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4-01-30 17:57:13
영상미 만으로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을까
립세의 사계
립세라는 폴란드의 한 시골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칭송받는 야그나, 그녀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어 곳곳에서 혼담이 들어오고 있다. 마을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쫓아다니느라 바쁘지만 그녀는 하필 결혼한 유부남이 마을 최고 농부 집안의 아들인 안테크 보리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모두가 농사꾼인 이 마을에서 그녀는 그저 오늘도 종이접기를 하며 더 넓은 세상을 향한 꿈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아름다운 미모는 그녀를 안테크의 아버지에게 시집가게 만들었고 그렇게 마을에서 제일 가는 마님이 되었지만 어째 그녀의 삶은 녹록치만은 않을 것 같다.
1. 러빙 빈센트를 떠올리게 하는 영상미
이 영화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상화된 명화를 보는듯한 영상미, 정말 신경쓴 티가 난다. 밀레의 만종,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등 사실주의, 자연주의 미술 사조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다가 명화속 인물들이 살아움직였던 역사속 인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화를 딱 보는 순간, 이 영화 러빙빈센트와 정말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아니나다를까 같은 감독이더라. 자신만의 스타일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유니크한 영화를 본 것 같아 좋았다. 생생한 역사의 현장, 그 시절의 농업이 삶의 전부였던 마을 속 풍경을 예술과 접목해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칭찬은 여기까지다.
2.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클리셰
나만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가끔 유럽영화를 보고 있자면 운명적인 사랑의 노예라는 그 소재가 여전히 인기 소재인 걸까 싶을 때가 있다. 이 영화 속 여인은 미모를 무기로 남자들을 홀리면서도 진정한 사랑과 도피를 원한다. 모두가 농사일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저 농장에서 누워있을 뿐이다. 그 와중에 유부남과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계시며 그 유부남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모든 대사가 아침드라마 같았다. 난 그저 남자의 유혹에 이기지 못한 가련한 여인이라는 변명은 캐릭터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요새도 이런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그녀의 사랑이 은밀하게 워너비라는 걸까 싶기도하다. 표출되지 않는 관객의 마음 속 이런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걸까.
원작이 180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만큼 원작에 충실했던 지점도 있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이 보는만큼 여주인공이 조금더 자아를 가지고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혹자는 그렇게 되면 그녀의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녀가 마을에서 마녀취급을 당한 것은 마을의 부정을 그녀가 뒤집어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편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은 그녀의 행실이 너무 수동적이었고 주체성이 없이 상황에 끌려다녔기에 그녀가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마녀사냥이란 바로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불륜이라는 전제 앞에서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캐릭터를 이해하고 그의 불행에 얼마나 안타까워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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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덤블도어의 비밀> 내용과 형식의 부조화가 초래한 난국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력한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매즈 미켈슨)'가 과거 범죄를 사면 받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키워나가자 '알버스 덤블도어(주드 로)'는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에게 마법부 오러이자 형인 '테세우스(칼럼 터너)', 순혈 마법사 가문의 후손인 '유서 프(윌리엄 네이디람)', 마법학교의 교사인 '힉스(제시카 윌리엄스)', 머글 '제이콥 코왈스키(댄 포글러)' 등으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그린델왈드를 저지할 임무를 맡긴다. 이에 뉴트와 친구들은 마법 세계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머글과의 전쟁에 나서려는 그린델왈드와 '퀴니(앨리슨 수돌)'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에 맞서 치열한 혈투를 펼친다. 한편, 전쟁 못지않은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덤블도어는 가문의 비밀이 담긴 '크레덴스/아우렐리우스 덤블도어(에즈라 밀러)'를 조우하면서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한다.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은 2016년 <신비한 동물사전>, 2018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비밀>에 이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시리즈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전편인 <그린델왈드의 범죄>가 혹평을 받으며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을 거둔 만큼, <덤블도어의 비밀>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프리퀄이자 5부작으로 기획된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의 존속 혹은 종결을 결정지을 수 있는 분기점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공개된 영화는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듯 보인다. 우선 번잡하다. 너무나도 많은 내용을 한 데 다룬다. 부제에 충실한 덤블도어 가문의 출생의 비밀과 오해, 헤어진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과거사와 정치적 수싸움, 그린델왈드를 막기 위한 뉴트와 친구들의 미션, 그리고 남은 시리즈를 위한 포석 깔기 및 전편들에서 던져진 복선 회수까지. 결코 짧지 않은 2시간 20여분의 러닝타임이 부족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공허하다.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들었지만, 남는 것은 없다. 뉴트의 모험과 신비한 동물들의 활약상이 간신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선과 악의 구도로 집결한 마법사들의 대결은 스케일에 걸맞은 긴장감을 불어넣지 못한다. 전편처럼 또 한 번 길고 긴 예고편을 본 듯한 인상도 남는다. 어째서일까? 그 중심에는 내용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의 형식을 고집한 각본이 있다.
<신동사>와 <해리 포터>의 결정적 차이점, 사랑
사실 <덤블도어의 비밀>의 전반적인 구조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을 상징하는 덤블도어가 한쪽에 있고, 악을 상징하는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와 볼드모트가 반대쪽에 위치한 가운데, 덤블도어의 대리인으로서 뉴트 스캐맨더와 해리 포터가 있다. 즉, 직접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는 뉴트/해리 대 그린델왈드/볼드모트이고, 덤블도어는 뉴트와 해리를 지도하는 감독인 것이다. 문제는 덤블도어-뉴트-그린델왈드가 만드는 이야기와 덤블도어-해리-볼드모트의 관계가 빚는 이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자와 후자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상이하다는 점을 <덤블도어의 비밀>은 간과하고 있다.
