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5-07 23:00:32
[JEONJU IFF 데일리] 절망보다 푸른 나무처럼
영화 <하와의 첫 문장> 리뷰
DIRECTOR. 나지바 누리
CAST. 하와 누리
SYNOPSIS. 어린 시절 정략결혼을 한 지 40년이 지난 뒤, 하와는 마침내 독립적인 삶을 시작하며 글을 배운다. 그러나 탈레반이 다시 집권하고, 그녀와 그녀의 딸, 손녀의 꿈은 새로운 고난에 직면해 산산조각 난다.

구글에 "여성 교육이 금지된 나라"라고 검색해 보자. 딱 한 국가의 이야기만 줄줄이 뜬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24년에도, 해가 바뀐 2025년에도, 지구상에 여성 교육이 금지된 유일한 국가는 아프가니스탄이다.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의 현재가 아닌 미래까지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이는 정말 치명적이다. 게다가 더 끔찍한 점, 이 악몽은 지금이 아닌 아주 오래 전 싹을 틔웠으며, 이제 되돌아왔다는 점이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에서 두 번 모습을 드러냈다. 소련 붕괴 (및 철수) 후 힘을 길러 1996년 카불을 장악해 2001년까지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하겠다는 명목으로 공포 사회를 조성했다. 여성은 공부도 일도 할 수 없이, 집 혹은 무덤에만 있어야 했다. 남성의 경우에는 조금 나았다지만 역시나 특정한 복장과 규율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공개 처형까지 서슴지 않았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은 다시 자취를 감추고 오사마 빈 라덴은 사망했지만, 미군과 나토군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2021년 철수를 결정했고 같은 해 8월, 카불은 다시 점령되었다.
지금도 유튜브 영상을 관리할 만큼 SNS나 국제 여론을 의식하고 있고, 집권 초기에도 여성을 존중하겠다는 (그러니 국제 사회는 말 얹지 말라는) 성명을 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영화를 만든 나지바 누리 감독 또한 여성 기자로서의 삶이 위험에 처했음을 직감하고 옷가지와 노트북, 카메라, 지금까지 만들던 영화의 풋티지 영상이 담긴 장치만 겨우 들고 곧바로 출국한다. 극영화보다 더 극적인 현실.

나지바는 그전까지 엄마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 이름은 하와. 어린 나이에 30살 많은 남자와 결혼해 자식 여섯을 낳았고, 이제는 남편의 치매 증세가 악화되는 상황을 보고 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사람. 동시에 너무나 아름다운 큰 나무 같은 사람. 영화를 보면서 하와가 얼마나 현명하고 용감하며 대담하고 또 넓은 사람인지 느꼈다.
하와는 남편과 함께 사그라드는 날들을 고요히 보내는 대신, 기꺼이 밖으로 나가 자수 천 파는 사업을 벌인다. 동업자를 찾아 역할 분담이나 흥정을 능숙하게 해낸다. 결혼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지라, 뒤늦게 글자도 배운다. 어린 손주들이 지적하고 고쳐주는 내용을 듣고 익힌다. 심지어 손주들은 "할머니가 어떻게 (글씨를) 써?" 라고 되물을 만큼, 할머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너무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도.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 그대로의 모습이다. 새로운 것 배우기를 포기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계속해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

이토록 현명하고 강인한 하와는 그 동안 '집 안의 사람'으로만 살았다. 뭐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은 여성에게 불합리했다. 하와는 어린 나이에 수십 년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와의 조혼을 겪어야만 했으며, "부모가 자신을 위했다면 아이를 낳지 말라고 말했어야 했다", "이런 결혼으로 우리에게 상처만 남겼다"고 오랜 세월 후에도 그 상처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지바의 언니는 이혼과 함께 두 살배기 딸의 양육권을 박탈당했다. 그 딸, 자흐라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만 해도 돌아오는 매를 맞으며 유년기를 보냈고 끝내 쫓겨나 12년 만에 제 엄마를 찾아왔다. 나지바 언니의 새 남편은 다행히도 친절하고 합리적으로 자흐라를 대해 주지만, 부부 또한 현실의 벽을 넘어설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양육권 분쟁에 시달릴 마음도, 혹시나 자흐라의 친부가 새로 낳은 아들들과 새로운 삶에 손을 뻗쳐오게 둘 마음도 없다. 결국 손녀를 맡아 옷과 팔찌를 사주고 글자를 가르치는 것은 하와의 몫이다. 마치 이럴 줄 알고 배웠던 사람처럼, 하와가 쓰려고 산 화이트보드는 자흐라의 공부 터전이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재난은 언제나 약자를 치고, 어린 여자는 재난 상황에 약자 중의 약자이므로.

탈레반이 오면 14살 자흐라는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신세가 된다. 결국 자흐라는 시골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어른들의 결론이 난다. 그 동안 자흐라는 내내 울고 있고, 하와가 똑같은 표정으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 방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공포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 둘이다. 하와가 탈레반의 치하에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의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가장 마음 아픈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계속 극영화 못지않게 극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내 마음은 자흐라와 하와의 표정에서 떠나지 못한다. 하와는 글을 배우기로 결심했을 때 몰랐을 것이다. 손녀에게 글을 가르칠 줄도, 딸이 멀리 떠나야만 해서 편지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 줄도. 마치 이럴 줄 알고 배웠던 것처럼, 그토록 유용하다.
