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7-01 13:51:48
7월 1주 차 최신 씨네뉴스
📢샤를리즈 테론, 크리스토퍼 놀란 신작 ‘오디세이’ 합류🎬
7월 1주 차 최신 영화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샤를리즈 테론, 크리스토퍼 놀란 신작 ‘오디세이’ 합류🎬
샤를리즈 테론이 한 행사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에 ‘키르게’ 역으로 합류한 것에 대해
“무척 부담되고 긴장된다”고 털어놨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엄청난 캐스팅까지..!
캐스팅 찾아보면서도 믿을수가 없었네요 🔥
맷 데이먼 - 오디세우스
톰 홀랜드 - 텔레마코스
젠데이야 - 아테나
로버트 패틴슨 - 헤르메스
샤를리즈 테론 - 키르게
루피타 뇽오 - 클리타임네스트라
베니사프디 - 아가멤논
지금까지 캐스팅은 이렇게 공개되었구요
이 밖에도 배우 존 번탈, 미아 고스도 합류했다고 합니다.
🗞️
❶ 애플스튜디오, F1: 더 무비 흥행 성공으로 후속작 논의 중
❷ 배트맨: 파트2 각본 완성, 2027년 10월 1일 개봉 예정
❸ 폴 워커, 분노의 질주 마지막 시리즈 장식…2027년 4월 개봉
❹ 샤를리즈 테론, 놀란의 ‘오디세이’ 합류, "무척 부담되고 긴장된다"
❺ CGV, 서비스 리뉴얼로 7월 14일 전국 상영관 임시 휴업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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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가버나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가버나움> Capernaum, 2018 제작
레바논 외 | 드라마 | 2019.01.24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26분
감독: 나딘 라바키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가버나움>
이 영화는 이오아나 유리카루의 <레모네이드>(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4), <어느 가족>(2018),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는 분명 다르게 다가온다. 나열한 영화 속 주인공들을 모두 만났다 자부해도 <가버나움> 속 자인과의 만남을 ‘익숙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15분의 기립박수’와 ‘각종 영화제에 초청받았다’는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지도 모른다. <가버나움>은 어느 리뷰에서도 완벽히 해석할 수 없는 작품이다.
출처: <가버나움> 스틸컷
‘가버나움’은 성서에 등장하는 도시로, 예수가 축복하는 동시에 인간의 욕심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 내릴 거라 예언한 곳이다. 성서에서는 ‘축복’과 ‘멸망’을 함께 품고 있는 마을이지만, 자인이 사는 곳은 오직 ‘멸망’만이 존재한다. 감독의 가버나움은 기적보다, 혼돈에 초점을 맞췄다.
<가버나움>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각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은 그들에게 지독한 굶주림과 끝없는 노동을 강요한다. 대부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유일하게 자인의 부모만이 기구한 인생에 절망하기만 한다. 자식들에게 아무런 힘이 없는 이름을 던져주고 거리로 내쫓는다. 우리가 자인에게서 일말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까닭은 함께 사는 부모가 여전히 젖병을 물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혼돈 속에 갇힌 자인을 복잡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색 바랜 빨간 신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
출처: <가버나움> 스틸컷
사하르(여동생)가 생리를 시작하자, 자인은 불안함을 내비친다. 그녀도 떠나간 다른 여동생처럼 남자에게 팔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 주도권은 자신의 부모가 휘두를 것도 아이는 알고 있었다. 끝내 자인은 여동생을 가게 주인에게 빼앗기고 만다. 지키겠다 맹세한 오빠의 절실함은 부모의 매질로 손쉽게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집을 나와 무작정 버스를 타고 떠난 자인은 바퀴맨 복장을 한 할아버지를 따라 작은 놀이동산에 내린다.
놀이동산, 그곳은 아이에게 주어진 새로운 세상일까? 페인트가 다 벗겨진 놀이기구를 통해 짐작했겠지만, 역시 아니다. 하지만 자인은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너무나 자신과 똑같은.
아이는 식당에서 일하는 라힐과 그녀의 딸 요나스를 만난다. 요나스를 집에서 돌보는 것으로 자인은 라힐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다. 나무판자들이 간신히 바람을 견디고 있는 판자촌에서 아이는 또다시 동생을 성심성의껏 돌본다. 비극에 비극이 더해지는 순간에도 그들은 내내 웃고 있고, 우린 말 못 할 고통을 느낀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는 너무나 익숙한 하루일 뿐이었고 미소마저 사라지게 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가버나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인만이 아니다. 불법체류자 라힐 역시, 딸과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 새로운 신분증을 구해야만 한다. 비극 속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순식간에 라힐이 경찰에 잡히고, 자인은 요나스와 긴 기다림을 함께 하다 결국 불법 신분증을 만드는 어른에게 속아 요나스를 두고 집으로 향한다. 출생신고서를 가지러 집에 온 그 순간, 사하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불행이 끊임없이 두 사람을 덮쳐오지만, <가버나움>은 이를 너무나 태연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그렇게 자인은 법정에 서서 순순히 자신이 한 충격적인 행동을 읊는다.
