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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시선과 판단을 배제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은 때때로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떠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내면이 어떠한 지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아사코>에서는 야외에서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사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흔들리는 아사코의 시점 쇼트를 통해 재난 이후 어느 정도 회복된 일상에서도 사건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음을 보여주고,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지 2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가후쿠가 차 안에서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를 연습하는 모습을 통해 사건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그의 일상과 습관을 보여주며, 미사키와 가후쿠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들이 서로 자신이 가진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하마구치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시 영화 전체에서 주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작은 산골 마을에 도시의 자본가들이 오며 글램핑장 설립 문제를 둘러싸고 주민들과 도시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영화는 글램핑장 설립 문제를 둘러싼 사람들의 갈등과 대립 자체보다는 도시에서 내려온 외지인들에 대해 마을 주민들이 어떤 태도와 반응을 보이는지, 각 상황에 대해 인물들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고, 해당 사건이 일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에 주목한다. 내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인간 중심적인 시각과 판단을 방지하려는, 혹은 부정하려는 듯한 영화의 태도를 볼 수 있는 지점들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인물의 시점 쇼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이어지는 다른 컷들이나 인간의 시선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어색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사실은 그것이 시점쇼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지점들이었다. 이러한 지점들로 대표되는 장면으로는 오프닝 장면과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간 장면, 타쿠미 모녀가 죽은 사슴의 뼈를 발견하는 장면과 엔딩장면을 말할 수 있다.
먼저 오프닝과 엔딩 장면의 경우, 영화는 아래에서 나무를 위로 올려다보고 있는 듯한 시점의 화면을 제시하며 화면은 인물이 나무를 올려다보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듯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이 화면에는 어떠한 떨림도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움직이고 있는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이었다면 적어도 걸어가는 동안 인물의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하는 떨림이 감지되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 특히 엔딩의 경우 거친 인물의 숨소리가 함께 등장하고 있기에 안정적인 화면은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보이는 움직임에서는 그러한 떨림 없이 수직 방향으로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이것은 다소 기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즉, 이것은 어떠한 인물의 시점 쇼트, 인간의 시선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와 달리, 기계의 시선으로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패닝으로 담는다. 이를 통해 관객은 마치 이동 중인 차 내부에서 차창으로 아이들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해당 장면에 앞서 타쿠미가 딸 하나를 데리러 가기 위해 숲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했기에 관객은 이 시선이 차 안에 위치한 타쿠미의 시점일 것이라고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내 한 대의 차가 프레임-인하고, 이 차에서 타쿠미가 내리며 앞선 관객의 기대는 무너진다. 만약 이것이 타쿠미의 시점이었다면 우리가 타쿠미의 차가 프레임-인 하는 걸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보고 있는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일까? 이어지는 장면에서 하나가 이미 홀로 걸어갔다는 말에 타쿠미는 다시 차를 돌려 나간다. 이때도 역시 우리는 그가 떠나는 길을 그의 시점이 아닌 차의 후면에서 바라보게 된다. 타쿠미와 하나가 죽은 사슴의 뼈를 발견하는 모습에서도 관람자는 어딘가 어색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어색함은 하나와 타쿠미의 정면 바스트-숏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장면은 숏-리버스 숏으로 연결되며 사물을 보고 있는 주체를 담은 쇼트, 그리고 관찰의 대상이 등장하는 쇼트가 이어지는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해당 장면은 죽은 사슴의 뼈가 먼저 등장한 뒤 이를 바라보고 있는 타쿠미와 하나의 모습이 로우앵글과도 가깝게 보이는 정면으로 등장하며 죽은 사슴의 뼈의 시점에서 바라본 인간, 혹은 땅(자연)의 시점에서 바라본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게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마지막 부분, 뿌연 안개 속 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점점 하나와 사슴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 장면 역시 머지않아 카메라 양쪽에서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프레임-인하며 이것이 인물의 시점일 것이라고 예상한 관객의 기대가 무너진다. 