아니, 이 말은 틀렸다. 마치 이럴 줄 알고 배운 것처럼 배운 게 아니라, 글을 배운다는 건 그만큼이나 일상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렇게나 필수적인 기술을 배워야 하는 기회를, 소녀들은 박탈당하고 있다. 하와는 그 고통을 알고 있다. 이미 피부로 겪었기에.

"차라리 다 같이 몰려가서 우리를 다 죽이라고 하자. 몰살을 당하는 게 낫겠어. 그러면 애도도 하루만 하면 되잖아." 얼마나 절망하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닿을 수 없는 깊이의 절망을 스크린 너머 바라볼 수밖에 없다. 탈레반은 이미 여자들을 몰아냈다. 이미 공부하고 일하고 생각하고 "나대기" 시작한 여자들을 탈레반이 어찌 갑자기 가두겠나 했던 사람도 있을 텐데, 결국 그렇게 되고 있다. 이토록 생명력 넘치는, 푸른 나무 같은 여자들의 오늘과 내일을 탈레반이 뒤덮고 있다.

하지만 하와는 포기하지 않았다. 책과 자수 천을 곱게 챙겨 두었다. 언젠가 다시 펼쳐 옷을 만들어 팔고 사업 수완을 발휘할 날이 올 수 있길 바라며. 하와가 꾹꾹 눌러 쓰고 읽는 문장들을 자흐라와 다른 아이들도 계속 읽고 쓸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를 앞두고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전 세계가 모두 비슷해지는 시대에 다른 경험을 하는 것 자체가 저항입니다."라는 말로 관객을 전주에 초청했다. 어쩌면 이런 영화를 함께 본다는 자체로도, 우리가 지켜보고 있음을 명확히 하는 자체로도, 포기하지 않은 어떤 이들에게 가 닿을 수 있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보기 괴로워도 포기하지 않고, 아프가니스탄 소식에 귀를 기울여 본다. 나무 같은 여자들의 자장이 더 넓게 드리우기를.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30-05.09) 상영일정]
2025.05.01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상영코드 111)
2025.05.03 13:30 CGV전주고사 8관 (상영코드 330)
2025.05.06 17:3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 (상영코드 65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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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되는 법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한 영화 <우리, 둘>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꿈꾼다. 그 이야기 속에서, 설령 그 이야기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당신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당신의 이야기는 다채로워질 수도 있고, 그저 그런 평범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고민하게 된다. 우리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진정한' 주인공(hero)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영웅담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1. 방황하는 젊은이
여기, 우리와 마찬가지의 고민을 품은 젊은 기사가 있다. 그의 이름은 '가웨인'이다.
가웨인은 그 유명한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아서왕의 조카로, 그는 원탁의 기사 중 유일하게 그만의 '영웅담'이 없다. 기사 서임식은 다가오는데, 이렇다 할 업적도 세우지 못했으니 그는 날로 초조해지기만 한다. 그리하여 방황한다.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한다. 무엇도 해내지 못할까봐. 그래서 말한다.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나이다.'라고.
2. 과업의 서막
가웨인이 준비가 되었거나, 말거나, 운명의 순간은 다가온다. 어느 크리스마스 절기의 만찬에 정체 모를 녹색 기사가 찾아온 것이다. 한 손에는 죽음의 상징인 도끼를, 다른 한 손에는 호랑 가시 나무를 들고서! 그가 제안한 바는 이랬으니, '나의 목을 벨 기사는 누구인가? 내 목을 베는 자는 영광을 얻으리라. 그러나 1년 후 나의 녹색 예배당으로 와 내게 목을 베여야 하리라!'
그 섬뜩한 '목베기 게임'에 응한 것은, 다름 아닌 젊은 가웨인이었다.
가웨인은 녹색 기사의 목을 베었고, 이 초자연적 존재는 스스로 베인 목을 옆구리에 낀 채 말달려 돌아간다. 1년 후 가웨인의 목을 벨 날을 기약하며!
가웨인은 그 게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웅이 되었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시련의 시작임을 모르지 않았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녹색 기사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그는 대단한 행패를 부린 것도 아니고, 그저 어떤 신비롭고 기괴한 제안을 했을 뿐이다. 가웨인은 얼마든지 그 제안에 응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응했다. 우리들이 우리에게 닥치는 운명을 마지 못해 받아들이는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운명의 여정에 어쨌든 올라야 하는 법이므로.
그리하여 가웨인은 1년 후 모험을 떠난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용기보다는 막막함과 걱정이 더 많이 맴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짊어진 그리스도 같기도 하고, 신벌로 과업을 부여받은 비극적 운명의 그리스 영웅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1년 후에 죽을 것을 알면서 누리는 영광은 얼마나 찰나와 같았을까. 그는 매 순간, 녹색 기사에게 목을 베일 것을 걱정하며 살아갔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여정을 떠난다. 과업을 수행하는 것은 모름지기 모든 영웅의 필수 조건이니까.
3. 자아 찾기의 여정, 그리고 시련
여정은 고달프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는 도적에게 가진 것을 죄 털리기도 하고, 피로는 언제나 그의 몸을 뒤덮는다. 어쩌면 그는 몇 번이고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안락한 성 안에서, 그가 사랑하는 이들의 애정을 받으며, 그저 향락에 빠져 사는 것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므로 이런 고난은 다 내버리고 돌아가고 싶다고. 그러나 그는 나아간다. 그의 삶의 '영웅'을, 그의 삶을 빛낼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 했으므로.
