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5-05-04 20:57:14
[JEONJU IFF 데일리] 성실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에서 사랑을 지켜낸 여자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 꽃놀이 간다> 리뷰
‘J스페셜:올해의 프로그래머‘는 각 분야의 영화인을 프로그래머로 선정하여 자신만의 영화적 시각과 취향에 맞는 영화를 관객에게 선보이는 섹션이다. 올해로 5회 차가 된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배우이자 가수, 그리고 이제는 감독으로서도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이정현이다. 그녀는 자신의 출연작 3편과 선정작 3편, 총 6편의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내가 이번에 감상한 영화는 이정현 감독의 <꽃놀이 간다>와 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영화 정보
안국진
AHN Goocjin
Korea
2014
90min
DCP
Color/B&W
Fiction
청소년 관람불가
시놉시스
"미안해요, 그러니까 내가 죽이는 거 이해해 주세요. 전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에요. 제가 이래 봬도 스펙이 좋거든요. 잠도 줄여가며 투잡 쓰리잡 열심히 일했어요. 근데 아무리 꾸준히 일해도 빚은 더 쌓이더라고요. 그러다 빚을 한 방에 청산할 기회가 찾아왔는데! 왜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자꾸 생기는 걸까요? 이제 제 손재주를 다르게 써보려고요.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5포 세대에 고함! 열심히 살아도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 그녀의 통쾌한 복수가 시작된다.
* 해당 상영작은 J 스페셜클래스가 포함된 상영회차(상영코드 131)에서만 코리안시네마 단편 <꽃놀이 간다>와 묶음 상영 됩니다.
상영정보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2025.05.01 13:00
메가박스 전주객사 2관 2025.05.03 21:00
영화리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10년 만에 전주에서 다시 상영되었다. 안국진 감독과 이정현 배우는 영화 상영 후 스페셜 클래스 시간을 통해 그때 당시를 회상했다. 이 작품은 이정현 배우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이정현 배우는 <꽃잎>으로 데뷔하여 큰 주목을 받았지만 그 뒤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아 가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의 권유로 <파란만장>에 출연하는 등 영화배우로서의 활동에 시동을 거는 그때, 운명처럼 찾아온 영화가 바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이 영화는 2015년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제36회 청룡영화상, 제3회 들꽃영화상에서 이정현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또한 제52회 백상예술대상에서는 영화 부문 시나리오상을 수상하며, 상업성과 예술성을 두루 인정받았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영화는 이정현 배우를 위해 쓴 극본은 아니라고 했다. 극본에 쓰인 ‘수남’이라는 인물을 누가 수정 없이 연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와중 그것을 수정 없이 해낸 배우가 바로 이정현이었다고 한다. 이정현의 소속사에서 캐스팅 제안을 거부했지만 박찬욱 감독의 추천으로 이정현 배우가 출연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디에도 없던 여성캐릭터. 사랑과 삶을 지키기 위한 광기와 묘한 사랑스러움이 매력적인 ‘수남‘이라는 캐릭터는 무척이나 독보적이다. 이 등장인물은 감독의 어머님이 모티브라고 한다. 남자로서 여자의 일생을 제대로 그려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머니의 삶과 사랑을 이 영화에 녹여내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이 무한하고도 끊임없는 헌신적인 사랑의 형태가 이해가 됐다.
수남은 수많은 선택의 시간을 지나왔다. 첫 번째로는 여공으로 살 것인지, 엘리트로 살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엘리트’의 삶을 선택한 수남은 여자는 무엇보다 ’몸매=가슴‘이중 요하다는 선생님의 말을 한편에 새기지만 곧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컴퓨터의 세상이 도래했고, 자신보다 더 큰 ‘가슴’은 곳곳에 있었으며 성실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깨닫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하룻밤의 실수로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평생을 꿈꾸게 된다. 그녀의 마음만큼은 ’실수‘가 아니었다.
규정은 늘 ‘집’을 먼저 사자고 말하며 우리 아이에게는 나처럼 살지 않게 기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청각장애로 인해 보청기를 끼고 있던 규정이 청력을 정말 소실하게 되며 수남의 권유로 집을 사려고 했던 2천만으로 인공와우 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으나 갑자기 인공와우에 문제가 생기며 손이 기계에 절단되는 사고를 겪게 된다. 그 후, 규정은 폐인이 되어버렸고 그런 규정에게 죄책감을 느꼈던 수남은 규정이 그토록 원했던 ‘집‘을 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잠을 줄여가며 청소, 요리, 신문 배달, 명함 날리기 등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10년 간 계속하지만 집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결국에는 은행에서 1억 4천만 대출까지 동원해서야 집을 마련하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수남은 성실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사랑도, 일도. 이 모든 게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이 여자가 성실하다는 건 명백한 일이다. 이러한 헌신적인 사랑의 형태는 좀처럼 찾아보기도 힘들고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혐오스러운 마츠코가 생각나기도 하는 수남의 일생은 비극의 연속이다.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르며 그녀의 삶은 점점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진다. 희망이 생기는 순간, 저지되는 희망은 더 큰 절망으로 그녀를 찾아온다.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일군 수남에게 세상은 언제나 가혹했다.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그녀가 저지른 그 ‘죄’보다 앞서는 건, 그녀가 얼마나 성실히 살아왔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남은 끝내 울지도, 제대로 분노하지도 못한다. 세상은 그녀의 삶을 죄로 낙인찍고 그 죄를 옹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 죄가 어떤 절박함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를.