이것이 타쿠미나 타카하시의 시점 쇼트였다면 그들의 뒷모습은 결코 등장할 수 없을 것이고, 그들이 아닌 다른 어떤 인물이었다면, 타쿠미가 타카하시의 목을 조르는 상황 혹은 타쿠미가 하나를 안는 장면에서 존재가 감지되어야 했지만, 해당 장면에서는 타쿠미, 타카하시, 하나 세 인물과 사슴뿐 다른 어떤 존재도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것이 어떤 인물의 시점 쇼트가 아님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처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정 인물의 시점 쇼트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며 인간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파악하는 것을 배제하고자 한다. 인간의 시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사유하려는 순간 영화는 기계적인 움직임과 예상치 못한 관점을 통해 우리의 판단을 제지하는 것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주의에 대해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자 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악은 의도하지 않고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악인은 자기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악이 좋지 않은 것임을 그가 알았다면 그것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어떤 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것을 행했을 리 없다는 가정으로부터 선과 앎, 악과 무지는 곧 동일시된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이러한 니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는 말 그대로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피해와 병치되는 타카하시의 피해는 타쿠미에게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했던 ‘선’으로, 새끼를 지키려는 본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을에 글램핑장을 설립하려는 기업은 그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선’이 있기에 해당 일을 추진하고자 하고, 엔터업에 종사하는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지원금이라는 선을 위해 행동한다. 특히 주민과의 대화에서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해당 마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나는데, 니체의 말처럼 만약 그들이 마을에 가해질 악이 자신에게 돌아올 선보다 크다고 인지했다면 그들은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들뢰즈는 참과 거짓이라는 진리의 문제는 언제나 선과 악이라는 언제나 앞서 결정 되어있는 전제 뒤에 따르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의미와 우리가 믿는 것의 가치에 따라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진리들만을 소유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며, 이렇게 미리 결정 되어있는 참과 거짓을 와해시키는 역량을 들뢰즈는 시간-이미지에서 발견하고 이를 ‘거짓의 역량’이라고 부른다. 즉, ‘거짓의 역량’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서의 오류가 가지는 상대적인 힘이 아니라 참과 거짓의 판단 체계 자체를 와해시키는 힘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에서 발견한 ‘거짓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영화는 인간의 시선과 인간 중심적 가치판단 체계를 계속해서 전복시킴으로써 관객이 쉽사리 악인을 특정할 수 없게 하고,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거나 악인의 존재를 찾는 것에 집중하는 대신 관객들을 악의 범주와 규정에 대해 사유하는 길로, 최근(하류의 변화)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 어떠한 변화(상류의 변화)에 대해 사유하는 길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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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잔은 떠나버린 너에게, 한 잔은 곪아버린 나에게
그렇게 화제였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드디어 보았다. 그렇다. 뒷북도 한참 뒷북을 친 것이다. 영화는 인생에서의 커리어도, 사랑도 모두 잡은 것처럼 보이는 카후쿠의 삶을 조명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는 연극배우로서의 삶, 사랑하는 아내와의 화목한 삶, 두 가지를 모두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아내의 외도를 눈으로 확인하지만 그는 그녀의 부정을 외면한다. 그녀를 질책하는 순간, 그의 화목한 삶은 날라갈 것 같아서. 하지만 그녀의 아내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녀에게 이유를 묻지 못한 채, 슬픔과 궁금증을 묻어두고 살아간다. 마치 로봇처럼.
1. 다양하게 표현되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대사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예요.