다행히 그는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그에게는 정체 모를 여우 조력자가 있고, 기나긴 여정 끝에 도달한 버틸락 성에서는 그를 살갑게 맞이해 주는 성주 내외가 있다. 그들 덕분에 그의 여정은 마냥 버겁지만은 않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젊은 가웨인에게 달콤하기만 했을까? 우리는 때론 달콤한 것을 경계해야한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 가장 화려한 독버섯의 독이 가장 치명적인 것처럼 말이다.
고달픈 여정만이 그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이 아니란 소리다.
버틸락 성주는 그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특이한 제안을 한다.
"자네가 머무는 동안 나는 내가 사냥해 온 사냥감을 줄테니 자네는 자네가 여기 머물면서 이 성에서 얻은 것을 주게."라고. 그리고 가웨인은, 그 성에서 성주 아내의 입맞춤과 녹색 벨트를 받는다.
그는 정직한 기사로서 성주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성주 아내의 유혹을 애써 뿌리쳤지만 그녀가 내미는 마법의 녹색 벨트, 그러니까, 차고 있으면 어떠한 상처도 나지 않는다는 그 물건을 거절하지는 못한다.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1년간 고민했던 비극적 운명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을터였다.
성주가 그에게 성에서 묵던 며칠 간 무엇을 얻었냐고 하자, 그는 성주에게 그의 아내에게서부터 받았던 입맞춤을 돌려준다. 그러나 녹색 벨트는 돌려주지 않는다. 대담하게 꾀를 부리는 그 숱한 고전 속의 영웅들처럼. 그것은 부정직과 비겁일 수 있을테지만, 어쩌면 영웅이라는 미명 하에 그것이 용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웨인은 녹색 예배당으로 향한다. 그가 떳떳하지 못하게 얻은 녹색 벨트를 차고서.
4. 시련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녹색 벨트만 있으면 그는 죽음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의 순간까지 그것을 찬 채 고개를 숙인다. 속이려고 한 것이다. 그 초자연적 존재를!
그러나 가웨인은, 그 최후의 순간에, 주어진 과업을 불명예스러운 속임수로 마무리한 결과를 예측한다. 거짓으로 얻은 왕위는 그를 좀먹어 들어갈 터였다. 사랑하는 이와 저버리고, 그의 왕국을 위협에 빠트리리라. 그것이 부도덕한 영웅이 맞이할 결과일테니. 그 상상속의 말로는 처참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짧지만 끔찍한 고뇌 끝에 마침내 이야기한다.
"잠깐! 이 벨트를 풀고 나서 나의 목을 베시오!"
그렇게 이야기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는, 마침내 과업을 완수한 영웅의 광채가 깃든다. 그렇다. 그는 그 많은 유혹들 중 가장 떨쳐내기 어려운 스스로의 유혹을 떨쳐낸 것이다.
가웨인은 목에 베였을까? 그는 목숨을 잃었을까?
영화 내용만 봐서는 그것을 예측할 수 없다. 그런 장면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가 그의 임무를 영웅답게 완수하고 영광스럽게 그의 고향으로 되돌아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으레 과업을 수행한 다른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숱한 시련과 유혹 속에서 방황하는 가웨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네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달콤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예측불허하며, 그래서 우리를 두렵게 한다. 삶은 녹록치 않다. 사람들은 우리가 '청춘'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기대와 굴레를 씌우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앞날도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삶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제대로 빛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고뇌가 우리의 뇌를 가득 채우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달콤한 속임수에 눈을 돌린다. 나와 타인을 속이는 일은 내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보다 훨씬 쉬우므로.
그러나 우리의 젊은 기사 가웨인처럼, 우리도 때때로 우리의 '목베기 게임'에서 기꺼이 우리의 녹색벨트를 풀어내야 한다. 두렵다고 피해가는 것은 운명을 상대하는 바른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속임수를 버리고 모두의 앞에서 떳떳해짐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 영화는 신비롭고 상징적이다. 반지의 제왕처럼 스펙터클한 전쟁씬을 바랐다면 조금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중세 기사의 이야기라든가, 아서왕 이야기의 큰 팬이라면, 혹은 방황하는 청춘으로써 눈 앞에 닥친 운명으로부터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지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한번쯤 관람해봐도 좋을 것 같다.
영화 줄거리 외적인 부분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다양한 인종이 출연했다는 점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을 맡았던 데브 파텔은 인도계이고, 그의 어머니를 맡은 사리타 초우드리는 인도계 영국배우이다. 오늘날 영국 인구의 적지 않은 수가 인도계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캐스팅은 현대적 감수성을 반영한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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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 첫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Every good thing in this word started with a dream"
이 세계의 모든 좋은 것들은 꿈과 함께 시작됐다
대부분 2005년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떠올릴 테지만 <웡카>는 1971년에 개봉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오마주를 띄고 있다고 하죠? 21세기를 대표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의 2024 <웡카>는 어떨지 이번주 개봉작 함께 알아보아요.