여동생의 남편을 칼로 찔렸음을.
출처: <가버나움> 스틸컷
절망스럽지만, 자인이 간신히 암흑을 찢고 나와 처음 마신 건 엄마의 모유가 아니라 술이었을 것이고, 처음 눈을 떠 본 것은 밤마다 헐떡이는 부모의 옆모습이었을 것이다. 일찌감치 깨달았겠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열두 살로 추정되는 아이는 부모를 고소하기 전까지 그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부모는 아이의 앙상한 신체를 때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끝내 아이를 자기의 손으로 가버나움에 가둬버린다. 더 충격적인 건, 그들이 끊임없이 가버나움 안에서 새 생명을 갈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자인의 손에 칼을 쥐게 한 건, 가난에 힘입어 현실을 부정하는 법밖에 모르는, 무능력하면서 요란하기만 한 부모의 만행 때문이다. 따라서 자인이 법정에 서서 ‘가난이 아닌 부모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 건 당연한 결과다. 모든 걸 통달한 어린아이의 나지막한 선언이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아이가 스스로 삶의 고난과 슬픔을 터득했음에도 가족은 불완전하다 못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었던 자인에게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될 수 없었고, 아이는 선택한다. 부모를 버림으로써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기로.
그렇게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시작한다.
출처: <가버나움> 스틸컷
<가버나움>는 감각적인 장면 전환과 역동적인 스토리, 실제 빈민가에서 캐스팅한 배우들의 열연으로 완성된 수작이다. 그 덕에 필자는 쉽게 감동할 수 없었다. 물론 감동과는 아주 먼 이야기지만, 이 작품을 ‘레바논의 고립된 현실에 직격탄을 날리는 영화’라고만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신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나 역시 자인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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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을 찾아서(2007)> 리뷰
얼마 전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행복을 찾아서(2007)>를 감상했다. 현재는 사업가이자 연설가로 부유한 삶을 누리는 크리스 가드너의 삶의 한 부분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일까. <행복을 찾아서>는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주인공의 고달픈 시절에 집중한 후, 영화 말미에 이르러 간신히 행복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이렇듯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놓친 적 없는 이의 이야기는 욥기에서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인류에게 오래되고 익숙한 플롯이다. 필립 모슬리의 삶을 기반으로 삼았다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나 존 카니 감독 본인의 이야기가 기본 뼈대였다는 <싱 스트리트(2016)> 등을 비롯한 영상 매체와 다양한 문학은 물론, 신문 기사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전형적이라 해도 뻔하진 않고, 감동과 교훈을 한 번에 선물하는 소위 ‘안전한’ 서사이다 보니 많은 이들이 <행복을 찾아서>를 가족과 함께 봐도 좋은 영화로 추천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남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굳이 사회 고발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한 개인을 영광스럽게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할지라도, 이따금, 어떤 예술이 세상의 허점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찾아서>를 보는 동안엔 여러 책이 머리를 스쳤다. 예컨대 대런 맥가비의 『가난 사파리』, 스테퍼니 랜드의 『조용한 희망』, 조문영의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내게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장밋빛 아메리칸드림 홍보영화로 다가오지 않았다.
간단히 <행복을 찾아서>의 시놉시스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는 구식 스캐너를 파는 세일즈맨이다. 당장 매일의 생계가 걱정되는 상황이지만 불안이라는 파도를 가족과 함께 견뎌왔다. 그런데 세금, 집세, 어린 아들 크리스토퍼 가드너(제이든 스미스)의 어린이집 비용을 부담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순간 아내 린다(탠디 뉴튼)는 떠나겠다고 한다. 아들을 임신한 순간부터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자신했던 크리스의 말이 오래도록 실현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그의 얼굴은 참담하리만큼 무표정하다. 이렇게 아내와 헤어진 크리스 가드너는 딘 위터 레이놀즈의 주식 중개인 인턴십 프로그램을 택한다. 우연히 추천받은 이 프로그램은 6개월 동안 지속되지만, 합격률은 단 5%에 불과하고, 심지어 그 동안 봉급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린다는 그에게 묻는다. 그건 후퇴 아니야?
우리는 크리스 가드너가 결국 모든 기회를 쟁취하고 백만장자가 되었음을 알기에 린다를 향해 조금만 더 남편을 믿어주었으면 좋았으리라 말하기 쉽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자. 당신이 린다의 상황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장 생존의 위협이 다가왔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대개 결과를 보장받을 수 없는 꿈을 추구하는 대신, 매일의 삶을 연장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린다가 아들 크리스토퍼를 데리고 뉴욕으로 떠나 가족의 식당 일을 도우려 했듯.
그러나 크리스는 이 미치도록 적은 확률의 ‘가능성’을 선택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타인과 다르게 만든 지점이고,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생각한다. 개인을 저토록 궁지에 내모는 사회는 얼마나 취약하고 몰인정한가?