나는 믿어요, 아저씨,
나는 뜨겁게, 간절히 믿어요
[출처] 필사 :: 체호프의 희곡, 바냐아저씨 명대사|작성자 헤베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대사는 수화로 표현된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다.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은 카후쿠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와 언어가 다 다른 배우들을 연극 바냐 아저씨의 캐릭터로 캐스팅한다. 이런 연출법은 생소하면서도 현대 사회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오히려 더 부각시킨다. 언어가 달라도 감정이 통한다면, 진심은 결국 통하게 되어 있다는 점, 다만, 그 소통이 진실어린 소통일 때 말이다. 겉보기엔 각기 다른 언어들이 상충된 소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극 속 인물들의 이런 생소한 소통 방식은 관객들에게 극 속의 내용을 더 진실되게 전달하는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카후쿠는 그 점을 노린 것이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수화로 진행되는 연극은 다른 어떤 연극보다도 특이한 전달법을 선택했지만 관객들에게 제공한 감정의 폭은 다른 어떤 연극보다도 넓었을 것이다. 언어의 기능적 불통이 의미론적 불통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의미론적 감정의 증폭만이 남은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배우들에게 감정을 배제하고, 로봇처럼 대사를 읽게 시키기도 한다. 그런 그의 독특한 지도는 배우들로 하여금 대사에 배우들의 개성을 입히기에 앞서, 대사가 주는 메시지에 먼저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주었다고 본다. 극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역시 극이 주는 메시지일 테니까. 그 메시지를 직구 던지듯 전달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대본 숙지와 메시지에 대한 텍스트적 이해가 우선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2. 진실을 알고도 묵인한 그의 최후
하지만 그런 인상적인 극을 연출하는 그는 위선자였다.
그는 아내의 부정을 알고 있었다. 부정을 저지를 당사자도 그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정작 중요한 구멍을 메꾸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구멍은 점점 커져가 카후쿠에게 무감정을 선사한다. 좋은 사람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그는 솔직할 수 없다. 남을 질책할 수도 없고,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겉모습을 유지한다. 하지만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며 죄책감에 매여 살아간다. 자신의 문제를 질책하지 않고, 이해하는 그의 표면적 자비는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다 못해 그의 행동을 위선으로 몰아가고 싶은 못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카후쿠 입장에서는 자신의 평온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를 이해한 것이었겠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잘못을 묻어둔 순간부터 그의 평온한 삶은 끝나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직업을 가진 카후쿠에게 이런 지나친 감정적 절제는 아이러니로 보이기도 한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에 몰입하게 된다. 배우 자신이 실제로 처한 상황과 다른 상황을 연기해야 할 때도 있지만 자신의 상황과 완벽히 일치하는 캐릭터를 만나기도 한다. 카후쿠에게 바냐 아저씨는 그런 캐릭터였던 것 같다. 바냐 아저씨의 대사 한 줄 한 줄을 마주할 때, 그는 자신의 상황과 바냐 아저씨의 상황을 비교해 깊은 몰입을 해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런 몰입이 주는 감정적 소용돌이를 감당해 내기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아내와 연결점이 있었던 후배 배우에게 바냐 역할을 맡긴 것 같다. 그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던 후배 배우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기 위해서. 보다보니, 그 배우에게 소소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3. 상처는 상처로 치유하는 법
그의 상처는 그의 운전사, 미사키와의 담담한 대화들로 치유되기 시작한다. 자신과는 다른 결의 슬픔, 죄책감이지만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마주하고, 담담히 견디어내고 있는, 어쩌면 그보다 더 성숙한 태도를 가진 미사키의 모습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고야 만다. 그녀가 자신의 상처, 죄책감에 대해 마주하는 모습을 목도하며, 자신도 그래야 함을, 그래야 자신이 제 2막을 시작해나갈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의 연극을 보면서 미사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는 운전 기사로 일하면서 카후쿠의 딜레마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그가 연기하는 바냐 아저씨의 진정성을 가슴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고, 극복해나가는 카후쿠의 모습에서, 그리고 카후쿠가 연기하는 고뇌하는 바냐 아저씨의 모습에서 자신이 지고 있던 죄책감을 조금은 덜었던 것 같다. 영화 마지막의 미사키의 표정이 나에게 그렇게 해석되었으니 말이다.
카후쿠는 자신의 나약한 대처로, 아내를 잃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표출해내지 못해 묵혀버린 감정들을 뒤늦게 폭발시킨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바냐 아저씨로 분한다. 여전히 바냐 아저씨로 분해 연기하는 것은 그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나이가 들어가는 어른들에게 특정한 정도의 성숙함을 요구한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프레임을 걸고서 말이다.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라고 있는 것임을 영화는 역설하고 있다. 표출되지 못하고, 곪아버린 감정은 그 인간의 삶의 질을 하락시키고, 점점 로봇으로 살도록 만들기만 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성 못지 않게 감정도 중요한 요소이기에 힘든 부분이 있으면 표출하고, 싫어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싫어도 하고, 화도 내고 해야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 인간이라고 평가해 줄 수 있지 않을까.