웡카
Wonka
ⓒ 네이버영화
개요: 판타지, 드라마 | 미국 | 116분
감독: 박영주
출연: 티모시 샬라메, 캴라 레인, 올리비아 콜램, 톰 데이비스, 휴 그랜트 등
개봉: 2024.01.31.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시놉시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여정 좋은 일은 모두 꿈에서부터 시작된다! 마법사이자 초콜릿 메이커 ‘윌리 웡카’의 꿈은 디저트의 성지, ‘달콤 백화점’에 자신만의 초콜릿 가게를 여는 것.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모자 가득한 꿈과 단돈 12소버린 뿐이지만 특별한 마법의 초콜릿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낡은 여인숙에 머물게 된 ‘웡카’는 ‘스크러빗 부인’과 ‘블리처’의 계략에 빠져 눈더미처럼 불어난 숙박비로 인해 순식간에 빚더미에 오른다. 게다가 밤마다 초콜릿을 훔쳐가는 작은 도둑 ‘움파 룸파’의 등장과 ‘달콤 백화점’을 독점한 초콜릿 카르텔의 강력한 견제까지. 세계 최고의 초콜릿 메이커가 되는 길은 험난하기만 한데…
CINE PICK!
북미에서 1억 9천만 달러의 누적 흥행을 기록한 <웡카> 21세기 가장 핫한 배우 티모시 샬라메와, 휴그랜트의 대변신으로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작품으로 특히 <찰리와 초콜리 공장>을 봤던 이전 관객들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킬것으로 보입니다.
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스릴러 | 프랑스 | 152분
감독: 쥐스틴 트리에
출연: 산드라 휠러, 스완 아라우드, 밀로 마차도 그라너 등
개봉: 2024.01.24.
배급: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시놉시스
남편의 추락사로 한순간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유명 작가 ‘산드라’. 유일한 목격자는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과 안내견뿐.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우발적 자살 혹은 의도된 살인? 사건의 전말을 해부해 가는 제7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CINE PICK!
칸 황금 종려상, 골든 글로브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한 화제작 <추락의 해부>는 쥐스틴 트리에의 각본, 연출로 역대 3번째 여성 황금종려상 수상자가 되었으며, 독일의 3대 여배우에 속하는 산드라 휠러가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치며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고 있습니다.
두 세계 사이에서
Between Two Worlds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프랑스 | 103분
감독: 엠마뉘엘 카레르
출연: 줄리엣 비노쉬, 헬렌 랑베르, 레아 카르네 등
재개봉: 2024.01.31.
배급: (주)디오시네마
시놉시스
저명한 작가 ‘마리안’은 고용 불안을 주제로 한 신작 집필을 위해 프랑스 남부의 연고 없는 항구 도시 ‘캉’으로 이주한다. 신분을 숨긴 채 청소부로 일하면서 노동자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그들의 현실을 직접 보게 되고 점차 우정을 쌓아가지만, 정체를 더이상 숨길 수 없는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CINE PICK!
영화 <두 세계 사이에서>는 위스트리앙 부두라는 소성르 원작으로, 프랑스의 국민배우 ‘줄리엣 바노쉬’가 주연을 맡으며 섬세하고 절제된 연기로 르포르타주 드라마의 장르적 특성을 살려내며, 비노쉬는 소설을 영화화하기 위해 원작의 작가에게 오랫동안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톰 새로운 시작
Astro Boy
ⓒ 네이버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 미국 | 94분
감독: 데이빗 보워스
출연: -
개봉: 2024.01.31.
배급: 블루필름웍스
시놉시스
과학의 도시 메트로 시티. 최고의 과학자인 '텐마 박사'는 로봇 시험 가동 중 자신의 실수로 아들 '토비'를 잃고 괴로워한다. 그는 '토비'의 DNA와 하이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최고의 로봇을 탄생시키는데... 이제 시작이다!
CINE PICK!
데쓰카 오사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으로 이 영화는 고전적인 아톡 캐릭터를 현대적이고 첨단 기술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배우 조병규, 김소원, 김강현이 더빙에 참여하며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네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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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며드는 것은 막을 길이 없지.
이 글은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 많음 주의)
빌런의 새로운 챕터를 열다;숀펜
사진 출처:다음 영화
강인함과 당당함에 내려오지 않을 것만 같은 어깨. 그리고 그 위에 꼿꼿하게 존재하는 고개. 바쁘게 내딛지만, 배어있는 위엄과 여태껏 지나온 전투들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걸음걸이까지. 꿈속에서라도 군인이 아니었던 순간을 찾아보기 힘들 것만 같은 강직함. 그러나 동시에 오만함을 장착한 스티븐 J 록조(숀 펜)를 보면서. 영화 역사 속에 존재한 빌런의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또 하나의 캐릭터가 탄생했음을. 그리고 여태껏 존재한 악역들과는 필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그를 완벽하게 차별화된 경지에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현실성이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잔인함으로 혀를 내두르게 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누구를 협박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일을 한다. 마치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 평범성이 현실과 너무 맞닿아 있는 바람에. 그를 보는 내내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으니까.
그는 영화의 모든 순간을 장악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정말로 한 번쯤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서. 그의 절룩거리는 걸음걸이에 소름이 끼치는 순간을 몇 번이고 맞이하다 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숀 펜에게 빚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순간을 반드시 느끼게 될 것이다.
역사상 가장 느슨한 카 체이싱;마치 주제를 담은 듯한 장면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 거의 모든 부분이 버릴 곳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 카 체이싱(?) 장면은 이 부분 때문이라도 다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이 보석 같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대한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카 체이싱 장면은 속도감이나 규모 면에서는 오히려 소박하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윌라(체이스 인피니티)와 살인자, 그리고 후발주자인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으로 이어지는 소소한 차 세대(three cars in a row)의 행진은(?) 마치 영화 [죠스]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충분한 제작비가 없어서 상어의 지느러미를 보여주는 것 만으로 상어의 등장을 암시하는. 그로 인한 서스펜스를 관객의 입장에서 상상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방식 말이다.
