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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2022-05-22 13:16:58

안타고니스트를 프로타고니스트로

우리 모두는 히어로이자 빌런이다

조정이라는 종목을 통해 극한 경쟁의 세계를 다룬 <더 노비스>는 홍보 문구대로 <위플래쉬>의 박자 감각을 따라가며 <블랙 스완>의 내면 갈등을 묘사한다. 알렉스(이사벨 퍼먼 분)는 영화 후반부까지 프로타고니스트의 위치에서 관객의 공감을 유도하지만 후반부에서 알렉스가 팀 내에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알렉스가 결국에는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데 알렉스라는 캐릭터가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희한한 일이기도 하다. 알렉스는 지독하지만 조정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어보이거나 조정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캐릭터가 아니다. 알렉스는 그저 자신이 갖고 태어나지 못한 재능을 갈망하며 노력으로 이기려고 하는, 승리 자체가 그 목적인 인물이다. <위플래쉬>의 앤드류(마일즈 텔러 분)나 <블랙 스완>의 니나(나탈리 포트먼 분)는 최고의 자리를 갈망했지만 내부로 침잠했던 반면 알렉스는 외부로 그 화를 돌린다. 재능에 대한 갈망이라는 목마름은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의 재능을 가질 수 없는 많은 관객들에게(최고라는 단어가 수많은 이들 가운데 최정점에 이른 극소수를 이르는 말이니 대다수의 관객은 필연적으로 최고가 아닐 수밖에 없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그럼에도 알렉스가 호감을 사기에 쉽지 않은 캐릭터임은 자명해 보인다. 알렉스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지도 않았고 조정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나 사연도 없다. 오히려 대통령 장학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금난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고 조정에 대한 사연은 거의 비춰지지 않는다. 전공 또한 조정과는 거리가 먼 물리학이고 이마저도 본인이 가장 못하는 과목이기에 전공으로 선택했다는 희한한 답변을 내놓는다. 알렉스의 사연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최정점 그 자체를 향한 갈망에 천착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조교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시험 답안지를 가져가는 행동이나 단순히 잘난척하는 동급생이 보기 싫었다는 이유로 우등반을 떠나지 않고 최우등 졸업에 도전했다는 사연은 관객의 공감을 사기 어렵다. 영화 내내 무표정과 분노를 오가는 알렉스는 집착의 화신에 가깝다. 영화 초반부에는 이런 모습이 성실성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관객의 응원을 얻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알렉스의 집착이 불러오는 파국에 관객은 어리둥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은 여전히 최고의 위치에 서본 경험이 없는 이가 대다수이므로 알렉스의 시선에 공감하게 된다. 알렉스의 갈망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초조함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연출이다. 알렉스의 손가락 소리나 로잉 머신에서 기록을 확인하는 장면 등은 공포영화에 가깝게 표현됐다. 알렉스에게 있어 조정 대표팀에 든다는 것은 단순한 목표를 넘어 삶의 이유에 등치된다. 즐거운 학교 생활을 위해 조정 클럽에 가입하거나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기 위해 조정을 하는 등 조정이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한 다른 조정 클럽원들과는 달리 알렉스는 조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취에 집착한다. 로잉 머신에서 연습하다가 요실금을 한 알렉스는 팀원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망상에 시달리기도 하고 첫 경기에서 지고 난 후에는 자신의 실수로 팀원이 졌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알렉스는 타인의 평가에는 민감하지만 팀원을 존중하지 못하는데 이는 조정 경기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드러난다. 운동에 재능을 타고난 제이미(에이미 포사이스 분)와의 포지션 경쟁에서 팀원들이 제이미와 경기할 때 더 열심히 노를 저었다고 믿는 알렉스는 공정하지 않았다고 열변을 토한다. 하지만 팀 스포츠라는 특성상 팀원의 존중을 얻는 것 또한 경쟁력의 일부라고 한다면 알렉스의 패배는 불공정의 결과가 아니다.

 

알렉스의 시선에서 공감을 유도하던 연출은 중반 이후 선로를 틀어 알렉스의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공정해 보이지 않던 경쟁은 알렉스의 성격적 결함에 따른 결과였을 뿐이고 팀원들의 적대감은 연출로 가릴 수 없을 만큼 눈에 띄게 드러난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호수 합숙훈련 기간이 다가오면 이제 알렉스의 문제점은 관객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발전한다. 누가 봐도 조정 실력이 아닌 팀 플레이를 확인하는 합숙 훈련은 즐거운 분위기를 띠다가 알렉스의 기록에 대한 문의로 삽시간에 반전된다. 기록을 재느냐고 다그쳐 묻는 알렉스에게 코치는 마지못해 싱글 기록을 잴 거라고 말해주지만 관객은 이미 알렉스가 호수 합숙훈련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알렉스가 대표팀에 들기를 응원하게 되는데 많은 관객이 끊임없는 갈망에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대통령 장학금을 받고 아침마다 홀로 싱글 보트 훈련을 할 만큼 성실한 알렉스가 대표팀의 자리 하나를 따내지 못하다니 가혹하지 않은가. 특히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는 한국 관객에게 알렉스의 패배는 관객의 패배나 마찬가지다.

 

 

 

 

 

 

 

 

 

 

 

<더 노비스>가 혹여 한국에서 더 공감받는 영화라면 그 이유는 팀 활동 경험이 유독 적은 한국의 교육환경 탓일 공산이 크다. 팀 스포츠가 발달한데다 우수한 학생임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스포츠 클럽에서의 활동인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개인의 경쟁이 두드러지는 학업 경쟁력이 입시에서 우선순위가 된다. 따라서 팀 스포츠에 익숙하지 않고,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를 알려면 대학생들의 팀 프로젝트를 보라는 말이 유행하는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알렉스에게 공감하기 쉽다. 팀이란 서로를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다는 제이미의 대사는 그래서 날카로운 지적으로 돌아온다. 제이미이기보다는 알렉스이기 쉬운 한국의 입시 환경에서 잉태된 아이들은 그래서 최고가 되지 못하고 최고에 대한 갈망만을 품게 된다. 나의 시선에서는 알렉스를 제외한 다른 팀원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쉽지만 타인이 보는 나는 알렉스와 비슷할 가능성이 더 높다. 특히나 입시에 대한 공정성이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지금 관객은 알렉스라는 안타고니스트를 프로타고니스트로 여기고 조정이 아닌 승리를 염원하는 알렉스를 응원하게 된다.

 

어두운 새벽 강에서 다른 팀원을 물 속으로 밀어넣고 번개가 치건말건 제이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알렉스를 보는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알렉스의 공허함에 주목한다. 알렉스를 조용히 응원하던 관객은 결말에 이르러 묘한 서글픔을 경험하고 승리를 향한 비뚤어진 갈망이 낳은 허무함을 목도한다. <4등>을 비롯한 많은 영화에서 한국 사회의 비뚤어진 경쟁이 사회 구조의 문제만으로 묘사되어 왔지만 <더 노비스>는 그것만이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에 맞서 개인 또한 경쟁보다 공동체에 속한 개인으로서 경쟁 자체에 맞서야 함을 은유하는 <더 노비스>는 알렉스의 공허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서사를 마무리한다. 알렉스를 프로타고니스트로 여겼던 관객은 이제 안타고니스트로 돌아온 알렉스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을 독대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작성자 . 레이

출처 . https://brunch.co.kr/@screenholic/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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