꽃놀이 간다
영화 정보
이정현 LEE Jung-hyun
Korea | 2025 | 28min | DCP | Color | Fiction | 12세 이상 관람가 | World Premiere
시놉시스
지병을 가지고 있는 수미는 죽음을 앞둔 엄마의 병원비가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 병원의 ‘중간 정산' 때문에 입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이 조금만 더 기도하면 엄마가 살아날 거라는 믿음을 확신하며 병원에서 난동을 피우고 강제 퇴원을 시켜 집으로 데려온다. 모든 게 뜻대로 풀리지 않지만 다음 주 시작되는 꽃놀이 관광에 엄마를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상영정보
2025.05.01 13: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2025.05.04 10:00 CGV 전주고사 4관
2025.05.06 20:30 메가박스 전주객사 6관
수미는 엄마의 간병을 도맡아 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엄마의 병원비가 밀려있는 상황에서 병원에서 난동을 피우고 강제 퇴원을 시켜 집으로 데려온다. 꽃놀이 관광에도 함께 갈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질 거라는 믿음과는 다르게 엄마의 상태는 점점 나빠진다. 엄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집을 내놓았지만 불경기라 팔리지 않고, 그 집 때문에 기초수급수령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여전히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과연 꽃놀이 관광을 갈 수 있을까?
이정현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비극적인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꽃놀이 간다>에서는 연출자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또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의도치 않게 두 영화는 참 많이 닮아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무한 경쟁과 생존의 논리 속에서 ‘성실한 사람’이 어떻게 밀려나고 지워지는지를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단순하게 피해자로 표현하지 않고 버텨내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 낸 한 여성의 치열한 삶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정현 감독의 첫 연출작 <꽃놀이 간다>는 창신동 모자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라고 한다. 한국 사회의 가장 어두운 이면을 고요하고도 섬뜩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수미의 내면의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현실의 벽에 부딪혀도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불안정한 시스템과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이정현 감독이 두 번째로 연출한 단편 영화가 곧 공개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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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컴 투 왕가위 월드! 씨네랩이 뽑은 추천작 4편
오는 11일부터 CGV는 'All about Wong Karwai : 왕가위 특별전 Season 2'이라는 행사로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 11편을 상영합니다. 지난해 동명의 특별전 Season 1에서는 왕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작품들만 상영했던 반면,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가 감독으로서 연출한 작품 11편을 선보이는 것이죠. 특히 앞서 작년에 재개봉했던 <화양연화>를 포함하여 <해피 투게더>, <2046>, <타락천사>, <중경삼림> 등의 5편의 작품은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화질을 복원한 버전으로 상영되기 때문에 이번 특별전은 왕가위 감독을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도, 기존의 팬덤에게도 모두에게 반가운 소식입니다. 특별전의 상영 기간은 2월 11일부터 3월 3일까지이며, 전국 CGV에서 관람이 가능합니다.
'왕가위 월드'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작품 세계로 홍콩 영화계에 한 획을 그어 그 자체로 장르가 된 왕가위 감독.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감독인 만큼 이번 설 연휴에는 그의 감성에 빠져보는 게 어떨까요? 11편 모두를 챙겨보기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씨네랩이 추천작 5편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1. 해피 투게더 : 리마스터링 (春光乍洩, Happy Together, 1997)
Synopsis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던 중 두 사람은 사소한 다툼 끝에 이별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얼마 후 상처투성이로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 보영은 무작정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서로를 위로하며 점차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하지만 보영의 변심이 두려운 아휘와 아휘의 구속이 견디기 힘든 보영은 또다시 서로의 마음에 상처 내는 말을 내뱉은 뒤 헤어지는데...
<해피 투게더>는 왕가위 감독에게 제50회 칸영화제의 감독상을 안겨준 영화로, 장국영과 양조위가 맡은 보영과 아휘의 매력적인 사랑을 담아낸 영화입니다. 그러나 관객을 사로잡은 것이 단연 러브 스토리뿐만은 아닙니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과감한 편집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이국적인 풍경, 삽입되는 음악이 모여 영화만의 독보적인 영상미와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두 사람을 아르헨티나로 떠나게 한 목표이자 재회를 상징하는 아이콘 이과수 폭포의 장엄한 광경은 스크린으로 관람할 때 가장 그 정수에 가까울 듯합니다. <해피 투게더>는 지난 4일 먼저 재개봉하여 현재 극장에서 바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2.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로 디그리 (Buenos Aires Zero Degree, 1999)
Synopsis
영화 <해피 투게더>의 또 다른 이야기.
낯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왕가위 감독은 0도의 땅을 찾는다. 동쪽도 서쪽도 아니고, 낮도 밤도 없으며,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곳.
제로 디그리의 땅에서 철저한 이방인이 되어 영화를 찍는 동안의 우여곡절이 녹아 있다.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촬영과 자꾸만 미루어지는 일정, 스태프와 배우들의 고뇌 영화에서 담지 않은 뒷이야기들.
다소 생소한 제목 탓에 '이건 또 어떤 영화야?' 싶은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위에서 소개해드린 <해피 투게더>를 촬영하며 그에 관해 제작한 다큐멘터리입니다. 62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영화에는 없는 뒷이야기들과 왕가위 감독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관람을 추천해드리는 이유는, 국내의 각종 OTT 서비스를 통해 집에서도 관람할 수 있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다큐멘터리는 현재 한국에서 따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이 없어 시청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해피 투게더>를 감명 깊게 관람하신 분이라면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 또한 함께 챙겨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3. 중경삼림 : 리마스터링 (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1994)
Synopsis
경찰 223(금성무)은 헤어진 옛 애인을 기다리다 지쳐 술집을 찾는다. 그가 떠나간 애인 대신 그곳에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때마침 험한 일을 마치고 온 마약 밀매 중개자가 술집에 들어선다.
