉했어요.
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1편과 2편은 그 당시 먼저 등장했던 격투게임을 기반으로 했는데요.
실사로 찍어 표현했던 게임 상의 액션 모습이 사실감이 있어 인기를 끌었죠.
영화는 CG로 게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해서 이야기는 매력이 없었죠.
그 당시에도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들늘 주로 기용해 만들었었는데 이번 리메이크도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들을 내세워 비슷한 전략을 가지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성공적인것 같지는 않네요.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좋지 않았어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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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분노의 질주 : 라이드 오어 다이> 메인 예고편
아무리 빨리 달려도 과거를 앞지를 순 없다. 돔(빈 디젤)과 그의 패밀리 앞에 나타난 운명의 적 단테(제이슨 모모아). 과거의 그림자는 돔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달려온다. 단테에 의해 산산히 흩어진 패밀리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맞서야 하는 함정에 빠지고 마는데.. 달리거나 죽거나, 그들의 마지막 질주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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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리,13구> 메인 예고편
화려함 속에 가려진 외로운 도시, 파리 13구.
낭만을 잃었다 생각한 그곳에서 불현듯 사랑을 만났다.
사랑을 원하는 에밀리
사랑이 두려운 노라
사랑이 값비싼 앰버 스위트
사랑을 몰랐던 카미유
흔들리고 불안했던 그 사랑이, 우리는 전부라 생각했다.
여전히 사랑을 믿는 도시
<파리, 13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