잠시 시선을 돌려 <해리 포터>를 살펴보자. <해리 포터> 시리즈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실제로 <해리 포터> 소설과 영화를 막론하고 사랑은 가장 중요한 마법으로 묘사된다. 해리가 몇 번이고 볼드모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부모님과 선생님, 동료,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의 힘이 컸다. 반면에 볼드모트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에게는 연인도, 친구도, 동료, 가족도 없었다. 심지어 영혼을 잘라내는 어둠의 마법인 호크룩스를 연달아 만들며 자신의 영혼을 불구로 만들 정도로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해리 포터>가 사랑의 중요성을 외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을 이기는 모습만 보여주면 됐고, 비교적 단순한 선악 구도도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그런데 그린델왈드는 볼드모트와 다르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이미 전편에서 그는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악인으로 묘사되었고, 1편에서도 자신을 도와주던 크레덴스가 눈앞에서 파괴되자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또 이번 영화에서 그와 덤블도어가 연인관계였던 것도 명시적으로 밝혀진다. 그러니 단순히 사랑의 유무로 선악을 나누는 과거의 방식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당장 덤블도어와 뉴트는 머글과 마법사, 신비한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그 자체로서 사랑한다. 하지만 그린델왈드는 머글보다는 마법사를, 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사와 동물만 아낀다. 그러니 영화는 둘 중 어떤 사랑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보다 깊은 차원의 고찰을 보여주어야 한다. 머글과 전쟁을 펼치려는 계획이 원래 덤블도어의 것이었다고 일갈하는 그린델왈드의 대사만 보더라도, 이 갈등과 대립이 쉽게 매듭지어질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과거를 답습하는 데 그친 각본
하지만 <덤블도어의 비밀>의 시나리오는 익숙한 길을 고집한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차이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보다는 그린델왈드에게 악의 이미지를 거듭 덧씌움으로써 손쉽게 선악의 대결 구도를 만들려고 한다. 그린델왈드의 행보가 재고의 여지없는 악인인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뮌헨 폭동 이후 감옥에 갔던 히틀러는 출소 이후 본래 롤모델이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달리 쿠데타보다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지난 두 편에서 각종 테러를 저질렀지만, 사면을 받는 데 성공하고, 끝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마법 세계의 권력을 회득하려고 시도하는 그린델왈드의 행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광기가 번뜩이던 조니 뎁의 그린델왈드와 달리, 매즈 미켈슨의 그린델왈드로부터는 속내와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영화는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크레덴스, 즉 아우렐리우스 덤블도어의 서사를 최소한의 수준만 남겨둔다. 덤블도어 가문의 사생아인 그는 가문의 오점이 될 수도 있고, 알버스 본인에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일깨우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알버스 덤블도어는 아우렐리우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 자신의 과거 행적을 반성하고 또 일찍이 가족을 챙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그를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반면에 그린델왈드는 철저히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아우렐리우스를 아끼며, 그가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며 가차 없이 엄벌한다. 즉, '덤블도어의 비밀'은 그 자체로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가치관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소재였지만, 과거를 답습한 시나리오에 의해 끝내 빛이 바래고 만다.
중심을 잡지 못해 흔들리는 영화와 캐릭터
더 나아가 <덤블도어의 비밀>이 해리의 자리에 뉴트를 투입하고도 왜 뉴트여야만 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 것 역시 과거를 답습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해리에게는 볼드모트와 싸워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또 호크룩스나 죽음의 성물 같은 다양한 마법으로 인해 둘의 관계는 더욱 끈끈하게 묶인 바 있다. 해리포터와 덤블도어의 사이도 단순한 학생과 교수 관계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뉴트와 그린델왈드, 뉴트와 덤블도어의 관계는 3편에 이르기까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대결에 뉴트가 주인공으로 나서야 할 운명적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뉴트가 자주 모습을 보일수록 오히려 영화가 중점으로 다루어야 할 덤블도어 가문과 크레덴스의 이야기, 그리고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관계가 설 자리는 줄어든다. 그렇다고 뉴트와 친구들의 비중을 줄이자니 그가 엄연히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제목이 나오기 전까지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가 처한 이 난국을 함축하고 있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짧은 만남은 그들이 갈등의 중심축이고, 크레덴스와 뉴트는 그 정치적 갈등에서 활용될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된 지도자를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신비한 동물, '기린'만이 필연적 관계가 없는 이들을 느슨하게 엮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그 결과 영화의 구성은 시작부터 중심을 잃고 정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는 캐릭터들의 문제로 이어진다. 핵심적인 주연 캐릭터들조차 애매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연들도 자신만의 매력이나 개성을 보여주기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들의 행보를 간신히 펼쳐놓고 정리하기에 급급하다. 히로인이어야 할 '티나(캐서린 워터스톤)'는 카메오나 다름없고, 퀴니나 테세우스 등은 그동안 쌓아온 매력을 상실하며, 유서프의 오락가락한 줄타기는 좀처럼 개연성을 느끼기 어렵다. 새롭게 합류한 '애버포스 덤블도어(리처드 코일)'는 활약할 만한 기회도 마땅히 않으며, 그나마 머글인 제이콥 코왈스키만이 고유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활기를 불어넣으려 고군분투한다.
블록버스터에 걸맞은 최소한의 묘미
물론 <덤블도어의 비밀>에는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기존 <해리 포터> 시리즈로부터 큰 폭의 변화를 준 액션 연출이 대표적이다. 그간 마법사 간의 결투에서는 지팡이에서 뻗어나가는 주문끼리의 충돌 혹은 주변 사물이나 환경을 이용하는 마법을 주로 묘사해 왔다. 이번 영화는 다르다. 덤블도어와 크레덴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결투 장면처럼 액션의 형식이 육체적으로 근접전을 벌이는 가운데 지팡이와 마법의 힘을 활용하는 형태로 달라지면서 더욱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선보이는 데 성공한다.
액션을 단순한 물리적인 충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관계와 그 변화를 보여주는 장으로 활용하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너무 많은 에피소드와 서브플롯으로 인해 스토리 전개에 과부하가 걸린 듯 느껴지는 가운데, 주요 인물들의 심경 변화를 시각적으로 전달해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고 영화의 템포를 순간적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 상의 특이점은 데이빗 예이츠 감독의 장점인 인물 간의 심리묘사를 잘 보여주며, 감독에 앞서 불완전한 각본이 이번 작품이 노출한 여러 문제의 근본 원인임을 방증한다.