“결과적으로” 크리스 가드너는 노력 끝에 자수성가에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지만, 만일 그가 인턴직 기회를 몰랐더라면? 도둑맞은 스캐너를 찾지 못했거나, 교통사고를 더욱 크게 당했더라면 어땠을까? 대런 맥가비는 자신의 책 『가난 사파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가난은 일자리 부족도 문제지만,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면서 실수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게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영화 곳곳에서 증명된다. 크리스 가드너는 끊임없이, 쉼 없이 달려야 한다. 페인트칠하다 경찰서에서 밤을 보내고 달려가 면접을 보는 그의 모습, 부유한 이들 앞에서 자신의 서러운 상황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장면, 당장 모텔을 전전할 돈조차 부족해 아들의 손을 잡고 교회의 자선사업에 의지하고 발을 구르거나 전철역의 화장실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던 삶의 편린은 너무도 절박하다. 일련의 상황과 조건이 크리스의 열정에 기름을 부었을 수 있겠지만, 이렇듯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 희박하기 짝이 없는 가능성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고 보편적 대중에게 설파하는 건 지나치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대 사회는 단순히 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 희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더욱 많다.
심지어 영화의 제목의 유래가 되었고, 크리스가 언급했던 문장조차 그다지 찬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토머스 재퍼슨이 미국의 헌법에 명시했다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라는 구절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혁명론』을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재퍼슨이 뜻한 바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적 차원의 행복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공적 행복이었다고. 실제로 재퍼슨이 어떤 생각을 하며 해당 문구를 헌법에 넣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간단히 미국이 영국 왕정의 핍박을 피해 온 이들이 세운 국가였다는 점, 당시 미국이 민주주의를 최초로 제도화한 근대적 국가인지라 많은 용어가 보편적이지 않았으리라는 점만이라도 고려한다면 아렌트의 주장은 퍽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진실로 재퍼슨이 헌법에 급작스레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기까지 한 ‘행복의 추구’를 포함한 이유가 개인의 사적 행복을 보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삶의 설움을 떨치기 위해 개인적으로 발버둥 친 크리스의 노력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허해지기까지 한다. 그가 가진 불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한 편으로는 그저 약간의 행운이 부족해 제2, 제3의 크리스 가드너가 되지 못했을 이들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일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저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의 신념처럼,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산 사람을 해치지 않을 방어 체제는 언제고 필요하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필요하다면 인간의 기본 권리와 개인의 삶이 소외되지 않기를 고민했던 헤겔의 법철학을 가져와도 좋겠다. 현대에 오며 낡아버린 철학일지라도 그가 했던 고민의 뿌리는 작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살얼음판인 이에게 “행복은 환경을 비롯한 외부적 요소와 무관하며, 개인의 힘만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공허하다 못해 잔인한데다가,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가.
잠시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의 내용을 인용해본다.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썼더니,
한 친구가 이런 내용으로 답글을 달았어요.
"선생님 이야기처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꿔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걸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꼭 높은 사람이 되어야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두 명의 예외적인 성취를 칭송하고 지금의 시스템에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우리에겐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일인분의 행복을 위해선 당신과 세상이 필요하므로 이것은 나를 위한 일이자 당신을 위한 일이며 사회를 향한 발돋움이다. 사다리를 걷어차지 않는 세상, 개인의 능력에 맞는 사다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점차 세계가 어려워진다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요즈음이지만,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민사회에 대해 낙관을 가져본다.
* 참고 문헌
조문영.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김누리 .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대런 맥가비. (김영선 옮김) 『가난 사파리』
소병일.(2018).헤겔의 행복한 인간.철학사상,(68),129-153.
이재정. (2015). 행복의 공공성: 한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철학연구, 133, 263-282
정원규. (2020). 아렌트 공적 행복 개념의 발전적 재구성을 위한 보충적 논제들. 사회와 철학, 40, 4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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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결국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
난 두드러기가 있다. 자세히 말해보자면 '콜린성 두드러기'라고 한다. 다들 아우터 입는 4월에 나만 반팔에 얇은 겉옷을 입는다. 이 간지러움은 시도 때도 없이 겹친다. 가령 버스를 타고 갈 때나 매운 짬뽕을 먹을 때도 몸이 불편하다. 안그래도 잘 타는 더위 두드러기까지 겹치면 두배로 고통스럽다. 겨울에는 더울 일이 없어서 괜찮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히터를 빵빵하게 틀면 꼼짝 없이 몸이 간지러워진다. 그럼 한 3분동안 밖에 나가있어야 한다. 얼핏보면 일 땡땡이에 가까운 모습이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근데 이건 나만 그러지는 않을거다. 사람마다 말 못할 일상생활의 애로사항은 다들 있다.