한편, 단골손님인 경찰 663(양조위)을 짝사랑하는 식당 종업원 페이(왕페이)는 경찰 663의 헤어진 애인이 맡기고 간 이별 편지 속에서 그의 집 열쇠를 손에 넣게 되는데…
왕가위 감독의 이름은 몰라도 '중경삼림'이라는 제목은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이 영화. 국내에 왕가위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중경삼림>은 90년대 홍콩의 감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힙니다. 영화는 경찰 223의 이야기인 1막, 경찰 663의 이야기인 2막으로 나누어져 각각 다른 분위기를 선보이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 임청하, 양조위, 왕페이, 금성무가 주연을 맡아 역할의 매력을 한층 더했습니다. 최근 왕가위 감독이 후속작 <중경삼림 2020>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온 만큼, 본편을 미리 관람해 두는 것이 좋겠죠?
4. 화양연화 : 리마스터링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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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랜짓>의 게오르그
매혹적인 은유 덩어리, <트랜짓>
"그러니까 내가 이 호텔에 머무르려면 이 나라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걸 증명해야만 하네요?"
어렵게 마르세유에 도착해 호텔에 잠시 묵으려는 게오르그에게 호텔 주인은 체류 허가증을 요구하며 그가 잠시 머물다 갈 사람임을 증명하라고 한다. 머물고 싶어도 마음대로 머물 수 없고, 떠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 영화 <트랜짓(Transit)>(2018)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는 자들의 딜레마를 조명한다.
<트랜짓>은 선명한 영화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기묘하게 점유하는 영화의 배경은 영화의 선명도를 한껏 낮춰 그 자리를 모호함으로 채운다. 선명하지 않다는 말은 곧 규정짓기 어렵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특정 관점을 견지한다기보단 복합성을 머금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트랜짓>은 그 자체로 시공간대를 중첩하고, 인간상을 교차하고, 다양한 실존적 딜레마 요소를 얽어내어 가공해낸 매혹적인 은유 덩어리에 가깝다. 모호한 기운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무정형의 덩어리 <트랜짓>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과정에서, 겹과 겹 사이의 공간이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나타난 난민 문제는 오랜 기간 논의가 되어온 범세계적 사회 이슈다. 이때 나는 조금 디테일한 면에 주목하고 싶다.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오르그를 관찰하려고 한다. 그를 통해 영화에서 난민들의 삶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게오르그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다. 그는 죽은 바이델의 소지품과 편지들을 챙겨 마르세유로 떠난다. 상태가 위독한 동료 하인츠는 마르세유에 도착하기 전에 죽는다. 번듯한 신분증조차 없이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던 게오르그는 졸지에 두 남자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삶에 직면한다.
두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오르그
누구의 신분도 빌리지 않은 게오르그의 민낯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게오르그는 독일 출신의 난민이다. 하인츠의 아들 드리스가 골키퍼는 독일이 최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게오르그는 독일인이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데, 현대 독일 국민의 스포츠 문화를 염두에 둔다면 독일인으로서 게오르그가 품은 정체성은 은근슬쩍 뭉그러진다. 영국, 스페인, 독일 등이 축구 문화의 선봉장인데다 자국민들의 관심도도 매우 높고 독일이 축구사에 있어 걸출한 골키퍼를 많이 배출한 국가라는 사실 등이 자연스레 뒤따라온다는 점에서, 게오르그는 분명 소속감이 결여된 타자다. 어쩌면 그에게 정체성이 지워진 껍데기로서의 삶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바이델의 신분으로 위장하거나 하인츠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은 상태의 게오르그는 피상적으로 존재는 하지만, 내면이 텅 비어버린 갈 곳 잃은 유령이다.
우선 게오르그에게 죽은 동료 하인츠의 삶을 대체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인츠의 아내 멜리사와 아들 드리스 역시 게오르그와 같은 불법 체류자로, 정착을 어려워하는 불안정한 존재들이다. 드리스는 게오르그를 통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 한다. 멜리사에게 청각 장애가 있으므로 소통에 있어 제약을 받기 때문에, 게오르그와 드리스의 관계가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게오르그는 드리스와 유대를 쌓아가며 아이에게 애착을 느끼게 된다. 의사 리처드가 볼 때 게오르그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 의사는 게오르그에게 왜 그 아이를 사랑하는데 버리려 하냐고 추궁하지만, 정작 게오르그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상투적인 이유를 거들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소속감이 없는 유령 같은 게오르그는 아무리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처럼 보여도 쉽사리 녹아들지 못하며, 이는 곧 게오르그의 텅 빈 정체성을 부각한다. 멜리사와 드리스 모자 역시 끝내 마르세유를 떠나 홀연히 사라진다는 점에서 난민들의 처지에 대한 상징성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게오르그는 죽은 작가 바이델의 신분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멕시코 영사관을 떠올려보자.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겨진 사람일까요?”. 게오르그는 바이델과 마리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참고할 만한 자료는 오면서 읽었던 편지뿐인 상황에서 그는 “나는 더 이상 아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남겨진 이가 먼저 잊을 거라는 암시를 날린다. 이 말은 마리의 말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그녀는 게오르그에게 “남겨진 사람에겐 슬픈 노래와 동정이 있지만 떠난 이에겐 아무것도 없다”라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영사의 질문은 남녀 관계의 딜레마를 건드리는 아련한 물음이지만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겠다. 남편을 떠난 마리는 남편을 계속 그리워하며 찾으려 한다. 독일을 떠나온 게오르그 역시 라디오 수리를 하며 어렸을 적 엄마가 자장가로 불러줬던 노래를 부르며 추억에 잠긴다. 게오르그는 자국의 골키퍼가 유명한 지조차 모르는 독일인이다. 자국에서의 삶은 저 멀리 기억 저편에 묻어둘 법도 하다. 그런 게오르그가 아직도 자신이 떠나온 국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게오르그의 양가적 면모는 그를 스스로 모호한 존재적 잔상에 갇혀 있도록 만든다.