또한 <해리 포터> 영화들이 그러했듯이, 최소한의 장르적 쾌감을 잡아내기도 한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가 성장 영화였고, <해리포터와 혼혈왕자>는 로맨틱 코미디였듯이, <덤블도어의 비밀>은 첩보물의 형식을 빌려오고 있다. 팀을 구성하고 그 팀으로서 실행에 옮기는 두 차례의 작전이 주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마법사 버전의 <미션 임파서블> 같기도 하다. 다만 그 디테일이 예상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첫 임무에서 실패한 후 재정비된 팀이 두 번째 임무를 성공한다는 클리셰는 물론,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대사나 뉴트의 가방을 활용한 속임수 등은 그리 낯선 디테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덤블도어의 비밀>은 <해리 포터> 본편에서 간략하게 등장했던 과거사들을 보다 풍성하게 채우고, 해리 포터 팬들을 마법 세계에 다시 한번 초대하는 팬 서비스를 하는데 그치는 듯 보인다. 호그와트와 마법사들의 마을인 호그스미드와 애버포스의 술집인 '호그스해드'가 주된 배경 중 하나인 가운데, 호그와트 대연회장과 필요의 방, 퀴디치, 맥고나걸 교수의 젊은 시절 모습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열성적인 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시리즈의 여러 설정이 어긋나는 아쉬움을 달랠 만한, 그리고 반기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만 이러한 과거 답습의 대가로 <덤블도어의 비밀>은 시리즈를 이어갈 동력을 확인시켜주거나, 독립된 작품으로서 인정받을 만한 부분은 갖추지 못했다. 특히 전편인 <그린델왈드의 범죄>에 비해 정돈된 감은 있지만 소설에 적합한 내용을 한 시나리오에 과하게 집약시킨 듯한 단점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결국 두 번째 타석에 이어 세 번째 타석에서도 삼진 아웃당한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은 다음 타석에 대한 기대감보다도 걱정을 먼저 키우며 애매하고 답답하게 시리즈를 일단락한다.
P(Poor, 형편없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자명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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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성과 연결, 마블의 분위기 전환
우리는 살면서 계속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처음 태어나 부모를 만나고 주변 가족들을 만난다. 그러다 자라면서 친구와 지인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는 관계는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존재로 변해간다. 때론 다투기도 하고 멀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에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연결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한다. 가장 가까운 나의 가족을 만드는 일은 현재에는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누군가와 강한 연결관계가 되어간다는 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리고 각자가 서로 연결되어있을 때 그 힘은 막강해진다.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는 가까운 곳의 관계뿐 아니라 먼 나라의 사람들과 연결될 기회를 만들었다.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인종과 여러 성향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먼 곳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과 가까워질 기회도 있다. 그 관계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다른 인종이라고 할지라도 강한 연결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그렇게 다양한 연결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때다. 어려움이 있으면 연대하고 서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힘을 얻어 행동으로 이어나간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렇게 서로 연결된 힘이 있으면 쉽게 그것은 깨지지 않는다.
다양성과 연결에 대한 이야기
영화 <이터널스>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들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마블의 새로운 영화다. 영화 속 이터널스 주요 인물들은 포식자인 데비안츠를 막기 위해 지구로 온 히어로들이다. 7천 년 전 지구에 온 이후 주요 지역에 지구인과 생활하면서 주변에 나타나는 데비안츠를 사냥했고, 그 포식자들이 모습을 완전히 감춘이후에는 각자의 삶을 지구에서 보내게 된다. 그들은 우주와 이터널스를 창조한 '셀레스티얼'이라는 존재를 따르고 있으며, 지구로 와서 데비안츠를 사냥하는 것도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터널스 조직을 이끄는 리더인 에이작(셀마 헤이엑)은 셀레스티얼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그의 말에 따라 지구에서의 생활을 리드한다.
<이터널스> 안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다양하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세르시(젬마 찬), 이카리스(리처드 매든)를 비롯해 테나(안젤리나 졸리), 길가메시(마동석), 킨고(쿠마일 난지아니), 마카리(로렌 리들로프), 파스토스(브라이언 다이리 헨리), 드루이그(베리 케오간) 그리고 스프라이트(리아 맥휴)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숫자도 많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도 다양하다. 백인, 아시아인, 남미인 등 인종으로 구분할 수도 있고, 양성애와 동성애 같은 성향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실제로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그 어떤 히어로 영화와 비교해도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구성 자체에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태계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성은 생명을 순환의 고리에 넣어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다양성으로 인해 여러 포식자들이 등장하고 때론 그들 사이에 충돌이 생기지만 여러 아픔과 복잡한 사건들이 벌어진 이후에 좀 더 나은 존재가 탄생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세상을 번성하게 할 아이디어들도 등장한다. 그래서 이터널스의 구성원들이 가진 다양성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되고 동기가 된다. 그들이 포식자가 된 데비안츠를 물리치는 일도 결국에는 지구 생명체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지구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지구로 온 이터널스
그들이 맨 처음 지구에 왔을 때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힘을 합쳐 괴물 데비안츠를 물리친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들은 함께하며 공통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데 힘을 모은다. 그들이 가진 각자의 특성은 지구 안에 존재하고 있는 데비안츠들을 물리치는 일이 원활히 진행되게 만든다. 결국 지구 안의 데비안츠를 모두 물리친 이후 목적을 잃은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각자가 가진 의견이 달라졌고,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달라졌다. 그렇게 따로 생활하게 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진 힘도 서서히 약해진다. 개개인의 능력은 여전할지 몰라도 이터널스라는 집단의 힘은 줄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 판단했을 때 자신들의 힘이 필요하지 않는 시기가 도래했고 이에 그들 스스로 자신의 힘을 내려 놓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데비안츠라는 파괴적 존재와 비교 했을 때 좀 더 나은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지구에 머물렀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이것은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힘을 주는 또 다른 근원이 된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말할 수 있을 그 애정은 지구인들이 싸우고 서로 칼을 찌르는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적인 존재인 그들이 지구인들을 돕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왜인지 그들을 이끄는 셀레스티얼은 지구인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한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잔인한 전쟁과 질병이 지구인들을 괴롭혀도 이터널스는 그것에 개입하지 못했다. 그것이 전 우주적으로 벌어졌던 이벤트인 악당 타노스의 악행에도 이터널스가 개입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영화는 이터널스 멤버들 간에도 지구인의 일에 개입을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 내내 멤버들은 하나로 뭉치는 모습이 아니라 계속 서로를 의심하고 밀어낸다. 영화 <이터널스>에는 셀레스티얼이라는 강력한 존재가 등장하고, 어떤 이유로 엄청나게 진화해버린 데비안츠가 등장함으로써 기본적인 긴장감을 바탕에 깐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높은 긴장을 불러오는 것은 이터널스 멤버들 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때다. 실제로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도 이 구도는 계속 이어진다. 마지막까지 서로 간을 설득하며 연결을 시도하려는 모습은 마치 현재 다양한 인종들이 뒤섞여사는 현실에서 다양성의 융합을 통해 힘을 극대화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닮아있다. 결국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수없이 발현된 다양성을 하나로 모아 융합하는 것이다.
