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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5-25 15:41:02

댕겨진 불씨는 반드시 타오른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 리뷰

DIRECTOR. 모함마드 라술로프

CAST. 마흐사 로스타미, 세타레 말레키, 소헤일라 고레스타니, 미삭 자레

SYNOPSIS. 꿈에 그리던 수사판사 승진을 하게 된 ‘이만’, 때마침 테헤란에서는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이만’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총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딸들과 논쟁을 벌인 어느 날, 총이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가족의 믿음에는 균열이 생긴다. 지금 반드시 목격해야 할, 올해 가장 용감한 걸작.

 

POINT. 

✔️ 2022년 히잡 시위를 둘러싸고, 이란의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영화입니다. 감독과 두 딸 역할의 배우는 이 영화 이후로 망명했고, 함께 나오지 못한 엄마/아빠 역할의 두 배우 사진을 높이 올려든 채 레드카펫에 섰습니다.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소헤일라 고레스타니는 2022년 당시 시위에 연대하여 수감되었고, 현재 자택 연금 상태라고 합니다. (해당 내용을 비롯, 영화 외부적 이야기는 배급사 그린나래미디어 SNS에서 참고했습니다.) 

✔️ 의미 있는 영화인 동시에, 재미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인데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집안에서 없어진 총을 둘러싼 가족 간의 이야기가 아주 잘 짜여 있는 구조라서, 다음을 궁금해하면서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흡입력 있는 영화입니다.

✔️ 영화는 6월 3일 개봉합니다.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이 있다. 1장에서 총이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 총이 반드시 쏘아져야 하며, 쏘지 않을 총이라면 이야기에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를 역이용해 신경 쓰이는 위치에 놓여 있던 아이템이 별 의미 없는 맥거핀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집안에서 총이 사라진 이 영화에서 총은 맥거핀일 리 없어 보였다. 총을 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관객은 총의 행방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겠지.

 

이 영화에서 총이 맥거핀일 리 없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맥거핀으로 장난을 치기엔 이 영화가 너무 절박한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담고 있었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체제 비판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감시와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감옥이냐 망명이냐, 다소 극단적인 두 가지 선택지만 남아있던 상황에서 감독은 망명을 택한다. 칸영화제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심사위원 특별상'이라는, 기존에 없던 상을 만들어 수여했다. 한 해가 지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다른 이란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 감독에게 돌아갔다. 심사평에는 "저항과 생존"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어, <신성한 나무의 씨앗>도 함께 떠오른다. 무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수년간 이어진 노력, 인내, 그리고 저항 끝에 이슬람 공화국 체제 아래에서 썩고 텅 빈 검열의 체계는 마침내 밀려나기 시작"했다며 '검열을 거부하는 영화'들이 "보다 단단한 기반 위에 올라섰"다는 내용이 담긴 축사를 보냈다. 히잡에 대한 검열은 2022년 이전의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고, 영화에 대한 검열 또한 2025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1. 이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사건은 2022년 마흐사 아미니라는 이름의 여대생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고 '도덕 경찰'에게 끌려가 구금 끝에 의문사한 사건, 그리고 거기서 촉발된 대규모 히잡 시위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수만 명이 구금되었고 사망자도 (사망 사유와 숫자는 제각각 다르게 밝히고 있지만) 수백 명에 달한다. 의문사에서 시작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개 처형까지 불사하면서, 이란은 '신정일치' 즉 종교와 정치를 접붙인 시스템을 공고히 하려 애썼다.

 

이 '신정일치'의 나라는 1979년 혁명으로 들어섰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였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시위였는데, 당시 왕조의 급격한 서구화 정책과 경제적 어려움이 맞물리면서 군주제에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비밀경찰이 돌아다니고 반대파가 '정치범'으로 탄압받는 사회를 끝내고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시민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시 혼란과 의견 차이의 우여곡절 끝에 설립된 국가가 이슬람 교리와 정치를 내세우면서 도덕 경찰이 돌아다니고 정치적 탄압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여성 인권은 그야말로 추락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누렸고 이란혁명에서도 굵직한 역할을 여성들이 해냈는데, 혁명 끝에 여성들에게 남은 것은 히잡을 뒤집어쓰고 다니라는 강요, 히잡을 쓰지 않고 운전하다가 벌금을 물거나 차량을 압수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다. 시위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히잡을 벗어던지는 시민 불복종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란 정부는 여전히 강경하다. 히잡은 여전히 법령으로 강제되고 있고, 공개 처형과 구금은 셀 수 없으며, 심지어 카타르 월드컵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던 남자 축구 선수들에게까지, 선발 제외 소문부터 사형 선고까지 다양한 탄압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짓밟아도, 외치고 버티고 항의하는 목소리는 죽지 않는다. 끝내 살아남아 우리에게 도달한다. 검열과 탄압이 아무리 이어져도 이 목소리는 제 갈 길을 간다. "1명을 죽이면 1,000명이 일어난다!" 하고 분연히 일어났던 이란의 여자들처럼. 검열 시스템은 "공포와 위협으로 마치 모든 걸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섬광탄 같은 효과"일 뿐 "실질적으로 모든 걸 볼 수는 없다"는 무함마드 모술라프 감독의 말처럼.