이게 성격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도 두드러기때문에 운동하는게 한동안 싫을 때가 있었다. 이건 내 소심했던 모습과 관련이 있다. 몸이 간지러워도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서 병원에 안 갔다. 콜린성 두드러기 자체가 약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게 큰 의미는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만큼의 찜찜함은 남아있다. 그 때 미리 잡았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미리 내가 겪는 불편함에 말하고 다니던 사람이었으면 20대 중반의 내가 살기가 편했을까. 지금이야 이 문제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말하고 다닌다. 인터넷에 '온도 알레르기'라고만 검색해도 관련정보가 쉽게 나오기 때문에도 있지만 이게 남에게 피해주는 피부질환이 아닌게 큰 이유다. 따지고 보면 키가 작은것보다 훨씬 더 내 삶에 지장을 주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사는 수밖에. 나름 살다보며 느낀건 나를 이해해야 남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병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지는 오래 됐으니 이제 타인을 이해하며 살면 될 것 같다. 별거 아니라면 별게 아니고 심각하면 심각한 이 애로사항에 일상생활에 난감함이 많다. 에잉. 이 리뷰를 쓰면서도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왼쪽 팔로 오른쪽 팔꿈치 쪽을 벅벅 긁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이게 그냥 나인가보다. 안그래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못하는 나는 이런 사소함 하나때문에 점점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있다. 인정해야 한다. 나는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란걸.
<펀치 드렁크 러브>는 이해와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배리는 여자 형제가 7명이나 있다. 직업은 그냥 사업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이다.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20, 30대 남자 중 한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크게 틀린건 아니다. 가족이 많긴 하지만 또래 남자들과 유별나게 다른 건 없다. 그에겐 문제가 있다. 인생의 재미를 못 찾고 영 기를 못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도 부하 직원이 주인공 배리를 쪼는 모습이 나온다. 한 20분쯤 지나면 배리가 여자 형제들의 집들이에 가는 장면이 있다. 다 큰 베리지만 누이들은 베리를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 같다. 여자 형제 중 한명이 배리를 보자마자 느닷없이 '너 게이니?'라고 묻는다. 이 뿐일까? 비듬 많다는 지적부터 뜬금없는 망치 이야기까지 배리는 누이들에게 사람이 아니라 장난감 완구같은 느낌이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엄청 화가 나겠지? 배리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주인공은 느닷없이 유리창을 깨부순다. 배리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냥 소심한 남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주인공은 분노조절이 서툰 사람이었고 이 덕에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외로운 주인공은 말동무를 찾는다. 신문을 보다 찾은 말동무 프로그램(?)에 전화를 건다. 처음엔 사는 곳도 속이고 이름도 속이지만 결국 다 들통난다. 말동무 프로그램의 사장 트럼벨은 겉으로는 가구점을 운영하는 아저씨지만 사실 조폭 사장님이다. 트럼벨은 배리와의 통화내용을 바탕으로 조금씩 조금씩 배리의 신상정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트럼벨의 추적기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이어지기 전까지 영화는 남, 녀 주인공의 러브스토리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은 서로를 알아가며 점점 변해간다. 레스토랑에서 대화만 했을 뿐인데 서로의 벽을 넘어 키스한다거나, 푸딩 마일리지로 비행기를 산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며 '이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싶은 영화를 보여준다. 이런 클리셰를 비튼 플롯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감이다. 공감을 위해 캐릭터를 뒤집고 연출이 그걸 뒷받침하게 도와줬다.
우리라고 다를까?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니다. PTA는 연출법으로 플롯과 장면 연출이 절묘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 핵심 주제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닌 우리들'을 연출하기 위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만든(내가 생각하는) 중요 포인트 몇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주인공 배리에 대한 성격 제시다. 배리는 집들이 장면 처음에 이상한 말을 듣고 바로 화를 내지 않는다. 그 대신 감독은 배리가 무언가를 참고있고, 분노조절이 서툴러 사고를 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집들이 모임에서 배리를 비추는 카메라가 고정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감독이 배리가 지금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런 연출을 짰다고 생각한다. 또 화면 구도상에서 주인공이 딱 정가운데에 있다. 여자주인공이 함께 있는 경우나 트렘벨과의 대면같이 영화의 주요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 혼자서만 장면에 나온다. 나는 이것이 영화가 배리가 정신적으로 불안함에 처할 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뭐 이뿐만 아니라 두 주인공의 의상도 그렇다. 파란색 수트를 입는 주인공과 빨간색 옷을 입은 여자주인공은 빨간색과 파란색처럼 별개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서로에게 솔직해지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징에 의한 내용전개는 하나 더 있다. 도입부부터 와장창 보여주는 피아노는 사랑에 대한 간접적인 은유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갑자기 주운 사랑이지만 아무 음이든 눌러도, 그러니까 함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게 사랑이라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는 셈이다. 영화는 보편적인 로맨스코미디 장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 그리고, 이런 연출법과 플롯전개를 통해 우리의 삶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사랑이야기를 보여준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 문단을 쓰면서 느꼈다. 단어 몇글자만 바꾸면 배리의 이야기가 내가 된다는 것 말이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나의 공감를 샀다. 이건 내 웃어 넘길만한 짝사랑 흑역사와 어떤 목표를 향한 전진 둘 다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전자의 경우를 보자. 10대 때 나는 단순히 누군가를 예뻐서 좋아했던 적이 있다. 사진과 실물이 차이가 나는 여학생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사진을 보면서 '쟤 귀엽다'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다. 고3때는 걸그룹 마마무의 팬이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마마무를 위해 음원 플랫폼을 처음으로 정식 결제했다. 유투브로 마마무 나오는 영상은 다 찾아볼 정도로 덕후였다. 마찬가지로 굳이 이성을 좋아한다는 관점이 아니어도 된다. 누군가를 존경하게 될 때, '이 사람이 이래서 멋있어'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라고 생각하게 되면 나만 손해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체고 나에게 잘 보일 이유가 단 조금도 없다. 멋지면 그냥 그 사람이 멋있으니까 따르게 된다. 이는 내 삶의 많은 순간들과 비슷했다. 누군가를 멋있다고 따르게 될 때도 아니면 발로 이불 뻥뻥 차는 흑역사를 만들때도 나에겐 이유가 필요 없었다. 무언가에 사랑에 빠지면 나는 거진 대부분 미친놈이 됐다. 나는 이래서 이 영화를 통해서 이런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PTA는 이 영화에 나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공감을 받을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 같다. 누구나 자기 기를 죽이는 요소가 있을 것이고 또 둘이 함께이기 때문에 강해졌던 지점이 있었을 테니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명제를 아주 쉽게 받아들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각본과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사랑이 찾아오겠지? 꿈꾸게 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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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마음과 파도의 울림, 인 디 아일
운디네와 트랜짓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프란츠 로고스키의 필모 중 인 디 아일을 보게 되었는데요.