영화는 과거에서 현재가 되기까지 각 구성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하나씩 보여주며 영화의 중반까지 진행해 나간다. 그들 각자가 가진 사연이 결국 후반부에 이어지게 되지만 그 시간 동안 그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봐야 하기 때문에 조금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하다. 15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서 너무나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모든 인물들은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기존의 히어로들이 아니어서 그들에게 익숙해지는데 필요한 시간에는 한참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기존 마블 영화에 비해 그 안의 캐릭터와 공감하고 그들의 행동에 의한 감정적 울림은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결말부 몇몇 캐릭터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기존 마블 영화와 차별화되는 이 영화의 메시지
하지만 이터널스 멤버들의 각기 다른 특성과 능력이나 그들이 향하는 방향 속에 포함된 영화의 주제의식은 다른 마블 영화에 비해서 또렷한 편이다. 여러 가지 설명이 미흡한 부분이나 캐릭터 행동의 변화 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터널스 멤버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 그리고 향후 이어질 마블 영화가 어떤 주제의식 안에서 진행될지를 보여준다는 개괄적인 의미는 가지고 있다. 이들이 가진 다양성과 그 다양성이 한곳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뚜렷한 주제의식이고 그것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다.
영화를 연출한 클로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 로 베니스 황금사자상,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는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여러 수상을 했다. <노매드랜드>에서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 연결과 우정,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잔잔히 풀어줬는데, 그런 감독이 가진 자신만의 이야기가 영화 <이터널스>에도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전혀 성향이 다른 두 영화지만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서 조금은 통하는 구석이 있다. 마블 영화라는 조금은 특이한 영역에서도 클로이 자오 감독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그가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마블 히어로 영화에서 오롯이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이터널스> 에는 다양한 배우들이 등장한다. 안젤리나 졸리를 비롯해 한국 배우인 마동석은 길가메시 역으로 등장해 그가 가진 특유의 타격감 있는 액션을 펼친다. 젬마 찬, 리처드 매든, 셀마 헤이엑, 쿠마일 난지아니 등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출연하여 그들이 가진 특유의 감성과 연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영화가 가진 주제와 맞닿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기존 마블 영화와 같은 밝고 오락적인 영화는 아닐지라도 앞으로 개봉할 마블의 다양한 영화들이 어떤 곳으로 향할지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마블의 분위기 전환을 기대하게 하는 영화다. 또한 아쉬움은 있더라도 영화에 포함된 다양한 액션 장면은 여전히 이 영화가 마블 영화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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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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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흐르지만, 기억은 여전히 우리의 내면을 뒤흔든다
영화 <하얼빈>이 개봉된 후 극장가와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어떤 관객은 이 작품을 ‘엄숙하게 다시 써 내려간 독립운동의 한 페이지’라고 평하고, 또 누군가는 ‘감정적으로 울컥하게 만들면서도 담담하게 흘러가는 독특한 분위기’에 주목한다. 개봉을 기다려온 사람들 중에는 앞서 안중근을 다룬 여러 작품을 기억하는 이도 있고, 이제 막 안중근이라는 인물과 그의 역사적 역할을 자세히 접하는 이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언제 이런 순간이 다시 와도 우리는 과연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곱씹으며 극장을 나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은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무겁고도 절실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영화 속에서 안중근(현빈 분)과 독립 투사들은 러시아와 만주가 뒤섞인 복잡다단한 국경 지대, 그중에서도 하얼빈을 활동 무대로 삼는다. 시대는 1909년.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만큼 이미 조선 땅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과 동지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고 필사의 싸움을 이어간다. 그들은 하얼빈의 얼어붙은 기차역, 어둡고 취약한 뒷골목을 거점 삼아, 비밀리에 정보를 교환하고 작전을 짜낸다. 눈 내리는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고국으로부터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거대한 제국의 압박은 점점 더 거칠게 이들을 죄어 온다.
그러나 영화는 안중근과 동지들의 처절한 현실을 단순히 영웅적 의지로만 채우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당위는 분명하지만, 눈앞의 죽음을 피할 방법이 마땅치 않고, 주변을 살펴보면 배신과 협잡이 난무하며,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노선을 주장하는 갈등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하얼빈>은 ‘독립 투쟁’의 표면 뒤에 묻혀 있는 수많은 난관과 엇갈린 이해관계, 인간적인 번민을 담담하게 그려낸다.독립 투사들의 인간적 번민
이렇듯 실제 역사적 사건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향해 치닫는 과정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안에서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거기서 관객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라는 거대 담론과, ‘한 사람의 인간 안중근’이 겪는 작고 숨 막히는 고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이런 부분에서 <하얼빈>이 이전에 안중근을 다뤘던 영화 <영웅>과 <도마 안중근>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영화 <영웅>은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틱한 감정선에 강점을 두어,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결연한 의지와 함께 감동을 자아내는 노래들로 극의 정서를 극대화했다. 반면 <도마 안중근>은 안중근의 재판 과정과 그가 가톨릭 신자로서 품고 있던 신념, 그리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부각해, 그가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신앙적·윤리적 갈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완성도를 떠나 이런 시도들은 '안중근' 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려는 시도들이었다.