유령 난민 게오르그를 구속하는 경유지
게오르그라는 존재는 소속감 없이 부유하는 난민의 공허한 삶의 표상이다. 미국 영사관에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하는 듯한 영사의 질문에 게오르그가 바이델의 유작 원고 일부를 읊는다. “여기가 지옥”이라는 그의 말은 비록 바이델의 표현을 빌렸음에도, 게오르그 본인의 처지를 강조하는 역설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지옥 그 자체인 셈이고, 정체성과 목적지를 모두 상실한 방랑자로서의 비참한 최후만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런데 지옥에서의 삶을 체념하고 받아들여야만 오히려 살아남는 건 아닐까. 재밌게도 게오르그의 곁을 떠나 마르세유라는 경유지(지옥)를 탈출한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거쳐가는, 그 누구도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는 경유지가 난민에게만큼은 운명적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이제 게오르그는 지독한 상실감을 받아들여야 한다. 돈도 있고 장비도 있으니 바텐더에게 게오르그는 산맥을 넘겠다고 말했지만, 모든 걸 포기한 채 마리의 잔상에 취해 있는 그의 뒷모습에선 탈출과 전진을 향한 동력을 찾을 수 없다. 비자도 없고, 점령군의 세력은 갈수록 확장되고 있으며, 사랑하는 이들도 전부 자신을 떠나갔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현실을 헤쳐나갈 힘을 상실한 채 공백에 사로잡혀 끝없는 표류의 세계로 침잠하다가 문득 유령 같은 마리를 마주하길 고대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오르그의 삶은 정상궤도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 <트랜짓>의 모호한 기운을 빌려 말하자면, 대답할 수 없다. 그저 경유지에 발이 묶여 허우적대는 유령만이 보인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드플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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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 사쿠라, 어디까지 봤어?
“연기하지 않고, 그저 살아내는 배우”
안도 사쿠라 좋아하시는 분 🕺🏻🕺🏻🕺🏻🕺🏻🕺🏻
<백엔의 사랑>으로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어느 가족>으로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의 극찬을 받은 그녀는
늘 작품 속 인물 그 자체로 존재하며 과장됨 없이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배우죠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배우인데요,
그런 안도 사쿠라가 <다음 소희>
정주리 감독의 신작 <도라>에 출연합니다!
한국 영화에서의 안도 사쿠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씨네픽지기의 사심 가득 담긴 안도 사쿠라의필모그래피 저장해두고 함께 기다려볼까요?
❶ <가족의 나라>, 양영희
❷ <백엔의 사랑>, 타케 마사하루
❸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❹ <한 남자>, 이시카와 케이
❺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❻ <브러쉬 업 라이프>, 드라마, 바카리즈무 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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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집힐지언정 결코 부서지지 않는
* <슬픔의 삼각형>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슬픔의 삼각형 (2022)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출연: 우디 해럴슨, 해리스 딕킨슨, 찰비 딘, 돌리 드 레옹
장르: 코미디, 드라마
상영시간: 147분
국가: 스웨덴, 미국
개봉일: 2023.05.17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한참 기울어져 버린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14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비교적 긴 편에 속하지만 젠더와 계급(혹은 사회적 지위),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빈부격차에 대한 풍자가 쉴 새 없이 이어져 체감 상영 시간은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다.
1부 '야야와 칼'은 전통적인 구조의 남녀 관계가 전복된 산업에서의 연인 관계를 통해 젠더 갈등을 논한다. 남성 모델인 '칼(해리스 딕킨슨)'은 시작부터 인터뷰어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한다. 이는 '칼' 한 사람에 대한 모욕이나 희롱이라기보다는 여성 모델에 비해 대우를 받지 못하는 남성 모델 산업의 실태를 언급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해석된다. 남성 모델의 수입은 여성 모델의 1/3에 불과하며 게이들의 성적 희롱을 견뎌야 한다는 통념이 존재하며 미팅에서 헤프게 웃어보라는 소리를 듣는 둥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다. 오프닝 시퀀스가 꽤나 신선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이러한 불합리한 처사가 여성에게 적용된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이 보아 왔지만, 성별이 전복된 케이스는 흔히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과 남성 모델 간의 수입 차이는 '칼'과 '야야(찰비 딘)'의 데이트에서 젠더 간의 갈등을 촉발시킨다. '야야'는 여성 모델이기 때문에 '칼'보다 수입이 많고, 훨씬 잘 나간다. 하지만 데이트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는 쪽은 '칼'이다. 단지 돈을 언급하는 남성은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야야'는 본인이 '칼'보다 수입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굳이 본인이 돈을 내겠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는 않는다. 그녀의 무신경한 행동은 '칼'의 분노를 유발하고, 급기야 감정싸움으로 치닫는다. 어찌 보면 '칼'의 행동은 쪼잔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이 또한 연인 관계에서 비롯된 성적 고정관념 때문에 생긴 시각일 터다. 결국 남자는 '팩트'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여자가 문제를 인식하게끔 만들고, 여자가 본인의 행동을 인정하는 것으로 두 남녀의 싸움은 일단락된다. 상처가 될 법한 말들을 주고받았지만, 둘 사이에는 얄팍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고, 또 SNS를 통해 돈을 벌어들이는 이해관계로도 얽혀 있다.