과거와 현재 그 사이의 외로운 마음과 잔잔한 파도의 울림을 잘 표현한 인 디 아일 이라는 영화를 소개할게요.
자본주의에 허덕이는 지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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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그의 현재를 덮쳐와 갱생하려는 현재를 막아서 과거에 묶인 크리스티안.
하지만 그의 새로운 자리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나쁜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행운을 맞이합니다.
주변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등장한 그의 과거는 약간 아쉽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현재를 완전히 덮치지 않아 그의 현재와 주변이 더 잘보였다는 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쓰레기통에 얼굴을 박고 폐기물을 먹어치우는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네요.
과거에 묶인 것은 크리스티안 뿐만이 아니였죠.
트럭에서 지게차로 옮겨가야만 했던 브루노, 여러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해 그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복되고 잔잔한 일상에 밀려오는 파도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의 긴 시간을 달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언젠가부터 살기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팔릴때까지 헤엄치는 물고기와 다를바 없는 우리가 참 서글퍼졌습니다.
브루노의 빈자리는 언제든지 채워지고 시간은 지나간다는 것이 말이죠.
약간의 커피와 파도소리가 전체를 비춰주는 조명처럼 느껴졌던 영화 인디아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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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하이머>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모든 것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독일 물리학자들이 우라늄의 원자핵을 쪼개 엄청난 에너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를 비롯한 미국 물리학자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원자폭탄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 정부 역시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로브스 대령'(맷 데이먼)을 책임자로 삼고 신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을 추진한다.
하지만 맨해튼 계획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로브스 대령은 오펜하이머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사막 한가운데인 로스 앨러모스에 연구소를 짓고 가능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과거 공산주의에 경도됐던 오펜하이머 이력이 재조명되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공격에 직면한다.
크리스포터 놀란 필모의 정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 <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쓴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스크린에 옮겨 미국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다뤘다. 영화는 특히 그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정과 전후 수소폭탄 반대 운동을 펼친 뒷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오펜하이머>는 개봉 전부터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CG 없이 트리니티 실험의 핵폭발 장면을 재현했다고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1달 전에 개봉한 영화 <바비>와 '바벤하이머' 밈으로 얽혀 이슈였고, 해외에서는 <바비>와 함께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다. 워너 브라더스가 아닌 유니버설 픽처스가 처음으로 놀란 영화를 단독 배급한 점도 화제였다.
사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3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는 작업은 어렵다. 원작 평전은 심지어 오펜하이머의 삶만 다루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사건과 정치인, 과학자의 이름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펜파이머>는 더욱 놀랍다. 놀란의 스타일, 기술, 직관, 통찰력이 한 데 모여 모순적인 물리학자의 일생을 긴장감 넘치게 재구성했기 때문. 달리 말해 <오펜하이머>는 영화감독 놀란의 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자폭탄 같은 영화
<오펜하이머>는 기본에 충실하다. 주인공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사실 그의 내면과 감정선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공산주의에 경도된 좌익 과학자.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미국의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지휘한 유능한 행정가. 자기 손으로 만든 신무기를 경계하는 야심 찬 정치인. 모순적인 세 인물이 한 사람이니 당연히 어색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마치 원자폭탄처럼 재구성한 놀란의 각본은 그의 내면을 유려하게 보여준다. 핵분열물질의 원자핵에 중성자가 충돌하면 원자핵은 분열되고, 더 많은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과 충돌해 새 핵분열이 발생한다. 원자폭탄은 이 연쇄반응에서 생긴 에너지를 활용한다.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트리니티 핵실험이라는 목표까지 거침없이 질주한다. 관객의 시선을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헌신하는 오펜하이머에게 집중시킨다. 그러고 나서는 트리니티 실험이라는 클라이맥스가 유발한 연쇄적인 폭발로 시선을 돌린다.