에스파가 서 있어야만 할 거 같은 허허벌판 광야 위의 도로에서. 윌라와 살인자의 이 숨 막히는 긴장감은 백미러로 보이는 뒷 차의 간격으로 만들어진다. 분명 점 정도로 보였던 뒤차가. 이제는 백미러의 뒤꽁무니에 걸리기 시작하더니 두 고개 차이로. 그리고 한 고개 차이로 좁혀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발이 동동 굴러지는 것은 당연하고 윌라가 훔쳐 탄 차가 엔진 오일을 언제 갈았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할 정도로 차 두 대 사이의 좁혀지는 거리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이 와중에 세 사람이 연신 넘어가는 작은 굴곡들을 볼 때마다. 영화의 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어야만 했는지를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하나를 넘었더니 또 하나가 존재하고. 따라잡았다 생각했더니 그것이 장애물이었고. 부딪치고 추락할 때도 있지만 끝까지 나아가는 것 또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느끼다 보면. 안 그래도 갈길 바쁜 관객들은 발을 더 빠른 속도로 구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Can't fight the moon light:스며드는 것은 막을 길이 없지.
사진 출처:다음 영화
총각 시절 잘 나갔던 폭탄 제조자 시절을 보여주는 퍼거슨의 모습을 제외한다면. 영화가 혁명의 진전을 보여주는 방식도 조금은 독특하다. 그들의 혁명은 연기(smoke)로, 그리고 그 연기가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대변할 수 있다.
극 중에서 록조는 하얀 최루탄 가스로 반란을 저지하려 한다. 희고 뿌연 매캐한 억압은 뿌리는 사람의 눈에도. 그것의 피해자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눈에도 명백히 보이기에, 혁명단원들은 그 연기에 닿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도망친다. 행여나 그 압력에 발끝이라도 닿는다면 숨을 잠시 참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꼼수라도 쓰며 일단 살아남으려 기를 쓴다.
그러나 퍼거슨(혹은 윌라)으로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의 혁명은 다르다. 그들의 혁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연기가 되어 뻗어나간다. 자신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과 단어들로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서로의 살 길을 터준다. 이들의 혁명 방식은 그들을 제압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기에, 록조 역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여지없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들의 복수 혹은 혁명은 마치 달빛과도 같아서. 싸울 수도 그렇다고 만져질 수도 없다.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그들의 혁명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의 TMI]
먼 훗날.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값지게 쓴 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내 늙고 녹슨 머리를 굴려서 찾아낸 순간들 중에 오늘 이 영화를. 위해 쓴 세 시간은 반드시 후보군에 오를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전율이었다고나 할까. 영화에 나온 모든 배우들의 모습을 내가 지켜봐 왔다는 사실에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더 쓰고 싶은 말이 많은데 휴가 첫 날이라 영화 두 편 보기로 해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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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불한당>,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불한당>과 <무뢰한>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품격(?) 막장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두고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불륜이 선빵이면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농담조로 말하자 상대방은 부부, 아니 인간관계에서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냐고 진지한 답을 내어놓았다. 동감하며 답했다. 맞다. 그런 메세지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믿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인지를. 안 믿고 있다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는 게, 믿었다가 못 믿을 놈이란 걸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데 말이다. 그런 인생의 교훈을 일찍 깨달아서 도움이 되었겠다는 말에 웃으며 답했다. 아뇨, 알면서도 당했다고. 이번은 다르겠지. 이 사람은 다르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 결과가 똑같았다고. 알면서 당하면 진짜 바보인데. 안 그런가?
현수 曰 "(어휴) 촌스러워요"
<불한당>은 촌스러운 듯하면서 까리하다.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빨간 스포츠카 같은 영화다. 맛깔나는 대사나 장면도 많다. 다년간의 드라마와 영화 학습으로 쌓인 우리의 기대와 예지력을 조금씩 벗어난다. 처음부터 생선 눈이 무서워서 회를 못 먹는다는 둥, 사람 눈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최후의 만찬처럼 회를 사주고 머리에 총알을 박질 않나, 사람 죽이는 건 안 무서운데 여전히 생선 눈은 무섭다고 깻잎을 덮질 않나. 그러다간 또 푼수 떼기처럼 허세를 부리다가 삼촌에게 얻어맞고 차에 가서 훌쩍거린다. 그 눈물이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던지. 덩치가 작은 현수가 덩치 큰 수감자와 뺨 때리기를 하면서 주먹을 쓰는 반칙을 하면서도 당당하고, 재호는 그걸 보며 '혁신적인 또라이'라며 마음에 들어하기도 한다. 그런 현수에게 열광하는 당신도 두말할 것 없이 압도적인 또라이 아니겠어.