이에 비해 <하얼빈>의 안중근은 묵묵하고, 동시에 인간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안중근이 태생부터 ‘결단력으로 가득한 의인’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처절한 현실 속에서 “과연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뇌며 심리적 갈등을 겪는 존재로 나타난다. 스스로가 택한 길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길에 따라붙는 죽음의 그림자와 가족, 동지들의 희생, 그리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옥죄인다. <하얼빈>의 안중근은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감정을 이끌어낸다. 영웅서사로만 보면 희생과 결단이 낭만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내가 정말 이 모든 걸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그렇다면 안중근의 심리적 고민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화가 비추는 장면들을 보면, 먼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길’이라는 명분 안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독립운동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이토록 거대한 상대를 저격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 혹은 일이 성공한 뒤에 남아 있는 것은 과연 자유일까,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의 시대일까 하는 걱정 또한 안중근의 머릿속에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내부의 신념,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겹치며, 그는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영화는 이러한 심리를 매우 건조하고 진지한 톤으로 그려내며, 관객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안중근의 인간적 고민들
안중근이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현실을 매우 또렷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 순간 실패와 죽음을 예견하는 일이다. 배후 세력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거지를 안전하게 마련할 방법도 없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조국은 더욱 식민지화되어 간다. 반역자나 스파이의 위협도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너무나도 불리하고 암울한 환경에서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 그를 고뇌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가 만일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총알을 꽂는다면, 적어도 전 세계에 조선을 도살장에서 끌려가는 짐승 취급하지 말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토는 일본 제국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침략 정책의 주체였으므로, 그를 제거한다는 행동이 동아시아의 정세에 어떤 충격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안중근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즉, ‘나라가 망할지언정, 우리 민족의 끈질긴 투쟁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에게는 존재했다. 이는 단순한 애국심 이상의, ‘나와 동시대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왜 다시 안중근을 떠올려야 할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안중근의 행위는 단순히 ‘역사적 의거’가 아니라, 억압받는 개인과 국가가 저항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과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는 여전히 치열한 대립 구도를 안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과 이해관계 속에서, 때로는 법과 원칙이 무너지고,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쥐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기도 한다.
계엄령이나 내란과 같은 단어가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할 정도로 정세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100여 년 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안중근의 ‘간절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총성은 단순한 살상 행위가 아닌, 더 넓고 깊은 맥락에서 ‘정의를 외치는 나팔소리’였고, 그 울림은 우리 사회가 지금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독립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는 암시를 영화는 마지막 장면까지 내비친다. 역사적으로도 알고 있듯, 안중근 이후로도 독립운동은 수많은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 벌판을 누비는 무장투쟁 세력부터 해외 각지의 외교 활동까지, 일제강점기 내내 ‘해방’을 꿈꾸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로 그 끈질긴 의지를 오늘의 관객에게도 전해주면서, <하얼빈>은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힘들다고 해서, 혹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멈춰 서선 안 된다.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러한 격려는 지금을 사는 이들에게도 분명히 힘이 된다.
영화에서 보이는 현실의 정치상황
물론 <하얼빈>은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느리고, 말 그대로 ‘건조한 듯 진지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일부 관객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투 장면이나 의거 장면에서 극적인 음악과 연출을 더해 감정선을 폭발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우민호 감독은 이를 절제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 덕분에 영화 전체가 허황된 영웅주의에 기댄다기보다는, ‘정말 그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고민했겠구나’라는 현실감을 심어준다. 관객에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그 인내 끝에 오는 묵직한 감동이야말로 <하얼빈>이 가진 특별한 강점이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큰 몫을 한다. 안중근을 맡은 현빈의 연기는 서사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말없이 굳센’ 동시에 ‘내면의 흔들림이 분명한’ 상태로 끌고 간다. 대사를 통해 감정을 일거에 폭발시키기보다는, 상황과 상황 사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다짐을 되뇌는 듯한 미묘한 눈빛 변화로 캐릭터의 심리를 전달한다. 동지로 나오는 조우진, 유지태, 전광렬 등 중견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거창한 애국심을 노래하기보다, 항시 떠나는 자들의 슬픔을 눈빛으로만 보여주고, 은밀한 접선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낮은 목소리로만 드러낸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면, 그저 웅장한 역사극 한 편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세기를 뛰어넘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우민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 역시 이런 연기에 잘 어우러진다. 그는 이미 <내부자들>, <마약왕>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드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번 <하얼빈>에서는 더욱 절제되고 묵묵하게, 시대의 풍경을 탁하게 그려내면서도 인물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때로는 극적인 클로즈업 대신 인물들을 배경에 작게 배치한 채, 눈 쌓인 하얼빈 거리나 기차역 풍경과 함께 묘사함으로써 시대적 고독과 혹독함을 배가시킨다. 덕분에 영화의 미장센이 매우 사실적이며, 동시에 서늘한 느낌을 전달한다.