2부의 '요트'는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계급 간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대다. 돈으로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부자들, 그리고 군말 없이 지시를 따라야 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이들의 경계선에 있는 듯한 인플루언서 커플까지. 영화 포스터에 볼 수 있듯 세 계급은 마치 삼각형 같은 구도를 이루고 있다. '슬픔의 삼각형'이란 1부 모델 오디션 장면에서 언급된 미간 사이의 주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계급 간의 구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이 세 계급이 전부는 아니다. 삼각형에 낄 수조차 없는, 부자들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노동자 계급이 뒤편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요트에 오른 최상류층들은 위선과 모순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다. 일례로, 힘든 시기를 함께 극복했다며 애정을 다지는 부부는 수류탄을 제조하는 방산업자다. 전쟁으로 남의 목숨을 팔아 번 돈으로 부를 축적한 작자들이 '사랑'을 논하고 있으니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똥(비료)'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왕이 된 러시아 갑부의 아내는 어떠한가. 그녀는 연회를 준비하는 요트 직원들로 하여금 수영하며 놀 것을 지시한다. 근무 중에 수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요구이지만 직원들은 이에 불복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직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요트 위에서 슬라이드를 타고, 러시아 부자는 자신이 마치 노동자들에게 아량을 베푸는 선량한 사회지도층이 된 듯 도취된다. 영화는 모순으로 똘똘 뭉친 인간 군상들을 통해 노골적일 정도로 자본주의가 만든 계급사회를 풍자한다.
위선자들의 향락과 사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악천후로 크루즈가 흔들리자 부자들은 최고급 음식을 앞에 둔 채 저항 없이 토사물을 내뿜기 시작한다. 고상한 척으로 절대 막을 수 없는 생리 현상 앞에 수치심을 느낄 여력 따위는 없다. 제아무리 돈이 많고,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일지라도 한낱 먹고 싸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화는 가감 없이 보여준다. 변기를 붙잡은 채 괴로워하며 배설물 속을 헤엄치는 부자들의 모습은 안쓰러움이 들기는커녕 폭소를 부른다. 비위를 자극할 정도로 더럽고 노골적인 장면들을 활용하긴 했지만 그들의 과거 행적을 돌이켜 본다면 이 정도는 자비로운 처사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요트가 박살 나는 순간 역시 그들이 저지른 위선이 바다 위 암초가 되어 스스로를 나락으로 굴러떨어뜨린 것이나 다름없다. 평화나 운운하던 방산업자들은 결국 본인들이 만든 수류탄에 의해 종말을 맞았으니까.
요트는 전복됐고, 온전할 것만 같았던 삼각형은 뒤집혔다. 3부 '섬'은 계급의 최하위 층에 있던 화장실 청소부 '애비게일(돌리 드 레옹)'이 그를 고용한 상류층 위에 군림한다. 제아무리 부자들일지라도 당장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요트에서 그들이 뱉은 토사물과 똥을 닦던 여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혈혈단신으로 겨우 목숨만 건진 이들은 아주 잠깐 동안 함께 화합하여 작은 평등 사회를 이루는 듯했다. 하지만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잡을 줄 아는 '에비게일'이 등장하면서 8명의 소수 집단에도 자연스레 계급이 생겨나고 이들만의 생존 질서가 형성된다. 기존의 계급이 역순으로 뒤집히는 것도, '에비게일'을 중심으로 한 모계사회가 형성되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쯤 돼서 1부의 '야야'와 '칼'의 대화를 한 번 더 소환해 본다면 영화는 더욱 재밌어진다. 앞서 '야야'와 젠더 고정관념에 대해 열띤 입씨름을 벌였던 '칼'은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같은 포지션에 가두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섬에 떨어진 이후 '칼'은 '야야'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던가. '에비게일'을 도와 물을 길어오고, 일손을 돕는 것은 '야야'였으며 '칼'은 가만히 앉아 한밤중에 프레첼이나 훔칠 뿐이었다. 마치 본인이 성적 고정관념의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했던 그는 막상 여자친구를 지켜주어야 할 순간이 닥치자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야야'는 더 이상 그에게 섹시한 남성이 될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녀는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았다. 앞서 여자친구에게 성토하듯 외쳤던 '칼'의 이상과 논리도 결국 모순에 불과했음을 보여준 셈이다.