4. 총평
수화로 연기하는 한국 여배우가 확실히 돋보였었다. 배우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카후쿠의 후배 배우 역할은 참 오묘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카후쿠를 깨우치기 위해서 배치된 인물인지 의심이 될만큼 그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이 영화의 모든 대사, 인물 캐릭터는 감정적인 호소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카후쿠가 마지막에 표출하는 감정이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전반적인 건조한 분위기에 한 몫하듯, 오토의 바람 상대였던 것으로 보이는 후배 배우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되려 당당한 태도는 오히려 그에게 건방지게 충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그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는 태도는 카후쿠의 감정 표출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그 배우의 기능적 역할은 결국 카후쿠의 성장을 위한 것이었던 걸까 계속 곱씹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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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어둠의 마에스트로: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씨네랩의 시사회초대로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감상했다. 영화는 바로크 시대를 여는 화가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을 흡인력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의 예술적 천재성과 인간적인 결함이 빚어내는 삶의 극적인 대비는 영화의 핵심 주제로, 카라바조의 명암대비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이태리 감독인 미켈레 플라치도는 카라바조의 대표적 화풍인 명암대비 기법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섬세한 연출로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의 개인적인 삶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빛과 어둠의 상징적 대비로 표현했다. 이는 관객들에게 영화전개에 따라 카라바조의 걸작을 하나씩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영화는 역사적 인물 카라바조의 생애를 다루면서도 허구적 요소를 결합해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그림자’ 캐릭터는 허구적인 인물이지만,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 속에서 어둠과 빛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매개체다.
그림자 역을 맡은 루이 가렐은 표정과 눈빛으로 캐릭터의 신비로움을 유지하면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리카르도 스카마르초(카라바조 역)는 천재적 예술가의 예민함과 격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관객에게 그의 고뇌와 열정, 분노, 아픔을 생생히 전달한다. 루이 가렐의 차가운 시선과 존재감은 카라바조의 열정적인 저항과 강력한 대조를 이루며 스토리를 전개한다.
카라바조는 조화와 균형으로 이상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교회 통치하의 르네상스 화풍에 도전하며, 현실 속 인간의 고통과 소외를 작품에 담아내었다. 영화 속 카라바조는 권위와 관습에 도전하며, 교회의 제단에 걸릴 성화(聖畵)를 그리면서 거지, 불량배, 매춘부와 같은 사회의 하층민을 모델로 삼았다. 이런 선택은 엄청난 도발이었으나 거리의 매춘부가 그림 속 성모 마리아로 승화하는 일은 단순한 파격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신성함을 발견한 예술적 통찰이었다.
카라바조가 말한 "내 죄를 사해 달라고 요청했소만… 내 그림은 사면이 필요 없소."는 예술이란 도덕적 판단이나 종교적 사면을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카라바조의 이 대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술과 표현의 자유가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오늘날도 종종 정치적, 종교적, 혹은 사회적 기준에 의해 예술이 검열되거나 제한되는 상황이 여전히 존재한다. 영화는 카라바조의 말처럼,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인 예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림을 사랑하는 이라면, 혹은 카라바조를 더 알고 싶은 이라면, 이 영화는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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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서치
더 서치
체첸을 침략한 러시아 군인의 만행과 체첸 사람들의 고통, EU 인권위원회 조사원의 이야기를 엮은 영화. 영화의 배경은 2차 체첸전쟁이지만, 이야기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1차 체첸전쟁에 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체첸공화국'은 아직 정식 국가가 아니어서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조지아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러시아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체첸공화국은 조지아와 국경을 맞댄 러시아 영토의 작은 부분이다. 인구도 적어서 불과 130만 명 정도이고 인구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들의 종교로 알 수 있듯이, 체첸인은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속했었는데, 1830년 이후 러시아군이 오스만트루크와의 분쟁을 이유로 체첸 지역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1859년, 러시아 제국에 강제 병합되었다.