결국, 지금 계엄과 내란의 기운이 감돈다는 뉴스가 흘러나올 정도로 정치적 혼돈이 이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하얼빈>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온전한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투쟁했다. 그 정신을 잊은 채, 그저 분열과 힘겨루기에 빠져 있다면, 과연 우리는 100년 전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로부터 무엇을 배운 것인가. 영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안중근의 망설임, 결단, 그리고 최후의 총성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혹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이 작품이 단지 ‘역사 재현’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유효한 독립군의 정신, 잃지 말아야 할 자유와 인간의 존엄,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가 진정한 <하얼빈>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정치적 혼돈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이 시점에 더없이 소중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몇몇 관객에게는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마음 한구석에 새겨야 할 작품이다. 어쩌면 그것이 <하얼빈>이 우리에게 주는 ‘차분하지만 강력한 울림’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만 치부하기에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 너무나도 절실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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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하고 폭력적인 사회, 그 속에서 시끄럽게 서로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원작, 이언희 감독
김고은, 노상현 주연* 해당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웃어주지 않는 곳에서
영화의 주인공,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는 대도시를 살아가는 20대 청년들이다. 인구 밀도 과다, 남에게 관심 많은 사람들 사이 끼어 살아가야 하는 두 남녀. 어느 누군가는 도시가 '시끄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도로에 꽉 끼어 클락션을 울리는 차들, 좁은 길을 지나다니며 떠드는 사람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각종 사건사고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끄러운 것이 당연하다는 듯, 바깥은 소음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시끄러움으로 무장한 도시의 이면에는 조용한 폭력이 있다.
재희와 흥수, 그들이 살아가는 대도시는 조용하고, 폭력적이다. 자유로운 영혼, 재희는 대학교에서 홀로 다니는 동안 여러 동기들의 소문에 시달린다. 눈에 띄는 빨간 니트로 코디한 '유러피안 스타일',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 눈치도 보지 않는 과감한 행동들. 동기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그리고 눈에서 눈으로, 귀에서 귀로, 재희는 '옷이 저거밖에 없는' 애가 됐다가, '유출된 누드 사진의 주인공'이 됐다가, 문란하다는 소문에 휩싸이기까지 한다. 이 과정 내내, 누구도 재희에게 다가와 알려주거나 직접 부딪히지 않는다. 그저 등을 돌리고 속삭일 뿐이다.
주먹을 쥐지 않고도 가닿는 조용한 폭력. 재희는 그래서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 채 자꾸만 밀려난다. 해명할 기회도, 설명할 시간도 없이, 재희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폭력적인 시선들이 '재희'라는 여성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웃어주지 않는 곳. 그곳에서, 재희는 자신과 너무도 다른, 그러나 어딘가 비슷한 것만 같은 흥수를 만난다.
두려움을 마주하는 법
재희가 온갖 소문과 관심에 시달리는 비밀스러운 인물이라면, 흥수는 비밀을 들키고 싶지도,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아하는 인물이다. 재희와 흥수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자신의 엄마조차 애써 외면하려 하는 성정체성을 이유로 남들 앞에 떳떳하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는 흥수, 헛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시험을 보고 나오다 강의실 앞에서 직접 옷을 벗고 해명하는 재희.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사람과,스스로 말할 수 있는 무대에 오르기를 꺼리는 사람.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희와 시선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흥수.
그런 흥수에게, 재희에게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은 또 다른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소문을 만들어내던 동기들의 의심의 타깃이 된 순간 재희가 흥수를 구해주면서, 흥수는 재희에 대해 두려움 대신 조금의 신뢰와 흥미를 가진다. 선입견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함께하자고 내미는 손. 새학기에 '너는 무슨 아이돌 좋아해?' 를 묻듯, 재희와 흥수는 '술이나 마시러 가자.'는 말로 관심사를 공유하고 함께 이태원으로 향한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랑법
서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사랑을 응원해 줄 수는 있다. 영화 내내 흥수와 재희는 대도시의 사람들과 '사랑'을 한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더 시끄럽고 반짝거리는 클럽으로 향하면서, 신나게 웃고 싶어서 술에 취해보려 들면서. 그러나 그들이 이어가는 '사랑'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재희의 애인은 재희를 숨기려 들다 애인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흥수는 당당히 성정체성을 밝히고 싶다는 애인의 뜻을 응원해주지 못하고 화를 낸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랑, 무게가 달랐던 관계. 그 속에서 이 젊은 주인공들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함께 공유하는 작은 집, 하나의 공간으로 모인다. 이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다른 이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지 못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애인도 아닌 남녀가 동거한다는 사실, 서로의 연애사, 성정체성까지. 남들이 들으면 웃어주지 않을지도 모를 사실들이, 재희와 흥수가 공유하는 집에서는 그저 공기처럼 당연하게 녹아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준다. 각자의 사랑을 응원하면서, 서로에게서 '사랑법'을 배우면서.
상처가 난 뒤에는 성장을 향해서
영화가 흘러가는 동안 각자에게 상처를 주는 사회 속에서 서로를 응원해주던 두 주인공이 서로 상처를 주는 장면이 있다. 재희가 믿었던 애인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날, 그리고 흥수와 재희의 동거를 재희의 애인이 알게 된 순간 재희가 흥수의 성정체성을 '아웃팅'한 날. 재희는 안정적이고 온전한 사랑을 원해온 인물이며, 흥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재단하고 함부로 말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재희와 흥수도 서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폭력보다 서로가 '알면서도' 그랬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더 큰 상처로 다가오게 된다.
재희가 흥수에게 상처를 준 날, 그리고 흥수가 재희에게 상처를 준 날. 그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지키고 싶어서, 숨고 싶지 않아서. 사랑을 위해 우정이 잠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서로에게 일 순위가 아니라 이 순위가 되는 순간. 두 주인공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균열은 금방 사그러든다. 싸웠지만, 서로의 말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서운함보다는 상대의 다친 얼굴이, 속상함보다는 상대의 우는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이. 서로 화를 내고 나서도 해장 라면 하나를 나눠먹고 나면 다시 이전처럼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 그리고 애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 그건 이들이 '애인'이 아닌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성장한다. 재희는 안정적인 사랑을 찾아 나아가고, 흥수는 엄마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백한다. 취업 준비를 하고, 군대를 가고, 다시 그 집에 모여 변한 서로를 바라본다. 술에 취해 이태원 클럽을 돌아다니던 그때와, 멀끔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지금. 누군가는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어느 한 쪽을 깎아내릴지도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그 순간도, 지금도, 모두 청춘일 뿐이다.