관객은 '에비게일'이 요트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열악한 노동 환경을 견뎌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내가 누구지?'라 묻는 '에비게일'에게 '화장실 청소부'라 답하는 관리인 ‘폴라'를 통해 작업 노동자들에 대한 평소의 인식이 드러난다. 애초에 요트도 없어진 마당에 '화장실 청소부'라는 직책이 무슨 소용이람. 따라서 '에비게일'이 이룩한 작은 혁명은 관객의 응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며 꼼짝없이 그를 선장으로 모시는 돈 많은 남성들의 태도 변화는 일종의 ‘사이다’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합리한 계급 구조가 뒤집혔을 때, 이상적인 평등 사회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건 순진한 생각이라는 게 곧 드러난다. 섬의 주도권을 잡은 ‘애비게일’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는 듯했다. 능력 없는 남성에겐 식량이 주어지지 않았고, 몸이 불편한 여성은 일을 못해도 필요한 만큼의 음식을 제공받았다. 엄격하지만 합리적이고, 규칙만 잘 지킨다면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 법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집단 내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시스템을 만든 ‘애비게일’ 쪽이다. 그녀는 구조정에서 잘생긴 백인 남성인 ‘칼’과 잠자리를 즐기고, 성을 착취당한 '칼'의 손에 쥐어지는 건 고작 프레첼 한 봉지뿐이다. 이는 곧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를 선악 관계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불합리함을 경험했던 계급 최하위의 노동자가 권력을 쥐었을 때 그들 역시 자신들을 착취했던 부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순적인 인간으로 얼마든지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부는 작품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야야'와 '애비게일'은 무인도인 줄 알았던 섬에서 리조트를 찾는데 성공한다. 섬에 문명이 존재하고,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희망적인 소식일 터이나 기쁨에 젖은 '야야'와 달리 '애비게일'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어둡다.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애비게일'이 만든 임시 사회의 끝을 의미한다. '애비게일'은 다시 화장실 노동자의 위치로 되돌아갈 것이며 그녀 앞에 굴복했던 부자들은 다시 계급 최상위층에 올라 그녀를 부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리조트는 '애비게일'에게 희망 같은 존재가 돼줄 수 없다.
제목이 '슬픔의 삼각형'인 이유는 사회의 계급 구조가 뒤집힐지언정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는, 그 완고한 특성이 절망과 허무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애비게일'은 8명의 생존을 돕는 데 일조했으나 현실로 복귀했을 때 그가 얻을 수 있는 보상이라곤 기껏해야 '야야'의 비서 자리다. '야야'가 은연중에 내비친 멸시 어린 태도에서 이들 사이에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의 벽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애비게일'은 마침내 분노한다. 리조트를 발견한 건 '야야'와 자신뿐. 눈앞의 대상을 제거한다면, '애비게일'은 지도자로서의 권력을 누리고 젊고 잘생긴 남성의 몸을 계속해서 탐할 수 있다. 살의가 넘쳐흐르는 독사 같은 그의 표정,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에 젖은 '야야', 그리고 뒤늦게 '야야'를 구하러 가는 '칼'의 삼각 구도로 이야기는 끝난다. 열린 결말로 마무리됐지만 '칼'과 '야야'의 로맨스도, '애비게일'의 행복도, '야야'의 생존도 모두 기대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하나같이 다 모순적이고, 그놈이 그놈이니까. 본작은 모든 걸 조목조목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비판과 풍자를 휘갈겼지만 궁극적으로는 폭력과 욕망, 위선으로 똘똘 뭉친 모든 인간의 몸뚱이를 해체해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감독의 냉소적인 시선은 관객의 씁쓸한 감정을 한없이 끌어올리고, '칼'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 같이 '슬픔의 삼각형'을 절로 찌푸리게 된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 받아 작성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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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와 불의의 싸움
줄거리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한양을 빼앗기며 위기에 놓인다.
왜군은 전주와 한산도를 동시에 공격하여 명으로 가는 길목을 열겠다는 작전을 짠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꿰뚫어 보고 바다 위에 성을 지어 왜군의 바닷길을 막기로 한다.
감상 포인트
1. 거북선이 등장하는 전투 장면에서 웅장이 가슴해지며 벅참을 느낄 수 있다.
2. 다만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여러 인물을 거치며 전개되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
3.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감상평
한산을 보고 나오면 딱 명량이 보고 싶어진다. 그땐 어떻게 영화를 보여줬는지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이 영화가 명량을 뛰어넘는 영화라는 점? 명량은 몇몇 인물에게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전체적인 상황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해 아쉬움을 많이 낳았고, 그 점 때문에 논란도 많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전체적인 흐름에 충실하여 한산도대첩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영화 속에 온전히 녹여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싸움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이순신에게 패한 준사가 이 싸움은 어떤 싸움이냐 묻자, 이순신이 답한다. 이 말에 관객들은 다른 생각을 모두 지우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 대사는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다. 대놓고 말을 하지만, 그래서 더 이해가 된다. 임진왜란은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을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준사가 직접 의병들과 전주성에서 싸우는 장면들도 인상 깊었다. 영화 내에서 준사를 보여준 방식은 단순히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불의에서 벗어나 의로 향하는 마음, 방향을 틀어 의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와 불의는 단순히 입장 차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장수들의 정치 싸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난다. 극을 이끌어가는 와키자카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을 잡고 싶은 인물들이 가토의 군대를 처치하고 배를 빼앗는 장면에서는 와키자카라는 인물에 대한 비열함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기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화합이나 의리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장수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균 장군은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려고 하고 이순신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학익진을 제때 펼치지 못해 위기의 상황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노장인 어영담이 대신 미끼가 되어 위기에 처하자 이운룡이 도우러 가고, 적진에게 붙잡힌 원균이 학익진의 날개로 들어올 수 있도록 구선을 등장시키는 등, 이순신은 절대 낙오된 자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의’를 가졌느냐, 가지지 못한 ‘불의’냐의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의 어떤 위치에 어떤 장군을 배치할 것인지 깊이 고민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에서 굉장히 지략가적인 면모를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이 그저 전술만 잘 짰다면 이토록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장군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임진왜란이란 혼돈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던 조선을 꺼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던 한산도대첩. 이순신은 단순히 '이기기 위해서' 학익진을 펼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디에 있을 때 이길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학익진을 펼친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이순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고, 어떤 정보를 숨겼는가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조카인 사헤에는 중으로 변장해 이들의 학익진을 전부 지켜본다. 전투 연습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가는 것도 모자라 거북선의 도면마저 훔쳐 간다. 이순신은 이걸 노린 걸까? 그런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났다면 좋았을걸, 싶다.