체첸인은 비록 소수민족이지만,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고, 그 역사는 무려 6천년이 넘는다고 한다. 주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고, 소수민족이어서 이들이 독립국가를 만들 기회와 힘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고, 러시아연방공화국(쏘비에트)가 탄생하면서 체첸도 쏘련연방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1991년, 쏘련 연방이 붕괴하면서 1993년, 새로운 연방법에 근거해 '체첸 공화국'이 되었다.
쏘련 연방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1년, 체첸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은 전 쏘련군 장군인 조하르 두다예프였다. 그는 체첸공화국 독립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내전에 휩싸인다. 체첸에는 독립 지지 세력과 친 러시아 세력이 갈등을 일으켰고, 이들이 내전을 일으킨 것이다. 이 내전을 계기로 러시아는 체첸에 병력을 보내게 되고, 이것이 1차 체첸전쟁의 시작이다.
1994년, 러시아는 체첸을 침공한다. 러시아 입장에서 체첸은 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되는 작은 지역이고, 군대를 보내면 곧바로 싸우지도 않고 승리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1차 체첸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다. 이와 관련한 영화로 '연옥', '전쟁' 등을 참고할 수 있다.
1차 체첸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약 9만5천여 명이 참전했고, 체첸군은 4만명 정도였다. 러시아가 체첸을 얕보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러시아군은 6천 명 가까운 전사자가 나왔고, 체첸군은 훨씬 많은 1만 5천명 정도가 전사했다. 하지만 이보다 체첸 민간인이 약 10만 여명 사망한 것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쟁은 1996년까지 이어졌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고, 러시아군이 철수한 것으로 미루어 체첸군의 승리라고 해도 좋은 전쟁이었다.
2차 체첸전쟁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저지른 테러로 촉발되었으며, 1999년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이 다게스탄 공화국 국경을 침범하고, 러시아 영토에서 테러를 저지르자 러시아군은 1999년 9월 23일, 체첸을 공격했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시기, 1999년 가을, 러시아군이 체첸을 습격한 이후의 상황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크게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가는데, 아홉살 소년 하지, 러시아군인 니콜라이, EU 인권활동가 캬홀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린다.
러시아 군인들이 체첸인을 심문하고 있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평범한 주민에게 테러범이라며 시비를 걸던 러시아 군인이 갑자기 총으로 두 사람을 살해한다. 그리고 젊은 여성을 끌고 사라진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한 러시아 군인의 비디오 카메라에 담긴다.
아홉살 하지는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본다. 부모님이 러시아 군인의 총에 맞아 죽고, 누나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집에는 갓난 동생만 있을 뿐이다. '하지'의 상황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도 내전을 겪었고, 하지와 같은 수만, 수십만 명의 어린이가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는 갓난 동생을 안고 집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한다. 길을 걷다가 러시아 군인이 보이면 몸을 숨긴다. 공포와 두려움이 그를 사로 잡고 있는 것이다. 동생을 돌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하지는 어느 집 앞에 동생을 내려 놓고 떠난다.
니콜라이는 러시아의 평범한 청년으로, 사소한 일로 경찰에 체포된 후 강제로 입대한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폭력조직이고, 폭력적인 인간들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니콜라이처럼 어리고 순진한 청년이 군대에서 당하는 폭력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자신도 폭력적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다.
니콜라이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한 청년은 결국 자살한다. 부대장은 자살한 신병의 죽음도 '전투 중 사망'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는데, 이런 거짓과 기만, 폭력은 러시아 군대의 일상이다. 니콜라이는 전투 중 사망한 군인을 옮기고, 사망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다 전투요원으로 전출되어 체첸으로 향한다.