조용한 사회 속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옆에 재희가 있다면, 그리고 내 옆에 흥수가 있다면, 나는 저렇게 대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재희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흥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쉽게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떳떳하게 '나는 누군가에게 폭력적이게 굴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와 흥수는 각각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재희와 흥수의 동거 사실을 안 재희의 애인이 재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을 막아서던 흥수가 흥수의 애인 대신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장면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폭력을 마주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과장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폭력들.
하지만 뺨에 손이 닿아야만, 얼굴에 상처가 나야만 폭력이 아니다. 조용하게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말들, 밤이 되면 내 성정체성을 부정하며 조용히 기도하는 목소리, 맞는 말을 해도 예민하다며 궁시렁대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대도시의 '폭력법'이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용한 폭력 가운데 이들은 더 크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재희는 자신을 '예민하다'거나 '시끄럽다', '튄다', '문란하다' 등으로 깎아내리는 대신 '멋있다'고 말해주는 직장 동료와 사랑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시선을 두려워했던 흥수는 엄마에게 성정체성을 고백하고 재희의 결혼식 축가로 당당히 걸그룹 노래를 선곡해 춤을 춘다. 앞으로 이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 다가올지라도, 이들은 가만히 앉아 스스로를 파먹고 울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잘못된 것에 잘못되었다고 소리칠 것이다. 그것이 '대도시의 사랑법'을 배우며 20대를 거쳐온, 젊은 청춘들의 종착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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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운탕도 끓어야 맛이다
이 글은 영화 [대무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인용하거나 퍼가는 경우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영화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이 언뜻 본다 해도. 영화만큼 종합 예술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형태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인 연기와 음악, 또 시나리오, 화면의 재현 등이 “어우러져야”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보았다는 포만감을 느끼며 영화관을 나서게 될 것임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표값이 치킨 한 마리 가격만큼이나 상승하는 지금은 다들 익숙하고 어느 정도를 보장하는 프랜차이즈 맛의 영화에 자신을 맡겨 안전한 경험을 하기 쉽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시도로 마니아의 입맛을 한 번쯤은 달래주는 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영화 [대무가]는 오컬트 물의 최전방에 서 있는 무당을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신빨이 떨어진 무당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더했다. 다시 전성기를 찾기 위해 피 튀기는 굿을 벌이는 세 무당을 보며 관객들은 과연 떡이나 먹고 있으면 될 것인지. 굿 하기 딱 좋은 날씨에 마침맞게 찾아온 영화가 더 보여줄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져 이번 주말 극장을 찾았다.
영화는 다채로웠고.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모든 게 다 들어가 있으니 끓기만 하면 맛은 보장하는 매운탕처럼 보였는데도. 대체 이 매운탕의 어떤 부분이 결국 관객을 아쉽게 했는지를 세 가지 요소를 통해 분석(?)해보려 한다.
재료;이게 다 들어가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를 소재라는 입장에서 보면. 정말 독특하다 못해 탐나는 재료들로 가득하다. 애초에 오컬트 물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입맛을 다시게 하는 재료가 없어 보인다. 무당이라니. 그것도 신빨 떨어진 무당이라니!!! 게다가 그런 무당이 셋이나 된다니!!
그러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당이 셋이나 된다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영화의 균형감이 자칫 잘못하면 깨지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절묘함은 영화에서 칭찬할 만큼 잘 지켜졌다. 세 배우는 각자의 색을 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딘가 한쪽으로 쏠리지도 않았다. 서로의 매력이 완벽하게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기주장을 한다.
또한 온화한 배역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던 정경호 배우의 악역 연기는 새로움과 함께 영화 속의 긴장감도 잘 챙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생기도 불어넣는다.
한국에서만 가능한 소재가 연기자들의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이걸로는 무슨 탕을 끓여도 맛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향신료;살인사건, 갈등, 성장
사진출처:다음 영화
물론 재료가 좋은 것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기본 재료의 맛을 끌어올릴 조미료마저 생략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절대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소금과 다진 마늘 같은 갈등과 성장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 기본적인 요소 위에 큰 두 가지 킥(Kick)을 첨가했다.
첫 번째는 무당들의 노래(대무가)를 랩 배틀처럼 풀어냈다는 점이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고해성사를 통해 발전을 이뤄나간다는 면을 지니고 있기에 이런 선택은 꽤나 탁월해 보인다. 여러 영화에서 보여줬던 굿 장면을 생각해보았을 때. 무당의 노래가 괴이하고 소름 끼치게 들렸던 가장 큰 원인(?)중 하나는 그 노래를 알아들을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당의 노래가 귀에 박히면서 그들에게 관객이 주화입마 하기 쉬울 정도의 리듬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 굿을 지켜보기만 한다는 느낌보다 굿에 함께 참여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니까.
두 번째는 살인사건이다. 무당과 살인사건은 가까우면서도 참 멀어 보이는데. 영화 속에서는 이승과 저승의 존재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무당이다.
또한 정경호는 이 신빨 떨어진 무당들이 반드시 용함을 되찾아야 하는 데 있어 기폭제 같은 역할을 악착같이 해내기에 이 동떨어져 보이는 관계 사이의 유착은 영화 내내 꽤나 잘 유지된다.
그 어떤 비린맛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신선한 재료와. 끓기만 하면 입에 쩍쩍 달라붙는 맛을 보장할 매운탕 끓일 준비가 어쩌면 완벽하게 다 끝난 셈이다.
불의 문제인가 냄비의 문제인가. 가게의 문제인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러나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끓지 않는다. 이것이 냄비 자체가 작았던 것인지. 혹은 버너의 가스가 모자라 최대 화력을 내지 못하거나 유지하지 못해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영화는 두 시간 내내 부분적으로만 끓어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찾아보지만. 그 어디에도 부탄가스를 갈아줄 주인이 보이지 않는 심정이다. 영화의 좋은 요건들을 확인한 관객이기에 괜히 애가 닳아 괜히 아직 끓지도 않은 매운탕에 수저를 집어넣어 휘휘 저어 보지만. 아직 이 매운탕은 여기저기 맛이 다를뿐더러 한쪽은 차갑고 또 다른 쪽은 덜 익어 풋내만 낼뿐이다.