숨겨둔 카드를 빨리 보여준다. 아니, 벌써? 살짝 당황스럽지만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재호는 현수가 위장 경찰인 걸 일찌감치 알고 있고, 현수는 심지어 순진무구한 얼굴로 "형, 나 경찰이야"라고 자백을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알아차리게 된다. 무간도 같은 언더커버 전개가 아닐 거라는 것. 실제로 영화는 나쁜 놈인 건 둘째치고 등장인물들이 어지간히 또라이들이다. 이상하게 순정파 같은 또라이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실 재밌어서 도와준 거 같기도 하고
재호와 현수의 영화이다. 좀 더 치자면 재호와 현수, 병갑과 천 팀장이 남는다. 현수의 행동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재호는 잘해야 미끼 혹은 돌다리다. 검거해야 할 타켓 중 일부에 불과했다. 어지간해선 칼을 가지고 재호를 얼마나 다치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기를 쓰고 그렇게 말리고선 대신 다친다. 재호를 구하지 않았어도, 다치지 않았어도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있진 않았을까. 목숨은 어머니 말씀처럼 박애주의적인 입장에서 구할 수도 있다 쳐도 교도소에서 남은 기간 동안 모든 힘을 다시 찾을 수 있게까지 해준 게 제법 과하게 느껴졌다. 목적을 위해 마음을 얻는 일이 이렇게 정성이 가득한 일이었나 싶었다. 재호에게 든든한 믿음을 얻으려는 전략이었을까, 그 사이에 진심이 있었던 걸까.
게임 끝나버렸는데요
재호가 왜 현수를 아까워하고 아꼈는지는 분명하다. 고아원부터 함께한 병갑과는 다르다. 병갑은 무조건적으로 재호를 좋아하고 무해하다. 하지만 그라고 뒤통수를 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호는 늘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뒤를 돌아보며 살라 하지 않았나. 병갑이 현수를 꼬마 새끼, 짭새 새끼라며 부르며 질투하고, 회장 자리에 앉아보면서 히히덕거리는 순진한 힘에 대한 로망은 빤히 보이니까 괜찮다. 병갑이 정말 재호를 아끼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삼촌이 재호를 죽이려고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놀라지 않았을 때였다. 별스럽지 않게 면회를 와선 뒤늦게 삼촌이 널 죽이려고 했다며 재호의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장면. 아, 이래서 병갑이와는 안 되겠구나 했다. 만약 재호가 잘못됐어도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었을까. 훌쩍거리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수가 재호의 뒤통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병갑은 늘 한 박자 늦고 어딘가 빈틈이 있다. 재호는 병갑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속하게도 마음이 수평을 이루는 사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갑의 마음이 재호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나 상황이냐, 앞통수냐 뒤통수냐
<불한당>은 내게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 안에 사랑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무뢰한> 이후에 믿음의 씁쓸한 얼굴이 떠오르는 영화다.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누구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은 역으로 현재 세상의 기본값이 거짓말과 뒤통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뢰한>은 <불한당>과 비교하면 그나마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재곤과 해경은 살아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믿진 못했다. 재곤은 해경을 속일 힘과 집요함이 있었고 혜경은 속일 수는 있지만 끝까지 모질지 못했다. 그에게 칼을 꽂아도 치명상에 이르지 못한다. 재곤은 혜경을 찾아가 변명도 하고 믿음을 저버린 걸 나름의 방식대로 속죄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해경의 복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에게 칼을 꽂는 것이고, 재곤의 속죄는 그 칼을 그대로 맞고서도 그녀의 새해 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불한당>은 다르다. 현수와 재호는 둘 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 인정사정없이 칼을 꽂고 목을 조르고, 얼굴을 뭉개고 총을 쏜다. 재호의 배신은 순순히 넘어가기 힘들다.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은 건드리는 게 아니지 않나. 재호가 현수를 감는 방법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아끼는 현수를 알고도 완전히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려면 어머니의 죽음쯤은 감수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열하는 현수를 보던 재호의 얼떨떨한 표정이 인상 깊다. 마치 "그렇게까지 괴롭고 슬퍼할 일인가" 싶으면서 약간은 잘못했나 싶은 표정.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현수가 심지어 신분을 드러내는, 평생 재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믿음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비밀과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게, 가족을 그렇게 아낄 수 있다는 게 재호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재호의 마음도, 어깨도 무거워진다. 우리만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그 생각.
이렇게 어려운 건 현수 네가 처음이야
재호는 착실히 판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원하는 것들을 이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왔다 가면서 세워놓은 방법이었다. 이제 현수도 곁에 있고 고병철 회장도 사라졌다. 살기 위한 일이었을 뿐 지겹고 피로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현수에게는 마지막까지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른 게 분명한데도, 주변의 공기도 날씨도 다른데도 함정에 걸어 들어갔다. 병갑을 직접 명패로 때려죽이면서도 현수가 복수를 하고 있구나, 내 손으로 복수를 하게 하는구나 했을 것이다.
묘하게 밉고 묘하게 미워할 수 없다
재호의 병 주고 약 주고(어머니는 돌아가시게 하곤 장례식 비용과 마무리는 도와주는) 식의 행동을 알게 된 후, 현수는 재호를 이상하게도 많이 배려해 준다. 일찌감치 어머니를 죽인 사실을 얘기해서 자신을 죽일 기회도 주고, 경찰들로부터 피할 수 있게 작전을 모조리 바꿔버린다. 재호 역시 자기 한 몸 지키기 바쁜 와중에도 현수가 곤경에 처하자 다가와서 도와주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재호를 천 팀장이 차로 받아버릴 때는 순간 이 영화의 악역이 천 팀장이었나 싶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 팀장이 제일 못된 사람은 아니지만 제일 야멸찬 사람이긴 하다. 모든 걸 알고도 원하는 걸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 죄책감 같은 건 스스로 괴롭기만 하고 당하는 놈이 바보라고 하더니 그럼 이제 누가 바보인가. 얼마나 악역인지는 재호의 웃음소리 뒤에 현수가 천 팀장에게 박아 넣은 총알 소리를 세어보자.