미국 정치권과 과학계는 수소폭탄 개발을 두고 갈등을 빚는다. 오펜하이머의 주변인도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져 계속해서 충돌한다.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공격당한다. 놀란이 처음 1인칭으로 작성했다는 각본은 이 지점에서 빛난다. 트리니티 실험 전까지는 맨해튼 계획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이 주인공이 된다.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한 양심의 가책, 매카시즘과 스트로스에게 시달리는 고통 등 오펜하이머의 감정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원자폭타과 같은 구조는 절제미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직후, 영화는 순간적으로 완급을 조절한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극장은 순간적으로 고요해진다.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할 무기를 개발했다는 기쁨에 심취하지 않는다. 인류가 다룰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힘을 손에 넣은 두려움이 정적 속 독백을 통해 전해진다. 그 덕분에 관객은 오펜하이머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다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강당에서 연설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흥분한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는 폭탄 폭발음과 오버랩된다. 이 장면은 원자폭탄으로 인한 흥분과 열광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 그가 받은 충격과 죄책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단번에 납득시킨다. 원자폭탄 희생자 시신을 오펜하이머가 밟는 환상이 나오기도 전에, 관객은 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날 때, 그의 선택 중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 없을 정도다.
양자역학의 인문학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논란의 인물이었다. 그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었다고 미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복권한 게 불과 반년 전 일이다. 영화는 이 모순적인 물리학자에게 스스로를 변론할 기회를 준다. 동시에 관객이 스스로 그를 판단할 공간도 열어준다.
핵심은 컬러와 흑백의 전환이다. 오펜하이머의 시점에서 흘러가는 'Fission(핵분열)'이라는 제목의 파트는 컬러로, 스트로스가 중심이 되는 'Fusion(핵융합)'이라는 이름의 장면은 흑백으로 묘사된다. 원자폭탄의 원리인 '핵분열'은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수소 폭탄의 원리인 '핵융합'은 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은 마치 양자역학의 인문학적 해석 같아 보인다. 양자 역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관측이다. 양자 세계에서는 전자나 빛이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중첩되어 있는 두 가지 상태는 관측을 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한 가지 성질로 표현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관점에서 주인공을 관측한다.
애국심이 투철한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공산주의자이고,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지만 반핵 운동의 중심에 선 정치인이 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영화는 그의 시점에서 그 모순점을 이해시키고, 타인의 시점에서 그 역설과 중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비춘다. 인간이 그 자체로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지, 그렇기에 한 사람을 재단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상기시킨다. 이는 제목에 걸맞은 접근법이다. 오펜하이머는 본래 양자 역학 연구자였으니까.
놀란의 <소셜 네트워크>
그래서일까? <오펜하이머>는 마치 놀란의 <소셜 네트워크> 같다. <소셜 네트워크> 역시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모아놨기 때문. 저커버그의 시점과 동업자였던 윙클보스 형제 및 왈도 세브린의 시점을 충돌시킨다. 두 영화가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방법도 흡사하다. <소셜 네트워크>는 법원 조정 과정으로, <오펜하이머>는 청문회로 서로 다른 시점의 충돌을 보여준다.
<소셜 네트워크>가 받은 찬사를 생각하면, <오펜하이머>는 작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역량을 재증명하는 장이기도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놀란의 통찰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므로. 그간 놀란은 캐릭터를 플롯의 장치와 도구로만 사용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르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모순을 통찰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록 조연 캐릭터가 여전히 수단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이번만큼은 놀란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놀란의 트레이드 마크
그러면서도 놀란은 자기만의 스타일과 색채를 잃지 않았다. <덩케르크>처럼 <오펜하이머>도 시간대가 세 개다. 오펜하이머의 젊은 시절에서 맨해튼 계획까지, 또 그 이후로 이어지는 시간대가 주 재료다. 1954년 원자력 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 청문회는 양념이다. 특히 두 시간대는 철저히 조각난 상태로 삽입된다. 주요 사건에 따라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형태로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시간을 비트는 연출과 구조는 주제의식과 긴밀히 연관된다. 오펜하이머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 붙임으로써 과학자의 책임을 논할 공론장을 연다. 통상적으로 과학자는 신기술의 개발자로만 인식된다. 그들의 역할은 기술을 만드는 데서 그친다고 여겨진다. 오펜하이머도 그랬다. 그는 원자폭탄의 오남용과 악영향을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말한다.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건 과학자의 몫이 아니라고.
하지만 자기가 바꾼 새로운 세상을 목도한 뒤로 그는 달라진다. 과학자에서 행정가, 정치인으로 변한다. 새 기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앞장서야 한다고 확신한다.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Thomas P. Hughes)의 표현대로 이제 그는 '시스템 건설자'(system builder)가 되려 한다. 그는 사회 구조와 관계망 안에서 신기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원자력을 평화롭게 이용할 체계를 만들지 못했고, 수소폭탄의 개발도 막지 못했으며, 자기 자신의 삶도 지키지 못했다. 대통령을 설득할 만큼 신중하지 못했고, 앙심을 품은 정치인을 꺾을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마치 인간에게 불을 선물했지만, 정작 자기 미래는 지키지 못한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이렇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기술자로서 성공했지만, 시스템 건설자가 되지 못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빛과 그림자를 가감 없이 들춘다.
