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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4-01-15 07:37:13

죽을 때까지 '장난'을 멈추지 않은 남자의 일대기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7★/10★

 

  영화 제목 이야기부터 해보자. 헤더 로즈의 인상적인 소설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의 주인공이기도 한 저명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에서 감독에게 제목을 즉흥적 투표로 정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를 포함한 몇몇 사람이 제목을 적어 내고, 그중 투표로 뽑힌 걸 이 영화의 제목으로 하자는 것이다. 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까지 “죽기 전에 해볼 장난이 몇 개 더 있어요”라고 말한 백남준의 일대기와 예술관에 부합하는 제목 정하기 방식이다. 그러나 백남준의 ‘장난’이 그러했듯, 이 제목은 그저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다. 이 제목에는 영화가 재현하는 백남준 예술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기도 하다.     

 

  1932년에 태어난 백남준은 당시 손꼽히는 재력가 집안에서 자라며 예술적 지향의 기틀을 다졌다. 그 퍽퍽했던 시절에 아놀드 쇤베르크의 전위적 음악을 들으며 감명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백남준의 예술은 그가 평생 미워하고 거부했으나 영원히 단절할 수는 없었던, 예술을 하찮게 여긴 아버지의 영향하에서 그 싹을 틔웠다. 한국 전쟁 후에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58년, 존 케이지의 공연을 보고는 “새로 태어났다”. 음악에 동양적‧우연적 요소를 적극 들여와 클래식 전통을 파괴해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존 케이지의 음악은, 아시아인 예술가를 상상하지 못했던 당시 유럽 예술계를 마주한 백남준에게 어떻게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기막힌 응답이 되어주었을 터이다.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고, 객석에 앉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바이올린에 줄을 단 채 반려견인 양 끌고 다니는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게서 “자유로워질 용기와 파괴할 용기”를 얻었다.     

 

 

  이후 모든 예술적 권위에 반대하는 예술 운동인 플럭서스에 참여한 백남준은 TV가 도래할 시대의 핵심 매체가 될 것을 예감했다. 훗날 그를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아버지’로 만들어줄 절묘한 통찰이었다. 그에게 TV는 독재적 매체였다. 사람들은 TV에서 송출되는 화면에 수동적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다(물론 문화연구에 따르면 시청자는 TV의 수동적 대상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TV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달과 같다. 즉,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이에 백남준은 TV를 헤집고 기괴하게 비트는 등 TV의 일방향적 매체성을 뒤집을 예술적 방법론을 지속적으로 고안했다. TV 방송의 중심지였던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리고 비디오가 나왔다. 비디오는 TV와 다르다. 수많은 사회 운동가가 TV 방송에서 다루지 않는 현실을 비디오로 촬영해 알릴 수 있었던 것은 비디오가 TV보다 민주적인 매체였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신만의 방송국을 소유해 주류가 하지 않는 걸 해야 한다는 백남준의 예술관은 비디오 시대, 나아가 지금의 1인 방송 시대를 한참을 앞서 선취했다.     

 

  백남준의 예술은 소재와 방법론 등에서 기존 위계의 맨 밑바닥에 있었다. 당시는 회화, 조각에 밀려 사진조차 예술로 대접받지 못하던 때였기에, TV와 비디오를 예술로 들여온 백남준의 시도는 파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단의 냉대도 자주 받았다. 그의 ‘재능 없음’에 대한 몇몇 평론가의 비판이 이어졌다. 하지만 백남준은 시대를 선취한 모든 예술가의 숙명과도 같은 냉대, 경멸, 저평가를 이겨내고 마침내 점차 널리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영향력과 예술적 영향력의 극치는 뉴욕과 파리 등에서 다원 생중계된 이른바 ‘인공위성 예술’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영감을 받은 이 방송은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이 시청했고, 한국에서는 새벽에 방영되었음에도 수백만 명이 봤다고 한다. 쇤베르크에서 시작해, 존 케이지를 경유하고, 끝내 그의 시대를 지배한 매체에 대한 통찰로 나아간 백남준은 언제나 예술적 전위, 즉 아방가르드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흥미로운 건 시대를 겨냥한 그토록 적확한 장난을 평생 멈추지 않은 백남준이 그의 ‘조국’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한국을 떠난 그가 국제적 명성에 힘입어 다시 고국을 방문한 1984년은 군부 독재의 통치기였다. 백남준이 예술에서 민주주의를 주창했을 뿐 아니라 특권층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좌파적 성향을 갖고 있었음을 고려했을 때, 그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 동료들에게 얼마간 연락이 없으면 조치를 취해달라 부탁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를 성대히 환영해 ‘국격 상승’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의 작품을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책임을 갖는 국가가 나서서 칭송하는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현상이다. 자기 예술에 담긴 반권위주의적, 민주적 요구를 국가가 그저 근사한 트로피로 포장해 전시했을 때 백남준(그리고 그의 후예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환대받는다는 느낌이 평생 고약한 장난에 몰두한 백남준의 예술가 정체성을 완전히 잠식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더불어 플럭서스의 일원이었던 백남준의 아내 구로다 시게코와의 관계 측면에서, 그의 예술가적 남성성이 어떤 토대에 발 디디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괴짜’, ‘천재’, ‘선구자’들은 거의 언제나 남성의 얼굴을 한다. 같은 재능과 예술 행보를 보인 여성 예술가가 종종 ‘미친년’ 소리 듣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백남준의 혜안과 탁월함에 감탄하면서도, 평생 아이 같은 해맑음으로 그저 예술가일 수 있었던 그의 예술적 토대와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예술계의 젠더 배치가 내내 궁금했던 이유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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