 

 

#2. 우회하여도 반드시 길은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세대와 성별에 따라 다른 미디어를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불안한 시위의 소식 앞에서 엄마는 텔레비전을 켜 보지만, 텔레비전은 엄마에게 아주 간단하고 정제된 뉴스 이상의 정보를 주지 못한다. 마치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드라마까지 보고 나면 텔레비전을 끄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체제의 수호자인 동시에 체제의 피해자인 기성세대 여성은 가장 혼란스러운 자리에 놓여 있다.

 

딸들은 SNS로 다양한 소식을 접한다. 온라인에 게재된 영상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자매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도 거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안다. 마치 히잡이나 부르카처럼, 두껍고 검은 커튼으로 자신을 가린 채 창 밖을 내다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자체 검열'의 집안에서도, 자매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뿐 아니라 통제 안에서 우회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빨간 하트로 이름을 저장해 두면 남자친구인 걸 들킬 테니까 하얀 하트를 쓴다든지. 이들에게 미디어는 양방향이고, '모바일'하다.

 

반면 아버지는 그 어떤 미디어도 접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그나마 미디어라고 부를 법한 것은 직장 동료와의 대화가 전부이며, 그 또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대화는 아니다. 그의 공간은 눈도 귀도 막혀 있다. 복도 가득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손동작을 한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등신대이며,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인 채 고요하게 끌려 다니는 이들의 존재만이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갖고 움직이는 이들이다. 죽은 공간에서 이들은 자신의 폭력이 자승자박의 미련 일로를 걷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심지어 총이 사라진 후로 "내 집인데도 안심이 안된다"며 불안과 혼란을 체험하고도,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와중에 자신의 혐오와 억측만큼은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다.

 

 

이 미련의 핵심에는 언어의 혼탁이 있다. "여성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히잡을 써야 한다고 하는 이들의 언어 논리 그대로다. "가족의 믿음을 회복"하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가족에게 가하는 행동은 이 나라의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폭력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보호라는 귀한 단어가, 명예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이토록 해악밖에 남지 않은 방향으로 혼탁해지고 무너졌다. 이렇게 깨지고 더럽혀진 언어로 짜인 지배구조는 시스템 안의 모든 사람을 옭아매는 폭력밖에 되지 못한다.

 

 

#3. 반쪽은 피와 어둠 아래 있어도, 나머지 반쪽은 빛 아래 있기에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것은 단연 여성들의 얼굴이다. 과연 셋 중에 누가 총을 가져갔을까 궁금해지는, 어머니와 두 딸뿐 아니라 잠깐 등장하는 큰딸의 친구까지 이들 모두 폭력적인 구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솔직히 영화 보기 전부터) 관객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영화에서 이들의 얼굴은 이따금 절반씩 나뉘어 다른 빛 아래 놓인다. 친구의 다친 얼굴은 처참한 피범벅이 되어 있는데, 코를 기점으로 반대쪽에서 보면 그 상처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끔하다. 그 얼굴을 영화는 햇빛 아래 공들여 오래 보여준다. 마치 보라는 듯이. 현실의 참혹한 이 상처를, 보라는 듯이.  느낌은 이후 캠코더 앞에  큰딸과 엄마의 얼굴에서 재현된다. 캠코더 화면 안에서 이들의 얼굴 절반은 어둠 속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 얼굴은 빛을 받아 새하얗게 드러난다.

 

 

이는 살뜰한 시중 손길을 받던 아버지의 얼굴과 매우 대조적인데, 그의 얼굴은 아내의 세심한 손길을 받지만, 물로 씻고 머리를 빗어 넘기고 잔털 관리까지 꼼꼼하게 이루어지지만, 역실 불빛 아래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은 분명 밝은 빛 아래 있음에도 살아있는 신체보다는, 마치 명화 속에 이미 베어버린 목처럼 보인다. 이는 어둠과 피에 절반이 묻히고, 눈물 혹은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로도 생명력이 하얗게 빛나던 여자들의 얼굴과 대조적이다.

 

어쩌면 이 얼굴이 이란이라는 나라의, 그리고 기본권 수준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국가 폭력과 싸우는 나라들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한다. 베어버린 목처럼 보이는 얼굴들이 지배구조를 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어둠과 피에 짓밟혀도 빛 아래 생명력이 형형한 얼굴들이 일어나고 있다. 권위적인 반지를 낀 손은 그 빛나는 얼굴들을 결코 파괴할 수 없다. 

 

 

체호프의 총이 반드시 쏘아져야 하듯이, 불씨가 댕겨진 혁명은 반드시 타올라야 한다. 이란의 여자들도 영화들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주요한 분기점을 함께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어떻게 피어나 무엇을 뒤덮고 자라나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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