그러니 괜히 수저를 집어넣을 때마다 어쩐지 실망감이 이미 익어 곤죽이 된 쑥갓이나 미나리처럼 숟가락에 붙어 올라온다. 스스로의 성미를 탓해보며 꿍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영화가 온 전체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기를 기다리지만. 그 알맞은 순간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세 무당의 대무가 중창에도 오지 않는다.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 “들쑤심”에 있다. 분명 좋은 재료들이었으나 고루 끓지 못해 결국 이 좋은 재료들은 부스러져 매운탕에서 존재감조차 꽤 많이 사라져 버린다. 무엇이 들어갔건 간에 매운탕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결국 펄펄 끓어 온전한 재료의 형상도 갖추지 못한 채. 관객들은 들큼하고 미적지근한 국물만 들이켜다 극장을 나오게 된다.
더 끓었으면 맛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다.
마치면서
투박한 예고편이었지만. 소재 자체가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아쉬웠다. 배우분들의 연기야 뭐 말할 필요도 없었고. 살인 사건과 연루되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아 이거 괜찮다. 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저기 얽혀 있어 풀어낼 이야기가 많은 구조였는데. 잘 살리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컸다.
조금만 더 제대로 미쳤다면 어땠을까. 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이 글의 TMI]
1. 사랑니 후유증 거의 다 없어짐.
2. 그럼에도 모든 배우들의 연기는 대단하다. 그리고 이런 시도가 많아지길 바란다.
3. 환절기라서 레몬 생강청 담글 준비 하는데 또 손 커서 2킬로씩 살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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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이게 뭐?
영화의 제목 "대외비"를 직역하면 '외부적으로 공개되길 꺼리는 비밀'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스포일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대외비>는 하루아침에 "순태"에게 지역 공천에 떨어진 국회의원 후보 "해웅"이 조폭 "필도"와 함께 복수를 하는 내용을 작품이다.
개봉일 국내 박스오피스 1위와 함께 현재까지 239,671명(03.02 기준)을 불러 모았지만, 이내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에게 1위를 내줄 만큼 반응이 좋지 않다!
과연, 그 이유가 뭘까?1. 마동석이 안 나오는 게 문제?
영화 <대외비>에는 마땅히, 선역이라고 칭할만한 인물들이 없다.
흔히, '악당'으로 분류되는 '빌런'들이 나와 '누가 누가 더 나쁜지?'를 보여주는 '피카레스크'로 정의된다.
조직폭력배 "필도"와 공천과 같이 뒤에서 모든 일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르는 "순태"는 말할 것도 없으며, 주인공 "해웅"도 앞에서는 주민들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나 뒤에서는 돈과 같은 온갖 향음으로 주민들을 매수하려 든다.
이렇게, 영화는 뻔하다면 뻔한 이미지들을 연쇄적으로 보여준다.이를 "클리셰"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2시간 내외의 한정적인 분량에서 관객들을 설득하려면 <대외비>가 아닌 여타 작품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들만 있다면 굳이 <대외비>를 볼 이유가 없으니 그만한 "시그니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대외비>를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이 있긴 할까?
결과부터 말하면, <대외비>를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기억할 수 있는 장면은 부재하다.앞서 말한 주인공들의 모습부터 이야기의 과정, 그리고 결말까지 영화 <대외비>는 모두가 예상하는 방향에만 그친다.
특히, 이번 <대외비>를 연출한 "이원태"감독의 전작이 <악인전, 2019>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악인전>이 잘 만든 작품은 아니었지만 "마동석"배우의 이미지에 걸맞은 호쾌한 액션을 앞세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음을 생각하면 말이다!2. 안일했던 짜깁기
이렇게, 정리하면 배우들의 매력 부족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영화 <대외비>의 문제는 이야기에 있다.
이번 <대외비>를 본다면, 전작 <악인전>과 장르는 물론이고 캐릭터들의 구도까지 동일한데 느껴지는 재미의 편차가 심한 이유에는 동기에 있다.
<악인전>에서 "동수 - 태석"이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경호"를 노렸던 것과 다르게, 이번 <대외비>의 "해웅 - 필도"에게 이런 시너지를 기대하기엔 계기가 없다. - 이게, <악인전>과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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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주 최신 개봉영화(샹치, 켈리 갱, 코다, 습도 다소 높음, 최선의 삶)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1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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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미니센스> 1분 예고편
해수면의 상승으로 도시의 절반이 바다에 잠긴 가까운 미래.
과학자 닉은 과거의 기억 일부를 선택해 다시 체험할 수 있는 기억 탱크를 개발한다.
좋았던 시절을 잊지 못해 닉을 찾는 고객들 중 하나인 메이는 닉과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어느 날 메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닉은 기억을 추적한 끝에 메이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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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기적> 추석 예고편
오갈 수 있는 길은 기찻길밖에 없지만 정작 기차역은 없는 마을.
오늘부로 청와대에 딱 54번째 편지른 보낸 '준경'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마을에 기차역이 생기는 것이다.
기차역은 어림 없다는 원칙주의 기관사 아버지 '태윤'의 반대에도 누나 '보경'과 마을에 남는 걸 고집하며 왕복 5시간 통학길을 오가는 '준경'. 그의 엉뚱함 속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본 자칭 뮤즈 '라희'와 함께 설득력 있는 편지쓰기를 위한 맞춤법 수업. 유명세를 얻기 위한 장학퀴즈 테스트, 대통령배 수학경시대회 응시까지!
오로지 기차역을 짓기 위한 '준경'만의 노력은 계속되는데..!
포기란 없다. 기차가 서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