그 사이 니콜라이는 선임병들에게 심하게 폭력과 모욕을 당하고, 이런 경험으로 니콜라이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캬홀은 EU 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난민대피소로 몰려드는 체첸인을 대상으로 그들이 러시아군인에게 당한 폭력을 기록하고 있다. 전쟁범죄는 시대를 불문하고 군인보다 민간인에게 더 참혹하고 잔인한 피해를 안긴다. 전쟁은 인류가 가진 폭력성, 야만성, 악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현상이며,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쟁은 인간을 가장 참혹하게 만든다.
캬홀은 그런 전쟁범죄를 기록하고, EU 인권위원회에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하지만, 정작 각 나라의 대표들은 캬홀이 말하는 심각한 전쟁범죄를 듣는둥 마는둥 하는 태도를 보인다. 전쟁은 결국 강자의 논리대로 흘러가고, 인권을 부르짖어도 그것은 형식적인 과정일 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캬홀과 하지는 우연히 만나 함께 지낸다. 그리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하지의 누나는 살아서 돌아와 하지가 어떤 집에 놓고 간 막내를 찾고, 하지를 찾아 나선다.
체첸은 러시아에서 분리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전쟁에 휘말렸다. 그들의 명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소수민족이 겪는 슬픔과 고통이 독립한다고 사라질 것이며, 독립이 원하는대로 될 것인지, 현실적인 상황과 해법을 고민해야 하는데, 체첸 지도부는 분명 이 점에서 성급했다.
결국 수십만 명의 체첸인들이 죽거나 다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으며 잊을 수 없는 비극의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 체첸의 경험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다 겪었던 역사였고, 지금도 분단된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체첸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우리는 남북한이 대치하고, 항상 전쟁의 위협 속에 살지만, 결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을 하는 순간, 남북한은 공멸하고 주변국들만 박수를 치며 좋아할 것이다. 체첸처럼 소수민족들이 세계에는 많고, 그들의 고통과 고난은 쉽게 끊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소수민족은 아니지만, 약소국가에서 이제 조금씩 힘을 갖춰가고 있다.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힘을 길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영화는 그나마 희망을 말하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그들에게 미래는 희망보다는 슬픔과 아픔이 더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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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3번 같이 먹다 숨 넘어가겠네
밥을 3번 같이 먹었을 뿐인데, 숨이 턱턱 막힌다. 식사 자리를 가질 때마다, 체할 것 같은 큰 사건들이 터지기 때문이다. 신작 '보통의 가족' 이야기다.
영화 '보통의 가족'은 헤르만 코흐 작가의 장편소설 '더 디너'를 영화화하였고,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에 좀 더 가깝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던 네 사람이 아이들의 범죄현장이 담긴 CCTV를 보게 되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만약 당신의 자녀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전형적인 질문을 '보통의 가족'을 구성한 두 형제 양재완(설경구), 양재규(장동건) 형제 일가에게 어느 날 폭탄처럼 터뜨린다. 오직 법논리로만 판단하는 형과 따뜻한 마음과 의술을 가진 동생. 가족 일에 한 발 물러서 있는 재완의 새 아내 지수(수현), 치매 걸린 시어머니 간호를 도맡으며 가족에 헌신하는 재규의 아내 이연경(김희애) 주요 캐릭터들을 초반부에 명확하게 설명한다.
이어 이들이 3차례 식사를 하면서 묵직한 주제들이 주어진다. 첫 번째는 치매를 앓는 모친의 향후 거취를 두고 재완, 재규 형제가 의논을 한다. 그러는 사이에 두 가족의 자녀 혜윤(홍혜지)과 시호(김정철)가 범죄를 일으키고, 양가 부부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며 두 번째 식사를 가진다. 네 명의 감정 모두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어서 난감한 상황에 쉽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게 된다.