현수가 될 수도 있었지
재호와 현수를 보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안타까워진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아니 현수가 원하는 대로 감방으로 입학하지 않고 취직을 했다면, 재호가 오세안 무역 사람이 아니고 현수가 경찰이 아니었다면, 재호가 가족애라는 걸 공감하거나 현수가 좀 더 솔직하지 않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현수가 바라던 대로 취직을 했다면 회를 먹으면서 영화 시작과 동시에 머리에 총알이 박혔을 것이고 오열하면서 홀로 남은 쪽은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알뜰히 챙겨줬다면 어머니를 핑계로 현수를 움직이게 했던 천 팀장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뭔가 달라졌다고 해도 결과가 과연 안타깝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처음에는 현수 입장에서 재호를 원망했다. 하고많은 방법 중에 꼭 어머니를 죽이는 방법이었어야 했을까. 좀 더 솔직할 순 없었을까.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으면 너를 죽였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 번도 누굴 믿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를 믿는다고 말할 때마다 괴로웠다고도. 천 팀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을 입도 이해는 간다. 경찰인 걸 속이는 것과 어머니를 죽였다는 점을 속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말했다 하더라도 현수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재호가 밝히는 순간 현수는 세상에 홀로 버려지게 된다. 차라리 끝까지 몰랐으면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보고 나선, 현수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과연 현수가 재호의 숨을 끊었을까 싶었다. 총도 맞고 차에도 치어 치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재호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는 끈질기니까 살아남을 순 있겠지만 어차피 이젠 함께할 수가 없다. 현수와 재호는 정말 모든 걸 그만두고 버리고 떠날 용기는 없었다. 재호가 다시 감방에 잡아넣는다고 치면 지난날처럼 감방을 주무르며 지낼 수 있을까. 또 나온다 한들 다시 이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현수는 이 일을 계기로 경찰을 그만둘 수 있을까. 현수는 모든 것을 재호에게로 돌린다. 이 모든 상황도, 사람들도, 시간도. 사람들도 역시 상황을 믿을 테니까. 재호의 손에 쥐여준 그 총을 믿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의 현수의 표정은 춥다. 늦은 후회와 밀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허여멀건 하게 질려있다. 굳이 손으로 재호의 숨통을 막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태까지 잠입을 위해 때리고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재호는 다르다. 의미가 생기고 믿어버리게 됐다. 차라리 그가 알아서 고통받도록 그대로 두었다면 적어도 죽음은 현수의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믿음을 저버린 복수는 현수를 스스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현수가 재호를 덮었던 손을 늦지 않게 놓아버리고 뒤도 돌아버리지 않고 걸어갔으면 어땠을까. 그 빨간 스포츠카가 비어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들이마시는 재호의 숨은 인셉션의 팽이처럼 마지막 숨인지 계속되는 숨인지 알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영화는 불한당이고, 나쁜 놈들의 세상이다. 현수는 재호를 죽게 함으로써 불한당이 되고, 재호의 마음을 이해한 채로 살아가게 됐다.
여담이지만 <무뢰한>에서 목적을 위해 믿음을 뒤로했던 형사 재곤은 <열혈 사제>에 가서는 신부가 되어 "너에게 말한다. 77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역대급으로 성장한 인내심과 믿음을 보여주었다. <불한당>의 피와 눈물, 배신감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에 젖은 경찰 현수는 재호와의 사이에서 용서가 물 건너가 버린 게 마음 아프기도 하다. 인생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용서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내 안에 살아있던 그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부정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언제 봤다고 대뜸 자기라고 부를 때였는지, 처진 어깨로 등 뒤에 칼이 있는지도 모르고 감방 복도를 걸어갈 때였는지, 출세하기 한참 전에 낡아빠진 사무실에 데려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인지, 알면서도 자기가 불러들인 죽을 자리로 들어오는 초연함 때문인지, 혹은 언제든 총을 쏠 수 있던 사람이 자신 앞에서는 결국 총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인지. 다만 현수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손을 떼지 못하는 그 순간에 여실히. 그 마음이 미안함 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어둠 속에서 느낀 모든 것들이 날이 밝아오면서 밀려올 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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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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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하지만 쉽게 망각하는 사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였다. 영적 세계를 표현한 픽사의 엄청난 상상력과 표현력은 놀랍다. 이래서 픽사 영화는 믿고 봐도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겠는가. 단순히 쉽게 흘러가는 줄거리 속 숨어 있는 심오한 메시지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다. 그리고 <소울>에서 가끔 등장하는 한국어와 한글은 한국인이 봤을 때 친근함과 소소한 웃음 포인트라고 볼 수 있다. 나에게 불꽃을 만들어준 영화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화 서두에 적었다시피 한글과 한국어에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우리들처럼 흑인들이나 뉴욕에 사는 사람들도 <소울>에 소소한 재미를 느낄 것이다. 거대한 뉴욕 도시 풍경과 분위기는 물론, 주인공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의 인종에 맞춰 소울 가득한 재즈 음악과 흑인 바버샵, 흑인 특유의 억양과 발음 등 자연스럽게 녹아든 흑인 문화들을 살펴볼 수 있고, 같이 즐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조 가드너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라라 랜드>의 세바스찬(라리언 고슬링)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과 비슷하여 그를 떠올렸지만, 피아노 연주로 전해져 오는 분위기와 소울이 달랐다. 역시 재즈는 흑인 문화인만큼 그 소울을 따라갈 순 없나 보다. 