이 영화는 한산도대첩이 '정보전'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순신 측에 왜군의 정보와 상황을 알리는 임준영(옥택연)과 와키자카의 기생 노릇을 하며 첩자를 지키는 정보름(김향기)이 있듯이 왜군에도 첩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정보를 내주고, 어떤 정보를 취하는지에 대한 부분들이 부각되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굵직하고 커다란 것들로 축소했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깔끔한 처리를 위해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2선에서 무너지면 여긴 끝장이야!"
그럼에도 이순신의 학익진 배치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임진왜란이라는 침략에서 버티는 힘을 가질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이순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믿는 결연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는 한산대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주성에서 의병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는 장면 역시 비중 있게 다룬다. 서로 보이지 않고 상황도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한 마음으로 필사의 노력을 다 한 것이다.
이순신 위주의 영화가 아니라 이순신과 그 주변 인물들, 왜구의 침략을 타파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을 조명한 영화라서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국뽕영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전작도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훨씬 더 나은 방향성으로 영화를 전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서 만난 영화라서 더 반가웠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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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결절을 목도하는 눈
SYNOPSIS.
위안부, 강제노역, 원폭 피해자…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재일조선인 2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
그의 집에 쌓인 작품화되지 못한 10만 피트, 약 50시간 분량의 16mm 필름
기억의 망망대해에서 수집해낸 역사가 강렬하게 들려온다.
잊혀진 피해자들의 표정을 되살려내고 식민과 전쟁으로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아간다!
POINT.
✔ 이렇게 멋진 기록자, 선구자, 영화인, 작가...를 왜 아무도 저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죠? 이제야 박수남 감독을 알게 된 게 너무 아쉬울 만큼, 그냥 인생 자체가 너무 압도적입니다.
✔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정말 귀한 풋티지를 보실 수 있는 작품을 놓치지 마세요
✔ 소수자성과 당사자성, 기억과 기록에 대해 사유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 영화는 11월 13일 수요일 개봉합니다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어두운 화면에서 목소리로 시작한다. 마의태자를 아느냐고 묻고, 딸의 이름도 마의태자에서 따왔다고 말한다. 영화 작업을 함께한 박마의 감독의 이름이 독특하더라니. 어떤 마음으로 딸의 이름을 마의라고 지었을까. 망국의 슬픔을 온몸으로 휘감고 사라진 왕자의 이름을. 그러나 마의태자에 관한 좋은 노래가 있다며 서정적으로 부르는 목소리는, 망국의 슬픔으로 이야기가 끝나게 두지 않는다. 마의태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싸매는 다정한 노랫말. 딸의 이름과 그 유래에 맺힌 노랫말. 슬픔의 자리와 그 자리를 혼자 두지 않는 마음. 박수남 감독의 인생처럼 느껴지는 오프닝 시퀀스다.
옛 사진 몇 장 위로 스쳐가는 몇 문장의 증언만으로도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보통 사람이 아님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이 예감은 148분 동안 스크린 위에서 겹겹이 펼쳐지고 풀어진다. 수많은 테스트 영상들, 수많은 인터뷰들, 방에 있었던 50시간 분량의 필름 중 10시간 분량을 풀어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10시간 분량 안에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에 관한 기록유산으로 지정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 귀한 풋티지들 사이사이, 하나하나 기함할 사건들 사이사이, 박수남이라는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역사의 결절을 목격하고 지적하는 눈
잘나가는 고깃집 사장님으로 살면서 글을 쓰던 박수남 감독은 가게를 팔고 다큐멘터리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로 수많은 곳을 다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기록한다. 펜으로 담기에는 언어의 한계가 있었다던, 때로는 언어 바깥에서 더 선명하게 전해지던 떨림과 침묵을 담기 위해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었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박마의 감독과 대화하는 장면은 다분히 인상적이다. 젊은 사람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쉽게 설명해 주는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는 박마의 감독의 말 앞에, 박수남 감독은 단호하게 말한다. 알기 쉽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두 사람의 대화는 이내 '카메라 앞'을 두고 더욱 단호해진다. 박수남 감독은 한 치의 타협도 먹히지 않을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카메라, 내가 영화라고.
오랜 세월 그가 들어온 목소리들은 마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엔딩에서 울려퍼지던 목소리처럼 그를 감싸고, 그는 이제 영화로 현현한다. 1인칭으로서의 카메라, 체화된 카메라. 키노 아이 그 이상의 카메라. 그는 기계적인 카메라의 정확성보다, 발군의 기억력과 소상한 기록의 힘으로 카메라를 역사의 경지에 끌어 올린다. 개인이 겪은 모욕과 수난의 증언들은 모여서 역사가 된다. 그가 그토록 열심히 기록한 것들을 결국 거칠게 요약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낯이다. 수탈하고 강제 연행할 때는 '내선일체'지만, 폭력과 피폭의 뒷수습을 할 때는 철저히 남, 아니 투명한 비존재 취급을 하는.
관동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부모님 아래서 태어나,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박수남이라는 사람은 작가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차차 기록자로 나아간다. 마침내 이 영화에 이르러서서는, '이 정도면 기록 계의 무형 문화재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는 관객이 생겨난다. 소수자로서 또 당사자로서 예리하게 포착한 감각들이 켜켜이 쌓여 여기까지 왔다.
역사의 결절을 목격하고 지적하는 사람, 스스로가 뚜렷한 사람. 사유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교실로 만들고, 그 교실에서 만난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 이 영화에서 내가 배운 건 다음과 같다.