재완-지수, 재규-연경 부부를 짓누르기 시작한 자녀 범죄의 압박감과 긴장감은 영화 전체로 번져 나간다. 오프닝 시퀀스에 뜬금없이 등장했던 사건이 왜 등장했는지 서사가 전개되면서 확인할 수 있었고, 초반에 다소 웃음을 유발하다가 뒤로 갈수록 진지하게 바뀌는 분위기,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는 정도로 활용했던 장면이나 대사 등을 회수하여 충격을 주거나 재활용하여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연출을 맡은 허진호 감독의 디테일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때, 세 번째 식사에서 마주하는 충격반전이 더해져 관객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린다. '가족', '보통'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부조리함과 이율배반의 민낯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친근하게 사용해 왔던 두 단어에서 거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다만, 세 번의 불편한 식사자리가 만든 결정이 빚어낸 결말은 보는 이들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결정이라는 측면에서는 묵직하다 할 수 있겠으나, 109분 러닝타임 동안 풀어놓은 이야기들을 결말 한 방으로 급끝맺음 하려는 듯한 뉘앙스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거운 딜레마 위에서 캐릭터 본질을 지키면서 한 끗 변주를 시도하며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려고 하는 배우들의 해석력과 앙상블 또한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더 문', '돌풍'에 이어 3번째 함께 호흡 맞춘 설경구와 김희애의 활약상이 인상 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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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콤달콤 (2021); 새콤달콤은 어디에? 남은 건 씁쓸함 뿐
새콤달콤 (2021)
새콤달콤은 어디에? 남은 건 씁쓸함 뿐
새콤달콤 (2021) 정보
감독: 이계벽
출연: 채수빈, 장기용, 크리스탈
개봉: 6/4 (넷플릭스)
장르: 로맨틱 코미디, 로맨스
상영시간: 102분
현실 단짠 로맨스(?)
비정규직 간호사 '다은(채수빈)'은 황달로 입원한 공대생 '혁'에게 유일하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인물이다. 혁은 자신을 챙겨주는 다은을 사랑하게 되고, 순수한 애정 공세에 다은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 퇴원한 그는 다은을 다시 못보게 될 거란 생각에 좌절하지만, 어렵게 연락을 취하게 되면서 '간호사-환자'로 만난 인연에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혁은 다은에게 굉장히 헌신적이었고, 살집 있는 몸매에서 다이어트에도 성공하고 대기업 파견직 사원으로도 발탁되며 승승장구한다. 달콤한 연애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이지만, 혁이 바빠짐에 따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권태기에 접어들면서 다은과 혁의 관계는 점차 나빠진다. 그리고 혁 앞에 나타난 회사 동료 '보영(정수정)'의 새콤한 매력 탓에 혁은 점점 다은과의 연애에 집중하지 못한다. 이렇게 파국으로 접어든 커플의 관계 속에서 영화는 말미에 놀라운 반전을 선사한다.
2000년대 로맨스 소설 원작,
구시대적 설정
<새콤달콤>은 일본의 연애소설 '이니시에이션 러브'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로맨스 영화다. 원작이 2000년대 작품인 탓일까. 2021년 영화로 보기에는 굉장히 올드하고 전형적인 속성들이 많다. 순박하고 숙맥인 공대오빠와 예쁘고 매력있는 간호사와의 로맨스. B급 로맨스 만화 설정이 느껴지는 영화 초반부의 구성은 이런 스토리의 영화가 아직까지도 나온다는 사실에 한숨을 불러일으킨다. 오빠 소리 못 들어서 환장한 귀신이 붙었나? 그 놈의 오빠 소리에 설렌다는 설정은 도대체 언제까지 나오는 건지...퇴원 후 '혁이오빠'가 다은을 찾기 위해 핸드폰 번호를 캐내서 전화를 거는 장면은 사실상 범죄다. 그런데 전화를 받고 당황하기는커녕 집으로 오라는 다은의 태도는...현실감각이 많이 떨어지는 내용이다.
새콤하고 달콤하지도 않다,
그래서 하이퍼 리얼리즘 연애인가?