SF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기 영화
이러한 맥락에서 <오펜하이머>는 외관과 달리 SF 영화 같은 면도 있다. 많은 SF 영화는 과학의 발달이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우려로 가득하다. 달리 말해 SF 영화는 과학에 근간을 둔 스펙터클을 통해 오히려 인간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통로나 다름없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SF 영화의 본질을 품고 있다. 영화는 만약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잊는다면, 그의 업적과 과오에서 현명한 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손으로 전 세계를 초토시킬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설령 0에 가까운 확률이라 해도 인류가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날이 멀지 않을 거라고.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정점은 멕시코에서 핵폭탄이 폭발한 순간이 아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킬리언 머피의 표정과 지구를 불바다로 만드는 핵 미사일이 교차되는 결말이 정점이다. 오펜하이머와 놀란이 입을 모아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경고를 가득 담고 있으니 뇌리에 각인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오펜하이머>는 테넷의 정신적 속편이자 프리퀄인 셈이다. <테넷>의 주된 플롯은 핵폭탄을 막는 미션이었고, 인류의 존속을 위한 현재와 미래의 전쟁이 시대적 배경이었으니까. 이는 SF 영화에 대한 관심을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여준 놀란스러운 착상이기도 하다.
모두가 좋아할 영화는 아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호불호가 심하게 나뉠 영화다. 천 페이지 분량의 책을 영화화한 만큼 밀도가 높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놀란의 꼼꼼한 각본이 반갑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맨해튼 계획 이전의 오펜하이머의 개인사나 초기 생애에 관련한 내용이 결코 짧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도 낯선 영화다. 일반적인 기승전결 구조 대신 트리니티 실험을 기점으로 영화가 다시 시작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 친절한 영화도 아니다. 1930~50년대 미국 사회를 강타한 정치적, 국제적 이슈에 대한 배경 지식을 요한다. 갈 길이 바쁜 만큼 상세한 설명은 제공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기대에 비해 시각적 임팩트가 약하다. 블록버스터 영화다운 쾌감을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그래도 배우 덕분에 진입장벽이 낮아지기는 한다. 우선 킬리언 머피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놀란 사단 중 하나로만 알려졌던 그는 이제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증명했다. 명배우들의 향연도 인상적이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데인 드한, 라미 말렉, 플로네스 퓨는 앙상블을 이루며 머피 뒤를 단단히 받쳐준다. 특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니었다면 후반부는 힘이 빠져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몇몇 단점은 취향의 문제이지, 완성도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놀란이 의도한 방향성만 정확히 짚어 쫓아간다면 <오펜하이머>는 <인셉션>, <다크 나이트>, <덩케르크> 보다도 강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놀란이 그간 자기 필모그래피에서 보여준 스타일과 장점, 통찰력을 한데 모아 만든 폭탄 같은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종합하면, 단언컨대, <오펜파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마스터피스다.
Outstanding 특출함
원자폭탄 섬광과 굉음으로 빚어낸 프로메테우스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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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대부> 분석: 가문 내 마이클의 지위 변화에 따른 영화 속 미장센의 변화
가문 내 마이클의 지위 변화에 따른 영화 속 Mise-en-Scene의 변화
Godfather는 마피아 조직의 두목인 돈 코를레오네 가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돈이 솔로초와 타탈리아 가문에 의해 저격당하자, 본격적으로 전개가 이루어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화 속 갈등과 사건이 벌어지며 마이클이 암흑세계로 발을 들이게 된다. 영화는 마이클이 마피아의 세계로 어떻게 점점 스며들고 마침내 코를레오네 가문의 두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강조하듯 영화의 미쟝센(Mise-en-Scene)은 마이클이 집안 사업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때와 조직원의 일원이 되어 행동할 때가 다르게 나타난다.