표현 같은 픽사 작품인 <인사이드 아웃>이 인간의 감정과 정신세계를 창의적이게 표현한 영화라면 <소울>은 인간의 영적인 세계 즉, 죽음과 창조에 대해 창의적으로 표현한 영화다. 인간이 죽고 난 후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의견은 각자가 다를 것이다. <소울>은 우주처럼 보이는 배경에 거대하고 환한 빛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으로 죽음을 표현한다. 환한 빛을 향하니 긍정적인 세계로 향하는 듯 보인다. 반면, 창조는 생물학적인 탄생 이전으로 인간이 가지게 되는 성격이나 성향을 미리 만든 상태로 성장해간다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 자아를 미리 만들어놓고 성장하면서 그 자아를 발현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이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든 영적 세계는 신기함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인간의 자아 형성은 어떻게 되고, 죽음 이후에 다가오는 과정은 이러한지 그리고 인간이 지닌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순간 <소울>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일상의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아가자라고 느낀 영화다. 이 주제는 너무 단순해서 금방 망각하기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소울>은 이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영화다. 일상의 즐거운 순간, 행복한 순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다독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이 주제와 더불어 '목적'이라는 키워드도 언급하고 싶다. 조 가드너는 '하프 노트'라는 재즈 클럽 멤버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막상 꿈에 그리던 재즈 멤버가 되니 그는 마냥 기뻐하지 않고, 공허함을 느낀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불꽃이 약해진 것이다. 목적, 목표를 정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긍정적인 성과나 변화를 얻길 원하고, 실제로 얻기도 한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좋은 결과에 대한 기대감을 한 없이 높아지고 과장되어 간다. 그리고 결국 꿈에 그리던 목표에 도달했을 때, 과장되었던 기대감에 김이 빠지기 시작하며, 공허함이 밀려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대감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두려워서 무계획을 실현할 수도 있다. <소울>은 한편으로 목적 있는 삶이 필요한가를 묻는다. 정확히는 무조건 목적이 있어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꽃이 생겨날 수 있는가를 묻지만, 단순하고 일반적인 순간에도 마음속 불꽃이 생겨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신롬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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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친구가 이발하라고 만원을 쥐어주던데 [단편영화] Official short film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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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수많은 사람들에게 레전드로 기억되는 썰
'여자친구가 이발하라고 만원을 쥐어주던데'를 본격 단편영화화!
제작 씨네마사지
원작 김봉철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
출연
황보 김동영 오유나
여자친구가 이발하라고 돈 만원을 쥐어주던데
그다음엔 목욕탕 가라고 또 만원 주고
목욕 다 하고 탕 앞에서 바나나 우유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굴 뽀얘져 가지고 막 빨간 볼 하고 나오면서 바나나 우유 두개 들고오다
나 먼저 먹고있는거 보고 뒤로 감추고
상설매장가서 옷 깔끔한거 사주고 막 맞춰보면서 잘어울린다고 좋아해주고
나 수줍어하니까 귀엽다면서 막 웃고
집에 데려다 주는 길 집 앞에서
이제 깔끔해지고 말쑥해지고 멋있어졌으니까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고
이게 마지막 사겼던 애랑 마지막 날 했던 일인데
내가 다시 연애같은걸 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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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4」시리즈 속 모든 상징과 철학 뽀개기 #02 | 매트릭스 인문학 리뷰 | 매트릭스 리저렉션 리뷰 | 매트릭스4 리뷰 | 매트릭스4 해석 | 매트릭스 리저렉션 해석 |
?《매트릭스4 리저렉션》(2021) 영화리뷰 / 매트릭스4 리저렉션 리뷰
《매트릭스 1~3》 인문학 결말포함 영화리뷰 #2
*후속영상
#1 [네오는 테스형♪] https://youtu.be/gckW2TYRFMc
#3 [빨간 옷의 여자] https://youtu.be/X_fQcoytk70
#4 [오라클은 악마다?] https://youtu.be/fLgWf7NWkn8
#5 [스미스는 왜 졌을까] https://youtu.be/Uas0KZDCQec
*추천영상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리저렉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 라나 워쇼스키
각본: 라나 워쇼스키, 알렉산드르 하몬, 데이비드 미첼[1]
제작: 라나 워쇼스키
음악: 조니 클라이맥, 톰 티크베어
촬영: 존 톨
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앤 모스 외
제작사/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1년 12월 22일, 한국 12월 22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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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림천하: 제국의 부활> 메인 예고편
황실의 불교 탄압으로 흔적도 없이 불타버린 소림사의 마지막 후예 ‘득보’.
그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사기 행각으로 객잔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득보’의 객잔에 숨겨진 소림사 마지막 유산의 단서는 세력을 키우려는 권력가들의 야욕을 자극하고,
이를 갈취하려는 권력가들로 인해 ‘득보’는 살인 누명을 쓰고 하나뿐인 아들마저 잃는다.
복수를 결심한 ‘득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림사 노승의 지도 아래 뼈를 깎는 고통으로 소림권을 수련하고,
그는 소림사의 후예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함께 자신을 모함한 사건의 배후에는 제국을 피로 물들일 음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모든 악을 끝낼 결전의 시작!
전무후무의 소림 액션이 난세를 종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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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의 나라> 3차 예고편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 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