그래도 초반에 '장기용'이 등장하기 전 파트의 로맨스는 B급 감성을 감안하고 보면 나름대로 귀엽다. 하지만 장기용이 등장하고, 채수빈과 정수정 사이를 오가는 아슬한 관계 속 균열들이 나타나며 이야기는 씁쓸함과 지루함만을 남긴다. 결말에 뒤통수를 칠 만한 반전을 선사하기 위해 중후반부의 내용을 포기한 건가 싶을 정도로 멕이 빠진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새콤달콤'함을 말하고 싶은 건가 의문이 들다가도, 새콤달콤한 연애를 원함에도 현실의 찐연애는 씁쓸하고 하루하루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를 반영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단순히 현실연애의 씁쓸함만을 반영했다고 하기에는 '장기용'이 맡은 '장혁' 캐릭터가 너무 쓰레기처럼 비춰져 혁과 다은의 연애가 유독 최악인 것처럼 보인다. 모두의 연애가 이들처럼 끔찍하게 끝나는 건 아닐테니.
채수빈의 인상적인 연기,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캐릭터
잘생긴 외모의 '장기용'과 천덕꾸러기 같은 면과 새침한 면을 동시에 보여준 '정수정'의 연기도 좋지만, 새콤함과 달콤함의 매력을 가장 절묘하게 표현한 '채수빈'의 연기가 제일 인상적이었다. 영화 초반의 애교 섞인 모습부터 중반부의 달콤한 연인의 모습까지. 특별한 임팩트는 없더라도 영화의 중심을 탄탄하게 잡아준다.
하지만, '채수빈'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다은'이라는 인물에게 너무나 불친절하다. '다은'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피해자로 그려진다. 남자친구인 '장혁'은 다은에게 매일 같이 거짓말을 하고 연애의 권태기를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며 임신과 낙태까지 겪게 한다. 그럼에도 다은을 옆에서 챙기기는커녕 일을 핑계로 보영과 함께 하고, 다은에게 소홀히 대한다. 이러한 장혁의 태도 앞에 다은은 어떻게 하는가. 다은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은 영화 속에 1도 담겨져 있지 않다. <새콤달콤>이 철저하게 남자주인공의 시선에서만 영화를 전개하고 두 여성 캐릭터는 주제를 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말의 반전은 쓰레기 같은 남성 '장혁'을 징악함으로써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게끔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다은'의 시선을 전혀 그려주지 않았는데, 단순히 자신을 사랑해주는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것만으로 관객이 느꼈던 불쾌함이 해소가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엔딩 크레딧이 내려갈 때까지 관객이 통쾌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겔겔겔스타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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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을 목격한 맹인 침술사가 등장하는 스릴러
?Rabbitgumi 입니다!
오랜만에 개봉한 웰메이드 사극 올빼미가 개봉했어요.
다들 요즘 볼만한 영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실텐데,
제 리뷰를 보시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해보세요!
배우들의 좋은 연기와 스릴로 가득찬 사극을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영상에서 알려드릴게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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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도공간> 재개봉 예고편
부모의 이혼으로 홀로 남겨진 ‘얀’은 오래된 낡은 아파트로 새로 이사를 온다.
이사 온 첫날부터 아파트에 감도는 이상한 기운에 자신 말고 다른 존재들이 집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고 불안감을 느낀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위해 사촌 언니는 정신과 대학교수 ‘짐’을 소개 시켜주고 그녀가 보이는 건 자신의 과거 상처로 인해 비롯된 존재라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켜준다. 서서히 이상한 존재에게서 멀어지며 회복되어 가던 그녀는 ‘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는데...
하지만 그에게 다가갈수록 ‘짐’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성적인 정신과 대학교수 ‘짐’은 같은 동료 교수의 소개로 ‘얀’을 만나게 된다.
모든 현상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녀가 부모의 이혼과 상처로 귀신이란 허구를 만들어냈다고 안심시켜준다. 상담 치료를 한 이후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짐’ 주변에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계속된 불면증에 시달리던 ‘짐’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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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앰뷸런스> 메인 예고편
브뤼셀에 한 학교에 17살 두 소년이 자살 폭탄 테러를 하기 위해 뛰어든다.
한명은 현장에서 즉사하지만 다른 한명은 현장에서 사라진다.
한편, 1번 구급차의 응급요원들은
부상자를 응급차로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데,
부상자 몸에 부착된 폭발물을 보고
이 부상자가 사라졌던 테러리스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어린 테러리스트가 깨어나게 되면서
끝난 줄 알았던 숨막히는 테러가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