ㅁ 기억도 기록도 힘이 세다
가끔은 이 말 자체가 구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현실 정치와 모략이 판치는 세상에서 기억이 과연 얼마나 힘이 셀 수 있을까. 힘이 셌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구호처럼 맺힌 문장은 아닌가. 그러나 평생 동안 삶으로 기억하고 기록한 사람을 보니 이는 허망한 구호가 아니다. 실제 그의 기록 중에는 역사 교과서의 몇 줄 행방을 가르는 주효한 대목도 있었다. 목격한 일을 전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는 말 앞에서, 기억과 기록은 단순히 내 주장을 뒷받침하고 내 목소리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참으로 인간 되기 위함임을 통감한다. 그러면 결국 생각이 다른 서로를 가르는 선은 딱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가?
ㅁ 피의 대립, 국적의 대립이 아닌 역사의 대립이다
그렇기에 이는 한국과 일본의 국가 대립도 아니고, 어떤 피를 타고났는가에 따라 답이 갈리는 문제도 아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 사이, 역사를 무엇이라 기록하고 싶어하는가의 차이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역사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과, 차마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차이이다. 박수남 감독은 철저히 후자다. 눈물로 바다가 되도록 울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말로 못 다하는 말까지 다 담을 수 있다고 위로하는 사람.
ㅁ 인류애는 한 걸음부터
박수남 감독은 당시 소년이었던 고마쓰가와 사건의 이진우에게 편지를 쓰며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민족의 정체성은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전혀 다르다. 손을 떼라는 "상부"의 금지령을 듣지 않고, 반국가적 인물이 되기를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자신으로 살려면 어디에 살아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이므로, 민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친 끝에 소년 이진우가 발견한 것은 인류애다. 잘못되었으면 어쩌지, 하고 옆 사람을 걱정하기 시작할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범죄가 왜 잘못되었는지 받아들이게 된다.
ㅁ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해
영화에 짧게 지나가지만, 지금도 원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본인들의 모임이 있다. 피폭 다시 히로시마에 재일 조선인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인터뷰하는 한 장애인 남성은, 감독과 자신이 차별 받는 존재라는 공통점으로 서로 공감할 수 있다고 밝힌다. 이 대목은 짧게 지나감에도 내게 너무나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는 방법은 그뿐이지 않을까? 뿌리는 다양성에서 찾아야 한다. 한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만 갖고 살지 않으므로, 어딘가에서는 다수파의 안온한 자리에 서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소수자의 자리에 선다. 이러한 소수자의 감각을 일깨우는 건 다양성이다. 그걸 토대로 우리는 좀더 쉽게 타인의 자리를 가늠해 보고,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이 영화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묻는 영화였다. 가끔 이렇게 내가 하고 있던 고민이나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지는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를 적시에 조우하는 기쁨이 있다. 이런 영화들이 등불처럼 비추어 주는 길이라면, 걸어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이 영화의 엔딩 신은 내가 최근 몇 년 간 본 영화의 엔딩 신 중 가장 산뜻하고 말끔했다. 이렇게 마음을 놓게 해주는 엔딩이라니. 박수남 감독은 병으로 점차 시력을 상실해 가고 있지만, 투쟁의 도구이자 기계적 정확도를 가진 '키노 아이'를 넘어서는 눈을 우리에게 빛낸다. 발군의 기억력과 끈덕진 마음으로 오케스트라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이 더 큰 감각을 가져온다. 50시간 분량의 필름 중 10시간 분량을 이렇게 풀어냈으니, 남은 40시간 분량의 필름 또한 언젠가 또 볼 날을 기대한다.
**혹시 저처럼 지금부터 박수남 감독님의 작품과 궤적을 따라가보실 분들을 위해 남겨둡니다.
[박수남 감독 작품]
▶ <침묵>, 2017 (퍼플레이로 보러 가기 / 편당 결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이옥선 씨가 전후 50년, 긴 침묵을 깨고 14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본 정부에 사죄와 개인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 과정을 동행하며 담은 기록입니다.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께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작품 중 굉장히 시각이 독특한 작품이라며 꼭 추천한다고 하셨어요.
▶ 또 하나의 히로시마 + 아리랑의 노래 /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 방문 관람 가능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이 터졌을 때, 당연히 그곳에는 조선인도 있었습니다. 강제 연행과 피폭으로 이어진 피해는 컸지만, 전후 보상 대상에서 이들은 빠졌습니다. 이들을 기록한 이 작품은, 일본이 내세우던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슬로건(?)에 균열을 내고, 현실에 변화를 이끌어낼 만큼 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 누치가후: 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 /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 방문 관람 가능
*한국어 자막 없음 (영, 일)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3월, 미군의 상륙 공격이 임박해오자, 오키나와에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굴 등의 은신처에서 일본인에게 받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결하거나 서로 목 졸라 살해하는 참극... 생존자들은 일본군의 명령과 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싶어하는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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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경고> 티저 예고편
친구의 부탁으로 조카를 봐주기로 한 아이작.
어마어마한 보수에 수락했지만 기묘한 조건이 붙는다
#1. 이동을 제한하는 사슬 조끼를 입을 것
#2. 조카의 방에 들어가지 말 것
#3. 허락 없이 집을 떠나지 말 것
외딴섬에 위치한 미로 같은 집과 석궁을 들고 다니는 조카, 섬뜩한 토끼 인형까지…
이곳에서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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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인시큐어> 공식 예고편
이사와 몰리는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흑인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세상은 험난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