첫 번째 변화: 마이클의 외적인 모습
첫 번째 변화로 마이클의 외적인 모습 즉, 의상과 머리 모양이다. 그가 조직의 일에 관여할수록 그의 외적인 모습은 변화한다. 집안 사업에 관여하지 않을 때 마이클은 편안하고 일상적인 옷을 입고 등장하며 머리도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꾸미지 않은 듯 격식을 차리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마이클이 조직원의 일원으로서 집안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하자 그는 편안한 옷이 아닌 짙은 색의 정장을 착용하며 머리도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가 아닌 헤어 제품을 사용하여 앞머리를 올리고 머리를 정리한 것만 같은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그의 외적인 변화와 지위 변화의 연관성은 그가 솔로초와 매클러스키를 살해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조직원들처럼 정장 차림으로 둘을 저격한 것은 그가 둘을 살해함으로써 진정한 마피아 조직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인상적인 점은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나타나는 마이클의 외적인 변화와 돈의 외적인 모습이 대비된다는 것이다. 마이클이 마피아 수장 자리에 더 가까워질수록 편한 옷이 아닌 정장을 더 많이 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을 보이지만 돈은 대부의 자리에서 내려오며 영화 초반 정장을 입은 모습만 보이던 것과 반대로 편한 옷을 더 많이 입고 등장하며 죽음을 맞이할 때도 일상적인 옷을 입고 사망한다. 따라서 마이클과 돈의 외적 변화는 그들의 지위 변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변화: 마이클의 위치
외적인 변화에 이어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마이클의 자리이다. 이때 자리란 카메라에 촬영될 때 배우가 촬영되는 피사체로서 존재하는 위치를 의미한다. 마이클이 마피아 조직원이 되기 전 그는 카메라 프레임의 끝에 위치하거나 카메라를 등지는 등 카메라 프레임의 중점에 위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코니의 결혼식 장면에서 가족사진을 찍을 때 그는 오른쪽 끝에 위치하고 돈이 습격을 받은 후 소니와 조직의 간부들과 같이 앉아 회의할 때도 카메라 프레임의 중앙에 위치한 소니와는 다르게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 있다. 그러나 마이클이 솔로초와 매클런스키를 죽이겠다는 계획을 소니와 톰 그리고 클레멘차에게 얘기하는 장면에서 그는 카메라 프레임의 중앙에 위치한다. 뒤이어서 간부들과 밥을 먹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있던 이전 모습과는 다르게 카메라 프레임의 중심을 두고 양옆에 소니와 함께 위치한다. 이는 집안 사업에 더 관여할수록 관객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인물임을 프레임에서 마이클의 위치 변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마이클이 마침내 수장 자리에 오르면서 이를 다시 증명한다.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마이클은 돈 대신 가문의 수장 자리를 맡게 된다. 조직의 간부들과 돈 그리고 마이클이 한 방에 모여 바르치니를 없앨 방법에 관해 얘기하는 장면의 풀 샷(full shot)에서 마이클은 프레임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돈은 프레임의 왼쪽이지만 두목 자리를 나타내는 테이블에 근접하여 서 있다. 그러나 돈이 이제 두목은 자신이 아닌 마이클이라고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이클이 돈이 있었던 자리로 이동하며 프레임의 중앙에 위치한다. 해당 장면의 풀 샷(full shot)에서도 마이클은 가운데에 있다. 이는 이제 돈이 더 이상 사업에 관여하지 않으며 마이클이 그 뒤를 맡아 가문의 수장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세 번째 변화: 장면 전환의 변화
마지막으로 마이클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적이 되는 세력을 제거할 때 그의 반응이 변화하는데 이는 영화의 미쟝센(Mise-en-Scene) 중 장면전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이클이 조직원으로서 처음으로 적을 제거하기 위한 일환으로 솔로초와 메클런스키를 살해할 때 그는 클레멘차가 당부한 조언을 따르지 못할 만큼 긴장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바로 그들을 죽이지 못한 마이클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는다. 그의 긴장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카메라는 장면전환 없이 천천히 마이클의 얼굴을 줌인(zoom-in)하여 나타낸다. 반면 가문의 수장이 된 후 다섯 가문의 수장과 바르치니를 제거할 때 영화는 제거하는 장면과 마이클이 코니 아들의 대부가 되기 위해 세례를 받는 두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주며 교차로 인한 장면전환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처음 적을 제거할 때의 장면처럼 마이클의 얼굴을 클로즈업(close-up)하여 촬영되었으나 이전과 다르게 살인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교차 되어 나오는 장면전환은 제거되는 자들과 마이클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나타내며 마피아의 두목으로서 냉철한 모습과 담담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또한 반대되는 세력을 제거할 때 비교되는 장면전환의 쓰임은 마이클이 ‘대부’로서 완전히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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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3주 최신 개봉영화(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매트릭스 리저렉션, 드라이브 마이 카, 신데렐라2 마법에 걸린 왕자, 호두까기 인형)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2월 3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킹스맨퍼스트에이전트 #매트릭스리저렉션 #드라이브마이카 #신데렐라2마법에걸린왕자 #호두까기인형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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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듄」 영화에서 생략된 세계관 및 스토리가 있습니다 | 듄 리뷰 | 듄 영화리뷰 | 듄 설명 | 듄 분석 | 듄 해석 | 듄 스토리 | EBS |
? 듄 영화리뷰 - 영화 세계관 스토리 요약정리(*스포없음)
- 베네 게세리트, 초암공사, 퀴사츠 헤더락 등
- 수정을 통한 재업로드 버전입니다
- 영화 정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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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생각의 여름> 런칭 예고편
뒹굴뒹굴 무기력증에 빠진 시인 지망생 ‘현실’.
공모전에 내야할 마지막 시가 데굴데굴 산으로 가자,
새로운 영감을 찾아 집을 나선다.
시가 산으로 가면, 산으로 가는 게 답?
‘현실’은 생각의 여름 속에서 집 나간 영감도 찾고,
호구 잡힌 자신도 찾을 수 있을까?
남다른 현실의 한여름 기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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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달짝지근해 : 7510> 본 예고편
OMG! 세상에 이런 맛이!? 완전히 새로운 올여름 코믹로맨스? [달짝지근해: 7510] 본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